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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우 및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총장 서한 제89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3-04




교우 및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총장 서한 제89호

2020년 2월 28일/fsspx.news


 

오랫동안,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몇 마디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두 가지 매우 중요한 기념일 사이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50년 전에 새미사(New Mass)가 공포(公布)되었고 (역자 주: 1969년 4월 3일), 이로 인해 소위 현대사회의 도전에 적응된 신자들에게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 개념이 부과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올해 우리는 성비오10세회 창립(역자 주: 1970년 11월 1일) 50주년을 기념합니다. 첫 번째 사건인 새미사 공포에는 비례적인 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두 기념일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는 귀중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선, 50년 전에 나타난 이 갈등은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생활에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저는 (주님의 공생활) 시간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가파르나움(Capharnaum)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종도(사도)들과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주님의 수난이 있기 1년 전에 미사와 성체의 위대한 선물이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주님과 분리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그분께 애착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역설적이지만, 그러나 성체에 대한 바로 이 생각은 첫 번째 "분열(schism)"을 유발했으며, 그와 동시에 종도(사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결정적으로 분명하게 고착하도록 자극했습니다.

성 요한은 우리 주님의 말씀과 그리고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하고 나도 저에게 거하며, 마치 생활하시는 성부 나를 보내시매 내가 성부를 말미암아 삶같이, 나를 먹는 자도 나를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하늘로조차 내려 온 바 떡이라. 너희 조상들이 먹은 만나와 같이 아니하니, 이는 먹고도 죽었으되,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시니, 이는 예수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교훈하실 때에 하신 것이니라. 이러므로 그 제자 중의 여럿이 듣고 이르되, “모질다 이 말이여, 누 차마들으리요?” 하거늘 (…) 이후부터 그 문제(門弟, 제자) 중에 물러가는 자 많아, 곧 예수와 한가지로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 복음 6:57-61, 67).


서로 다른 세 가지 질문에 답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왜 추문을 당했으며, 그리고 그 시점부터 무엇을 거절했습니까? 바꾸어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거절합니까? 이 같은 오래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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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살을 먹게 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시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기에 추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이해시킴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합리적으로 더 접근하기 쉬운 설명을 하는 대신에, 우리 주님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할 필요성을 여러 번 재확인 하셨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 자기들이 방금 목격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 인도를 받을 준비와 확신이 부족했습니다(참조, 요 6:5-14). 한마디로 그들은 그분의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영혼을 구원의 신비로 소개하신다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내 성부의 의향이 이것이니, 곧 성자를 보고 믿는 이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함이요, 또 나 저들을 끝날에 부활케함이니라. (요한 복음 6:40).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은 1년 후에 결정적으로 거부할 대상을 이미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희생, 거룩한 미사가 계속되고 거룩한 성체 성사는 그 열매임을 거부할 것입니다. 미리 그들은 십자가의 섭리를 거부했으며, 그것은 믿음의 비전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알리시는 우리의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똑같은 "부끄러움"이 동시에 두 번 나타납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복되신 성체를 사랑할 수 없고, 복되신 성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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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한 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거부합니까? 그는 또한 십자가의 섭리(economy)를 스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속으로 통합되기를 거부하는데, 통합은 제대에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를 다시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천주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떻게 성부이신 천주께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요청하셨는지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의 개념은 치료할 수 없이 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완성한다는 개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조, 골 1:24).

따라서 십자가의 정신은 점진적으로 세속적인 정신으로 대체됩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보고자 하는 깊은 소망은 더 나은 세상, 생태계와 관련하여 더 살기 좋은 지구, 더 나은 인류를 추구하나 (역자 주: 요즈음 바티칸의 추구 정신입니다) 어떤 목적과 수단으로 실제로 알지 못하고 그저 모호한 소망으로 길을 내줍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관점, 무의미하고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받아들이면서 성직자와 신자들을 가진 교회 전체가 존재 이유(raison d’être)를 잃고, 깊은 위기에 빠진 후에 필사적으로 새로운 임무를 추구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의 승리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임무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개념에서는 미사에 대한 거룩한 희생은 더 이상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십자가 자체가 더 이상 자리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될 것입니다. 새 미사는 새로운 미사 전례뿐만 아니라,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직접 유대인에게 전파하셨고 종도(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전한 것처럼 십자가에 대한 배신, 불충(不忠)의 최종 표현입니다. 여기 우리는 지난 50년간의 교회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와 그리고 아울러 지난 2 천년 간 교회를 위협했던 대부분 오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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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2020년에 십자가의 정신과 성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만간 우리 주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을 쫓아낸 것과 똑같은 유혹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찾게 되며, 주님께서는 종도(사도)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입니다. “너희들도 물러나고자 하느냐?”(요한복음 6:68). 그러므로 성 베드로와 함께 항상 어떻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 영생의 말씀을 가지셨으니, 그리고 우리 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천주 성자이심을 우리 등이 이미 알고 있나이다.(요한복음 6 : 69-70)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에 진정한 참여와 성체 중심의 생활 방식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미사는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삶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에 들어가서 희생 제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전례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희생 제사에 들어가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희생을 완벽하게 유지하면서, 우리의 희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 주님과 함께 우리 자신을 바치려면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모든 결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 의지, 마음, 포부, 야망, 애정, … 한마디로 우리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 심지어 우리의 좌절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진정으로 제공할 수 있기 위해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내는 문제입니다.

성자께서 성부께 자신을 제헌하실 때, 이런 성향을 가지고 우리는 또한 성자 안에서 우리를 드리니,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 일치시키고, 그리고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과 합병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성부께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성부께 진정으로 자신을 바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희생제물이 큰 가치를 얻는 것은 오로지 천주 성자 희생과의 연합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답으로 받을 수 있는 것, 이는 필수적이니 매 미사에서 새로워진 우리 자신의 자신이 이 총체적인 선물을 받은 후에 거룩한 희생 제사의 열매인 거룩한 성체 그곳에서 성자께서 자신을 드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드립니다. 복된 성체는 우리를 정결(淨潔)시키고, 세상에 대해서는 싫증을 증가시키며, 우리를 성화(聖化)시킵니다. 이는 급진적인 자기 비움에 대해서 저항이 없다면, 이는 이 변화에 있어서 전제 조건입니다. 이것이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 본질입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가 그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든 시대의 미사를 통해 우리가 받은 모든 은총의 위대함을 더욱 재발견해야 하고 계속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미사의 거룩한 희생은 항상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제한해서는 안 되는 투쟁의 대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변화는 오직 우리의 복되신 주님만이 저자가 되어 만들어내는 이루말 할 수 없는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통해 사는 사람은 점차 다른 모든 욕망을 잃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영혼에는 천주님의 거룩한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의 투쟁에서 비롯된 일반적인 불안은 더 이상 거룩한 미사와 성체에 의해 변화된 영혼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성체로 진정된 사람은 평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 너희에게 평화함을 끼쳐 주며 내 평화함을 너희에게 주되, 내가 너희에게 주기를 세속이 줌과 같이 아니하노니,”(요한복음 14:27)

또한 영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며, 특히 우리가 주님과 맺는 유대에 의해 변화됩니다. 실제로 모든 거룩함과 영적 삶은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에 요약되어 있으며, 이 일치를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은 속 빈 와플(waffle)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그분에게 중요한 유일한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주께서 그분의 교회를 설립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만 기대하십니다. 이 일치는 영원토록 완벽하고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부여, 너 내게 주신 자들로 하여금 나 있는 곳에 나와 한가지로 있기를 나 원하옴은, 저들로 하여금 너 내게 주신바 영광을 보게 하려 하옴이니, 대저 너 세상을 배포하시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4).

성체를 통해 주님은 이미 이 결합을 시작하여 우리에게 영원을 준비시킵니다. 복된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서약과 이미 여기 아래에서 시작되는 수단입니다. 요구된 배려로 이 성체를 받는 사람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성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의 미덕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바로 성체입니다. 각 성체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키고 우리에게 때마다 천국에 좀 더 정착시켜 줍니다. 주님은 특히 우리의 영혼을 영원하게끔 완전히 완벽하게 채우시기에 영원은 실제로 절대로 끝나지 않는 우리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영성체입니다. 영원은 길고 끝없는 부활이며, 주님께서는 부활하셨던 날에 하신 것처럼 그분의 영광을 다시 드러내실 것이고,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기쁨과 영광을 연관시키실 것이며 그분의 기쁨과 영광과 연관시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과 그분의 기쁨과 영광의 이러한 연합은 현재 감추어져 있지만, 복된 성체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미사와 성체에 대해 고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종종 우리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끔찍한 선택을 하기 전에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리에 관한 신학적인 교훈을 통해 전달받지 못하나 그들의 연장자들에게서 행해지는 성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감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는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의해 완전히 흡수될 것입니다.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는 많은 불신자들이 우리를 책망하듯이, 우리가 애착하는 간단한 전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룩한 미사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찾고 그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에게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매일 복된 영성체에서 찾을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라. 나에게 오는 사람은 굶주리지 않을 것이요.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요한복음 6:35).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지속적으로 젊어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보속과 기쁨, 희생과 생명의 정신, 세상을 경멸하고 성체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절을 준비해야 하는 방법입니다. 몇 주 지나서 축하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원히 축하할 것입니다.



주님의  강복을 받으소서!


봉재 제 1주일, 2020년 3월 1일, 멜징겐

총장 돈 다비데 빠글리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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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바오로 6세는 1969년 4월 3일, 회칙 Missale Romanum(로마미사)를 통해 Novus Ordo Missae(새 양식의 미사)의 최종판을 공포하였다. 공포되었을 당시에 많은 이들이 새미사에 참례하기를 거부했다. 전통미사전례와 달랐고, 개신교의 관념이 들어갔으며, 구원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주의 주교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오타비아니 추기경과 바치 추기경은 1967년 9월에 “새미사는 전체적으로도 세부적으로도 트렌트 공의회의 22회기에서 공식화한 가톨릭미사로부터 신학적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고 교황 바오로 6세에게 탄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