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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는 누구인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1-04



르페브르 대주교는 누구인가?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강론 번역을 연대순으로 1970년대의 강론까지 마치고 나서 1980년부터 시작되는 강론을 게재하기 전에 <혼란스러운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의 영문 책자를 펴낸 마이클 크라우디(Michael Crowdy) 신부님이 하신 대주교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대주교님의 의도는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서문’ 부분을 이곳에 게재합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름이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분에 대해서 좀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프랑스의 모범적인 성(聖) 가정에서 태어나 생활하면서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성소(聖召)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신회(聖神會)에 입회하고 나서 정규 수련과정을 마친 후에는 전교 활동 그리고 신학교 교수직에 종사하였습니다. 매우 탁월하다 할 정도로 주교다운 자질(資質)을 인정받아서 다카르의 대주교로 영전된 이후에는 마침내 불어권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하는 로마 교황대사인 교황 대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교(傳敎) 단체 중에서도 규모가 최대인,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총장상직에 6년 동안 재직하였습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르페브르 대주교는 전교 활동을 하는 주교라면 모름지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기에 때문에 그는 바람직한 주교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분의 특성을 보면 가식(假飾)이 없고 그리스도인다운 지도자다웠으며, 주교다운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주교다운 인품이라는 것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려는 추진력과 신뢰성, 솔직성, 평온함,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기에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기가 편했음을 말합니다. 평범한 시대적 상황이라면, 그런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마지막 은퇴의 시기가 올 때까지 ‘기성세대’라는 위치를 향하여 살아가면서 날마다 전교 사업을 계속하고 또 그런 정신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면 바로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고 난 뒤에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 내의 혁신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전 세계인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모든 가톨릭계에 걸쳐 불명예(또는 찬탄)의 표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에서야 그러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지만 살펴야 할 것은 <혼란스러운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 책의 주제로서, 전반부에서는 가톨릭교회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실제적으로 연구하는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그렇게 되었는가에 해당되는 원인을 살펴봅니다. 저자인 대주교의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그 어려움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는 독자는 이 책에서 그 답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주교의 폭넓은 경험으로 생각해 보면, 그분의 분석은 신뢰할 만합니다. 저서 또한 그에 대해서 말로만 듣던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내용 역시 탁월하고 옳습니다. ‘항명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도 마찬가지로 항명자라는 구설수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지 않은가!) 대주교는 대단히 조용하고 정중한 사람입니다. 어 그래요? 하고 놀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대주교를 알릴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발 또는 그가 채택한 입장으로 인해 당황한 자들이 그를 완고한 역행의 본보기로 삼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평온한 침묵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책을 펴내는 것은 비록 늦기는 했지만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봅니다.


 자기 홀로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분명한 사실을 외친 안데르센이 지은 동화 속의 어린 소년처럼, 대주교는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킵니다. 거의 모두가 2차 바티칸에서 비롯된 교회의 변혁을 만족해하는 합창을 부르지만, 대주교는 그 변혁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을 꼭꼭 집어내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또한 신자들이 어리둥절 하는 가운데 가톨릭다운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특히 차세대의 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통계로써 아는 사실, 즉 성세성사, 견진성사와 신품성사, 수도자 및 수녀의 수, 그리고 학교 수의 격감들을 지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맨 먼저 변혁에서 항상 첫 번째 손실인 현재 상황의 핵심과 교회의 기존 가르침의 핵심에 대해서도 묻는 있습니다.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한 견해에 오염된다면 이는 가톨릭인의 신앙에는 재앙이요, 다른 이들에게는 불의한 것이라 하는데, 그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이란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선익을 가정해 놓고 그것을 추구함으로 해서 그런 잘못된 오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대주교는 간파합니다. 그의 서한을 보면 옛 교리를 진솔하게 수용함으로 해서, 신자들이 즐겨하는 또 다른 특징이 되는 명쾌함이 매우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기 의향을 잘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첫 인상이 가톨릭교회가 붕괴된다는 경고를 듣는 것처럼 느낄 것이고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결국 본당이 무너질 정도로 변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조금 과장된 발언이 있다 하더라도 대주교는 너무나도 온전해 보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주의, 종교의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와 같은 관념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대주교는 어떻게 처리하여 이해시킬까요?

  이 부분에서는 용어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주교는 프랑스의 환경에 역행하는 서한을 쓰고 있는데, 대영제국이랄까, 어느 면에서는 영국보다 프랑스에서의 관념이 대체로 더 명확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예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그 무엇보다도 형제애 및 정의라는 사회주의 관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는 강경하게 반종교적이거나 거의 종교를 대신하는 것으로, 공산주의는 그런 사회주의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대주교가 설명하는 사회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또 자유주의를 배격할 때에는 자유당이라든지 또는 관대함이라는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주님이나 교회의 주장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더 높이는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뉴먼(Newman)에 의하면 맞서 싸워야 할 일생일대의 과업이라고 했던 그런 종교적 자유주의를 말합니다. 이는 대주교가 교정해야 한다고 한 그 자유주의를 선동하는 문구가 제2차 바티칸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문]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에도 역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현대주의란 단지 나아기는 촉진이 아니라 성 비오 10세께서 견책하신 적 있는 특별한 관념 체계로서, 계시를 현대의 정신구조에 맞게 개조시켜야 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성서의) 계시된 진리에 들어있는 믿음의 토대 자체를 파괴한 입장을 말합니다. 또한 한편으로 저자는 ‘혁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언급하여 틈틈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상기시키고, 특히 제 15장에서 혁명은 어느 면에서 르네상스의 모습을 하고 프리메이슨에 의해 키워져서 1789년에 격렬하게 폭발했으며, 나아가서는 마르크스-공산주의가 나타나고 교회에 맞서 싸우는 대 폭동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천주님과 주님의 계시를 거부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초래됐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붕괴의 증거를 보고 어느 가톨릭인은 자포자기가 되는 심정일지도 모르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는 주님이 뽑으신 지상 대리자(교황)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증해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의 뛰어난 품성일 수도 있는 즉, 자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대주교가 신앙의 수호자로 존경해온 이(주교)들, 그리고 간단하게 몇 가지만 타협하면 그 보답으로 두 손을 들고 대주교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주교들의 지독한 압력에 맞서 고립된 채, 강용의 필요한 용기를 그가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흔들리지 않는 신앙 때문입니다.


 입장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니, 대주교가 교회에 끼친 도움이 각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의 기도, 마침내 참된 갱신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절대적 확실한 전통을 항구하게 지켜나가도록 거룩한 사제와 수녀를 늘려 달라는 기도의 뒷받침을 기대할 자격이 대주교에게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