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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담화 1 (1987. 9. 27) - 성 교회의 변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8-18

 

 

 르페브르 대주교의 담화 1(1987.9 27 프랑스 안시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초대를 받아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좌담회를 열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더라도, 현재의 위기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에 관한 모든 정보는 약 2년 전의 출판물을 통해서 얻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란스러워 하는 가톨릭인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된 이들에게》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태도, 우리의 입장, 로마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곤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의 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으로, 출판을 제법 거듭했습니다. 비교적 읽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 속에는 여러분이 품는 의문, 혹은 여러분의 친구나 지인들이 이른바 ‘에콘 문제’라는 것에 관하여 품는 의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더 중대해지고 더 비극적으로 악화되어 우리가 싸우는 중대한 이유, 정의하기가 퍽 까다롭고 파악하기가 미묘한 이유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철학적인 용어나 신학 용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째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 몇 가지에 반대하고 있는지 잘 이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란, 예컨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라든지 ‘현대세계헌장’입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그 두 가지 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꽤 미묘한 문제로, 자유주의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현 상황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려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신간 서적을 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저들이 우리 주를 왕위에서 끌어내렸도다(Ils L'ont découronné)》라는 책을 낸 것입니다.  내 생각에 《저들이 우리 주를 왕위에서 끌어내렸도다(Ils L'ont découronné)》라는 이 제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저들’이란 누구일까요?여러분, 저들이란 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누구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일까요?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퇴위시키고 왕관을 탈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요. 이는 극히 중대한 일입니다. 그 책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리요, 이것이 우리 싸움의 가장 중대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항하는 중대한 이유는 라틴어 문제가 아닙니다. 사제가 수단을 입느냐 입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례 중 2차적인 전례양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주라는 신앙, 그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7월 14일, 랏칭거 추기경(역주: 후일 베네딕토16세)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했을 때 그런 것을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종교의 자유(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라는 문서)에 관한 우리의 반론에 대해, 추기경이 답변한 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이 대화에 임했던 것입니다. 추기경은 이전에 우리더러 반론을 쓰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40쪽의 소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추기경은 우리의 반론에 꼼꼼하게 답변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답변에 대한 답을 작성하여, 7월 14일에 랏칭거 추기경에게 가져간 것입니다. 우리는 추기경이 종교의 자유를 정의하는 그 정의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며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하, 비록 추기경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려 하셔도, 어떤 의미에서 많은 특전, 성전에 의한 미사를 바칠 수 있는 특전, 교황 요한 23세의 1962년의 전례서, 1962년판 전례서를 지키는 특전을 주시려 해도, 우리의 신학교가 그대로 계속될 수 있게 해 주셔도 우리는 협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몹시 어려울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방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 통치가 약화시키고 계십니다. 추기경님은 시민사회, 국가를 비 그리스도교화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이것이야말로 저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나의 이 좌담회를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있었다면 잘 알 것입니다. 신문에서 읽었겠죠. 이탈리아의 기가 막히는 사건에 관해서 말입니다. 교황좌가 나서서 이탈리아 정부더러, 이젠 종교에 관하여 중립이 되어 가톨릭 국가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입니다.작년 3월, 이탈리아의 정교(政敎) 조약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교황좌는 이탈리아 정부 및 사회주의 정부와 동의하는 서명을 했습니다.

 

 이로써 이후로는 정부도 이탈리아도 가톨릭만 인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종교가 아니게 되고, 이탈리아는 종교에 관해서 중립이 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서 영토 안에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교황좌에 의해 요구된 것입니다. 이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정부가 아니라 교황좌가 요구한 것이라는 점을.  


 스페인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모든 가톨릭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일랜드에서도 그렇습니다. 스위스의 가톨릭 캔튼(州)에서도 그렇습니다. 캔튼이란 각각의 헌법을 지니는 스위스의 행정구역입니다. 이 모두는 교황좌가 각 정부에 요청한 것인즉, 국가가 엄격하게 가톨릭인 것, 공식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것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알현이 있은 지 벌써 8, 9년이 되었군요. 1978년에 교황으로 뽑혔고 1978년의 11월에 알현했으니까요. 그때 나는 교황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성하,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 통치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어 정말로 놀라고 있습니다.” 나는 교황께 베른(Bern, 스위스의 수도)의 교황대사와 내가 대화했던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대화는 내가 쓴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베른의 교황대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고, 교황대사는 자신이 스위스의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가톨릭인 캔튼이 투표하도록, 헌법으로부터 가톨릭 캔튼인 것을 폐기하도록 국민투표하게 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헌법 본문에는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예컨대 발레 주, 프리부르 주는 가톨릭을 해당 주의 유일한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다.’ 이것을 폐지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는 사회의 비 그리스도교화입니다. 나는 교황께 말했습니다. “성하, 개신교 캔튼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헌법 구절을 그대로 살려놓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개신교 캔튼은 ‘이 주는 개신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꾸지 않습니다. 네덜란드,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는 국가의 유일한 공식 종교로서 개신교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네덜란드의 여왕 줄리아나의 장녀는 부르봉가의 왕자인 자비에르의 아들 중 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줄리아나에게 왕위계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줄리아나가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에 개신교도가 아닌 여왕이 있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덴마크도 같은 상황입니다. 프랑스 청년이 덴마크의 왕위계승권이 있는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프랑스 청년은 가톨릭을 배교하고 말았습니다. 덴마크의 개신교 신자인 여왕과 결혼하려고 가톨릭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덴마크의 여왕이 가톨릭교도와 결혼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잘 보세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관습이 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논외입니다. 난 교황께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를 이슬람 국가의 원수로 앉혀 보세요. 가톨릭 신자를 공산주의 국가의 원수로 앉혀 보세요. 공산주의 국가는 당을 위한 인간을 바라고 있습니다. 공산당원이 아닌 누군가가 공산주의 소련의 원수가 되는 것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슬람교 국가에 가톨릭 신자인 원수를 앉혀 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것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참된 종교, 진정한 종교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만이 국가를 가질 권리가 없다는 말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세기나 통치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 위한 가톨릭 국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라는 나라가 주교들의 압력을 받고 종교적 중립국이 되었을 적에, 당시에 나는 콜롬비아에 있었습니다. 주교들의 압력을 받았다는 것은 콜롬비아 주교회의 사무총장이 나에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입니다. 2년 동안 우리는 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관저에서 연좌 농성을 하여, 결국 헌법 조문으로부터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유일한 종교는 가톨릭’이라고 돼 있는 곳을 삭제하게 했습니다.”  

 

 그 헌법 조문을 바꾸려고 콜롬비아 주교회의 사무총장이 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관저에서 연좌 농성을 했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콜롬비아의 왕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 그런 삭제가 있고 나서 이루어진 여러 차례의 연설 중에서 3가지 연설을 꼽아 보겠습니다. 나는 콜롬비아에 있었기에, 그 연설을 신문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통령의 연설, 교황대사의 연설, 주교회의 대표의 연설이었죠. 그중 가톨릭다운 연설은 대통령의 연설이었습니다. 주교들의 연설은 그저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적용한다. 즉,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의 자유의 의미를 적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대사의 연설은 프리메이슨의 연설이었습니다. 진보, 인간, 문화가 거론됐죠. 진짜 프리메이슨의 연설이었습니다. 그와 달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톨릭을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종교로 여기지 말라고 하니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틀림없이 우리 국민은 이 변화를 극도로 애석해하고 놀라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이 콜롬비아에 의해 인정된 유일한 종교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나는 가톨릭이 콜롬비아에 계속되고, 항상 최고로 경의를 받는 종교의 지위에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대통령은 가톨릭다운 연설을 했습니다. 교황좌에서 압력을 넣어 자신이 속한 사회, 자기 나라를 비 그리스도교화 하는 행위를 시키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면서 이 연설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교황좌가 사회를 비 그리스도교화 하라고 요구하다니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바티칸이 이해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에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7월 14일 랏칭거 추기경(후일 베네틱토 16세)은 자신을 변호하여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으로 말한 것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대주교님, 사회는 가톨릭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종교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천주의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민사회라는 것은 가족이 천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회는 종교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안 돼요. 사회는 종교에 관하여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추기경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에 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1500년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역대 교황들은 국민이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불신앙의 침략이나 무신론의 침략, 이단 종파의 침략, 모든 오류의 침략에 반대하라고 제후들과 왕들과 국가원수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왕들에게 간원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성별(聖別)이 있습니다!왕을 성별한다는 종교 의식입니다. 스페인의 군주 후앙 카를로스는 왕으로 성별되었습니다. 후앙 카를로스는 교회의 손에서 왕관을 받았습니다. 왕을 위해서 봉헌된 모든 기도, 모든 기원문은 바로 왕이 가톨릭교회에 충실하도록, 왕이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왕이 신앙 안에서 그 신자와 국민들을 지키도록 해 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추기경에게 “그렇다면 이 모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라고 물었습니다. 추기경의 대답, “아,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1500년간 특별한 사정이었고, 이제는 복음을 참조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거룩한 복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반대하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비 그리스도교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비 그리스도교화란 프리메이슨적인 것으로, 프리메이슨의 원리입니다. 프리메이슨은 언제나 그것을 겨냥해 왔습니다. 사회의 비 그리스도교화 말입니다. 이 사회의 비 그리스도교화 외에도 양심의 비 그리스도교화가 있습니다. 단언컨대 이것은 종교의 자유입니다. 그릇된 종교의 자유, 자유주의의 종교의 자유입니다. 양심을 비 그리스도교화 한다는 것은 양심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각각의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가(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자신의 종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도가 되고 싶습니까, 불교를 바라는데, 아주 좋습니다. 이슬람교를 바랍니까,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바라는 군요,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 등등.” 각자가 자기 좋을 대로 종교를 가져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럼 참 천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규칙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는 우리가 주께 순종케 할 권리, 우리에게 명할 권리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 주께서는 “믿고 세를 받는 자는 구원되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양심에, 모든 양심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은’이라고도 하지 않았고 ‘믿지 않는 내 제자들은’이라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모든 인간, 누구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유가 아닙니다.  

 

 양심이 자유로워지면, 각각의 양심이 좋아하는 종교를 가지는 자유가 있다면, 국가는 개별의 종교를 가지는 각자에게 ‘사회적 자율 공간’이라 불리는 것을 주어야 하게 됩니다. “당신은 이슬람교도입니까? 당신에게는 사회적 자율 공간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식이죠.  


 이 ‘사회적 자율 공간’은 그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회답해 주면서 사용한 말입니다. 이 ‘자율 공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이슬람교도가 사회에 있어서 그들의 학교, 라디오, 신문, 예배, 자신의 사고를 넓힐 권리 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적 자율 공간’의 유일한 제한은 공공질서입니다. 그러나 공공질서란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결국에는 무제한적임) 완전히 자유입니다.  


 그에 따라서 사회 질서에 있어서 일부다처도 존재할 권리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부다처가 바로 이슬람교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개신교로 말할 것 같으면, 낙태도 피임도 이혼도 사회적 자율 공간의 권리를 가집니다. 그것들도 그들 종교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원리에 의하여, 가톨릭적으로 이해되는 종교의 자유란 무엇이었을까요? 역대 교황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종교의 자유란 시민사회에서 참된 종교를 실천하고 행사할 수 있는 자유, 참된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지요. 시민사회에서 참된 종교를 행사하는 자유란 현재의 이해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가톨릭답게 이해하는 참된 종교의 자유란 모든 종교의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생각, 모든 사상도덕의 자유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자유주의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참으로 큰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공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관은 빼앗겼습니다. 이런 말투는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에 의해 왕관을 빼앗겼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성직자들, 주교들, 로마에 의해 왕관을 빼앗긴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로마가 교황대사, 모든 교황대사에게 권장하여 국가가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니도록, 중립을 유지하도록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그 결과는 상상할 수 있는 이단이란 이단은 있는 대로 퍼졌습니다. 그 이단이 지닌 돈을 가지고, 특히 미국의 이단이 온 세상 어디든지 퍼져나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죠? 여러 곳에서 아주 빈번하게 여호와의 증인, 어드벤티스트(예수재림파), 모르몬교 등등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서든지 그렇습니다. 그로 인해 6천만 명의 라틴아메리카인이 1968년 이후, 그러니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으로부터 이단 종파로 옮겼다고 대중매체가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정말로 교황좌가 가톨릭 국가를 폐지하고, 가톨릭 국가더러 모든 종교를 향해 문을 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단이 퍼졌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이로써 6천만의 남아메리카인이 배교한 것입니다. 이단에 입교하려고 가톨릭을 버린 것이죠. 이는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유럽을 대상으로 놓고 통계를 내면, 수백만 가톨릭 신자들이 이슬람교 혹은 실질적인 무신론으로 이동하고 있거나 혹은 종교를 버리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수백만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사회 및 양심을 비 그리스도교화한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추기경에게 말한 것은 이것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반대합니다. 우리의 전 존재, 우리의 모든 생명, 우리의 모든 이상, 우리에게 있는 모든 수단, 우리의 모든 설교, 우리가 건설하는 모든 신학교, 우리가 세우는 모든 수도원, 그것들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를!   


 우리는 이것을 천주경 속에서 빌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추기경님, 추기경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 통치와 그 나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개인의 양심에 있어서, 가족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공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추기경님, 당신은 이것이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유대교, 이슬람교, 개신교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에큐메니즘 때문이죠. 우리는 우리의 주에 대해서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는 우리 주를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서 어디서든지 십자가를 떼어버렸습니다. 바티칸에서도, 바티칸의 안의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모든 십자고상을 없애고, 아무 의미도 없는 그림으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회화 양식의 그림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그림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림물감을 붓에 찍어 아무렇게나 휘갈긴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그림입니다.  


 상아로 제작된 멋진 십자고상이나 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대형 십자고상, ‘아무개 왕의 기증’, ‘아무아무 나라의 기증’, ‘모 군주의 기증’ 등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십자고상 등은 모조리 제거돼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 이 훌륭한 십자고상을 감상하며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도 훌륭해서 넋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모두 제거돼 버렸습니다. 나는 바티칸에서 물어봤습니다. 나를 맞이한 비서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름다운 십자고상을 없애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르세요? 지금은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들 마음에 들지 않잖아요. 모르세요?”  


 우리 주를 보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십자고상을 모두 없앴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를 밖으로 추방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회 건축을 보세요. 제단에는 이미 십자고상이 없습니다. 십자고상 비슷한 것은 아직 있지만, 어떤 십자고상입니까! 무섭고 보기 흉한 것으로, 제단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한 구석에 두는 것은 어디다 둬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 주께 대한 공경심은 없습니다. 십자고상에 대한 경의는 이제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통치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께는 더 이상 통치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드라마입니다. 여기에 현재의 로마의 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아씨지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쿄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든 종교의 대표가 아씨지로 모인 것도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교황 자신도 십자고상을 몸에 지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십자가를 가슴에 걸고 있지 않았습니다. 교황님은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들의 눈과 거기에 있던 모든 이교도의 눈, 교황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겉옷으로 십자가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교황님에게는 십자가 표시가 이미 없었습니다. 교황님이 십자가를 걸고 있었는지 걸지 않았는지, 나는  모릅니다. 어쨌든 교황님은 흰 겉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십자고상도 교황님의 그리스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쿄토에서는 아린제 추기경(Francis Cardinal Arinze)이 바티칸 대표들의 좌장이었습니다. 아린제 추기경은 나이지리아의 주교로,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향 르 비아프라(le Biafra)를 선교한 것이 우리 성신회 신부들이기 때문이죠. 아린제 추기경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나는 현지에서 그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그는 확실히 훌륭한 사람인 동시에 신앙의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다른 20명과 함께 교황좌의 파견을 받아서 왔습니다. 쿄토의 모든 종교 모임에서 교황좌를 대표하기 위함이었지요. 아린제 추기경에게는 네 번째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먼저 일본의 종교인 신토(神道), 다음으로 불교, 그 다음은 이슬람교, 그 다음이 가톨릭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들 중 네 번째, 경배를 받는 신들 중 네 번째였던 거죠. 우린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몇 세기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린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또 어떤 종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일까요? 유일하신 천주 밖에 계시지 않다면, 다른 신들을 믿는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주라고 믿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천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존재하시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모호하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우리를 심판합니까? 우리를 천국에 받아들여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를 밀어내고 지옥에 떨어뜨릴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계속 존재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천국에서 우리를 받아들여주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기쁨 가운데 영원히 있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밖에는 없습니다. 천주 외에 성부와 성신과 한가지로 일치한 것을 더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성 삼위일체로, 오직 하나이신 천주 외에는 없으니까요. 천주는 둘이 아니라, 오직 한 분만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카르멜회 수녀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바로 최근에 카르멜회 수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주교님, 이들 종교는 모두 같은 천주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카르멜회 원장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습니다. 스캔들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보세요. 그 집회의 스캔들이 수녀에게까지 퍼진 것입니다. 선량한 카르멜회 수녀라서 수녀에게까지 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 수녀는 참 천주와 거짓된 신을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주교님, 그들은 모두 같은 천주께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일까요?유대교인이?이슬람교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일까요? 불교도는 우리 주께 기도하는 것일까요? 아니오!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그들은 정녕 우리 주께 기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께 대립하고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이슬람교와 특히 유대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종교는 유대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슬람은 유대교를 기원으로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부친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슬람교의 종교 의식은 유대교의 의식과 잘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꼴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립하도록 꼴을 갖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도들 및 유대인 모두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주께서 아십니다.

 

 우리 주는 유대 민족에서 나셨습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속죄의 성총이 전해진 것입니다. 다만 회두한  그리고 우리 주를 믿은 유대인에 한합니다. 그들은 회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를 반대하여 십자가형에 부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를 반대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우리 주의 신비체, 즉 가톨릭교회를 십자가형에 부치고 있습니다.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분명합니다. 그럼 로마에서는? 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젠 알 수 없습니다. 이해 불가입니다. 큰 불가사의입니다. 정말로 헤아릴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불가사의, 우리 주의 왕관을 빼앗는 종교의 자유의 선언, 잘못 정의된 멋대로의 자유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똑같이 하면서도 그 똑같은 말에 다른 정의를 갖다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다운 정의를 말하죠. 우선 저들에게는 ‘종교에 관한 속박의 부재’입니다. ‘속박의 부재’, ‘종교에 관한’, 여기에는 진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진리나 오류와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의에서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모릅니다. 불명확합니다. ‘종교에 관한 속박의 부재’, 이는 가톨릭이 정의하는 종교의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그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아, 그럼요, 그럼요, 새로운 것입니다, 혁신적인 것입니다, 그대로예요, 새로운 것이라고 인정해야죠,’라고 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는 반대였습니다. 또 항상 명확한 정의에 찬성했습니다. 애매하고 확실치 않은 정의, 어떤 식으로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정의, 적당하게 말하는 정의에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미사성제에 대해서 바오로 6세의 총칙 제7조에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들은 트리덴티노공회의가 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사를 정의했습니다. 이것도 새로운 정의죠.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그들은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항상 정의해 온 것과는 다른 정의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신학을 배웠던 시절의 신학에서 정의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교회에 대해 ‘영혼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그 지체가 되어 믿어야 하는, 유형의 위계질서가 있는 군주제의 사회’라고 정의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가 정의에 들어갈까요? 그런 것은 이제 없습니다. 끝났지요. 새 교회법을 보세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새로 작성하여 교회법을 제시한 헌장, 지침서를 보세요. 거기에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교회란 ‘친교, 에큐메니칼한 친교’라고 돼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친교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어디서 끝날까요? 친교?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정의입니다. 더 이상 ‘영혼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그 지체가 되어 믿어야 하는, 유형의 위계질서가 있는 군주제의 사회’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의에서는 적어도 명쾌했습니다. 예를 들면 ‘위계질서가 있다’는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조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요. 아주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에큐메니칼한 친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물론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교회 안과 교회 밖의 경계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애매하고 어떤 식으로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교회의 새로운 태도, ‘에큐메니칼한 태도’를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전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의 전교 정신을 붕괴시켰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조금 알려드린 것, 즉 위에서 열거한 내용, 그러니까 새로운 교회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교회의 새로운 태도에 직면하여, 우리 중 몇 명은 공회의에서 저항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여러 번 설명했죠?  이미 공의회 때부터 우리는 교회가 분열하는 것, 교회가 찢어지는 것을 미리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새로운 것, 자유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종교의 자유, 왕이신 우리 주의 강제 퇴위, 사회와 양심의 비 그리스도교화 때문입니다. 우리는 극적인 사태가 생길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 전통적인 교회의 원칙에 반대되는 새로운 원칙이 원인인 것입니다.  


 내가 속해 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중앙준비위원회에서, 베아 추기경(Augustin Cardinal Bea, S.J. )과 오타비아니 추기경(Alfredo Cardinal Ottaviani )이 대립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구체화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의회 직전 중앙준비위원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베아 추기경과 오타비아니 추기경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베아 추기경은 자유주의적인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습니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전통적인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습니다. 물론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옳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성전(聖傳)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아 추기경이 일어서서 오타비아니 추기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추기경, 나는 당신의 종교의 자유의 개념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이 위원회에 70명의 추기경이 참석했고, 20명 정도의 대주교와 주교가 있었습니다. 나는 서부 아프리카 주교평의회 의장으로서 이 위원회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4명의 수도회 장상이 있었습니다. 이상이 이 위원회의 정회원이었고, 그 외에 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은 고문들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신학 고문들은 듣고 필기만 할 뿐입니다. 보통 회의는 교황이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 23세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서로 마주 대했습니다. 2명의 추기경이 기본적인 문제에서 서로 대립한 채 일어서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신앙 문제였습니다. 우리 주께서 사회를 통치하셔야 하는지, 아니면 더 이상 통치하시면 안 되는 것인지, 즉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였습니다.  


 거기서 팔레르모의 루피니 추기경(Ernesto Cardinal Ruffini )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소, 대단히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 2명의 동료 형제가 서로 반대하여 일어서 있는 것을 보니 심히 언짢구려. 우리는 이것을 상부에 알려야 할 것 같구려.” 추기경들보다 높은 권위란 누구일까요? 추호도 망설임 없이 말하건대, 틀림없이 교황입니다. 하지만 교황 요한 23세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루피니 추기경은 이 논의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를 없애고 “이것을 교황께 말씀드리자”고 말하고 그것으로 끝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아 추기경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베아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안 되오, 아니 되오! 나는 투표를 요구하오.” 그리하여 우리는 투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우리는 반수가 특히 오타비아니 추기경에게 찬성표를 던진 것을 알았습니다. 대체로 남아메리카인, 스페인인, 라틴인, 이탈리아인이나 로마 계열 사람들은 모두 오타비아니 추기경에게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문제에서, 그것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날에 70명의 추기경이 떼를 지어 분열하는 것에 직면했습니다. 공의회가 어찌 되어 갈지 알 만한 일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은 사태입니다. 공의회 직전인데,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 두 명의 추기경이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기경단도 그야말로 두 동강이 나고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이 됩니다. 상상이 되나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싸움의 이미지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4년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황님은 혁신파 쪽에  있었습니다. 보수파 쪽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만약 교황님이 “나는 보수파에 찬성한다.”라고 했다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전은 지금껏 계속돼 온 것처럼 계속되었겠지요.  


 그와 반대로 교황님은 혁신파의 견해를 지녔습니다. 베아 추기경 쪽에 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혁신파는 의기양양했습니다. 자유주의파가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극적인 대사건입니다. 《저들이 우리 주를 왕위에서 끌어내렸도다(Ils L'ont découronné)》에서 읽을 수 있겠지만, 혹시 그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면, 역대 교황들이 자유주의에 대해서 말하던 것, 19세기의 모든 교황과 20세기의 처음 반세기 동안의 교황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읽었을 것입니다. 교황들은 지금,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됐던 것을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공의회에서 승리를 손에 넣었는지,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저들은 즉시 주요 지위를 차지하고, 지령을 내리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간단하죠. 정부의 경우와 같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들은 곧바로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경질하고, 사회주의를 실행합니다. 분명합니다. 바티칸에서 한 일도 그것입니다.

 

 자유주의파가 이기자, 단박에 바티칸의 쿠리아에 있던 성직자들이 배제됐고, 그것은 로마 쿠리아(로마의 모든 성성)와 성전(聖傳)을 다소 강하게 지지하고 있는 주교들이 있는 모든 주교구에 대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조리 배제됐습니다. 많은 주교들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 사임했습니다. 동요가 너무 심하고 마음이 괴롭기가 이를 데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임하는 주교들에게는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250명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Coetus Internationalis Patrum’라고 불리는 것으로, ‘국제적 공의회 보수파 교부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싸웠습니다. 이 회에는 회장이 임명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일을 한 것은 회장이 아니었습니다. 회사 등에서는 이런 일이 보통입니다. 사무총장이나 비서가 일을 합니다. 사무총장은 브라질의 지아만치나(Diamantina)의 시가우드(Geraldo de Proenca Sigaud, S.V.D. ) 대주교였습니다. 시가우드 대주교는 독일에서 창립된 천주의 말씀회의 회원으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시가우드 대주교는 지 카스트루 마예르(Antonio de Castro Mayer ) 주교 및 칼리(Luigi Maria Carli ) 대주교와 함께 공의회가 한창일 때 늘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단체에 있는 우리는 4, 5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파와 싸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파국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가 정말로 승리하면,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지요?그런 일이 있으면 교회는 붕괴되고 맙니다. 그것은 프리메이슨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모든 오류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타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류와 싸우는 것을 그만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는 이제 전교의 정신(가톨릭으로 회두케 하려는 정신)이 없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흡사 에이즈처럼, 교회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에큐메니즘이 나올 것입니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나는 설교 중에 교회는 지금 에이즈에 걸려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에이즈에 걸리면 우리를 매일같이 공격하는 갖가지 질병에 대항하는 체내의 모든 저항력, 즉 우리의 조직을 공격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힘이 없어져 버립니다. 혈액이나 몸의 기능은 우리의 몸을 파괴하려고 오는 모든 것에 저항합니다. 즉, 에이즈라는 병은 질병에 대해 몸이 가지고 있는 저항력이 소멸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에이즈에 걸리면 끝내 몸이 분해돼 버립니다. 분해되는 이유는 저항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항력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교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항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오류에 대해서, 악덕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 내의 모든 질병에 대해서 이젠 저항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지금 조금씩 부패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해되고 있습니다. 마치 몸이 썩어서 풍화 돼 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극히 엄청난 사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항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제되었습니다. 일례를 들어보죠. 더블린의 대주교의 사례입니다. 나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친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성신회(Congregatio Sancti Spiritus sub tutela Immaculati Cordis Beatissimae Virginis Mariae)원 중 한 사람이었고, 나는 6년 동안 그 수도회의 총장으로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맥케이드(John Charles McQuaid, C.S.Sp.) 대주교입니다.

 

 맥케이드 대주교는 사임신청서를 내고, 2주 후에 운명을 달리 했습니다. 대주교는 비관해서 죽었습니다. 비탄에 젖어 죽은 것입니다. 맥케이드 대주교는 전심전력으로 로마에 애착하고 있었습니다. 혼신을 다해 교황에 충실히 밀착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황을 알현하려 하자 거부당했습니다. 대주교는 말하자면 로마로부터 추방된 듯이 느꼈습니다. 대주교는 이것을 감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건강은 무너졌습니다. 이런 주교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성전(聖傳)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죠. 마드리드의 모르시죠(Casimiro Morcillo Gonzalez) 대주교의 사례입니다. 모르시죠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무국 소속이었습니다. 사무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공회의에는 5, 6명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무국원은 공의회 이후 모두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단, 마드리드의  대주교만은 별개였습니다. 그도 당연히 추기경이 돼야 했음에도 그렇게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수파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도 비탄에 젖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젠 내키지 않는 사람, 사람들이 거부하고 피해야 할 사람이 된 것을 감지한 것입니다. 다른 주교들은 모두 추기경이 됐는데, 자신만이 추기경이 안 됐거니와 또 추기경이 될 수 없음을 감지한 것입니다.

 

 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추기경이 되고 싶었다는 게 아닙니다. 추기경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조치가 납득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 공의회 사무국의 주교들이 모두 추기경이 되었는데 어째서 마드리드의 대주교가 추기경이 안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스페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설명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마드리드는 추기경이 있는 주교좌가 아니기 때문이죠.  

 

 추기경의 주교좌는 스페인의 수석주교좌인 톨레도(Toledo)이지, 마드리드(Madrid)가 아니니까요.” 확실히 톨레도에는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깐, 내 고향 릴(Lille)에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추기경이 없었는데 주교를 추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주교좌가 아니어도 추기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모르시죠 대주교가 서거하자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대주교는 곧바로 마드리드에서 추기경(Vicente Cardinal Enrique y Tarancon )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거짓말로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추기경이 모르시죠 대주교의 뒤를 이었는지요!새 추기경은 스페인에서 이중의 혼인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민법상의 혼인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민법혼을, 교회 혼인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식 종교혼을 도입하는 것이죠. 가톨릭 신자들은 택할 수 있으면 택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르시죠 대주교의 후계자인 마드리드의 추기경이 스페인의 마드리드의 추기경 및 대주교 회의에서 제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요컨대 전통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진정한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해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부터 표적이 되고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분명합니다. 만약 그때에 내가 아직 주교좌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도 곧장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신회 총장이었기에, 한 수도회의 총장이었기에 그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진퇴는 총장 선거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신회가 스스로 분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1968년에 내가 직접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교황(바오로 6세)이 모든 수도회에 주문하여 개최된 특별 총회에서, 성신회는 나더러 몇 가지 제안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모든 수도회는 공의회를 적용하기 위해서 회의를 열어야 했습니다. 특별 총회에서 도가 지나친 행태를 보고, 수도회 내부가 온통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래서는 성신회 역사에 우리 수도회를 실질적으로 소멸시키는 문서에 서명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오.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소. 내가 떠나는 편이 좋겠네요. 나 대신에 누군가가 서명하겠죠. 난 내 수도회를 무너뜨리는 일에 서명하고 싶지 않소.”  

 

 그래서 나는 총회에 참석할 의무를 면제해 달라고 수도자성성에 부탁했습니다. 사무국원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 편이 좋을 게요. 지금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따라서 대주교님의 수도회 신부님들에게 직접 수도회를 조직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 안 되거든요. 미국에라도 여행을 좀 다녀오세요.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나는 총장이었습니다. 임기는 1974년까지였으며, 1962년부터 1974년까지 12년 임기의 총장으로서 선출된 것이었습니다. 그 특별 총회는 1968년에 열렸습니다. 나는 아직 총장인 상태였고, 총회 전체를 성전 쪽으로 이끌어야만 했습니다. 총장이 모든 것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총장이 위원회를 임명하고, 모든 것에 대해 논의하며, 모든 것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위원회에서 구성원으로서 아무런 자격도 없게 되었고, 말석에 앉아야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나 대신에 3명의 의장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성직자성성에서 총장을 도우려 했을까요? 아닙니다! “미국에라도 여행을 좀 다녀오세요.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라고 할 뿐이었죠. 나는 더 이상 할 게 아무것도 없고, 교황좌는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사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사표를 제출하자,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수리되고 인가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성신회로부터 배제할 수 있게 되자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성전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박해였습니다......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