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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알바노(Albano)의 어느 신학생의 베네치아 방문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1-17



1980년 월요일 부활절 때에 르페브르(Lefebvre) 대주교께서는 산 시메오 피콜로(San Simoe Piccolo) 교회에서 미사를 드렸다. 로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알바노(Albano) 신학교에서 20명의 신학생들과 많은 사제들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베네치아로 이동했다. 나는 성 주간 동안 신학교에 머무른 적이 있기 때문에 부활절 저녁에 세퍼(Seper) 추기경을 만나는 것보다 그 미사에 더 흥미가 갔다. 세퍼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를 통해서 내 책을 전해 받고 나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신학교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해 로마 역으로 갔다. 그리고 나는 그 미사의 결과에 가장 흥미 있었는데 이는 베네치아의 총대주교인 체(Cé) 추기경이 자신의 관구에서 미사를 드리겠다고 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결정에 불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 각하가 다른 주교의 관구에 개입한 것에 대한 해명은 엘칭거(Elchinger) 각하가 대주교께서 스트라브르그(Strasbourg)에 왔을 때 한 항의에 대한 나의 논평에 포함되어 있다. 베네치아 미사와 관련된 네 개의 목록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한 신학생이 제시한 이야기, 대주교의 설교, 타임즈에 나온 기사 그리고 Universe gutter 저널의 로날드 싱글톤(Ronald Singleton)의 독특한 예시이다. 이 리포트와 한스 큉(Hans Kung)의 유죄 판결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알바노(Albano)의 어느 신학생의  베네치아 방문기

 

로마 근처 성비오10세회의 집(Society of St. Pius X’s house)에서 2학년을 마친 신학생들은 부활절 주간 동안 이탈리아 후원자의 자비로 베네치아에서 5일 동안의 휴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디디에르 보네테레(Didier Bonneterre) 신부님의 감독 아래, 우리는 신학교 성당에서 저녁 기도를 한 후에 알바노(Albano)를 떠났습니다. 수녀 분들께서 저녁식사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는 파두아(Padua)까지 기차로 가는 긴 여정 동안 매우 감사해 했습니다.

 

파두아는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미 종교적,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상업적으로 중요했던 중심지로 번영하고 있는 현대적인 대도시입니다. 오늘날에는 성 안토니 유해를 거처하기 위해  지어진 거대한 중세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가장 유명합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그 회당에 매우 가까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6시부터 이 큰 교회 곳곳에서 아침 명상을 하고 성무일도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중세 도시의 중심지인 파두아에 있는 다른 교회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는데, 교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업 개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우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산타 구이스티나((Santa Guistina)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 있는 8개의 돔이 얹어진 장엄한 16세기 교회를 예로 들면, 우리는 복음사가의 성 루까(St. Luke the Evangelist)와 종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의 작가의 무덤에서 기도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도교계에게 있어서 오늘날 교회에 대한 고통스런 현실을 알게 해주는 장소로서 정말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성 루까와 다른 종도들 그리고 전교자가 처음으로 천주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 믿음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위협받고 있지만 말입니다. 녹색 셔츠를 입은, 이 성지의 수호자 중 한명인, 베네딕트 수도사가 그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종도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진리를 퍼뜨리고 신앙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 양떼들을 돌보는 목자들을 기억해야합니다.

 

파두아Padua)에서 출발한 지 30분 만에 1933년에 지어진 3마일 길이의 선로 다리를 건너며 베네치아(Venice)에 도착했습니다. 선로 역 밖으로 나오면서 본 베네치아(Venice)의 광경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대운하Grand Canal)의 끝없는 곤돌라와 소형 증기선, 그리고 물속에서 드러나는 층계 위로 산 시모네 피콜로 성당(San Simone Piccolo)이 있었습니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 건물은 매우 대중화되고, 또한 지난 부활절 후 월요일에는 모순적인 행사 행사가 되었습니다: 성비오10세회 총장이신 르페브르(Lefebvre) 대주교님께서는 장엄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습니다. - 1975년에 바티칸이 성비오10세회와 성 비오 5세의 미사를 억압하려고 한 이후로 이탈리아에서의 첫 공적인 미사였습니다. 우리가 그날 아침 베네치아에 일찍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성당 주위에 모여 있었고, 텔레비전 카메라는 대운하(Grand Canal)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산 시모네((San Simone) 빼고는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한 지역 지지자 단체는 입구에서 신문 기자들과 참례자들의 호기심을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당연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묵주를 읊고 있거나, 성당 한 쪽에서 본테르(Bonneterre) 신부님께서 제헌하시고 있는 평미사를 따라하고 있는 수백 명의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로 매우 빨리 찼습니다.

 

성물대(聖物臺)에서 마지막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교회 밖에서 일어난 매우 큰 소동은 르페브르(Lefebvre) 대주교님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하룻밤 전에 긴 여정을 다녀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지키며 피로함을 보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과해 성물대로 가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주셨습니다. 소문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충성과 함께 충실한 신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대주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고, 이 충직한 목자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향한 신자 자신들의 충성심과 헌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짐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사제들과 신학생들이 미사를 위해 미사복을 입고 있는 곳인 성물대(聖物臺)에 도착하셨습니다. 곧 이어 행렬이 이어졌고 십자가에 절한 후, 성당 안에 있는 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행렬의 십자가가 향이 피워 오르는 가운데 나타나자, 신자들의 열정이 다시 터져 나왔고 이번에는 Sacerdas et Pantifex을 부르면서 다시 환호하였습니다. 부활절 장식으로 빛나고 있는 고귀한 제대 위에 도착하자, 양쪽에 있던 신학생들이 예배를 위한 한 쪽 무릎을 구부렸고 성가대로 행했습니다. 초입경이 장엄하게 시작되었고, 대주교님께서 제대 아래에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부활절 전례미사의 전통 성가와 의식이 이어졌습니다: Hæc est dies - “오늘은 주께서 승리하신 날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부제(副祭)가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찬미가를 다 불렀을 때, 그는 대주교 앞에서 분향했고 그러자 대주교는 신자들에게 강론했습니다. 그 강론에서 대주교께서는 성비오10세회를 제소한 것을 비판할 때 성비오10세회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에 있어서 어떠한 핑계거리도 없는 것이라고 다시 단언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어떠한 타협은 없다고 대주교님은 다시 재확인했으며, 성전(聖傳, 전통)을 통하여 교회가 계속 지켜온 그 믿음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 천명하였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또한 로마와 관련하여 (일부) 전통주의자들(교황공석주의자)의 태도들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여 공식적인 교회의 적법한 권위를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로마 교회를 절대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에콘(Econe)과 200명 넘는 신학생들과 함께 가톨릭교회를 위해,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점을 증명하기 위해, 르페브르(Lefebvre) 대주교님께서는 베네치아의 대 교구장 당시에 베드로 좌에 임명되기 전의 성 비오 10세 교황의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당시 친구들은 진보주의자나 혁신가가 아니고 오히려 전통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강론이 끝난 후에, 신자들은 종도신경(Credo)에 나오는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미사는 이어졌고 곧 미사제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회에는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대주교님께서는 제헌경의 말씀을 속삭이기 위해 멈춰서 성반을 향해 몸을 구부렸습니다. 그러자 제대 위에 계신 우리 주님의 현존을 바깥세상을 향하여 기쁘게 선언하면서 교회 종은 의기양양한 울림으로 인하여 갑자기 거룩한 침묵은 깨졌습니다.

 

미사가 끝 나가자, 신자들은 주교님의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대주교님께서 신자들을 향해 십자 성호를 세 번 그리셨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와 신자들이 마지막 찬미가인 ‘크리스도 빈치, 그리스도 레냐, 크리스도 임페라’ (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를 불렀습니다. 성직자는 교회 밖으로 나가는 행렬을 시작하였습니다.

 

장백의로 갈아입고 감사의 기도를 한 후에,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었습니다. 몬시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운하(Grand Canal)쪽으로 향한 계단을 내려가는 위험한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매우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대주교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와 마이크 속에서 몬시뇰께서는 소형 증기선을 타면서 고요한 표정을 지었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의 후원자들은 도시 밖의 식당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이렇게 길고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에 모든 사람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더할 나위없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이후에 우리는 성비오 10세(St. Pius X)의 탄생지인 리세(Riese)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과 대다수의 신학생은 이 교회를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하나의 순례단체이지만 이 여행은 성 비오 10세 교황(St. Pius X)의 손자, 질녀와 함께하면서 매우 특별해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노(old) 부인은 성 비오 10세 교황(St. Pius X)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사르토(Sarto) 가족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평범하고 전형적인 그 지역의 주거용 집었지만 집 뒤에 훌륭하고 거룩한 남자를 위하여 박물관을 세운 사르토(Sarto) 가족의 관심 덕분에 모든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세(Riese) 시내에는 현재 Riese/San Pio Decimo라고 알려진 로마 교황의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교황의 이름은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주세페 사르토 가(街), 비오 10세 대로(大路), 성 비오10세 약국 등등. 그의 계승자들이 이러한 완고한 전통주의자와 반 진보적 교황(성비오10세)의 가르침을 잊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 이렇게 우리의 거룩한 천국의 후원자인 르페브르 대주교를 향한 헌신을 보는 것이 새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