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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제독신은 그리스도의 독신을 따르는 것(위기에 처한 사제독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6-15


사제독신은 그리스도의 독신을 따르는 것(위기에 처한 사제독신)


가톨릭교회가 귀중한 보석처럼 수세기에 걸쳐 보존해온 사제독신은 지난 수십 년간 의문의 대상이 되고, 해결할 과제이며, 심지어는 적의에 찬 공격이 대상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가톨릭인들의 양심은 고통 받는 반면에, 사제직을 열망하는 사람들과 사제들은 황당해한다. 그러므로 복음서 및 가톨릭 성전(聖傳)의 빛으로 이 질문에 대해 검사해볼 필요가 있다.(이 자료는 본래 1999년부터 프랑스 성비오10세회 관구의 “우리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연재물의 일부로서 2003년에 발간된 것이다)


사제독신에 저항하는 반대들

          

분명히 주장을 확신하는 것이 사제독신의 실천을 반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이러한 몇 가지를 빠르게 검증해보자.


1.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신약은 사제독신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각 개인이 자유로이 반응을 보여주는 특별한 은총으로서 단지 독신을 제안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f. Matt. 19, 11-12).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12명의 종도들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요건으로서 사제독신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사제들 역시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지도자들을 선임하는데 있어서 독신을 고려하지 않았다. (cf. 1 Tim. 3, 2-5; Tit. 1, 5-6).


2. 정결을 가지고 있지만 건강치 못한 강박감의 열매라고?


수세기에 걸쳐 교회교부들과 저술가들은 사제성소와 봉헌된 독신 사이의 관계를 설정해 온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독신 그 자체보다도 혼인하고서의 정결을 권고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자료들은 과장된 염세주의나 혹은 다소간의 정결을 지니는 건전치 못한 강박감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교회 내 독신의 관습은 독신에 이르게 하는 성소(聖召)의 관념을 가지고, 사제직으로 가려는 성소를 가진 이들이 오직 독신이어야 한다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정체성을 가짐으로써 사제 성소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더욱이, 현대의 성직자들이 그 수에 있어서 비극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제 수의 축소 원인 가운데 하나가 사제독신 유지에 있어서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 혹은 이것이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는가? 사제독신의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사제 모집에 있어서 새로운 자극이 되지 않는 것인가?


3. 사제독신이 실천하기 불가능한 요구 사항이라고?
 

그러면 이를 반대하는 것에 따르면, 사제독신이란 성경에도 그리고 성전(전통)에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제독신은 지나친 것이고 부적절하며 위선적이고도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완전히 억압하거나 또는 최소한 전적으로 선택 사안으로 만드는 것은 오늘날 성직자들과 미래의 사제들을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할 것이다.


사제독신을 옹호함


사제독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뭔가 이어질 논의가 제기되어야 한다: “만약 사제가 결혼하면, 그 사제는 아내나 자녀에 대해 몰두해야하니, 이렇게 가정에 신경을 쓰는 것은 밤이나 전염병이 돌 때나 성사가 필요할 경우 신자들에게 신경을 못 쓰게 되고 신자들이 불편함이니, 더욱이 고해의 비밀에 있어서 사제에게 신뢰를 두게 되는 비밀은 베우자와의 대화 동안에 누설될 위험이 있게 되고, 이러한 위험은 고해자로 하여금 사제에게 고해하길 꺼려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들은 전적으로 진리의 결여는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신뢰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반드시 밤이나 전염병이 돌고 있는 동안에 집을 떠나야 한다. 의사들 또한 환자들의 지극히 내밀한 비밀을 듣게 된다. 그래도 어느 누가 의사더러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이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적 질서로부터 취한, 잘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이 이유 하나만으로는 사제독신을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한 증거이다.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공격을 받고 부족한 주장으로 인하여 방어할 때에는 사제독신이 명분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고 역사의 승리 행진과 인간의 진보로 인하여 휩쓸려 나갈 운명처럼 보인다. 

 

1. 교회가 계속 이어 내려온 관습


위에서 언급한 반대로 인해 (그리고 공식화 될 수 있는 다른 것들에 의해서) 감동을 받아 우리는 사제독신을 동의하는 유혹이 이끌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당장 그 의문에 대한 엄중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우리 앞에 불안하게 떠오르는 엄청난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이란 교회의 사제독신은 가톨릭교회가 계속 이어온 관습이라는 것이다.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은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교시절에 걸친, 동방 및 서방교회 성직자들 사이에서 봉헌된 사제독신의 관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던 무명의 목격자들이다. 4세기 당시부터 서방교회는 (여러 지역 공의회 및 주교들의 중재 덕분에) 이러한 사제 독신의 관습을 강화시키고, 발전시켰으며 인가하였다.


2. 로마 교황의 행동


모든 시대에 있어서, 심지어 사제독신에 대해 반대가 있거나 이에 대한 도덕적 이완이 있을 때, 그리고 일부 성직자가 공개적으로 죄 가운데 살고 있을 때 사제독신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의향을 가진 이는 특히 다름아닌 이는 로마 교황이었다. 사제독신의 의무는 특히 트리덴트 공의회의 엄숙한 선언으로 인해 요청되었고 후일 교법의 전문에 삽입되었다. 20세기 시작 때부터 예외 없이 모든 교황들은 (성 비오10세 교황 이후) 전 세계 사제들에게 칙서를 발송하여 분명히 사제들로 하여금 저들이 계약하고 있던 사제독신의 엄숙하고도 거룩한 서약을 상기시켰다.


2. 동방교회의 관습


만약 사제독신에 관하여 동방교회의 법령이 부분적으로 서방교회와 다르다면, 이것은 동방교회의 그 지역에 있어서 역사상 환경의 적합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동정성과 사제직에 대한 독신과의 심오한 관계를 매우 찬미하였다. 더욱이 동방교회에서 사제직의 완성을 보여주는 주교는 엄격하게 사제독신을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혼인을 원하면서 사제가 되고자 하는 후보자들은 서품 전에 결혼할 것이 요구되고, 그리고 만약 그들이 홀아비가 되면 결혼할 수 없다. 사제독신과 사제직 관리자 사이에 있어서 사제독신의 원리와 이에 대한 호응의 원리는 어느 확실한 점에 있어서 동방교회의 주교직에 있어 제정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참고: 동방교회의 경우, 결혼한 사제는 주교가 될 수 없습니다)


3. 보편적이고도 계속 이어져 온 관습


전통(聖傳)에 필수적으로 충직해야할 성 교회 안에서 봉헌된 사제독신이라는 보편적이고도 지속되어온 관습은 단순한 인간의 관습으로 치부될 수 없고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에서의 사제독신은 그 자체 가지고 있는 계시에 깊은 연관이 있다.


진정한 사제독신의 의미

 

 저절로 취득된 교회의 관습은 법에 의한 강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천주님의 계시나 혹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기반에 의지해야 한다. 이는 사제독신의 경우인데, 가장 높은 덕행의 초자연적인 동기에 의존하는 것이고, 복음 그 자체에 직접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제는 제 2의 그리스도이다.” - Sacerdos alter Christus, - 이것이 가톨릭 사제직을 밝혀주는 기본 원리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유일하고 명확하며, 사목하고, 사제직을 관리하며, (어원적으로 종으로서의 사제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고의 사제직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범이요, ‘원형’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각 사제에게 있어서 그는 그의 사제직이 그 모든 진리를 받기 위하여 이에 친밀하게 순응되어야 한다. 


참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으로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신이 거의 알려지지 않는 세상에서 만약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분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동정 상태로 남아 계셨다함은 놀랄만한 일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동정성은 전적으로 그리고 남김없이 천주님께 봉헌하심을 의미한다. 그분의 모든 힘, 그분의 생각 모두와 행동 모두는 천주께 속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과 지상, 천주님과 사람, 말하자면 사제 사이에 중재자로 구성되어진 것은 이러한 완전한 봉헌에 의한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이는 항상 본질적 일치로 가는 것이니, 그래서 그분의 인성은 그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씀의 인격에 속한다)


천주께 봉헌함으로써의 사제독신


그래서 동정이란 그리스도의 사제직 본질인 봉헌을 의미하고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동정은 그분의 사제직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이것에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제직에 참여하는 인간의 사제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천주께 완전히 드리는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서 주님의 동정성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봉헌된 사제독신은 그러므로 성부께 주님이 드리신 봉헌의 표시, 예수님의 동정성과 친밀하고도 사랑으로 가득 찬 일치인 것이다. 이것이 사제독신에 대한 으뜸이고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은 동정이었으니, 이는 성부께 드리는 자신의 봉헌을 표현하면서, 또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헌하기 위한 것이니, 그리하여 당신의 교회를 영광스럽고, 거룩하며, 흠 없는 배우자(에페소 5:25-2)의 표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 방법으로, 사제의 봉헌된 동정성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동정으로 나타난 사랑과 이 사랑이 가지는 초자연적인 생식력을 분명히 하고 이어가는 것이다.


교회와 영혼을 사랑하는 사제의 활동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서 사제의 기도생활, 성사를 주관하고, 특히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제헌하고, 모든 이에 대한 사랑과 복음을 끊임없이 강론함에 의해 분명히 드러낸다. 사제는 매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신앙과 은총 안에서 영혼을 낳으며, 그리고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고, 사람들 사이에서 계신 그리스도의 동정을 나타낸다.


다가올 왕국의 표시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 임무를 면밀히 조사하는 것에서부터 천국에서 이 임무의 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헤아려 본다면, 주님의 동정에 대한 세 번째 명분과 또한 사제의 동정에 대한 명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천국교회의 씨앗이고, 그와 동시에 다가올 복된 생활의 표시이다. 천국에서의 지복직관이 되는 것은 비록 드러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써 이미 교회의 이 세속적인 생활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강력하게 “부활 때에는 너희는 혼인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천당에서 천주의 천신같이 되리라.(마테오 22:30)” 하셨다. 그러므로 동정성은 복 받은 인간의 은총 상태가 될 것이다. 이 동정성의 표시는 이 생활에서 환란과 육신의 욕망 가운데 빛나게 되는 것은 딱 맞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독신을 비추는 사제의 봉헌된 독신은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영광에 대한 기대, 간선된 생활의 예표,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겪는 그들의 일상의 짐을 내려놓지 않도록 독려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향해 발맞추도록 하는 압박하는 초대장인 것이다.


사제들에게 주어진 독신은 그러므로 최고의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동정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성부께 전적으로 드린 그리스도의 동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교회와 주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하고 다가올 천국의 복된 생활을 선언하는 것이다.


사제독신에 반대하는 응답


봉헌된 사제독신의 의무에 있어서 예수께서 어떠한 계명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기본적인 차이라는 답변을 가지고 응해야 한다. 본래 사제직이란 독신과는 절대적으로 연계된 것은 아니니, 왜냐하면 영혼의 영적인 특성, 성사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기혼 남성이 서품 받은 사제가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고, 왜 예수께서는 직접적으로 독신이라는 준수 의무를 명령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와 동시에, 복음에서 분명한 것은 사제봉헌과 동정 봉헌 사이에는 심오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의 첫 사제들을 선택하신 예수께서는 천국의 신비 안으로 초대하고자 하셨고 (마테오13;11, 마두4;11, 루까8:10) 저들을 초대하여 당신의 친구와 형제가 되길 원하셨다.(요왕15:15, 20:17)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안에서 봉헌되어지길 원하셨다(요왕15;15, 20;17) 또한 천주의 왕국을 위하여 집, 가정, 배우자와 자녀들을 버리는 이들에게 초자연적으로 풍성한 보상을 약속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만 주님 친히 의미와 전달로 이루어진 말씀 안에는 동정으로 인해 천주께 보다 완벽한 봉헌을 권하셨다.(마테오19;11-12) 사제독신에 대한 교회에서의 끊임없는 전통은 그러므로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교리에 위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특별히 인상 깊은 반응


같은 방법으로, 교회의 교부들은 독신과 사제직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복음상의 호응을 변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 사제독신은 서방교회와 부분적으로는 동방교회에서 교회법이 되었고 천주님의 법을 준수하는 엄격한 의무가 되었다. 그래서 사제성소와 봉헌된 동정 사이에 저들이 제정한 관계는 엄격한 의무라기보다는 압력을 주는 권고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들의 저작들은 매우 분명한 방법으로 이러한 방식 안에서 복음의 정신을 표현한다.


게다가, 교회 저술가들은 때때로 과장된 염세주의에 의해 영감 받았거나 또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문맥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점은 특히 이 교부, 저 교부에 있어서 세부적인 사항에서만 오직 맞는 것이다. 그와 반면에, 사제직과 동정 사이에 심오한 관계를 말하고 있는 모든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은 변하거나 의문스런 견해를 결코 표현하지 않았고, 반면에 천주 계시라는 바로 그 교리를 확고하게 전승한다.


성소(聖召)는 권리가 아니라 소명(召命)이다


봉헌된 정결로부터 사제직 성소를 분리시키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것은 저들이 성소라는 바로 그 본질에 관하여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정결은 주교의 음성을 통한 교회에서 분명히 밝힌 천주님의 부르심이다. 이러한 천주님의 부르심은 어떤 사람에게 떨어질 수 있는 흠 있는 선택의 종류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것은 부름을 받은 이에게서 있는 예상되거나 필요한 특성을 만드는 분명한 요청인 것이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교회 성가대가 차지한 중앙 때문에 그가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면 그 어느 관리자도 서품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동방교회에서의 진정한 사제직 성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후보자는 노래 부를 능력도 가지지 못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사제독신을 봉헌하지 못하면 사제로 서품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서방교회에서는 그가 사제독신으로 봉헌 받고자 부름을 받지 못하면 진정한 사제성소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서방교회에서 정결로부터 사제직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 바람은 전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이다.


기혼성직자일지라도 사제독신 성직자보다 더 모집하지 못한다


 
사제독신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소의 위기를 사람들이 지적할 때, 그들이 잊고 있는 점은 사제나 목사들의 결혼을 용인하는 교회공동체, 이를테면 정교회, 영국교회, 개신교 단체들도 라틴전례의식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교회처럼 성직자들을 모으는데 있어서 똑같은 어려움을 격고 있다는 점이다. 사제들을 결혼하게끔 허용하는 것은 그러므로 성소 감소에 있어서 이를 제거하는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은 아닌 것이다. 성소 감소에 있어서 진정한 원인은 오히려 신앙정신의 약화, 가톨릭 가정의 파괴, 물질주의의 발달, 어떤 사제들에 일어난 엄청난 추문, 전례개혁으로 인한 거룩한 미사의 파괴 등인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사제독신이 의미하는 천주께 자신을 드리는 총체적인 선물은 사제직을 향한 관대한 영혼을 인도하는 빛이며, 성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이다.


오로지 불완전하게 이행되기 때문에 계명을 바꾸라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천주님에게는 가능하다


사제독신을 준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적인 면이나 초자연적인 면에서도 거짓이다. 우리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심리학에서 알고 있는 것은 금욕, 심지어 절대적인 금욕은 본성에 거역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가 있고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그리고 감정적인 경향을 다룰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사제독신을 덕행으로,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은 원죄로 상처받은 인간본성에 평범하게 주어지 않은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이런 면에서 사제독신이란 본성 하나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천주님은 가능하게 하는 은총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봉헌된 사제독신은 특별한 은총이 요구되는 것은 그러므로 사실이지만, 그러나 천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경건하게 자기를 관련시킨 사람에게 천주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은총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이 은총은 그 사제로 하여금 자신의 일에 충직하게 남아있게끔 가능하게 해준다. 사제들의 흠 없는 동정성이 갖는 훌륭한 광휘를 일으키는 사제들의 엄청난 힘은 수세기동안 교회에서 이를 목격한 이들에게 빛을 주었다.


비오 12세의 아름다운 교본


사제독신에 대한 초자연적인 열매를 기억하게 하는 비오 12세의 가르침이 담긴 아름다운 교본으로써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사제는 초자연적 생명에 연관된 모든 것에 관한 자신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적절한 밭을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인 생명을 증가시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몸에 이를 연계시키는 자가 사제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직 ‘천주님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위하여 ‘세속의 것’을 멸시하는 것(코린토 전 7:32-33)은 필요하다. 그리고 사제는 세속적인 일에서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벗어나 천주님 일에 대한 성무(聖務)에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야 함으로 교회는 사제의 독신 계명을 세운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사제란 천주님의 일에 대한 관리자요, 모든 영혼들의 아버지라는 점을 훨씬 더 명확하게 해준다. 이 사제독신의 계명으로 사제는 아버지라는  선물과 의무를 잃어버린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선물과 의무를 증가시키니, 왜냐하면 비록 사제가 이 스쳐 지나가는 세속생활에 대한 자손을  낳지 않는다하더라도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활에 대한 자녀들을 낳는 것이다. 사제의 정결이 휘황찬란할수록 흠 없는 희생이시며 순수한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훨씬 더욱 신성한 관리자가 되는 것이다."(비오 12세, Mentinostrae, 9월 23일, 1950년).


* 레네 신부님의 글을 더 읽어보세요.


1. 여성사제 서품과 사제독신에 관하여


http://www.sspx.or.kr/bbs/board.php?tbl=question&mode=VIEW&num=114&category=&findType=&findWord=&sort1=&sort2=&page=11


2. 결혼한 성직자


http://www.sspx.or.kr/bbs/board.php?tbl=question&mode=VIEW&num=225&category=&findType=&findWord=&sort1=&sort2=&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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