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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치비타스 제136호(2018년 12월 25일 발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1-14






성모여, 당신 홀로 이세상 모든 이단을 물리치시나이다.



치비타스 제136호 Editotial


Ave Maria Immaculata!

사랑하올 형제 여러분,


개신교주의 이론(理論)이 정치사상에 어떻게 귀결(歸結) 되는지요? 물론 개신교주의는 신앙에 반대되는 이단입니다. 개신교라고 하는 이단은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파문되었습니다. 천주교회가 개신교를 파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단은 지성적인 오류로 신앙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주의 이론은 실제로 정치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개신교주의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정치는 개신교와 연관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세상이 바로 개신교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먼저 개신교주의의 교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2가지 관점(觀點)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당시 천주교회는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루터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천주교회의 혼란에 대해 루터는 악한 대답을 했습니다. 2가지 이유로서 악한 대답입니다.


1. 루터는 비판주의자이였습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이 실제로는 뭔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이성에 대한 비판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본성(本性)은 완전히 타락하여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 비관주의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교만했습니다. 천주교회의 권위에 순명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2. 개신교주의의 이론에서 보면 의화(義化)는 문제가 있습니다. 개신교주의에 따르면 천주는  영혼에게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천주도 인간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로 사람은 절대로 변화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너덜너덜해진 벽이다. 그래서 새 벽지를 발라 깨끗이 한다. 그러나 원래의 벽은 여전히 너덜너덜 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것이 개신교의 의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의화(義化)는 천주께서 성사로써 인간을 깨끗이 정화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의화(義化)가 아니라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즉 의인은 벽의 결함을 숨길 수는 있으나 망가진 것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의 성총은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천주님도, 천주교회도 영혼을 성화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성서는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종파 수는 개신교 신자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이것이 루터 신앙의 오류입니다.

 

천주교는 신앙이 이성의 행위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이(즉 지성과 의지)가 천주께서 계시해 주신 바, 진리에 순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성을 경멸하기 때문에 그 비판주의로 인해 이성은 지성에 의한 행위가 아니게 됩니다. 대신 믿음은 일종(一種) 신뢰(信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대상을 적극적으로 따르려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뿐입니다.


천주교에서 신앙의 가치는 ‘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객관적인 대상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나의 동의’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천주교회와 성전(聖傳), 객관적인 여러 권위를 거부합니다. 그는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경멸하고 교황들이 가르치는 것도 경멸합니다. 개신교는 종교의 모든 권위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독립정신’을 강조합니다. 개신교의 특징은 ‘주관주의’이며 ‘나의 세계’, ‘개인의 세계’입니다. 루터는 자신의 이론을 세웠습니다.


개신교주의 이론이 확장된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요? 17세기와 18세기 정치학의 유명인사는 모두가 개신교 신자였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16세기 이후부터 새로운 정치학이 대두되었습니다. 새 정치 이론가들로는 특히 영국인이 많습니다. 대표로 홉스(Hobbes 1588~1679),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루소(Jean-Jacques Rousseau)등을 들 수 있습니다.


홉스의 주요저서《리바이어던(1551)》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바다의 짐승인 추악하고 거대한 괴물의 이름입니다. 홉스 정치이론의 기초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homo hominibus lupus).”는 인간을 본질적인 악성으로 보고 인간본성타락이라는 비관주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사회계약의 발상으로 연결합니다. 즉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전능한 국가(정부)가 설립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전능한 국가는 바로 리바이어던(괴물)입니다. 홉스 이론의 기초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입니다.


로크(Locke)는 1667년 《관용에 관한 편지》를 발표했습니다. 로크는 사람들은 통일도 통합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사람들 서로간의 여러 이권에서 어느 하나가 우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관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상대화한 진리의 우위성이 없는 사회의 ‘관용’입니다. 여기서 루터의 인간 지성에 대한 비판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루소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 의해 타락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유일한 좋은 대책은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홉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루터의 개인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주의의 첫 번째의 특성은 ‘통일의 부족’입니다. 하지만 정치의 근본은 ‘통일’입니다. 한나라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하나의 단체라야 합니다. 정치의 기본단위는 가족입니다. 부모와 자녀사이는 혈연과 친밀감이 있습니다. 이런 통일은 실제로 자연적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주의의 자유해석 탓에 불화의 씨앗을 잠재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통일을 파괴하게 됩니다. ‘사회통일’ ‘사회일치’는 사회의 공동선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개신교주의는 적어도 종족으로 사회 공동선 ‘평화’에 반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주의는 자유해석을 고수하여 ‘불화’를 가져온 것뿐만 아니라 결국은 ‘자유야 말로 가치가 있다’라는 가치관을 가져왔습니다. 본래라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와 특징은 인간의 완전성입니다. 지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의지는 ‘선’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주의의 ‘지성에 대한 비판주의’,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주의’ 때문에 루터는 ‘자유’라는 피난처로 갑니다. 그런데 ‘지성’이라면 대상(對象)이 있습니다. 지성의 대상 자리는 '고유한 선'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유’를 절대의 가치로 두고 “하고 싶은 것은 한다.”고 하는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마음’이 중시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자신이 자신의 선을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자유를 수호하는 사람에게는 ‘공동의 선’보다 ‘나의 선’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들이 분열케 합니다. 절대적인 자유를 도입함에 따라 사회도 분열케 합니다.

 

개신교주의가 절대적인 자유를 ‘최고선’으로 보고 모든 권위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천주교 성전의 권위의 자리에 인간자신을 두기 때문에, 개신교주의는 무신론의 씨앗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자유가 절대적이라면 인간도 절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즉 천주 대신에 사람이 천주가 되는 것입니다. 


루터 후, 2세기가 지나 1789년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아래 혁명이 일어납니다.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혁명은 개신교주의의 결과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유’의 주장은 개신교주의의 유산입니다.

 

요약하자면 통일의 부재, 권위의 거절, 절대적인 자유, 자유해석, 개인주의가 어떻게 함께 공존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민주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탄에서 천주님은 우리에게 정결, 감빈을 가르치십니다. 사람이 되신 천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아기예수와 성모님께 더욱 예수 정신으로 생활 할 수 있는 성총을 구합시다.


2018년 올 한해, 형제 여러분의 많은 기도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토마스 오노다 신부

(한국성비오10세회 주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