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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근 시련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2) 갈라레타 주교의 회견(2012-10-1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최근 시련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2) 갈라레타 주교의 회견

 

 

2012년.10월 13일 토요일, 프랑스 빌프록스의 전통의 날 기념행사에서 알폰스 갈라레타  주교는 다음과 같은 회견을 했는데, 성비오10세회와 로마와의 관계 상태를 분석한 것이다. 발언 양식은 회견 양식이라는 성격에 맞게끔 기록되었으며 편집자에 의하여 제목과 부제들이 삽입되었음을 주지바란다. (DICI 2012년 10월 20일)

 


총회(2012년 7월9일-14일)

그리고 총회가 있었습니다. 비밀유지를 지킬 의무가 있기에 아주 상세한 내용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지는 못하지만 펠레이 주교께서 직접 어떤 사항을 알렸고 몇몇 사항들은 최종 선언문에 구체화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여러 조건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총회가 이루어지는 동안 성신의 도우심이 분명하게 인지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잘됐어요. 아주 솔직히 말하고자 합니다. 조용히,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초기 논제에 있었던 다른 질문들을 생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말씀 드려야 합니다. 우린 항상 토론할 필요가 있었고 견해를 비교해 왔습니다. 이는 같은 단체의 회원이며 같은 군대의 조직원으로서 합당한 것이죠.


어느 문제도 일으키지 않아요. 우리 성비오10세회가 여학교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때때로 우리에게 토론이 있다면, 어느 한 사람이 그 토론으로부터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비오 추기경의 글을 읽어 보세요. 19세기 프랑스에서 주교들과의 공개토론을 지지했을 때 그 분은 주교들을 정당화했고 이것은 전쟁이니, 가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사람이 전쟁으로부터 비극을 조성해서는 역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포기할 때 비극이 되지만, 이런 저런 일에 대해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의문 사항을 토론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요. 관점이 다를 수 있고,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상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기에 격언에서 말하는 복잡하게 얽힌(고르디안) 노끈을 자르기 위해서 칼을 꺼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달려들어 단칼에 해 내겠어.’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듯이 총회가 있을 때 우리가 겪었던 이 시련을 통하여 유익한 교훈을 끄집어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완벽하지 않고, 마음속에 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이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 일어납니다. 성 교회 역사를 읽어보세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완벽함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 본질에 대한 확고한 눈은 가져야만 합니다.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은 그냥 흘러가게 놔두세요. 여러분 가정일도 그렇게 하잖아요? 예, 그렇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이 삶에서, 심지어 우리 성비오10세회에서 조차 견디어 살아남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몇몇은 “아, 예, 그러나….” 이렇게 말하며 걱정합니다. 문제의 복잡성, 상황의 복잡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열정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런 분들이 심지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제 견해상 우리가 이들 문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본질이 훼손 되었나 안 되었나만 보면 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진실로 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위기를 겪었고 예상하던 방법으로, 특히 실용적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몇몇 사항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하고, 분류하기도 하고, 그 상황에 대해 보다 완벽한 통찰력과 선명성에 도달하도록, 이를 명료히 규명할 수 있는 토론 덕분에 논쟁을 잘 수행하였는데 여러분들이 시련들을 통해 배우고자 한다면 시련이 가져다주는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매우 중요하고도 생산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가설적으로 교리적 정상화를 우리가 그려낼 수 있는 몇 가지 조건들을 세웠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시면, 우리가 이루어낸 것이 실제적 조건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교리적, 전례적 의문사항에 이르는 것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 정상화가 가능한 조건

자, 제가 확실히 말씀드렸듯이, 이는 완벽한 것은 아니고 서명해선 안 될 조건과 바람직한 조건 사이에서의 구별이 매우 정확한 것도 아니거니와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 이후로 우리가 몸소 빨리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바람직한 것으로서 우리가 제시한 조건들 가운데, 서명해선 안 될 조건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 조건들이 실제적이고, 교법적이며 구체적인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성비오10세회 총회는 로마의 이 같은 조건들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반복된 논쟁이 있은 후에, 로마에 나아가기도 했고 물러서기도 했고- 동의할 준비도 되었고 심지어 현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총회의 목적은 명백히 그 결과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명확히 규정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필수사항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교황님의 관점에서 이것을 다르게 놓고 보면, 성비오 10세회와 협정을 맺고 싶어 하는 미래의 교황이, 교리적 체계가 무엇이고, 그것이 교리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신앙에 충실한가, 전통에 충실한가, 신앙의 공언에 오류를 퍼뜨리는 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이라든지,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교회당국자들인 경우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이런 점이 매우 꼼꼼히 살펴보고 난 후 첫 번째 두 가지 서명조건을 하지 않으려고 결론을 내린 점입니다.


모든 곳에 판단내리기 애매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그걸 여러분에게 다시 읽어드리죠.


첫째: “지속적인 성교회 치교권과 변함없는 천주성의 전통적 진리에 대한 신성한 교리를 보전하고 전승하며 가르치는 자유” 이 말은 사실 매우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만 여러분에게 약간 어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보전한다’는 의미는 어느 정상화된 상황에서 우리를 알고 있는 교황의 역할에 다가 우리가 “보전”하는 보증인(교황)을 두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르게 놓고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성 비오10세회)가 신성한 교리, 끊임없는 치교권의 신성한 교리를 보존하고 전승하며 가르칠 수 있다.”고 라고 써진 협약에서는 (뜻하는 바가 서로 다름을)확인시켜줍니다. 왜냐하면, 로마당국자들은 치교권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있는 반면, 우리단체가 그것으로는 부족함이 있는 ‘치교권’을 말하니,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시대의 치교권’이 저들이 아직도 쓰는 언어에서는 애매함이 있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가톨릭 전통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왜 ‘변치 않는 진리’입니까? 왜냐하면 그들 로마당국자들에겐 전통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일 년 반에 걸쳐 로마 당국자와 토론의 경험에서 나온 매우 소상한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게 됩니다. 이 첫 번째 핵심 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나 혁신적인 현대주의, 자유주의와 이에 따른 그 결과를 신장시키려는 사람들을 바로잡거나 심지어 이를 공개적으로 견책하는 진리를 옹호하는 자유”입니다. 여기에 어떤 것을 더 첨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오류를 인식할 수 있는, 그 오류들을 비난할 수 있는 자유이며, 그동안 부인되거나 사라졌던 진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류를 퍼뜨리는 자들, 심지어 교회 당국자들일지라도 그들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무엇이 오류인가요? 현대주의 자유주의 오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및 공의회 결과로 생긴 교리상, 전례상, 교회 질서의 오류입니다. 모든 것이 다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공개적 저항이라 자고로 물들어 버릴 정도에 이르기 까지 전부 오류투성입니다.


자, 두 번째 핵심 : “1962년까지 출판된 전례서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미사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62년까지의 모든 전례, 모든 사항, 심지어 교황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신품성사, 견진성사 혼배성사를 포함하여 현재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성사와 전례를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소간 현대주의자가 되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진실로 동의와 인식과 실제적 자유를 소유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성사나 교회법 관습에 관한 몇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필요하면, 우리가 새로 신품성사나, 견진이나 결혼에 관한 것도 다 포함하게 되는데 우리는 분명히 무효에 대한 새로운 대의명분을 받아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직도 무조건에 관한 서명 안에 있게 됩니다. 최소한 1명 주교의 보증인으로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는 완벽하지 않다. 왜냐 하면 성 비오10세회에 있는 우리 모두는 여러 보좌 주교 및 고위 성직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죠. 우리 모두 동의해요, 문제는 없어요. 과거의 문제도, 현재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헐뜯을 사항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와 반대로, 무엇이 문제인가는 확인했습니다. 사실, 우리 편에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또한 로마 쪽에서 뒤섞인 전달사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총회기관이 이 조건들에 들어있는 가치있고 흥미로운 사실을 첨가했었어도, 심혈을 기울인 총회가 되었을 것이며 이 총회에서 결정되어진 것입니다. 이 뜻은 이 결정이 (성비오10세회 회원에겐) 필요한 결속이라는 겁니다. 의견을 나눌 총회가 있을 때 당국이 조언을 요청하나 결정은 자유로이 하는 것이죠. 심사숙고하는 총회란 결정이 절대다수-과반수이상 찬성, 이는 우리에게 타당하다고 보여 지는데-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결정은 성비오10세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최근 총회가 인정했듯이,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발언할 수 있었던 그날,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우리가 겪었던 오해의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로마당국으로부터 주어진 조건을 동의해야 할 가능성에 대한 공들인 총회가 매우 현명하고 충분한 조치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비오10세회 집행부 다수가 논의를 시작하고 솔직한 토론 이후, 모든 측면에서 심도 있게 분석하고, 안팎으로 검토한 후에, 신중한 일을 다루는데 있어 그르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절대적인 보증인도 없거니와 독자적으로 일을 해나갈 개인도 없기에, 미래에 그가 해야 할 일에 관해서 모든 개인이 보증인이 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를 면밀히 조심스레 조사해보면 총회가 위 내부의 교착상태를 깨뜨리는데 대체적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최근 우리 총회는 로마가 한대로 정확히 똑같은 조건을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요구조건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 반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협상의 가능성은 더 멀어졌으나, 내 견해 상, 나쁜 협상의 위험성은 분명히 제거된 것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분명히’라는 의미는 영원히 라는 뜻은 아니고, 현재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사이에 분열을 피했으며, 이는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은 우리 성비오10세회, (종교관련)단체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이는 전투에서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격렬하게, 고집스럽게 우리가 분열되어 찢어질 수 있을 거라고 여러분은 상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이해심과, 이번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비록 완벽하지 않지만 많은 우리가 옹호하려는 참된 신앙, 우리의 전투, 우리에 앞선 이들, 르페브르 대주교님과 카스트로 메이어 주교께서 지켰던 진리를 위해 불미스런 형태가 되었던 분열을 극복한 것입니다. 


 

성 교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선에 관한 견해의 조건들

다음, 제가 말씀 드렸듯이, 우리가 겪었던 경험, 시련, 때때로 모순 덕분에, 보다 나은 이해와 현실에 대한 더 나은 실체를 깨달게 되었습니다. 성비오10세회의 입장은 6개월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분명해졌습니다. 금상첨화인 것은 무엇보다 회두를 통해, 교황 및 몇몇의 추기경들이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천주섭리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점인데 우리는 이점을 배제하지 않아요, 다른 방법, 실제적인 방법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로마일부나, 차기 교황이 신학적인 면에서, 신앙 안에서 가르침 안으로 먼저 되돌아오지 않으나, 현 교황이 소박하게 전통을 허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한 견지에서, 그리고 이 선이 중요해지는 신학적 정상화를 받아드릴 수 있게끔 허용하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이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역시 발전이 된 거라고 믿습니다. 신앙 안에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완벽한 전투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할 것이라는 조건을 우리는 분명하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추측한다는 것은 예언자이거나 점쟁이입니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가정이라는 예를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내일  교황이 현재처럼 똑같은 상황에 있다고, 그런데 오늘처럼 교황의 마음이 현대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봅시다. 그의 신학도, 마음도, 온정성도 현대주의자가 아니어서 ‘전통으로 진정 돌아오길 바란다고 해도, 진실한 신앙 안에서 저항하고 견뎌내려는 확신이 부족하다.’ 라고 가정한다면, 성 교회에 만연하는 모든 근대주의에 대결하려는 진정한 영웅적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황이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 또는 ‘대단히 많은 신념을 갖고 있다.’라고 해도 주변에 있는 성직자들에 의해 그가 유약하고 두려워하는 여건에 있다고 생각해봐요. 지금과 같은 주교들과 교황들이 있었던 성 교회 과거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교리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매우 선량한 교황들이 있었지만, 품행이 나쁜 교황들도 있었고 심약한 교황들도 있었으며, 실수를 저지른 교황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말하길 그들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역사적 결정의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 교회 현재 상황에서 확신과 강용함과 스스로 해결할 수단이 부족한 교황의 우발사건에서 신앙의 위기 가운데 교황은 우리를 창의 칼날로 잘 활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종양을 대적하게끔 창의 칼날이 될 수 있도록 교황은 필요조건을 가지고 우리와 잘 화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걸 생각해보세요, 어느 날 교황이 이 조건들을 우리에게 부여한다면,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교회 체계에 최초의 일격을 가하는 교황이 되는데 왜냐하면, 확실한 이 조치로 인해 교황이 공의회가 오류를 갖고 있다. 우리가 이를 거절할 수 있고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인데, 교황이 이들 요구 조건들을 고려하자마자, 교회 안은 전쟁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공의회 교회는 타격을 받게 됩니다. 확실해요. 그리고 이것은 교리적 문제가 우리 눈으로 보아 단지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입니다. 교황이 우리에게 첫 번째 두 개의 핵심사항을 인정한다면, 교황은 교리 사항을 포함하여 모든 사항을 부여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인데, 물론 우리는 이를 요구하려고 하는 겁니다.

 

시련의 필요성과 유익함

더 해야 할 말이 분명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 끝으로 시련의 필요성과 유익함에 관해 말씀드리려합니다. 가톨릭 전통 가르침이며 성경에도 있는 내용으로써 천사가 토비아에게 말한 “네가 천주님을 기쁘게 하기에, 네가 시련을 겪는 것이 필요하다.” (토비아서 12:13) 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리고 성 어거스틴은 말씀하시길,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 최악의 불행은 불행으로부터 교훈도, 유익도 끌어드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 불행으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선함도 배우지 못하는, 그래서 그의 시련이 이전보다 더 악화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유의하십시오! 시련이 유익하다면, 이것을 이용할 방도를 찾고 이로부터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타인의 재앙과 고통 그리고 시련으로부터 그들을 위해 교훈을 끌어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옳았으니 당신이 심한 일을 당하는 거야.” 그러나 시련에 많은 유익함이 있으니, 시련을 통하여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든 약점과 결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교정하고, 다시 또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시련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흔히, 옳은 사례를 옹호할 때조차 매우 서툴게 처리하게 됩니다. 배워야할 것은 겸손이며 곁들여서 신중해지게 됩니다.

 

아마 우린 자고 있고, 아마 우린 미래세대를 위해 전투정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으며, 천주께 더 의존해야 될지 모르며, 전투에서 더 많은 인내심, 굳셈 그리고 희망이 있어야만 할런지도 모릅니다. 굳셈, 용기 그리고 인내 모든 것이 함께 갑니다. 강용의 덕성은 두 가지 행위(sustinere et aggredi)인데 이 의미는 우리가 고통이 있고 겪으며, 참아 견디는 것이나 not aggress;  aggredi는 공격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공격하되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도량은 강용한 덕성의 일부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셨듯이, “인내는 전투에서 시련 속에서 소망을 싹 틔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소망에 주안점을 둡시다. 왜냐하면, 신앙부족, 자비의 부족, 소망의 결핍으로도 빠질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염세주의자, 패배자가 됩니다. 이것은 항복의 형태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할 것도 없게 되고 정복당하는 것이 됩니다.시련은 또한 장점과 보속의 수단이 됩니다. 이것들은 흔히 백신이 됩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독감에 걸리면, 내일 폐렴을 잡을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이번 사건이 그런 사례라 생각합니다. 흔히 시련은 다른 전투에 대한 준비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해 우리를 보다 더 명석해지고, 단호해지고, 조심스럽게 만드는 준비입니다. 누가 알겠어요? 시련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봐 걱정되기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이와 같은 시련을 보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천주께서는 우리가 약해질까, 혹은 약간 때론 왼쪽으로, 때론 오른 쪽으로, 혹은 아래쪽으로 일탈될까 살피려고 모든 것을 재조사하십니다.


이번 위기에서, 더 환한 빛을 가져다 준 교훈 가운데 하나는 시련의 목적, 즉, 지나침과 부족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질서가 어디에 있는가 보기 위함인데, 내가 말하는 이성의 무질서는 신중(분별)에 관한 이들의 의문사항들은 분명히 지성에 대한 의문이기에 무엇보다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방법이 어디에 부족한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지요. 때때로 옹호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로 하는 옹호 속의 지나침이죠. 우리의 지나친 열정을 좀 완화되게 합시다. 우리의 인내심을 살펴보고 이 위기를 단호히 해결하도록 서두릅시다.


이 방법이 많은 방향으로 가므로 모든 측면에서 아주 신중해져야만 합니다. 이쪽 면에서 약하면 수정하면 된다는 것, 이것이 교훈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천주께서 이번 시련을 허용하신 이유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전체적 구조가 시련으로부터 더 강해진 상태로 벗어날 것이며 훨씬 더 큰 전투에 준비를 잘 할 것입니다.


 

사랑의 진리를 반대 하지마라

리에게 주어진 거짓 딜레마를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 그 자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시험이 옵니다. 예, 그래요. 우리가 처한 그 상황에서 그 시험이라는 고유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길이 진리에도 반하는 것이며, 사랑과 신앙에도, 자비에도, 분별과 강용의 덕성에도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모든 것을 지켜야만 되고 올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위에 언급한 모든 덕목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좀 쉬운 것 무엇이던지, 우리의 기질, 우리의 성격에게 들어맞는 것에 호의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흔히 무시해버립니다.


우리가 질서, 균형, 그리고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될 때, 모든 곳에서 우리가 반드시 중간쯤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덕적 덕성은 극단과 패배사이의 정점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덕목과 인생, 일과, 행동, 주변 환경에 적용함에 있어서도 극단과 패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자체에 덕성이아니라, 적절한 목표가 있으니 그 분이 천주님이요,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지나치다고 할 만큼 천주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천주님을 잘 사랑한다고 생각해보는 동안, 우리기 얼마나 자주 잘못된 방법으로 천주님을 사랑합니까? 특히 우리들 사이에서 이런 일들을 자주 보게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되는 두 배의 위기를 갖고 있는데, 시련 가운데, 반드시 우리 자신과 모두를 위해 교훈을 끄집어내야겠지만,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미래에 일어날 진보에 눈을 맞추어 지나치게 많이 계획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천주님의 성총이 있는 곳에 모두가 구매될 것이고, 구령될 것입니다.


추락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가 끝나지 않는 한 끝은 아니며, 이를 단정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준비가 조금 부족했던 우리 중 몇몇은 결국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고. 처음에 매우 좋은 반응을 보여준 다른 이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 신앙의 고백만이 지켜져야 되는 유일한 것을 아닙니다. 진정한 자비와 사랑, 분별, 강용, 성 교회에 대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리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남고자함으로, 이 때문에 신앙만 시킨다는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리와 분별과, 가톨릭 정신 속에서 우리를 위기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인도해주는 우리에 앞서간 세 개의 별, 세 개의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세분이란, 비오 추기경님, 성 비오 10세 교황 성하, 그리고 르페브르 대주교님이십니다.

 

이 세 분들은 각각 그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자질로서, 성 교회 요구사항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동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유사한 자질을 갖고 있었으니 그런 것들은 특히 오늘날 신앙의 전투에 있어서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비오 추기경, 성 비오 10세 교황 성하, 그리고 르페브르 대주교에 이르기 까지 한 획을 끌어낼 수 있는데, 이 선을 따라가야 한다면, 앞에 놓인 선을 따르는 길을 갖는 것입니다. 교리와 신앙과 거룩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분야가 있었으니, 기도와 신앙의 고백과 강용과 분별입니다.


그것들이 모범사례입니다. 이 사례들을 따라야 할 길, 말하자면, 제시된 길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특히 10월 13일 토요일, 파티마에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났던 오늘, 지극히 복되신 성모님께 진실된 신앙 속에서, 신앙을 위한 참된 전투 가운데, 뿐만 아니라 참된 가톨릭 정신 가운데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성총을 주십사하고 기도합시다, 천주님께 그리고 우리 생활과 나이에 맞는 거룩함이 요구되는, 날마다 성총을 받을 수 있는 독실한 신자가 되도록 합시다.


성모님! 우리가 가톨릭 신앙의 값진 계승자들이 되고 위대한 참피온이 되는, 아들이 되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