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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의 명상을 조심하시오 - 가톨릭 묵상과의 차이(2015-10-2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29



불교의 명상을 조심하시오-가톨릭 묵상과의 차이(2015-10-24)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어느 날, “예수 어떤 곳에서 기구하시기를 마치신 후에 그 제자 하나 예수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기구(祈求)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루까11:1)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천주경을 가르쳤습니다. 불교인들이 또한 '명상한다는'것을 여러분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최근에 호주에 있는 한 신자가 호주 불교재단에서 나온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면서 제게 조언을 요청했습니다. 저들의 명상(冥想)에 관한 자료를 연구해 본 후 내려진 결론은 참된 가톨릭 묵상(기도)와 저들의 명상 사이의 큰 차이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주경은 아버지께 드리는 아이의 기도입니다. 기도 시작부터 한 인간의 인격과 천주성의 인격, 즉 아버지 중에 가장 뛰어나신 인성을 지닌 천주님, 말하자면 그분은 자기 아이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는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천주님을 최고의 지성, 궁극적인 영적인 현실, 그래서 인성을 소유하신 분으로 인식합니다. 천주님은 창조에 스며드는 맹목적인 에너지도, 피조물로부터 거의 구별되지 않는 희미한 현실도 아닙니다. 천주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그리고 그분 홀로 “스스로 존재한다”(ens a se)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그 분 스스로에 의해 존재하는 스스로 충족한 존재, (존재하기 위해 누구로부터) 존재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분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최고의 존재자 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저들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존재, 저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모든 것은 천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즉 “타인에 의해(ens ab alio)”, 즉, 의존적인 존재로서, 다른 것으로부터 받아서 자기의 존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도들은 인격적인 천주(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들은 영혼의 영성도 믿지 않습니다. 저들의 철학은 감각과 지성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는 저들이 채식주의자인 이유이니, 왜냐하면 저들이 인간과 야만 동물 사이에 전혀 차이를 두지 않고 같은 범주에서 “모두 지각이 있는 존재”로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사람에 관하여 천주(신)과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심지어 천주님이 인격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현실 뒤에는 희미한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희미한 에너지와 연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볼 때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참 천주는 피조물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의 근원이요, 창조주이시기에 그분은 이전에 선(善)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선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을 것이며, 그리고 그분이 주신 선을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기에 우리는 최고의 수준에서 모든 피조물의 선을 그분 안에서 찾습니다. 피조물은 작으며 최고의 선을 모방함에 있어서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수준에서 지식과 자유의지(능력)를 소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 내용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성영의 저자는 무지(無知)한 자들을 비난합니다: “백성 가운데 우매한 자들이여, 너희는 알아들을 찌어다. 또 미련한 자들이여, 언제나 슬기로워질꼬? 귀를 심어주신 분께서 아니 보시겠는가?“(성영93:8-9) 천주님은 우리 말을 듣는데 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기 전에 조차 그것을 아십니다.

 불교도들은 우리를 철저히 아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천주님에 관한 지식이 없습니다. 저들은 천주섭리를 믿지 않으며, 단지 맹목적인 운명을 믿습니다. 기도로서 하늘에 계신 사랑하는 성부로부터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저들은 믿지 않습니다. 저들은 기도가 단지 명상의 열매를 설명하는 유물론자처럼, (호주의 불교도 축복 센타에 의하면) 마치 우리 몸에서 어떤 호르몬과 다른 화학물질을 자극하는데 불과하고 합니다.

 단지 말 몇 마디 하더라도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천주께 기도 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천주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 마음을 천주께 끌어올려”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적용시키면서, 우리 지성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이용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치시길, 기도란 본질적으로 천주께 기도 그 자체를 적용시키는 지성의 행위라고 합니다. 모든 대화가 지성의 행위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기도는 천주님과의 대화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실 안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기도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인간의 활동인 것입니다. 가장 높은 목표(천주)에 적용된 가장 높은 능력(지성)의 활동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하여 천주님의 아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화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반면에 불교도들은 명상은 “무념무상(無念無想)”에서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예, 이것은 실제로 호주 불교 센터의 “명상과정 25번”에 분명하게 쓰여진 내용입니다. 그것은 기도에 관한 토마스 성인의 가르침인 “지성의 활동”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것 입니다.…


 불교인들은 가능한 한 정적(靜寂)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무념무상(無念無想)“ 상태로 영혼의 힘을 닫는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저들이 분명하게 말하듯이 감각에 모든 집중을 하면서 끝납니다: “그대는 들어오고 나가는 생각, 느낌 그리고 감정을 각성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기에,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느낌과 감정”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덕행이란 “올바른 이성”(분별)에 의하여 “느낌과 감정”을 통제하는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이성의 활동을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조절(능력)을 제거합니다.

 가톨릭 묵상(默想)의 주요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왕14:6) 실제로 대화는 두 길입니다. 우리가 천주님께 우리 생각을 표현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천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요? 그분의 “느낌과 감정”을 신뢰할 수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기만(欺瞞)을 피하기 위해서 천주께서는 객관적으로 계시(啓示)속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성인이 히브리인들에게 전합니다: “천주 옛적에는 많은 방법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선조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성자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으니“(헤브레야1:1-2)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분은 천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천주님의 말씀의 진리의 깊이를 흔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이 모든 사정(事情)을 자기 심중(心中)에 품어 궁구(窮究)하시고“(루까2:19)말씀하신 것처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은 가톨릭 묵상의 진정한 모범입니다. 이 가톨릭 묵상은 (불교의) “무념무상”이라는 명상과는 전혀 다르고, 그와는 반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써 더 많이 생각하고 채우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불교의 명상은 진리에 대해 이러한 의식적인 사고(思考)의 정신적 조절을 집중적으로 거부합니다. 정돈된 사고를 거부하며 “사고의 논리정연 - 드러난 생각이나 이상 - 이 명상과 함께 사유(思惟)없이 스쳐 지나가게 합니다. “불교의 명상 목적은 현실에 대한 비 개념적 경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이것이 진리인 체하니, 이러한 진리는 분명히 커다란 속임수입니다. 실제로 진리에 대한 정의는 “현실에 와 닿는 지성의 순응”입니다. 만일 지성의 활동을 파괴하고 “비 개념적 경험”을 찾는다면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으며, 현실적인 지성의 순응이 아닙니다.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유과정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진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이는 지극히 비 과학적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즉 그가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느 과학자도 어떠한 결과도, 현실에 와 닿는 신뢰할 만한 지식을 도출해낼 수 없습니다.


 과학의 위대한 발전은 지성활동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존중에 근거한 서구 문명의 열매였지, 불교도들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아니라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 저들이 무엇에 도달하고자 하나요? 저들은 “깨달음 만으로 놔두라. 자, 경험이란 존재의 무한한 상태, 생각을 초월하고, 내용을 비우고, 우주적으로, 경계 없이.. ”라고 합니다.


 이 “경험”은 현대주의자들의 신, “내재적” 열매, 즉 “느낌과 감정”등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은 명료하고 논리 정연한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악귀(惡鬼-에페소6;12)“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악귀는 교묘한 기만자(欺瞞者)이며, 기만을 증가 시키기 위해 즐거운 느낌을 잘 주는 자입니다. 진실로 “이교 백성들의 모든 신들은 악마들“(성영95:5)입니다.

 가톨릭 묵상에서 저급한 것을 제거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고, 감각의 활동, 특히 상상의 활동, 지성, 그리고 천주님에 관한 지성에 초점을 둔 것, 그분의 특성, 그리고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분은 “영원한 빛의 밝음이자 천주님의 존엄을 비추어 주는 깨끗한 거울(지혜서 7;26)과 같은 보다 높은 기능의 활동을 키우기 위해 묵상합니다.


 이 묵상의 열매를 바오로 성인께서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가리우지 않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은 다 이 우러러봄으로써 항상 더욱 영화롭게 주와 동일한 모상으로 화(化)할 것이니, 이는 주의 성신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라.“(코린토 후 3:18) 천주성자의 모습 안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이는 바오로 성인이 로마인들에게 가르치듯이 예정된 결실입니다.”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당신 아들의 모상과 동형(同形)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니“(로마8:29) 에페소인들에게도 이르기를,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 대전(大殿)에 거룩하고 비난할 곳 없는 자로 있게 하기를 위하사 우리를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 간택하셨으며” (에페소1:4)이것이 가톨릭 묵상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천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천주님과의 놀라운 친교행위입니다. 그 안에서 온전한 그리스도 생활이 존재하고 천주성(天主性)을 지니신 친구와의 조심스레 배려하는 곳에서 그분이 (피조물과 혼재되지 않은)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하려 하십니다.


 천주님은 순수 영입니다. 어느 한 장소에 계시지 아니하고 몸을 취하는 형태로 한곳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은 작용되는 곳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천주께서는 모든 곳에서 작용하시기에 존재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유지하면서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저들의 영혼 안에서 천주님의 아주 특별한 현존, 친교의 현존이 있으니, 왜냐하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저들의 영혼 안에서 성화(聖化)시키는 은총과 사랑을 부어주십니다.”우리에게 베퍼 주신 성신(聖神)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입(注入)되었노라.“(로마5:5) 기도와 묵상은 마음을 열고 영혼을 열어  성신에서 뿜어 나오는 사랑의 풍성한 은총을 받게 합니다.

 기도(祈禱)는 가톨릭인들의 끊임없는 활동(活動)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기구(祈求)하고 그치지 말라.”(루까18:1) 그리고 “이러므로 너희는 깨어 있어 항상 기도하라.”(루까21:36)  또한 바오로 성인도 말씀하시길, “어느 때를 막론하고 너희는 온갖 간구(懇求)함과 절원(切願)함으로 성신 안에 항상 간구할 지어다. 이 기구를 위하여 너희는 깨어 있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항구(恒久)히 기구할지어다.“(에페소6:18)


 존 보스코 성인은 “그의 마음은 항상 천주께로 끌어올려졌다”라고 전해지며,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는 3분를 넘기지 아니하고 항상 분명하게 천주님을 묵상(默想)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진실이니, 사랑하는 사람이 현재 여기 우리와 함께 있을 적에 주님 친히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실제로 천주님은 항상 우리를 살펴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특별히 더 기도를 바치기로 할 적에, 특별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집중적인 기도와 묵상은 종일 지속될 것이며 천주님의 계명을 충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짐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기도 가운데 성 교회는 특히 묵주기도를 권면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필요하니 이슬람의 발흥은 레판토 해전처럼 오직 (묵주기도를 통한) 동정 마리아에 의해 정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의 최고의 기도는 미사의 지극히 거룩한 희생입니다. 미사 안에서 이 지상에서 가장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께 제헌되는 모든 미덕,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 흠숭 지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함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미사가 가장 위대한 기도, 천주께 자신을 통째로 제헌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응함으로써 기도를 변환 시키는 것이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같은 모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하고 나도 저에게 거하며 “(요한1서6;57) “천주는 사랑이시니라.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니라. “(요한1서4:16)
 
 불교에 속고 있는 이들에게 천주님을 전하여 저들이 천주성자께 인도되도록, 그리하여 참된 신앙 안에서, 가톨릭신앙 안에서 저들이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진정한 묵상과 명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준비하고 참여함으로써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천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성부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를 너희는 볼지니, 곧 우리는 천주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고 또한 사실로 그렇게 되었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세속은 우리를 모르느니, 대저 그는 천주를 모르는 연고니라. 친애하는 자들아, 우리는 이제 천주의 자식이로다. 우리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아직 명백하지 않으니라. 그러나 이것이 명백하여질 때에는 우리는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아노니, 대저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 것 임이니라. 무릇 이러한 희망을 저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는 저 거룩하심과 같이 자기를 또한 거룩하게 하느니라.“(요한1서3:1-3)

10월 이달에, 특히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의 모범이 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여,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 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