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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근 시련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1)-갈레레타 주교의 회견(2012-10-1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최근 시련에서 배울수 있는 교훈(1) 갈라레타 주교의 회견


2012년,10월 13일 토요일, 프랑스 빌프록스의 전통의 날 기념행사에서 알폰스 갈레레타 주교는다음과 같은 회견을 했는데, 성비오10세회와 로마와의 관계 상태를 분석한 것이다. 발언 양식은 회견 양식이라는 성격에 맞게끔 기록되었으며 편집자에 의하여 제목과 부제들이 삽입되었음을 주지바란다. (DICI 2012년 10월 20일)





회견장에 오신 손님 여러분, 종교 관계자 여러분, 특히나 반가운 우리 교우 및 친구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가톨릭인으로서, 가톨릭 군사로서의 영적인 자질, 신자로서 반드시 유념해야 될 전쟁에서의 여건들, 그리고 우리 단체 대 로마와의 상황에 대해 몇 마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욥기에서 말하길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욥기 7:1) 이 말씀 구절이 아주 흥미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 땅에서 모든 이들의 삶은 전투이며, 가톨릭인들, 영세 받고 견진 받고 그래서 그리스도 왕을 위한 이 싸움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모든 가톨릭인들의 생활이란 전투요, 오늘날 가톨릭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월이 가져다주는 탁월한 투쟁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성서 말씀에서 전투의 필요성이 있다는 구절을 찾게 됩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며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싸워야합니다. 삶에는 전투가 있는 것이며 특히나 영혼구령을 위해서는 전쟁이 있기 마련인데 이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전투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군인이 갖추어야 할 요구조건이 무엇입니까? 분명, 그것은 투쟁의 능력, 싸움의 능력입니다. 즉 용기와 용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성서의 아주 간략한 이 말씀은 천주섭리를 언급하게 되는데 군인과 품꾼은 주인이 맡긴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님을 위한 전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의 주인이지만 역사의 주인이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는 모든 특정한 환경을 지배하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것은 천주섭리다.” 천주섭리에 의해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보내진다는 의미에서 천주섭리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투에 대한 초자연적인 견해

그래서 군인과 품꾼은 승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싸웁니다. 삶, 이곳에 전쟁이 있다면 이 땅에서 승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의 삶은 전투이며, 우리의 승리는 영생(영혼구령)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신앙이 가득한 눈으로, 초자연적인 모습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의 왕관을 얻기 위해 이 지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이 이 땅에서 정말로, 실제적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 가톨릭 신자는 반드시 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승리가 천국에서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하자면 이 땅에서의 승리가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승리는 (우리 및 친한 교우들에게 있어) 영혼 구령에 있기에 이 지상에서의 승리는 필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욥기에서 나오는 이 짧은 성서 구절은 전쟁의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힘들다는 의미인데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에서 힘들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한 싸움, 초자연적인, 영적인 싸움은 고통과 시련과 모순과 심지어 삶에서의 패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가톨릭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며, 오히려 신앙에 대한 싸움은 벌써 가톨릭인의 승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작가는 말하길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다만 굴복당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는 것은 쾌 흥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오늘날 성교회 위기에 잘 적용시켜보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주께선 우리가 승리하길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그 분이 하고자 한다면, 그 분이 승리하고자 할 때 승리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에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선을 방어하고 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고 싶은 비오 추기경님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신앙과 교훈으로 가득 찬, 표현이 매우 훌륭한 글입니다.

“현명한 이두메아 사람이 말했다: ‘세상은 전투다’(욥기7:1). 그리고 이 진리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만큼 단체에게도 적용된다. 두 개의 특히나 뚜렷한 본질을 구성하면서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의 속성을 지니고 이삭의 아내처럼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창세기25:22) 이들 둘은 여러분의 선호대로 두 가지 본성을 모순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대저 육체는 영신을 거슬러 욕구하고 영신은 육체를 거슬러 욕구하나니 그 서로 반대됨은 너희로 하여금 욕구하는 바를 행하지 말게 하기를 위함이라.’(갈라디아서 5:17) 이는 깊이 자리 잡은 원수이며, 그 팔을 육신에 넘겨주고 영적인 분별력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영적인 부끄러운 패배를 통해서야만 이곳 저 아래로 굴복되어 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싸움에 있어 평화를 얻거나, 혹은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육신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만약 그 평화를 원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다음 세상에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이야 말로 비오 추기경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뜻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이 땅에서의 인간의 생활, 덕성의 생활, 의무의 생활은 고귀한 결합이며 우리 영혼의 모든 자질을 표현하는 거룩한 순례이며 성총의 조력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이며, 이 결합은 육신과 세속과 지옥의 모든 단합된 힘을 거슬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전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적인 싸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들 똑같은 적수의 요소, 이들 똑같은 원수의 군대들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더 이상 개인 내부의 싸움이 아니며, 사람들의 집합체인 사회단체의 싸움이요. 그래서 그 투쟁이 더 원대한 크기를 갖는 것입니다. 포이티에르 주교는 창세기를 인용합니다. “주께서 레베카에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세기25:23).”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인간이란 두 민족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으로 말입니다. 한쪽은 모든 것을 영에 관하여 귀히 여기고 현양시키려는 영적인 인격을 나타냄이요, 다른 한쪽은 거칠고 세속적인 육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 떨어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비극은 이 모순된 두 세력 간의 싸움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이 정전(停戰)은 이교도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신은 소름끼치는 무조건적인 항복에서 비롯되는 모든 사회 및 가정의 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지혜서14) 이 마지막 붓놀림으로 초상화의 그림을 완성시키시오. 전쟁보다 천배 훨씬 더 치명적인 침체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속아가면서, 평화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엄청난 수많은 거대한 악에게 넘기고 있음을, 오늘날의 이 세상을 제대로 표현한 것 아닌가요? 평화! 평화! 평화!비오 추기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길 ‘치명적인 무감각,’ 이것은 죽음이란 무감각과 진배없으며, 침묵과 비교될 수 있는 무덤 속에서 시신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조용한 작업인 것이다.


 천주성자께서 평화가 아니라 환도를 주러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이란 치욕과 도덕의 붕괴상태에로 점차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창조주이신 천주께서 인간이 육신을 거슬러 싸울 수 있도록 인간의 손에 영적인 칼을 놓으셨으나 인간은 부끄럽게도 손에서 칼을 놓아버렸다. 나보다 먼저 다른 이들이 말했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칼이 놓여 있었던 비천한 신분으로부터 칼을 집어 들었다. 그 칼로 자신의 성혈을 담근 후, 맛보고 나서, 즉 그 분의 육체를 맛보고 칼을 돌려주니, 그 분이 이 지상에 오셨을 때, 새 사람들에겐 이 어느 때보다도 더 날카롭게 더 찌르게 됨이라. 영과 육신사이에 인간속성의 대립이 또 다시 반복되고 세상의 종말 때까지 결코 중지되지 않으리라. “내가 세상에 평안함을 주러 온 줄로 여기지 말라. 평안함을 주로 오지 아니하고 오직 환도를 주로 옴이니.” (마테오 10:34)


비오 추기경님의 긴 말씀인데 모든 것이 거기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 설명되고 표현이 잘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말한 천주님의 말씀인 이 전쟁의 필요성은 단지 내부적 갈등과  개인 간의 갈등, 가정과 학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전투인 것입니다. 두 개의 영, 두 개의 도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이 전투에 참여해야만 되고 지속해나가야만 합니다.


제 생각은 이 그림이 여러분에게 신앙의 전투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가톨릭 전투가 무엇인지, 세속적 도시에서 가톨릭인의 전투가 무엇인지, 배교의 시대에 성 교회의 이 끔직한 위기 속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전투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게끔 해줍니다.

 

그리고 최근 일어난 전쟁에 관해 몇 가지 성찰하고자 합니다. 작년에 겪은 일, 아주 어려웠던 일 가운데 하나는, 사실대로 말하면, 예전과도 같은 적(원수)때문에가 아니고 우리 사이에 일어난 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고 인간이 갖는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점을 알기에 옷 하나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속성상 같은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원죄 때문에 무지하고 악의가 있고 연약하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 학창시절에 일어났던 모든 어려움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중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어려움과 시련은 더욱 더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런 시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일이고,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과도 같아서 많은 기술과 사랑, 분별력과 기민함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확실히 그렇게 해결해야만 합니다.

 


로마와 우리와의 관계 때문에 생긴 짧은 역사

많은 다른 견해, 갈등을 일으키는 목소리, 그리고 지금 떨어져 나간 견해도 있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바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최소한 제 생각을 아셔야만 한다고 친히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빨리 몇 가지 사실을 회상해보고자 합니다. 짧은 역사적 원인, 금년 성신강림 주 끝으로 12,000,000꿰미 봉헌기도를 목표로 한 기도 캠페인인 로사리오 묵주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시작된 것인데요. 이 기도 순례가 끝나고 나서 우리는 로마로부터 세 가지 답변을 연이어 받았습니다. 성비오10세회의 교리상 선언에 대한 제안은 4월에 제출되었는데 로마에서 있었고 신앙교리성성으로부터 첫 번째 답변을 받았을 때가 성신강림절 이후였습니다.


이 반응 속에서 로마당국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길, 로마는 우리 성비오10세회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거부했으며, 그 후 우리가 받아드리도록 몇 가지 수정제안을 했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미사의 적법성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치교권을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로마당국자들의 전통에 대한 해석, 그러니까 무엇이 전통이고 무엇이 전통이아니라라는 것은 그들이 정하는 것이지요. 새 교리법전을 받아드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천주섭리라 생각되어지는 뮬러 대주교와 약속이 있었습니다. 교회당국은 뮬러 대주교를 신앙교리성성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일치 업무에 관련된 모든 조직을 책임지는 교회일치위원회 의장이었는데 성비오10세회와도 교섭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뮬러 대주교는 교회법원과 교회일치위원회 수장으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진리에 관한 질문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비추어볼 때 오늘날 신앙의 수호자인 것입니다. 즉 성비오10세회와 오랜 안면이 있고 차이츠코펜에 있는 우리 신학교가 있는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주교로 있었기에, 우리는 벌써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면을 요청했습니다. 3년 전 그는 차이츠코펜에서 신품성사를 주려고 한 주교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우연히도 제가 바로 그 주교였지요.


그래서 그는 사제서품 받으려는 부제들뿐만 아니라 저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물러났지만 우리를 존중해줄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요. 분명하건데 우리를 싫어합니다. 그는 “성비오10세회 주교들이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있다.” 라고 말했는데, “교구에 가서 사직서를 받아 교황성하에게 제출하고 수도원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랬지만 훨씬 잔인한 것이죠. 그리고 간략히 말하길 우리가 “공의회를 받기만 해라, 그게 전부다.” 이러는 거예요. 더 이상 토론할 것도 없었습니다. 성신의 빛의 조력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그 답장을 받은 것입니다.


총회가 있기 전, 로마로부터 혼재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한 문제 중 헷갈리는 내용 이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총장상께서는 교황의 의향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황께 편지를 썼습니다. 몇 몇 당국자들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신앙교리성성에서 온 답변은 공식적인 것으로 그들은 그 일을 그냥 통례상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냥 기록보관하시고 여하튼 우리도 협약을 원하니, 성비오10세회를 있는 그대로 우리가 인정하길 원하오.”


그러나 신앙교리성성의 답변과 뮬러 대주교의 약속은 이 두 번째 메시지와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기 위하여 필레이 주교는 교황께 편지를 써서 교황의 의중이 진정 무엇인지 알고자 한 것입니다. 편지가 오기 전 피정 당시, 총회가 있기 전에 몬시뇰이 답변을 받았는데 이것이 교황께서 펠레이 주교에게 보낸 최초의 답장인 것입니다. 주교는 피정이 끝날 때 쯤 주일날 협상이 있을 거라 했습니다. 지금 내겐 교황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갖고 있는데 그 내용은 교황도 신앙교리에 관한 성성의 답변을 확고히 지지하며 이는 교황의 답변이며 찬동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상기시켰는데 교회승인에 대한 세 가지요건으로 요약하여 무조건적인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1)살아있는 치교권은 전통에 관한 진정한 해석자 즉 로마당국임을 인정하라.
2)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통과 완벽하게 일치하므로 이를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3)성 비오10세회는 새미사의 유효성과 그 적법성을 반드시 받아드려야만 한다.


그들은 ‘적법성’이라 썼는데 불어로 쓴 이 말은 약간 애매한 의미를 지닌 어휘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합법적인 형태를 같은 어떤 것, ‘합법적’이란 단순한 의미를 지니겠지만, 교회법이 갖는 언어에 있어서는 이 단어는 훨씬 심오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효력을 지닌 의미를 지닌 진실된 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 교회는 가톨릭 신앙과 모순되는 어떠한 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전례개혁 및 새미사의 적법성에 대해 논쟁을 했는데 이는 성 교회 내에 이것이 법의 효력을 가져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신앙을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유효성과 적법성’이라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우리 전투에 있어서 필수적인 관련된 모든 것- 두 개의 도시, 두 개의 정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전투- 굴복과 배신이 필요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명백히, 우리가 총회의 길을 따르라는 성신의 가호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안되오. 우리가 교리를 적법하게 지킬 것이요, 그러니 당신들은 이제까지 거부한 모든 것을 다 받아드리도록 하시오.”(2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