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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라틴미사: 사제들에게 전통미사를 권고함(비가노 대주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1-30

라틴 미사: 비가노 대주교는 프란치스코가 우리가 잊길 원하는 전통미사가 무엇인지를 기억한다

(사제들에게 전통미사를 권고함)  by 비가노 대주교


Dilecta Mea — 거룩한 종도(사도) 미사에 관하여
사제와 주교들에게 보내는 Viganò의 진심이 담긴 메시지


거룩한 종도(사도) 미사를 금지하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허용하는 그대들은 그 거룩한 미사를 거행한 적이 있습니까? 전례를 드리는 대성당의 높은 곳에서 온 그대여! "옛 미사"에 대해 불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대는 전통 미사의 기도와 전례 예식, 고대의 신성한 몸짓에 대해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 미사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나 스스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이 미사를 섬기며 집례자(사제)에게 응답하는 법을 배웠지만... 여전히 남아서 소년들의 복사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젠 거의 잊어버리고, 잃어버렸습니다. Introibo ad Alterde Dei. [나 이제 천주의 제대 앞으로 나아가리이다] 학교에 가기 전에, 겨울에 얼음처럼 차가운 제대(祭臺) 계단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복사 소년은 제의를 입고 땀을 흘렸습니다. 나는 그 미사가 1968년 3월 24일 사제로 서품된 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사를 잊고 있었습니다. 그 미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그 자리에 위조된 의식(儀式)을 부여하면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박탈할 혁명(역자 주; 제 2차 바타칸 공의회)의 조짐을 이미 감지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제 사제직 초창기 몇 해에 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이 취소하고 금지했던 그 옛 미사는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그리운 친척의 시선, 종소리가 울리는 주일의 소리, 다정한 목소리처럼 먼 기억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향수, 젊음, 교회의 헌신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 세상이 2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새로운 영적 추진력을 가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이가 믿기 원했던 그 시절에 대한 열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경제적 안녕이 어떻게든 우리 국가[이탈리아]의 도덕적, 종교적 재탄생을 동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1968년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점령, 테러, 붉은 여단, 중동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수천 개의 교회적, 외교적 약속 속에서 사실상 해결되지 않은 채 내 기억 속에서 구체화되었으니, 이것들이 수십 년 동안 "일시적으로" 따로 놓고 있었던 겁니다. 오직 천주님만이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관대함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던 그 어떤 것입니다.


 내가 모든 시대의 미사를 봉헌할 때, 나는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정한 의미를 가장 숭고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깨닫는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에게 키스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고, 신부가 남편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는 것처럼, 신호와 경건함, 거룩한 말씀의 반복이 어떤 식으로든 소용없는 것이 아닌 사랑의 노래다


미국 고위 성직자들과 로마 교황청의 스캔들을 비난하기로 한 저의 결정은 대주교와 교황청 대사로서의 제 역할뿐만 아니라, 처음에 바티칸과 마지막으로는 미국에서의 미완성된 사제직의 영혼까지도 다시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무보다는 나 자신의 사제직을 위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해졌으니, 분명히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으로 인해 내 개인적인 안전이 위험에 처했고, 내 의지와는 달리 나는 교황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거의 숨어 살아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 축복받은 격리, 오늘날 내가 수도원의 선택으로 여기는 격리, 나로 하여금 거룩한 트리엔트 미사를 재발견하게 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나는 채서블(chasuble, 제의) 대신에 암브로시안 카피노(Ambrosian cappino)와 수대(手帶)와 함께 입었던 날을 매우 잘 기억합니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방금 전에 읊었던 것처럼 내 입에서 다시 나타난 그 옛 미사의 기도를 발음하면서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립니다. Confitemini Domino, quoniam bonus, in the place of the Psalm Judica me, Deus of the Roman Rite. Munda cor meum ac labia mea.


이 말씀은 더 이상 제대(祭臺)의 복사 소년이나 젊은 신학생의 말씀이 아니라, 사제의 말씀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제로서 봉헌하는 사람이고, 처음으로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 앞에서 봉헌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해, 즉 천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고 자신의 거룩함을 키우지 않았다면, 그의 사제직은 딸랑거리는 심벌즈처럼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찰은 모든 시대의 미사를 봉헌하는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는 이들을 무감동하게 하거나 심지어 겸손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하건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의 열정과 순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그녀의 눈에 빠져 있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무딘 로마의 전례주의자, 성직 복장을 하고, 그의 주머니 속에 가슴 십자가를 든 고위 성직자, 콘실리움 또는 치빌타 카톨리카 최신본을 로마 성청의 고문이 곤충학자의 눈으로 성 비오 5세 미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박물학자가 나뭇잎의 핏줄이나 나비의 날개를 관찰하는 것처럼요. 과연 메스로 살아있는 몸을 절개하는 병리학자의 무균성으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내적 삶을 가진 성직자가 옛 미사에 접근하면, 그가 이전에 이 전통 미사를 잘 알고 있거나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마치 그가 시간을 벗어나 천주님의 영원으로 들어간 것처럼 전례의 짜임새 있는 장엄함에 깊이 감동합니다.


주교와 사제직으로서 형제들에게 미사가 본질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사는 본능적인 방식으로 성스러운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천국으로 끌어 올리고,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와 현존으로 끌어 올립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에게 키스하는 데 지치지 않거나, 신부가 남편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지치지 않는 것처럼, 신호와 경건함, 거룩한 말씀의 반복이 어떤 식으로든 소용없는 것이 아닌 사랑의 노래입니다. 저곳에서는 모든 것이 잊혀지니, 왜냐하면 그 안에서 말해지고 노래되어 지는 모든 것은 영원하기에, 그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몸짓은 역사 밖에서는 영원하며, 세나클(Cenacle, 최후의 만찬소), 갈보리(Calvary, 십자가), 그리고 미사가 집전되는 제단을 하나로 묶는 연속체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하는 이는 이해 가능하거나, 훌륭하거나, 최신의 것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염려로 회중에게 연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천주님께 말합니다: 그리고 천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너무나 많은 영혼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용서를 탄원하는 이들의 죄와 결점, 또한 받은 은총에 대한 자비와 감사, 그리고 떨어져 있음에 대한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홀로 있으나, 그와 동시에 시공을 가로지르는 끝없는 영혼의 주인과 친밀하게 일치함을 느낍니다.


제가 종도들이 이어온 전통 미사를 드릴 때, 저는 치명자들의 유해와 수많은 성인들과 수천 명의 사제들이 어떻게 같은 제대 위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절을 하고, 같은 장궤(무릎꿇기)를 하고, 같은 제의를 입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 주님의 몸과 피로 된 성체를 받아 거룩한 희생제물을 제헌하는 가운데 동화(同化)된 것입니다.


제가 모든 시대의 미사를 드릴 때, 저는 가장 숭고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인격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공식상의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내 입이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 위에서 구세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성체와 성체를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신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은 내가 희생제물을 소비하는 것이고, 천주이신 그분을 먹는 것이고, 그리고 나는 파티(역자 주: 새미사의 개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온 교회는 나와 함께 합니다. 나의 간청하는 기도에 스스로를 (천국에) 합치기를 바라는 개선지회(凱旋之會),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체류를 단축하기 위해 그것을 기다리는 단련지회(鍛鍊之會), 그리고 매일의 영적 싸움에서 자신을 강하게 하는 신전지회(神戰之會)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듯이, 우리의 입은 진짜 그리스도의 입이고, 봉헌 안에서 우리의 말씀이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성체와 성배를 만지는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라면, 우리의 몸을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존경심을 가져야 할까요? 주님의 은총 속에 남는 것보다 더 좋은 동기가 어디 있겠는가? Mundamini, qui fertis vasa Domini. And with the words of the Missal: Aufer a nobis, quæsumus, Domine, iniquitates nostras: ut ad sancta sanctorum puris mereamur mentibus introire.


신학자는 이것이 일반적인 교리이며, 미사라는 것은 정확히 내가 의례에 상관없이 합리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트리엔트 미사의 봉헌은 성인들과 복자들로 가득 찬 구원의 연속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나에게는 개혁된 전례(새미사)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테이블 대 포퓰럼(populum)을 보면 루터교 제단이나 개신교 제단이 보입니다;


최후의 만찬 제정의 말씀을 내레이션 형식으로 읽으면, 크랜머의 기도서의 수정과 칼뱅의 예배를 들을 수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혁된 달력을 훑어보면, 사이비 개혁의 이단들을 취소시킨 같은 성인들이 (개혁된 달력에서) 취소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똑같은 것이 성가에도 적용되는데, 영국이나 독일 가톨릭 신자들을 소름끼치게 하는 성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들을 죽인 이들과, "교황 절대주의(가톨릭 신자)"을 경멸하는 가운데, 성체를 짓밟은 사람들의 찬송가를 듣는 것은 가톨릭 미사와 그 비슷한 공의회 위조품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이해하게 해야 합니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를 폐지한 첫 번째 사람들은 이단자들이었으니, 이단자들은 백성들에게 전례 의식을 더 잘 이해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속이고, 드러난 진리를 건들이고, 오류를 전파한 이들이었습니다. 새미사(Novus Ordo)에서는 모든 것이 불경스럽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모든 것은 우발적이며, 모든 것은 우연적이며, 가변적이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불변이듯이, 영원이 불변이기에 영원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마치 천주께서 불변이신 것처럼.


내 동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봤으면 합니다. 저는 그들이 불타는 덤불에 접근한 모세의 경건한 두려움으로 거룩한 트리엔트 미사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복음을 마치고 제대에서 내려오면서 우리 각자는 거룩하신 것 중 지극히 거룩한 것을 만났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내부가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전통적인 미사의 또 다른 측면이 있으니, 이것은 즉 과거의 성인들과 치명자들에게 우리를 연합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카타콤(지하교회)의 시대는 가장 최근의 박해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사제가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곳마다, 심지어 다락방이나 지하실, 숲이나 헛간, 심지어 자동차에서조차, 사제는 신앙의 영웅적인 증인들의 성체와 신비롭게 교감하고 있으며, 가장 거룩한 성 삼위일체의 시선은 즉흥적인 제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앞에서 모든 천사같은 영혼들이 경배하며 무릎을 꿇고,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그것을 바라봅니다. 이 점에서도 역사, 특히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전통이 어떻게 수 세기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지 이해합니다. 저 보물에 대한 질투 어린 관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에 수반되는 시련에 직면하는,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요. 이런 생각 앞에서 미치광이로 보이는 현 폭군의 교만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강화하고, 우리가 모든 시대의 교회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한 투쟁에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으면 승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동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이 장백의(長白衣)의 장식끈이나 제의의 자수(embroidery)으로 인한 기쁨이나, 또는 교리상의 규범에 대한 단지 이성적인 확신 때문에, 또는 전통 미사가 결코 폐지된 적이 없다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모세가 불타는 덤불에 접근한 경건한 두려움으로 거룩한 전통 미사에 다가가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마지막 복음을 마치고 제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만났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내부가 변모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곳이 있으니, 우리가 바로 사제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신비로운 시나이(Sinai) 산 위에서입니다. 사제직은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천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천주님의 더 큰 영광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모두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힘과 활력을 끌어내는 영적 희생과 자기 회복입니다. 고위 사제(주님)에게 길을 내주기 위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본보기를 따라 성부의 뜻에 양도하고, 자신의 의지를 말살하는 진정한 겸손의 표시입니다; 같은 신앙의 고백과 같은 전례 의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성인들과 함께하는 "교감(영성체)"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저는 수십 년 동안 노부스 오르도(새미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주고 싶을 뿐만 아니라, 특히 모든 젊은 사제들과 최전선에서 그들의 사역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주고 싶습니다: 성 비오 5세의 미사는 불굴의 영혼, 관대하고 영웅적인 영혼들, 천주님과 이웃을 위한 자비로 불타는 마음을 위한 것입니다.


시련에서 우리 모두는 한결같습니다: 원수가 이기고자 하는 승리는 성세자의 가엾은 영혼뿐 아니라, 우리가 거룩하게 받드는 사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제들의 삶이 천 번의 시련과 스트레스, 세상과의 싸움에서 홀로 된 느낌, 장상들의 무관심과 따돌림, 묵상과 내적 삶, 영적 성장으로부터 산만해지는 느린 마모와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포위당한 이 느낌, 혼자 폭풍우를 뚫고 배를 조종해야 하는 선원이라는 것이 전통주의자나 진보주의자의 특권이 아니라, 주님과 교회에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요청뿐만 아니라 각자는 자기의 불행이나 경제적인 문제, 주교와의 오해, 동료들의 비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의 시간에 또한 마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두운 밤처럼 천주님의 현존과 성모 마리아의 교제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Quare me repulisti? Et quare tristis incedo, dum affligit me inimicus? 악마는 배신으로 우리의 지루함을 악용하며 인터넷과 텔레비전 사이를 은근히 잠행하며 삼킬 것을 찾으며 오고 갑니다. quærens quem devoret, 이런 경우,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맞닥뜨리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것은 사탄이 헤롯 앞에 살로메처럼 설득력 있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선물해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사제직입니다. Ab homine iniquo, et doloso erue me. 시련에서 우리 모두는 한결같으니, 원수가 쟁취하고자 하는 승리는 세례자들의 불쌍한 영혼뿐 아니라 우리가 거룩하게 받드는 그리스도 사제직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거룩한 트리엔트 미사는 가톨릭 사제직 구원의 유일한 닻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사제는 날마다 다시 태어나고, 매일 성 삼위일체와의 친밀한 연합이라는 그 특권적인 시간에 죄에 빠지지 않도록, 이로부터 필수적인 은총을 끌어내기 때문이요, 자신의 직무에 맞설 건강한 균형을 재발견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의식적이거나 미적인 질문으로서 청산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사제직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의“ 거룩한 미사는 - 이는 진정한 미사이기 때문에 적들이 항상 반대해왔던 것처럼 - 누구에게도 자신을 바치는 의무적인 연인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하시는 주님처럼 질투심이 많은 정결한 신부입니다.


천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나요, 아니면 천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사람인가요?


당신은 천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나요, 아니면 천주님으로부터 당신을 멀리 떨어뜨리는 사람을 원하나요? 그 뿌리에 있는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화한 멍에와 원수의 노예 사슬 사이의 선택입니다. (새미사에서의) 불충분한 '회중의 주관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관리자이며, 천주님의 신비를 분배하는 자'로서 여러분에게 숨겨온 이 엄청난 보물에 경탄하면서 거룩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는 순간(1 고린토 4:1) 여러분에게 그 반응이 분명하고 투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미사 경본을 집어 들고, 사제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 뒤, 성 변용(變容)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Emitte lucem tuam et veritatem tuam: ipsa me deduxerunt, et adduxerunt in montem sanctum tuum, et in tabernacula tua.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여러분은 외칠 것입니다. Domine, bonum est nos hic esse "주여, 우리가 여기 있음으로 좋나이다."(마 17:4) 또는 제헌경에서 거행자가 반복하는 성영(시편)의 말씀으로: Domine, dilexi decorem domus tuæ, et locum habitationis gloriæ tuæ.


일단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아무도 여러분에게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니, 그걸 통하여 주께서 너희를 종이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시는 것입니다(요한 15:15). 그 누구도 반란의 정신에 의해 탄생된 불륜에 만족하도록 강요하여 그것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Eratis enim aliquando tenebræ: nunc enim lux in Domino. Ut filii lucis ambulate. "한 때는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면 빛의 아이들처럼 걸으시오.(엡 5:8) Propter quod dicit: Surge qui dormis, et exsurge a mortuis, et illuminabit te Christus. "그래서 그는 말씀하시길: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라. 그리스도가 너희를 깨우칠 것이다."(엡 5:14)


+ Carlo Maria Viganò, Archbishop
January 2nd, 2022
Sanctissimi Nominis JE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