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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1. 종교의 자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7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1. 종교의 자유

11. Religious Liberty

 


 종교의 자유에 관한 개요는 공의회 문헌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가장 신랄한 토론거리가 되었다. 이는 유력한 자유주의자와 연이어 내려오는 교회의 원수들이 종교의 자유를 주요 의제로 삼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리라. 20년이 지난 지금, 최근의 전통적인 교황들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모든 관념은, 문헌을 선언문이라고 발표하는 것을 보니, 우리 두려움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원칙을 틀리게 하거나 애매하게 다루다 보면 반드시 암묵적으로라도 오류가 드러나는 법이다. 프랑스의 사회당 정부가 가톨릭 교육에 공격을 가하는 것도 2차 바티칸에서 종교의 자유를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인하여 생긴 논리적인 결과임을 이번 단원 후반부에서 보여 주겠다.


  신학의 힘을 조금만 빌면 그 선언문에 어떤 정신이 들어 있는지 이해하긴 쉽다. 말머리에서 언급한.....사실상의 새로운 논의(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삼아서, 안팎으로 선택의 자유를 누릴 목적을 추구하려고 인간의 자유를 기초로 삼은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가 존엄성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니, 존엄성은 자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셈이다. 결국 존엄성이라는 미명 하에 어떤 오류든지 껴안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수레를 말(馬) 앞에 두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은 오류를 고수(固守)하다 보면 존엄성을 유지하기는커녕 도리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존엄성을 잃게 되어 더 이상 그것에 의지할 수 없게 되기에 앞뒤가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다. 자유의 기초는 진리이지만 존엄성은 아니다. “진리가 또 너희를 속량(자유)케 하리라”고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도대체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성은 그 완전성, 즉, 진리의 인식과 선(善)의 획득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은 죄로 유인되는 오류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주께 순종하려는 의향(의지)의 정도에 따라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에와가 첫 죄를 범하고 나서는 “사탄이 나를 꾀었다”고 말했다. 그녀와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실추되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해서 우리는 그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타락을 자유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와 반대로, 진리를 고수하고 천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의 참된 원칙이니, 천주님께 알맞은 흠숭을 드리고 또 당신의 계명에 따라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종교의 자유다.


  내 논지(論旨)에 찬성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오류가 있는 종교에는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종교의 자유는 그런 방식으로 양쪽에 적용될 수 없으며 국가적으로 인정해야 할 권리란 단지 시민이 그리스도교에 의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뿐이다.


  이는 (가톨릭)신덕이 없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보이겠으나, 시대사조(時代思潮)에 물들지 않은 가톨릭인이라면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동시에 타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현실을 직시할 능력을 잃고 말았다. 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관점을 용납해야 되는 정도가 될 때까지 거듭되었다. 터무니없게도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이 진리’가 규범이 되더니, 이제는 무조건 양보하게 만드는 대화가 최고의 추덕(주: 지덕(知德), 의덕(義德), 용덕(勇德), 절덕(節德)이라는 사추덕(四樞德)이 있음, 천주교 요리문답 169번 참조)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사랑에 휘말려 자신의 대화 상대보다도 한발 더 앞서서 양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제는 순교자들이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켰던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희생시키고 만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비종교 국가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세속주의에 익숙해졌고 또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채택하게 되었다. 교리를 채택하기는커녕 딱 한 번 고쳐 설명했을 뿐이다.


  공의회가 있기 전에 중앙준비위원회(Central Preparatory Commission)에서 개요 두 가지를 제출했는데, 하나는 ‘종교의 자유(Leligious Liberty)’라는 제목의 베아 추기경(Cardinal Bea)에 의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이라는 제목의 오타비아니(Ottaviani) 추기경에 의한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교정권에 관련된 문서를 참조하지도 않은 채(무시한 채) 14쪽으로 채워졌다. ‘종교적 관용’은 7쪽의 본문과 비오 6세(Pius Ⅵ)(1790년)로부터 요한 23세(John ⅩⅩⅢ)(1959년)에 이르기까지의 참고문헌 16쪽으로 이루어졌다.


  나의 관점과도 다르며 상당수의 교부들 및 교회의 영원한 진리와도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 베아 추기경의 개요에는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현대에 이르러 많은 나라와 인권옹호를 위한 국제기구가 자유 및 종교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칭송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라고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문제를 제대로 설명했다. “시민의 권리란 시민을 오류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할 권리를 고려해야 하는 동시에 숭배 행위를 다른 형태로 공식 표명하는 것을 규정 및 조절해서, 교회의 판정에 따라 시민의 영원한 구원을 위협하는 그릇된 교리가 성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Rerum Novarum에서 레오 13세는 시민사회의 목표, 즉 현세의 공동선(善)은 현세적 질서도 질서지만 ‘윤리선(倫理善)이 우선’이라고 했다. 인간은 공동선을 위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어떻게 해서 최고선, 즉 천상 행복을 사물의 개요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면의 교회 역할이 있으니, 그것은 그릇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릇된 관념의 전파가 가장 미약한 자, 교육을 가장 적게 받은 자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가 감히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가? 이는 조직화된 사회의 존재 이유, 최우선적인 의무이다. 그로써 국민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도둑, 살인자, 범죄자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공격자로부터 일상생활을 보호받는 것이다.


 이처럼 세속 국가조차도 금지령을 이용해서 윤리 부문에서, 즉, 음란한 호색 잡지를 막으려 하지 않는가?(지난 몇 년간 프랑스에서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부도덕성을 규제하는 강제적인 제도를 따르는 상황이 꽤 타락하였고 또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는 최악의 상황이기는 해도 그나마 깨달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가장 미약한 자, 특히 어린이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의무감을 오래 동안 존속시켰었다.


 시민들은 이 문제에 민감한 상태여서 가족 협회를 통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국가에 요청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악한 경우에는, 라디오가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기에 프로그램 자체를 (그 프로그램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언정)금지할 수 있다. 그 점에 관하여 교회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들 하겠지만 이성과 상식에 들어맞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형태의 구속이라면 거부함과 동시에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영향이라고 일소해 버리는 것이 현대의 조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반짝 유행을 존중한 결과, 스페인을 방문하는 동안에 종교재판소를 유감으로 여긴다고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종교재판소가 월권만을 행사한 것으로 기억하고들 있다.


 교회가 신앙교리성성(Holy Office - Sanctum Officium Inquisitionis, 주: 이전에는 신앙, 도덕, 사상 등을 감시하는 기관으로 검사성성이었음)을 만들어서 영혼을 보호하는 의무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신덕을 왜곡시키면서 모든 이의 영원한 구원을 위협하려던 자들과 맞서 싸운 사실은 까맣게 잊은 것이다. 죽으려고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재판소는 이단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제자가 그 불행한 이들에 대하여 참아내기 힘든 구속을 행사했다 하여 송사(소송을 제기)하려는가? 또 비유하자면 가톨릭 신자라면, 비록 혼란스러워 하는 가톨릭 신자일지라도 당연히 마약 중독자들에게 규제를 가하라고 주장할 것이 당연하듯, 정부가 마약금지조치를 내렸다 해서 불평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녀를 기를 때 가정에서 가장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하리라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다 아는 일이다. 종도행전(사도행전)을 보면 성총으로 감도된 백부장 고르넬리오(Cornelius)는 성세성사를 받았고 ‘또 그와 더불어 그의 모든 식솔들도’ 그렇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클로비스왕(King Clovis)은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성세성사를 받았다.


  공의회가 있기 전에는 가톨릭 종교로부터 참으로 많은 이점(利點)을 얻었던 것으로 미루어, 공의회 이후의 성직자들이 비신자에게 아무런 압박도 또는 영향도 주지 않으려는 새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미혹된 일인지..... 내가 인생의 주요 부분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전교사업의 대부분은 일부다처제, 동성애 그리고 여자가 당하는 모욕 등과 같은 골칫거리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회교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형편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문명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그들은 노예화되거나 소지품처럼 되어 버린다. 그릇된 종교를 제치고 진리의 권리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교회는 그릇된 종교에 대한 공식적인 표명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관한 처방을 맹목적이고 마구잡이로 또 즉흥적으로 내리지 않는 법이다. 교회가 노상 말해 왔듯이 큰 악을 피하기 위하여 당국에서는 그릇된 종교를 참기도 하는 것이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종교적 관용’이라는 용어를 택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가톨릭 국가의 입장은 그런 관용을 베풂으로써 전체에 해로울 수도 있는 문젯거리를 피해야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중립을 선언하는 세속사회에서는 교회의 법규가 지켜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그 교회의 법규를 지켜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만든 법은 폐지되거나 선택될 수 있는 문제다. 둘째로, 기본원칙을 저버리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되는 법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사례를 많이 겪었다. 천주교에 특별한 지위를 적절하게 허용했던 국가와 바티칸 사이의 협약이 개정되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현상이고 최근에는 이탈리아에서도 그러하니, 이제는 교리문답이 학교에서 필수과목이 아니게 되었다. 얼마나 더 빗나갈 것인가?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새 입법자들이, 교황이 국가의 원수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바티칸을 세속화시키고 또 그 안에 회교 사원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건립을 인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인가?


  가톨릭 국가가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는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국가도 있고 성공회 국가도 있고 회교 국가도 있으며 마르크스주의 국가도 있지만 가톨릭 국가만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을 국교로 삼을 권한이 가톨릭인에게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게 됨으로 해서 겨우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할 정도로만 허락되는 것은 아닌가 하니 두려울 정도다!


  비오 9세는 그것을 일컬어 ‘미친 짓’ 그리고 ‘지옥에 떨어지는 자유’라고 했었다. 레오 13세는 국가의 종교무차별주의를 비난했었다. 그분들 시대에는 옳았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에서는 모든 종교 단체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그와 동시에 그 종교에 따른 도덕적 자유도 허락해야 한다. 회교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프로테스탄트에서는(일부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혼배의 불가해제성 및 피임에 관하여 다소 허용하는 입장을 보인다.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지금 유럽에서는 낙태가 불법이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닌, 이른바 천주의 교회라는 곳이 종교의 자유를 지지함으로써 그런 남용을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역자 주: 2015년 5월, 아일랜드에서 동성애 결합을 허용하는 국민투표(62% 찬성)가 통과되었다)


  또 다른 결과가 가톨릭 학교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국가는 가톨릭 학교의 존재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민간교육을 허락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미 보았듯이, 비가톨릭 종파의 학교와 같은 수준에 두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그대로 있도록 놔둔다면 통일교 및 그런 형태의 모든 공동체 심지어는 평판이 나쁜 종파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라고 한다. 그러니 교회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의 자유를 허락한다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똑같이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 것에 토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는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문을 이용하여 다른 것들과 함께 가톨릭 학교를 파괴시켜 버리고 그 뒤를 이은 교육기관이 자연법만을 지키게끔 무진 애를 썼다. 그밖에도 종교를 가리지 않고 아무 어린이에게나 문을 열어주었으니, 어떤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보다도 회교도 어린이가 더 많아졌고 또한 이러한 현상을 자축하기까지 하였다.


  시민 사회에서는 어느 종파든지 공통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입장을 교회가 열심히 받아들임에 따라, 가톨릭교 스스로 다른 종파들과 다를 바 없는 일개 종파에 불과한 것이 될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진리가 오류를 인정치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이를부인(否認)해야 하는데, 교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위험에 처한 셈이다.


  프랑스의 가톨릭 학교에서는 ‘단 하나뿐인 진리, 그것은 자유’와 같이 해로운 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가사가 있는 노래를 아름답다면서 시위할 때 부르는 데모 노래로 채택한 적이 있다. 자유를 절대 선으로 여기면, 그것은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하지도 잡을 수도 없는 허상을 붙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에 적용시키면 그것은 교리의 상대주의 그리고 실질적인 무차별로 이끈다. 혼란스러워하는 가톨릭인들이여, 내가 인용했던 “진리가 또 너희를 속량(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