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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옥에 있는 가엾은 영혼들(2015-11-1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6







연옥에 있는 가엾은 영혼들(2015-11-15) 바로가기 미사사진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11월에 성교회는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후(死後) 영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고 이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끌어내어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첫 번째 진리는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진리입니다.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를 말합니다. 육체는 부패(腐敗)하지만, 영혼은 파괴되지 않고 육체와 분리됩니다. 이 진리는 우리 영혼의 지적(知的)차원으로부터, 이성의 자연적인 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성을 아는 동물”의 본질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명은 성장, 영양, 복제와 같은 식물과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몇 가지 힘이 있는데 이것들을 “생장력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생명은 식물이 갖는 공통성 외에도 이러한 식물적 생장력 힘보다 우위에 있는 힘이 있으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건들려 보며, 내적 감각인 기억, 상상력이라든지, 욕망, 즐거움,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들은 동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는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꼬리를 흔들고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다리 사이로 꼬리를 내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동물들 기능보다 더 우위에 인간의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이성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인간은 수학을 연구할 수 있고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성영44:8)합니다. 어느 동물에서도 이 같은 기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어떤 동물이 인간보다 시력이 뛰어나고, 어떤 동물은 청각이나 후각이 뛰어나고 (개들은 후각으로 여러분을 인식합니다) 더 잘 달리고 더 빠르게 수영하고, 심지어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래도 인간의 지성은 어느 동물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 수 있고,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전자 현미경을 만들 수 있으며, 어느 동물도 감지 못하는 파장을 감지해내는 레이더를 만들 수 있고, 영양(羚羊)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기차를 만들 수 있고, 물고기 보다 더 깊이 수영할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들 수 있으며, 어느 새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다른 모든 동물들을 능가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감각이 신체적인 기관의 작용인 반면에, 지성은 추상화하고 판단하면서 이성화하는 비물질적인 행동을 가집니다. 그 첫 번째가 사람은 물질로부터 구체적으로 추상화시킵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생각으로써 우리의 지성이 판단하며 결론에 이르도록 논리적인 증거 안에서 이와 같은 판단을 정렬시킵니다. 우리의 민감한 지식은 특별하니, 우리의 지적인 지식은 일반적이고, 우리의 사상도 일반적입니다. 모든 물질들은 독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물질이 아니며 이러한 생각들은 비물질적이고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영혼불멸 사실을 근거로 세상 종말 때에 육신의 부활을 증거하며 저들 사두개인(유대인으로서 내세를 부정하는 물질주의자)를 반대하며 논쟁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시길: “죽은 자들이 부활함을 의논컨대, 모이세의 형극 편에서도 설명하였으니, 일렀으되, 상주는 아브람의 천주시요, 이사악의 천주시요, 야곱의 천주시라 하였으니, 그런즉 천주는 죽은 자들의 천주가 아니요, 오직 산 자들의 천주시니, 대저 모든 이가 다 천주 대전에 삶이니라.“(루까20:37-38)


그 결론은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의 육신은 저들이 만든 무덤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아직도 존재하고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아니한 것은 저들의 영혼입니다. 이는 영혼의 불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음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자신들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자아”는 사후에도 계속 존재합니다. 영혼의 불멸성이야 말로 신앙의 교리입니다.

두 번째 진리는 심판(審判)입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사람이 다만 한번 죽고 그 후에 심판(審判)이 정하여져 있음 같이“(헤브레야9:27) 영혼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으니,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실대로 갚으리라.“(마테오16;27)


만일 대죄 상태에서 죽는다면, 그는 지옥으로 곧장 갑니다. 은총상태에서 죽는다면, 죄에 대한 모든 빚을 갚았거나, 소죄가 없으면 천국으로 곧장 갑니다. 그러나 만약 양심상 몇 가지 소죄가 있는 가운데 은총상태에서 죽는다면, 미처 갚지 못한 죄에 대한 벌이 남아 있다면 연옥으로 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눈앞에서 사망과 심판 모두를 항상 갖고 있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행한 모든 것을 천주 심판하러 오시리라.“(eccle12:14) “사람들이 말한 바 모든 한담을 심판 날에 헴 바치리니, 대게 네 말로 인하여 발명도 할 것이요, 또 네 말로 인하여 죄안(罪案)도 받으리라.“(마테오12:36)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더 이상 육체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물건에 의해 애착되지 않습니다. 연옥영혼들은 신덕, 망덕 그리고 애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덕들은 영혼의 영적인 부분 안에 있습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연옥은 이곳 지상 생활보단 훨씬 나은 곳이니, 이곳은 의로운 사람도 하루에 일곱 번씩 소죄에 떨어지는 불완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잠언24:16)


연옥 영혼들은 영원한 구령(救靈)에 대한 확실성을 갖는 반면에, 우리가 사는 이곳은 만일 우리가 천주님의 계명을 준행한다면 우리가 옳은 길에 서 있고, 만일 우리가 “(그 계명을) 세상 끝날까지 보존한다면”(마테오10: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오직 “신뢰”만을 가질 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보더라도, 연옥은 이 지상생활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연옥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곳 지상생활에서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소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입니다. 많은 이들이 작은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법 (음식, 휴식, 안락)들을 지나치게 추구하기에, 수없이 많은 이들이, 비록 옳지 않다는 것 (게으름, 못 참음 등)을 알면서도 이것은 대죄가 아니야, 해도 괜찮아 하면서 소죄를 범합니다.


연옥에 갔을 때 이러한 연옥 영혼들은 매우 괴로워하는 고통 가운데 저들이 배상해야 하는 것에 대한 소죄의 엄중함을 알게 됩니다. 비록 이것이 천주님의 사랑을 끊어버리지 않더라도, 소죄는 천주님의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죄는 사랑을 지연시킵니다. 만일, 이곳 지상에서 천주님을 섬기는 데에 주저한다면, 이에 대한 보상이 늦추어지는 것이 정당합니다. 저들이 지나치게 사랑했던 모든 세속적인 물건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 저들은 보상이라는 이러한 지연으로부터 지금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저들이 천주님에 의해 전적으로 이끌려왔고, 주님을 갈망하면서도 아직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일으킨 소죄로 인한 이 같은 지연은 가장 극심한 허기짐과 굶주림과 같은, 극도로 고통스런  불행이 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우리로 하여금 소죄의 중대함을 알게 하도록, 소죄를 미워할 수 있도록, 이 소죄가 천주님을 불쾌하게 하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합시다. 심지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천주님을 촉범(공격)하는 것은 절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겨우” 소죄에 불과한데 뭘 그래? 이렇게 절대 말하지 않도록 합시다. 고의적인 소죄는 우리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밖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최우선적으로 대죄에 항거하여 싸워야 합니다만 이와 같은 싸움으로는 부족합니다.


소죄를 피하지 않는다면 소죄는 쉽사리 대죄를 짓는 쉬운 길이 되고, 대죄를 효과적으로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모든 죄에 대해서도 절대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천주께 자신을 완전한 선물을 드림으로써 절대적으로 “예” 해야 합니다.

둘째로, 연옥영혼들은 고통을 당하지만 저들의 상황은 지옥과는 매우 다릅니다. 지옥에서 저주받은 이들은 아직도 죄를 사랑하고 저들의 고통을 증오하며 천주님의 정의를 미워합니다. 연옥에서 거룩한 영혼들은 천주님의 정의를 사랑하며 자기들의 죄를 미워합니다. 저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고통과 일치시키며, 천주님의 정의에 따라 자기들의 죄를 배상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지옥과는 상황이 정반대가 됩니다.


연옥에서 저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모범이 됩니다. 흔히 우리는 고통을 거부하며, 못 참고 고통에 대해 분개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실, 고통을 거부하기 보다는 고통이 우리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죄를 배상하는 가운데, 그리고 많은 영혼들의 구령을 위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함께 그 일치 안에서, 우리를 고통 안에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증오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교훈입니다.


그래도 이들 연옥 영혼들은 자신들을 위해 공로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공로를 세우기에는 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이야말로 자비의 시간이며 공로를 세울 시기입니다. 죽은 후에는 정의의 심판시간입니다.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벌을 줄이기에는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우리가 희생을 바치는 생활로써, 열정적인 생활로써, 천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민첩함으로써, 연옥영혼들을 위한 배상을 함으로써, 자비의 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몇몇 성인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부르는 즉 육체와 분리된 저들 연옥영혼의 지성은 진리를 위해 조성되고 신앙을 갖고는 있지만, 천주님을 뵐 수 있는 것이 아직은 결핍된 것으로서 묘사된 고통과 흡사한 고통을 연옥 영혼들은 겪습니다. 영혼에게 있어서 천주님을 뵙고자 하는 빛에 굶주림은 지극히 고통스런 아픔이 됩니다.


연옥영혼들은 애덕(愛德)을 갖고 있으니, 이 애덕은 불과 같고 천주님을 갈망하는 애절한 불길이며, 천주님을 지복직관하고자 하는 간절한 불이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러한 비전을 빼앗긴 상태가 되어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고통이 됩니다. 천주님을 뵙는 것이 지연되는 것은 저들의 과거 죄와 불완전 때문이며 불을 통해 황금이 빛나듯이 이 고통이 저들을 정화시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와 같은 많은 성인들과 심지어 많은 다른 열렬한 신자들은 연옥에서 보다는 더 많은 유익함을 가지고 이곳 지상에서 저와 같은 많은 고통을 통과하였으니,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이러한 고통이 저들의 영혼을 매우 깨끗하게 할 뿐 아니라, 많은 공로를 얻고 또한 많은 이들의 구령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교훈은 천국에 대한 커다란 열망, 천주님에 대한 큰 소망, 대면하면서 천주님을 뵙고자 하는 커다란 갈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만일 우리가 그분 뵙기를 목말라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그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지 않는다면, 얼굴을 직접 뵐 수 있는 가운데 변화되는 결합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주님을 모든 사물 위에 놓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진리 안에서 말할 수 있을까요?


성 요한은 아름답게 표현하시길, “성부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를 너희는 볼지니, 우리는 천주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고 도한 그 사실로 그렇게 되었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세속은 우리를 모르노니, 대저 그는 천주를 모르는 연고니라. 친애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천주의 자식이로다. 우리가 장차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명백하지 않으니라. 그러나 이것이 명백하여 질 때에는 우리가 천주와 비슷할 것을 아노니, 대저 사실대로의 저를 뵈올 것 임이니라. 무릇 이러한 희망을 저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는 저 거룩하심과 같이 자기를 또한 거룩하게 하느니라.“(요한1서3:1-3)


저 희망은 천주님을 향한 이 엄청난 소망(所望)을 포함하며 그 소망 자체가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니, 즉,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이르시길: “천주는 소진(燒盡 -태워 없애는)시키는 불“(deut 4;24. 헤브레야12:29)이십니다.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유익하니 특히, 주교들의 시노드 이후에, 아주 나쁜 성명서로 끝난, 너무나 진술이 불분명하여 많은 추문으로 이끄는 문을 열어놓은 시노드 이후에 유용(有用)합니다:‘구별’이라는 핑계 하에 어떤 교구(敎區)에서는 실제적으로 이혼과 재혼한 이들(실제적으론 저들이 간통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성체를 모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완전하게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들이 일어납니다. 저들은 천주님의 거룩함과 죄의 중대함을 모릅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죄를 기꺼이 버리지 않으려 하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저들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어떠한 진정한 노력(努力)도 없이 “저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지는”것 만을 갈망합니다.(마테오16:24)

그와는 반대로, 마치 베네딕도 성인께서 자신들의 입회가 허용되도록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들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천주님을 찾는 것”을 요구하신 것처럼, 천주께서 모든 세속적인 사물, 모든 세속적인 쾌락보다 무한이 그 위에 계시고, 또한 천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나 지극히 좋은 것이어서 세속적인 모든 사물을 버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되며, 그리고서 천주님의 계명에 따라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되는 희생은 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죄 있는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이 같은 희생은 영원한 빛 안에서, 무한하신 천주님 빛 안에서 보게 되면 지극히 하찮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세상은 정결이 불가능한 걸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 다가갔던 이들을 바라보면 정결이 그들에겐 너무 쉬웠던 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좇았사오니“(마테오19:27)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자녀와 전토를 버리고“(마테오19:29) 떠나는 것이 포함됩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완벽한 정결에 대한 놀랄만한 경외가 있었고 그래서 심지어 결혼한 많은 사람 조차도 공통 일치하여 성 파울리누스와 테레사처럼 완전한 정결서원을 하였습니다.

연옥에 있는 거룩한 영혼들이여, 우리가 연옥을 기억하게끔 도와주시고 천국과 천주님께 집중하는 영혼을 도와주시고 세상의 기만(欺瞞)에 결코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밀착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당신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모든 소죄를 항상 피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연옥에 있는 거룩한 영혼들을 돕고 저들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 속에서 충직하게 저들을 제헌하면서 우리의 십자가를 너그러이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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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아 레네 신부(성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