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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성성에 관한 레네 신부의 특별기고(特別寄稿)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03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성성에 대한 레네 신부의 특별기고

(1988년 7월,The Angelus)


프랑소와 레네 신부님은 성비오10세회 미국 관구장, 호주 관구장, 뉴질랜드 관구장을 역임하셨으며 1992년도에 한국을 최초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 형제 및  자매가 사제와 수녀의 길을 걷고 있고 작년에는 질녀(남동생의 딸) 역시 수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집안은 성녀 소화 데레사와 교분을 나눈 분들입니다. 현재 신부님은 아시아관구의 재무장이며, 매달 한국을 방문하고 계십니다.                                         
                                        

친애하는 친구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에게


 유일하고 거룩한 천주교적 복음의 로마교회의 전통을 계승시키기 위해 1988년 6월 30일에 있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님과 카트로 마이어 주교님 주관으로 네 분의 주교서품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특별호를 발간합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이 사건에 대해 이미 동의하고 있고, 다른 분들은 그렇지 못하실 것입니다. 또 언론에서 대답해줄 수 없는 많은 의문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호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찾고자 하는 대답을 제공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6월 29일에 있었던 16명의 신부 신품성사식에서 있었던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을 기재합니다. 이 강론에서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성직을 위해 신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교육과 정신을 설명합니다. 저 자신은 교회의 자존심을 훼손이라는 이름아래서 두 주교님이 직면하시는 반대를 무색하게 하는 이 강론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2,400명의 주교에 대항하여 언론과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두 분의 주교가 대항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긍지입니다. 아름다운 연설은 주님께 승복하는 것이 자만심과 반대되는 (겸손의) 전통적인 태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 긍지가 있는지 여러분들이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변화 없이 대대로, 진리대로, 완전하게 성신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예수님의 교리에 승복하는 자 입니까? 아니면 (전승된 진리를 왜곡하여서) 현대 세계에 적응시키려는 2,400명의 주교들입니까?  이들이 교리를 이렇게 변형시키거나 그런 변화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2,400명의 자존심 있는 주교들이겠군요! 그러므로 르페브르 대주교님도 그들과 같이 행동했으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바로 주님에 대한 복종이 그에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이 모든 것을 인간 아래로 창조하셨고, 인간을 자신 아래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이 주님에 대한 복종을 거부할 때 무질서가 확립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정의로운 판단에 의해 다른 피조물들도 더 이상 인간 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자의로 주님께 복종을 하면 모든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자연에 대한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늑대 같은 짐승들도 프란치스코 성인께 복종했습니다.


저는 성 어거스틴의 말에 덧붙여 말하건대, 어떤 사람이 주님께 복종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보다 사랑스럽게 복종 할 것입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성직자 반지에 입을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권위에 복종된다는 생각은 전혀 안하면서 그러한 주님을 모시는 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느낍니다. 그가 주님을 우선적으로 섬기려 하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4월 8일 교황은 랏징거 추기경에게 '전통 가족'을 위한 해결책을 찾아줄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4월 12일, 13일, 그리고 14일 3일에 걸쳐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해결책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4월 15일에는 이 토론들의 요약문서에 서명이 되었습니다. 5월 3일 랏징거 추기경은 대주교님에게 주교서품식을 무기한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주었습니다. 5월 4일에는 추기경과 대주교님의 입회하에 마지막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 중 추기경은 비오 10세회가 주교를 요하지 않고 교구 주교들 하에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주교님은 교회가 처해있는 현 위기를 감안할 때 전통에 충실하고 현대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주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랏징거 추기경은 결국은 어렵게 그러한 주교들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권력은 전혀 없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5월 4일 그 유명한 협정에 서명이 되었습니다. (이 협정과 본 사설에 있는 다른 문서들은 안젤루스 인쇄사에서 팜플렛 형식으로 근간에 구입가능 할 것입니다.) 독자 분들은 그 협정이 대주교님의 제안과 비교할 때 로마가 얼마나 충분한 배려 없이 “화해”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최소한만을 들어주었는지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내용은 같은 날 대주교님에게 사과문을 쓰라는 편지가 주어졌을 때 보다 자명해졌습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입니까?  거의 모든 주교들이 현대주의와 그 황폐함을 받아들였는데 전통과 그 결실을 사수 한 것이 잘못 이었을까요? 협정에 서명을 한 후 대주교님은 주교서품식을 언제 거행 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6월 30일?” “너무 이릅니다.” “8월 15일?” “교황청 당직자들이 다 휴가 중 일 것입니다.” “10월에?” “주교에 대한 조사를 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연말 전에?” “보장은 못하겠군요....”


 이 대화를 가진 후 대주교님은 하루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5월 6일) 그는 구체적인 날짜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추기경은 그러한 요청 자체가 협정에 위배된다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5월 20일과 5월 24일 대주교님은 교황에게 전통 유지의 중요성과 교회를 전통을 통해 복구시키기 위하여 오로지 전통에만 충실하고, 전통에서 양성된 몇몇 주교들의 필요함을 보여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대주교님은 5월 24일 랏징거 추기경에게 이 두 개의 편지를 전했고, 추기경이 8월 15일로 날짜를 제안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5월 30일 추기경이 보낸 서신은 이 제안을 확인했으나 필요한 주교의 수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대주교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로마 전통위원회의 구성은 거절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불란서에 있는 여러 전통 단체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베네딕트회, 도미니칸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과 수녀들, 남자들을 위한 성 변용회(聖 變容會), 갈멜회 수녀들, 그리고 코치 신부와 안드레 신부들이 포함되었습니다. 3일 후 6월 2일, 대주교님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이 편지는 이번호에 실었음) 전통에 필요한 것을 거절하였으므로 로마가 전통으로 돌아올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6월 9일날 교황은 무엇이 필요한지 명시하지도 않고 일치만을 부탁하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6월 13일, 대주교님은 주교직을 위해 그가 선정한 5명의 후보자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스위스 시에르에서 피정을 명했습니다. 6월 15일에는 자신의 결정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가런 추기경의 방문이래


 몇 주 전만 해도 이 역사적 사실들의 몇몇 요소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르페브르 대주교님이 왜 로마 교황청과의 협상을 중지했는지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때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987년 11월 21일 가런 추기경의 방문 중에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그에게 해결방안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현재는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엉망이 된 교회가 전통으로 돌아감으로써 만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진 대주교님은 전통의 정신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원하셨으며 우리들(비오 10세회)이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의 핵심적이고 실질적인 사항들을 요구했습니다.


 1. 전통적인 일을 지원, 보호하고 교구 주교들과의 중재를 해줄 로마의 위원회가 설립되는 것. 이 위원회의 임무는 전통의 필요성과 혜택을 교구 주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임.


 2. 개인적인 성격 혹은 “믿음 강화를 위한 집회” 성격으로 교황청의 비오10세회의 인정. 이 지위는 장상과 두 명의 보조원으로 구성된 세 명의 주교를 포함하도록 제안됨.


 3. 관련된 성직자 임명 및 행정 처리는 교구 주교가 아닌 이 주교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


 1988년 1월 5일 가런 추기경은 교황에게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본 한 부를 약속 했지만 1974년 방문 후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우리는 그것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방문 후 두 달이 지나도 로마에서 온 것이 없어서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2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편지를 써서 구체적인 방안을 촉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3월 18일 랏징거 추기경으로부터 공통 위원회의 구성을 위해 몇 명을 보내오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대주교님은 말라레의 버나드 티시에르 신부를 신학자로, 패트리스 라로쉬 신부를 교회법 학자로 보냈습니다. 랏징거 추기경은 오푸스 데이의 오카리스 신부를 신학자로, 살레시안인 베르토네 신부를 교회법 학자로, 그리고 오푸스 데이의 두루 신부를 중재담당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서품식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며” 그리고 그가 “생존을 위한 서품식”을 이행하기로 결정한 이래, 대주교님은 큰 평화를 느끼고 이런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6월 29일과 30일 평화 속에서 서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경찰이 측정하기로는 약 8,000명 보다 많은 군중이 에콘(역자 주: 비오 10세회 신학교가 있는 스위스 도시)에 운집했습니다. 그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저 자신도 미국 각지에서 온 신자들과 심지어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을 때 알았던 신도들은 보고 반가웠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과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님 두 분께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강론 내용은 즉석에서 영어와 독어로 통역되었습니다. 주교서품식은 다 합쳐서 다섯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아름다운 다섯 시간이었습니다! 몇 명의 주교들이 오늘날 자신들의 성직에 충실합니까? 거룩한 신자의 미사 책자에는 “가장 높은 분의 법을 그만큼 지키는 사람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노라.”라고 합니다. 오늘날 주교들 중 누구에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둘을 압니다. 몇이나 더 있을까요?


 서품식행사는 주교 후보자들의 믿음에 대한 검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신성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세속적인 것과 부끄러운 것을 멀리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름다운 문맥으로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거룩한 로마 교회에 대한 모든 이단을 저주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론에게 발라준 것처럼 그들의 머리에 신성한 기름이 발라질 때 임명자는 “주여, 이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어 그가 자신을 영광되게 하지 않고 이 힘을 파괴가 아닌 건설을 위해서 쓰도록 해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주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건설이 아닌 파괴를 위해서 써왔습니까? 한명의 주교가 교회를 세우고 전 세계에 신학교 여섯 개와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단체를 짓고 있는 동안 현대주의 주교들은 이 신성한 주교의 일을 탄압하고 그를 파문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교구의 파괴에 기여하려 했습니까? 그들이 이 권력을 “파괴가 아닌 건설을 위해서”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파문이 무효라는 것을 뜻합니다.


 서품자는 이사야에 나와 있는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가 교만을 증오하고 겸손함과 진리를 사랑하도록 ... 그가 빛을 어두움 속에 넣지 않고, 어두움을 빛 속에 넣지 않고,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르지 말게 하소서.” 다시 묻는데 누가 충실했습니까? 150년 동안 교황과 성인들이 비난 했던 것을 이제는 성직자의 모든 계층에서 격려되고 있습니다.


 미사 끝에 서품자는 주교관을 씌어 주면서 영혼의 빛인 진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주교가 가져야 할 힘을 상징하는 두 개의 등을 들고 시나이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는, “주여, 당신의 부하인 이 주교에게 보호와 구원의 철모를 씌어 주어서 얼굴이 장식되고 두 성서의 뿔로 무장된 그가 진리의 적들에게 무섭게 보이고 당신의 은총으로 강인한 투사가 되도록 해 주소서 ....”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주교들이 진리를 위한 투사가 되기보다는 그것을 왜곡하였습니까? 아니면 아씨시의 범종교적 집회처럼 오류와 진리를 똑같은 수준에 놓으려 했습니까? 혹은 오순절, 금요일에 힌두교들과 “진리를 찾아 나선” 세인트 루이스의 메이 대주교처럼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까?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서품식후에 우리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통은 살아 있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속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화의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식물이나 동물과는 다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주님의 존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현대. 물질주의적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의 생각에는 변함없는 생활이란 상상하기 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움직임이란 생명과는 다릅니다. 내가 발로 죽은 고양이를 움직일 때, 고양이를 움직이게 하지만 생명은 결코 안 죽습니다. 진정한 생명이란 안에서의 움직임입니다. 주님이 “나자로여! 나오거라!”하고 명하셨을 때 아무도 그를 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안에서부터였고 그는 부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에 있어서는 믿는 자 개인들의 인생과 교회전체의 생존을 구분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믿음의 무지(믿기 전)에서 믿음을 알게 되면서 그 믿음을 항상 굳건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즉 영원한 진리입니다.


 믿는 자들은 죄(믿기 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가게 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유혹과 죄의 잔재와 싸워야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영혼을 점차 정화시켜야 합니다. “선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주 예수님께 보다 가까워져야 하고 이것이 곧 영혼의 발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의 생애에는 움직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영적인 움직임입니다. 진리를 더욱 깊이 알고 덕을 강화시켜야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 믿고 시행했던 것을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있어서는 움직임 더욱더 적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의 완전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개개인은 이러한 믿음을 심화시킬 수 있으나, 교회는 애초부터 그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더 구체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자나 이단으로부터 방어할 수는 있으나,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영원한 진리의 중 어느 것도 잃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일곱 개의 성사를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추가할 수도 없고 (오순절 운동가들이 하는 것처럼) 뺄 수도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고해성사나 견진성사를 생략하고 싶어합니다.) 교회는 시초부터 선의 완벽한 예를 우리 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다 주님을 따랐으며, 우리도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합니다. 천당으로 가는 길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하나뿐인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가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교회의 도덕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8). 신성한 완전함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천당에서 성인들은 주님의 품에 변화 없이 영원히 쉬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지옥에서 저주받은 자들은 쉴 사이 없고 끊임없이 계속 더 나빠지는 고통과 고문을 받으며 괴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변화를 위해서 갈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들은 지옥에 가서 영원한 변화를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있어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각 시대에 맞도록 영원한 원칙을 이루기 위한 자체적인 대처 능력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통해서 생겨난 여러 단체들에 특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예수님을 모델로 따르고 동일한 믿음과 도덕의 원칙을 따르지만 특정한 상황에 적응시키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르페브르 대주교님과 다른 정통단체들의 업적을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이들은 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영원한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통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가 아닌 영원한 진리의 묵상과 영원한 덕인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부당한 비판


 우리를 비판하려는 자들은 우리들이 “살아있는” 전통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전통을 따르는 전통을 세속화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믿는다는 것의 뜻 자체가 믿음을 지킨다는 것! 입니다. 변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교황들이 되풀이해서 비난해 왔던 한 진보적인 원칙들을 결코 천주교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혁명을 결합시키려고 하므로 전통을 지키고 지속하는 것은 아주 시급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법의 원칙에 입각해서 진정한 긴급사태의 경우에는 처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처벌도 그 동기가 교회의 전통을 파괴하고 전통의 지속을 막는데 있으므로 부당한 것입니다.


 7월 1일 르페브르 대주교님께 전달된 파문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씨시 종교들의 만신전(萬神殿)에서 온 것입니다.(역자 주; 아씨시에서 거행된 세계 모든 종교(불교, 힌두교...) 지도자들이 한곳에 모여 각자의 신에게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함.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스캔들임) 오히려 고마운 처사이죠! 우리는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모든 신학교, 지부, 그리고 독립체들의 장상들이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에콘에 모여 대주교님이 그런 만신전에서 제외될 것을 부탁했습니다!


 교회법의 정신뿐만 아니라 법 조항을 살펴 볼 때 현재 우리의 경우는 교회법 제 1382조가 적용이 안 됩니다. 간틴 추기경의 문맥은 어떤 처벌을 내리는 판사의 문구가 아니라 (과연 죄가 저질러졌다면) 이 과제에 관한 연구들이 뚜렷이 보여주듯이 허용될 수 없는 법의 적용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해있는 상태를 고려해 볼 때 부당함은 보다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전 세기(世紀) 동안 교회에 대한 단순한 충성을 제외하곤, 가장 큰 범죄인 모독적인 믿음과 부도덕에 관해서도 모두 허락되고 처벌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이중 기준은 비신자들에게도 명백히 보입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누군가 아직도 의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전능하신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몇 개의 우연성이 있습니다. 바로 같은 날 ,(6월 30일) 로마는 “사제 없는 미사”라는 책자를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이 천주교 성직의 계승을 위해 노력하고 계실 때 로마는 사제들의 부재(不在)를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사들은 어떨까요? 개신교 예배와 아주 흡사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우연은 널리 보급되고 있는 USA TODAY 신문지의 7월 1일판에는 대주교님에 대한 교황청의 처벌을 알리는 기사가 헌트하우센 대주교에 관한 “동성애자들을 위한 미사”라는 기사 위에 우연히 있었습니다. 시애틀의 대주교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행위를 재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정당성에 대해서 누군가가 의문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읽어보면 정의가 현 상황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세 번째 우연은 같은 날 교파초월주의(ECUMENISM)와 타협은 로마의 카사롤리 추기경과 그 일행이 모스코(이슬람 성전)에 도착했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이 교파초월주의와 타협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고르바쵸브와 동의하는 것을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비오 11세가 이야기했듯이 공산주의는 본능적으로 악합니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Present 신문지와 Itineraires 잡지의 편집자인 쟝 마디랑은, “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뚜렷하게 타협 없이 옹호하고, ‘좌익과의 타협’을 반대하는 불란서 주교를 찾고 있다. 단지 르페브르 대주교님을 제외 하고는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악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선으로 악을 극복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종도 바오로가 전하는 말입니다 .악이 지배를 하더라도 우리는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유태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하고 빌라도와 타협할 때, 우리 주님은 적들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그들을 용서하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사순절 금요일에 종도(사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부활절에 믿음으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교황과 주교,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을 따라서는 안 되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몇 명  안 되는 충직한 자들처럼 예수님과 갈바리아 산상의 희생과, 희생제사인 미사에 충실해야합니다.


 지금은 용기를 발휘해야 될 때입니다. 용기 있는 믿음과 용기 있는 자선이 요구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받지 말고 그 반대로 축복으로 받으라.“(베드로 3:9)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증오하는 자에게 잘해 주거라. 너희를 탄압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전통이란 과연 수백 년에 걸친 믿음의 축적의 전달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거룩함과 성인들의 표본입니다. 복된 동정 성모 마리아가 우리 모두들에게 전통의 모든 것인 진리와 우리 주 예수님의 거룩함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