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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전통을 유지하고 이를 후대에 전해야만 한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2-24

우리는 전통을 유지하고 이를 후대에 전해야만 한다
February 11, 2022
Source:  fsspx.news


이 문서는 2022년 1월 15일 성비오10세회 돈 다비데 빠글리아라니(Don Davide Pagliarani)총장께서 DICI(성비오10세회 공식 기관지)와 제휴하여 파리에서 제16차 로마 신학회의(神學會議)의 폐막식에 행한 회의의 전체 사본이다.


"전통(聖傳)을 통한 영혼의 선익과 전통이 없는 새로운 교회를 동시에 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슬프고 논리적인 결정적인 순간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성비오10세회는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들로 인하여 자의교서인 ‘전통주의 옹호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현실에서, 발생한 이 새로운 상황은 성비오10세회의 입장이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용 가능한 위치임을 그 어느 때보다도 보여준다.


아마도, 내가 그것을 말할 적임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다만 에클레시아 데이(Ecclesia Dei) 아래에 있는 여러 기관들은 성비오10세회의 일부가 아니지만 성비오10세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기원은 성비오10세회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적어도 간접적으로 성비오10세회의 역사에 의존한다. 게다가, 이 새로운 상황은 성비오10세회의 역할과 사명, 그리고 불가피하게 전통에 대한 필요성의 범위를 더욱 강조한다.


(전통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반대


잠시 실례를 해도 될까요? 우리는 불가피하게 에클레시아(Ecclesia Dei)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기관들에 속한 사람들 – 신자나 그 구성원들 – 에 대해 아무런 반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는 완전히 개인적인 반대 영역 밖에 있다. 인간의 눈높이에선 어디든 훌륭한 사람과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해당되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저는 제 발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이 예비적인 발언을 주장한다.

전통은 하나의 단위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신앙에 관한 방해받지 않는 선언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도 천주님 자녀들의 참된 자유는 저들의 신앙을 고백할 자유이다.


문제는 성비오10세회가 "에클레시아 데이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에클레시아 데이 기관, 더 일반적으로는 전통 미사(Tridentine Mass)에 애착하는 모든 사제들에게 싫증이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이다. 그럼 에클레시아 데이의 시작으로 돌아가 봅시다. 1988년 7월 2일[1]의 본문에는 성비오10세와 르페브르 대주교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으며, 에클레시아 데이에도 미치고 있다.


설령 잘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최근 사건에 비추어 볼 때 이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몇 구절을 읽어볼 가치가 있다.


자의교서 에클레시아 데이 아드플리타 Ecclesia Dei adflicta


먼저, 르페브르 대주교와 성비오10회가 비난을 받은 신학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분열 행위의 뿌리는 불완전하고 모순된 전통 관념에서 식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분명히 가르쳤듯이, 종도(사도)로부터 유래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진보하는 전통에 대한 살아있는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현실과 말에 대한 통찰력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발생한다.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의 사색과 연구를 통해 나온다. 그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영적 현실에 대한 친밀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의 확실한 카리스마를 부여받은 주교들의 설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특히 모순되는 것은 로마의 주교와 주교들의 기구가 소유하고 있는 교회의 보편적 마치교권을 반대하는 전통 관념이다. 종도 베드로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의 일치 사역을 맡기신 분과의 교회적 유대를 깨뜨리면서 전통에 충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당신은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다.


성비오10세회 역사 전체와 마찬가지로, 1988년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 축성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 행위이다. 그것은 교황, 가톨릭의 교계제도, 영혼에 대한 충성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 당국이 무엇을 말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든 간에 상관없다.


반면에, 살아있는 전통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1988년에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랑의 기쁨(Amoris lætitia)이 있고, 지구에 대한 숭배와 파차마마(Pachamama)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다른 결과들도 있다. 왜냐하면 전통에 대한 역동적이고 진화적인 개념으로 어떤 결과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다른 차원에 있다. 그들은 종도(사도)들과 천주님의 계시에 뿌리를 둔 전통과 단절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 자체가 요한묵시록의 원천이다.


조금 더 나아가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에클레시아 데이" 집단이 될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엄숙하고 진심 어린 아버지이자 형제애로서, 그들이 가톨릭교회의 통합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에게 연합해야 할 중대한 의무를 다하고, 저 운동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그들(성비오10세회)에 대한 지지를 중단해야 할 것을 호소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든 이들은 분열에 대한 공식적인 고수(固守)는 하느님에 대한 중대한 범죄이며 교회의 법에 의해 선언된 파문이라는 처벌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틴 전통에 대한 이전의 전례와 규율 형식에 애착을 느끼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저는 그들의 정당한 열망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를 통해서 그들의 교회적 교감을 촉진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표명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문제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치(통일)는 신앙을 통해 얻어진다. 일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를 목표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인 은전(특전)이나 특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트리엔트 미사를 지키고자 하는 사제들과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비록 일정한 형태이긴 하지만 전통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공의회 교회(2차 바티칸 교회)"를 고수하게 하고, 교회의 현대적 사고방식을 지키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 모든 것은 1988년 5월 5일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과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명한 의정서에 비추어 수립되고 약속되었다. 그럼 이제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지혜를 되돌아보겠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 의정서에 서명했고, 원한다면 몇 시간 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기도와 고독 속에서 밤을 보낸 후, 대주교는 천주님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이해했다. 역사에 너무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는, 교회와 영혼에 있어서도, 몇 시간 동안 고독에 빠진 후, 30년이 지난 지금, '에클레시아 데이(Ecclesia Dei)'의 일부인 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했다.


“베네딕토 16세 경험”


이해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비록 오늘 아침에 언급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간단히 말하는 "베네딕토 16세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숨모름 폰티피쿰(Summorum Pontificum)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주요 축(axis)인 "연속성의 해석"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숨모룸 폰티피쿰(Summorum Pontificum)과 함께 트리엔트 미사는 훨씬 더 넓은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특정 수의 사제들이 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봉헌함으로써 (이는 인정되어야만 한다) 많은 사제들이 그들의 사제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공의회 및 새 미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바티칸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이 과정이다. 그러나 자의교서의 전망은 흠결로 남아있었고, 그것은 오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같은 미사 전례의 두 가지 형태, 무엇보다 내가 첨언하고 싶은 것은 위기의 원인을 논하지 않고 현재의 위기에서 무언가를 개선하려는 환상이다. 이것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실수였고, 이 자의교서의 한계점이었다: 그것은 단지 효과가 없었다. 당분간은 먹힐 수 있지만, 조만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잘못은 잘못으로 인정하고, 이를 거부하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연속성의 해석학은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거나 방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회는 미래를 위해 여기서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는가: 공의회는 언제 수정될 것인가? 공의회는 거부되어야만 할까? 그냥 잊어버릴 수 있을까? 공의회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결국, 공의회에는 오류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여기서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 공의회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오류에는 항상 진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솔직하고 현실적이 되고 보자. 공의회, 즉 진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즉 공의회의 근간이 된 것은 새 미사, 에큐메니즘, 인간의 존엄성, 종교의 자유였다. 그것들은 교회를 변화시킨 본질적인 요소이자 오류였다. 그들은 가톨릭교회를 변화시킨 진정한 공의회의 중심이다!


또한 공의회에 있는 문서에는 다른 모든 것들이 있는데 - 그리고 저는 이것들을 약간 단순화시키고 있다 - 교회 교부들의 인용문들과 이전 공의회들의 인용문들은 단순히 그림 주위에 있는 액자처럼 필수적인 중심 요소들을 감싸기 위한 덧대기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진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것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 공의회가 거부되지 않으면 가톨릭은 스스로 부흥할 수 없다. 우리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실험을 갖고 있는데, 진리를 오류 옆에 두고, 두 미사를 서로 옆에 두고, 하나는 다른 것을 "합법화"할 수 있도록 하고, "연속성을 통한 개혁"을 하는 것은 완전히 착각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이 원리들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추측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미래에 매우 유용한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오류와 진리는 손을 잡고 함께 갈 수 없다.


에클레시아 데이 단체를 감독하고 지도하던 에클레시아 데이 교황청 위원회(The Pontifical Commission Ecclesia Dei)는 정확히 3년 전인 2019년 1월에 폐지되었다. 다음은 이러한 결정을 발표한 교황의 서신에서 인용한 것이다.


"오늘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청 에클레시아 데이 위원회를 설립하게 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과, 관습적으로 특별한 형태로 기념하는 기관들과 종교 공동체들이 오늘날 숫자와 생활의 적절한 안정을 찾았다는 것을 주목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 에클레시아 데이 기관들은 충분히 재통합되었고, 그것이 그들을 보호해야 할 위원회가 폐지되는 이유이다.


흠숭지례 및 성사 규율을 위한 성성의 장관인 대주교 아서 로슈(Archbishop Arthur Roche[4]가 종종 인용되는데, 이는 공식적인 권한이 그렇게 명확하고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잉글랜드) 대주교인 빈센트 니콜스(Cardinal Vincent Nichols)[5] 추기경에 대한 답변으로 로슈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전 교황들이 제한적으로만 용인(容認)한 이 전통적인 전례문들을 잘못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을 장려한 것은 공의회 개혁(실제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폐지됨)과 불화(不和)가 되는 전례문제와 교회 치교권에 포함되지 않는 교회론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예전 전례 교본의 수여를 규정하는 새 법률에 대한 주요 논평이 권장이 아닌 예외적인 용인을 통한 것이라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명백하다. 또한 이러한 예외적인 허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및 교황의 전례 개혁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수용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도 명백하다. 새로운 법안의 모든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내려진 전례의 복귀와 안정화를 지향하고 있다." – 나는 그것이 충분히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뒤로 돌아보자. 2016년에 성비오10세회와 협상하기 위해 로마에 의해 임명된 주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한다: “왜 공의회가 그대(SSPX)들에게 부여되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공의회를 받아드리면, 우리는 교구 교회에서 (전통) 미사를 드리는 신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아요. 그래서 왜 이런 일이 그대에게 강요되어야 합니까?" 하지만, 로슈 대주교(Archbishop Roche)는 지금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사실, 협상하다 보면, 현실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지킬 수 없는 약속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오늘 언급된 모든 것과 강조된 모든 것의 중심점은 무엇인가? 전통미사를 지키는 이들(Traditionis custodes)에 대한 주된 직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원리로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다: 트리엔트 미사는 진정한 가톨릭교회나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표현으로 기념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심지어 덧붙일 수 있다: 그것(전통미사)을 봉헌하는 것은 그것이 진짜 무엇인지에 대해 봉헌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용될 수 있다. 그걸로 여러분은 역설을 알 수 있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 있다.


실제로, 에클레시아 데이 기관의 경우 1988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왔다. 오늘날, 그들은 같은 선택에 직면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긴급한 선택을 해야 한다.


- 또는, 신앙 전체를 고백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자유를 유지하고, 그에 비례하는 수단을 취하는 것 - 천주 섭리가 그 결과를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는 성비오10세회가 르페브르 대주교와 함께 한 결정이다.


- 아니면,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는) 가능성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당국자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 - 심지어 그것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 –이다.


그러나 후자의 선택은 막다른 골목이다. 의지가 하나로 뭉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뜻이 반대 방향으로 가는 두 실체를 함께 연결할 수 없다. 머지않아 현재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특전을 주었고, 은전을 주었고, 특별하지만 흔들리는 상황을 만들었고, 그들은 약 한 세대 동안 기다렸다 - 약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것이 특정한 목표를 지향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목표가 정반대의 목표이다. 전통을 통해 영혼의 선익을 구하면서 동시에 전통이 없는 새 교회를 통한 영혼의 선을 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최고의 스승이다.


역사는 삶과 신중함의 위대한 스승이며, 에클레시아 데이는 오늘날 선택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당시 르페브르 대주교가 갖지 못했던 혜안을 가지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부가적인 요소를 갖게 된다. 그들은 이제 정해진 원칙들의 장기적인 결과조차도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르페브르 대주교가 30여 년 전에 내린 이 선택과 결정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 1988년은 성비오10세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 단순한 인간의 경험, 삶의 지혜, 문화와 인간의 이해로는 – 우리는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내린 결정의 지혜의 깊이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요소들은 불충분하다. 다른 많은 해석들이 여전히 상상할 수 있고 고려될 수 있었을 때, 성신에 의해 움직이고 사물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이 능력은 오직 거룩함의 절대적인 증거일 수 있다.


전능하신 천주님 앞에서 홀로 기도하며, 비전의 타당성, 정확성, 깊이가 더 검증된 결정을 내린 것은, 어떤 면에서 가톨릭교회 전체와 교회의 전통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성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30년 이상 입증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혼이 거룩한 만큼, 또 순수한 만큼 온순하신 성신의 은사를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역사, 인생의 스승이다.


신앙의 요구조건에 입각한 건축


하지만 에클레시아 데이로 돌아가 봅시다. 한 세대가 지나고 - 그리고 우리가 말했듯이, 그들은 충분한 후견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이제 교황이냐, 전통을 지키느냐 중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치 않다. 우리는 이 인위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서로 다른 조치들 사이의 기본적인 연속성이 강조되었다. 물질적으로는 많이 다르더라도 둘 다 공통된 근거가 있다. 선택은 교황이냐, 전통이냐, "특전 A", "특전 B" 또는 "특권 C" 사이에 있지 않으며, 우리는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택은 1974년의 선언, 즉 영원한 로마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의 선언과 이미 알려진 결과와 함께 특정한 은전의 용인이 있다. Ecclesia Dei의 최종적인 막다른 골목에 위기가 있다. 여기서 여러분은 어떠한 획득된 권리도 기대할 수 없다. 여러분은 믿음의 요구에 의지해야 한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자들에게 특별한 권리, 특권, 또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로마는 헌법을 바꿀 수 있고, 심지어 로마는 신자들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예수회를 탄압했고, 성비오10세회를 탄압했으며, 다른 어떤 신자나 기관도 문제없이 진압할 수 있었다. - 신중한 판단력으로 이름을 대지는 않겠다 - 그리고 만약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싸웠다면 - 오직 특정 신도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특권에 기초한다면 – 그 모든 것은 억압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이 영원이고 우리의 싸움을 무적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믿음이다.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계시는도다. Verbum Domini manet in æternum (1 Peter 1:25).


현재의 전투, 전통을 위한 우리의 싸움에 필요한 토대가 바로 믿음이다. 그것은 믿음이지, 특권이 아니다.


교황 비오 5세의 미사의 도구적 사용


전통을 수호하는 이들(Traditionis custodes)에 대한 또 다른 측면도 강조되어야 한다. 전통미사가 도구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비난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대들은 이 경본을 다른 교회, 다른 신앙, 즉 진정한 신앙이라고 부르는 다른 교회의 깃발로 사용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누가 이 경본을 도구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가?


오늘 아침에도 보았듯이, 트리엔트 미사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다른 개념, 영적 삶에 대한 다른 개념, 사제직에 대한 다른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영적 삶, 사제직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부합할 수 있는 또 다른 미사로 대체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 전통적인 미사 경본의 사용은 도구적인 것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적 삶에 대한 가톨릭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미사의 정상적인 사용이었다.


반면에, 로마 당국에 의해 만들어진 성 비오 5세의 미사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다. 그들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특정한 길을 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당신은 그 경본을 가지고 놀 수 없다. 당신은 성사를 가지고 놀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그래, 우리는 30년 또는 40년 동안 여러분에게 이 경본을 주었고,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의 지배적인 조류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으로 점차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과도기의 시간은 끝났다.“


미사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동종 요법 사용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동종 요법 남용이라고 말하는 게 낫다. 동종 요법의 원리는 당신이 치료하고 싶은 질병에 대한 점진적인 반응을 면역 체계에서 유발하기 위해 병의 근원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로마 당국은 성 비오 5세의 미사에 대해 이것을 시행했고, 그들은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문제로 비치는 미사를 신자들의 문제를 치유하는 데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은 순전히 도구적인 용도이며,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구원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전통을 어떻게 전할까요?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성비오10세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낫지 않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자질이 아닌 우리의 힘은 다른 곳에 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우리의 힘은 믿음과 전통에 있다. 우리의 힘은 미사에 있고, 그리고 미사 안에서 신앙과 전통의 깃발이자 기준이 된다.


자의교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이 자의교서의 어떤 측면을 무시한다면 매우 진실한 어떤 것을 말한다. 가톨릭교회가 오직 하나의 미사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교회가 오직 하나의 훔숭지례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훔숭지레에 대한 이 하나의 형태는 새미사가 아니다. 새미사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다.


훔숭지례에 대한 이 유일한 형태는 모든 시대의 미사이다. 그리고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구원만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갈보리를 향해 수렴하는지를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바친 수 많은 다른 형태의 제물들은 십자가의 희생을 나타내는데, 이 제물들은 독특한 완벽함으로 그 모든 것을 요약한다. 우리 복되신 주님의 모든 삶이 십자가를 향했고, 그분의 수난을 향했다. 그것이 바로 이 특별한 통합을 가진 이유다. 이렇게 표현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전적으로 십자가에 도착한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십자가의 이 희생은 너무 완벽해서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 한 번만 바치신다.


개개인의 영혼의 삶처럼 이제 교회의 삶도 단순히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이 중심사상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교회와 구원받은 영혼의 삶은 십자가와 구원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이고, 십자가는 하나뿐인데 이를 통해 전능하신 천주님을 경배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사에서 찾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일치인데, 그것은 '구원'을 교회의 삶과 영혼의 삶에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한 구원의 단 한 가지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을 영속시키는 방법, 즉 영혼에게 적용하기 위한 시간 내에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즉 오직 하나의 가톨릭 미사만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에서 흘러나와 그의 전 생애를 통일한 단 하나의 중심적 의도를 단순히 영속시키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연장은 하나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성비오10세회는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봉헌하고 십자가의 신비로움으로 들어가고 싶다. 우리는 저 십자가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다. 십자가를 두 개 가질 수 없고, 두 개의 구원도 두 개의 미사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이 독특한 그리스도적인 삶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현실에서 항상 똑같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은 쓸모없고 좌절시키는 적응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항상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하는 변화하는 인간 본성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현대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틀렸다. 왜 틀렸는가? 죄의 근원은 항상 같고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오늘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이 거짓말은 거짓말의 결실을 맺는다. 그것은 교회의 삶의 붕괴를 낳는다. 이러한 구원의 적용이 없다면 교회의 삶은 통합의 원칙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미사의 거룩한 희생이 진정한 우리의 깃발이자 기준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그리고 전투에서, 그 기준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성비오10세회가 반드시 얻어야 할 마지막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미사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보 천하 교회를 위해 원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단순히 부(副) 제대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허용되는 원형경기장에 깃발을 들고 입장할 권리도 원하지 않는다. 당치 않다!


우리는 이 미사를 우리 자신을 위해, 동시에 모두를 위해 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은 특권이 아니다. 이 미사는 우리와 모든 영혼을 위한 권리이다. 예외 없다. 이것이 바로 성비오10세회가 가톨릭교회의 활동적인 부분이며,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성비오10세회는 특별한 특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분명히, 천주님의 섭리는 순간, 양식, 단계성, 그리고 상황을 선택할 것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 미사를 원하며,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모두를 위해 그것을 지금 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특정한 특권을 찾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관점으로 들어가지 않고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조금씩 양보받는 협상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여기에 교회가 주어지고, 거기서 미사의 시간이 주어지고, 마니플(수대, 手帶), 비레타(사각모), 성비오10세의 성주간 전례 등을 사용할 가능성 등등을 … 절대 아니다! 우리는 이 시나리오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아주 간단하게, 우리는 두 가지를 원한다: 신앙과 미사. 우리는 영혼의 영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에 자양분이 되는 가톨릭 교리와 십자가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 무조건 모두를 위해 그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 관점을 유지한다면, 성비오10세회는 항상 가톨릭교회의 작품일 것이고, 완벽하게 될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는 교회의 바로 그 중심에서 교회가, 그리고 교회를 위해 항상 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