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리

Home > 신앙과 교리 > 미사강론

제목 십계명에 대하여 - 들어가기(2016-01-09)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1-11



십계명에 대하여 - 들어가기(2016-01-0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금년에는 제가 십계명에 대하여 연속으로 여러 차례 강론을 하고자 합니다. 십계명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다가와 질문을 합니다;”착하신 스승이여. 나 무슨 선(善)을 행하여 써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 가라사대, 어찌하여 내게 선(善)을 물어보는뇨? 선하신 자는 하나이시니, 곧 천주시니라. 너 만일 영생(永生)에 들어가길 원하거든 계명(誡命)을 지켜라.“(마테오19:16-17) 그래서 십계명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들은 목표로서 자신들에게 바람직한 것이고, 다른 일들은 그밖에 다른 일을 위해 단지 수단으로써 바람직한데, 예를 들어 우리는 약을 그 약 자체가 목적이 아닌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원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는 건강을 소중히 하기에, 건강 회복을 위해 쓰디 쓴 약을 받아드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통스런 외과 수술은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써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 그 자체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이 건강할 때, 그는 그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할까요? 건강은 행복의 조건이지만 행복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길 원합니다. 모든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어디서 찾는가요? 행복은 단지 주관적인 것인가요? 단지 느낌만 좋은 것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어떤 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합시다: “네가 로또에서 큰 상을 받았어” 그러면 그 소리를 들은 여러분은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는 것은 그가 여러분께 진실(진리)를 말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약 그 다음날 그것이 진실(진리)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이 최초에 가졌던 기분 좋은 감정은 파괴되고 심지어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 상처를 받습니다.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 행복이란 단지 꿈이며, 비누 거품처럼 터져 버립니다. 기만(欺瞞)입니다. 그 누구도 사기 당하고자 하는 이는 없습니다. 이러한 기만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설명하길,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좋은 어떤 것을 소유할 필요가 있고, 그걸 소유하고 있으며, 사랑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큰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는 행복하질 못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이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걸 가지고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가 가진 것을 사랑하지만, 그 물건이 보잘것없는 것이라면 그러면 그는 그 상황에서 행복하질 못합니다.


마지막 사례를 든 전형적인 예가 나쁜 결혼입니다. 사람이 어떤 이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데, 결혼 후 만약 그 상대방이 썩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많은 실망과 커다란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좋은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내게 나쁜지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물의 좋은 점을 우리가 만들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의 단순한 결정이란 그 사물이 우리에게 있어 좋게끔 만들어주는데 효과를 못 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많은 방법에 있어 꽤나 분명합니다. 만약 사람이 아파서 약이 필요하다면, 단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결정이란 이러 저러한 약 제품이 우리 질병에 있어서 효과적인 치료제다 라고 하기엔 부족합니다. 객관적인 치료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니, 우리의 결정이란 그 약이 무엇인지를 바꾸지 못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결정은 그 약은 우리를 위해 그 약효(藥效)를 바꾸지 못합니다.


 저는 이점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에 기만 당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각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간에 생각하듯이, 그는 “자기 고유의 진리”를 만들어 가듯이 살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반 과학적이며, 적절한 철학에도 반대되는 것이고, 가장 단순한 상식에도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좋은 것 안에서 완벽한 행복을 찾을까요? 토마스 성인은 여러 다른 물건의 사례를  겪어보고 완전한 행복이란 그 어느 물건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 성인께서는 완전한 행복이란 부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보여주는데, 부(富)란 본질상 목표가 아니라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것 외에, 은행 계좌에 엄청난 잔고를 갖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래서 부란 단지 수단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길, 성공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어떻게 돈을 쓰는지 안다고 합니다만, 이는 악순환입니다. 그들이 버는 이 “더 많은 돈”으로 써 무엇을 합니까?

그래서 토마스 성인은 행복이란 영예, 명성, 영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권력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들은 인간에 있어 외부적인 장식에 불과하며 그 자신을 좋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더욱이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물건에 있는 것도 아니며 육신의 쾌락에 존재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쾌락이란 영적 부분의 훨씬 아래에 있는, 우리 인간 본성의 단지 저급한 부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성인은 계속 주장하시길, 행복이란 본래 영혼(靈魂)의 좋은 부분에 존재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이러한 (세속적인)사물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한계가 있는 사물이 무엇이든 간에, 가지고 있을수록 우리는 더 원합니다! 한계가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고 채우기에는 부족합니다.

행복은 오직 무한한 선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고 오직 천주님만이 홀로 무한하신 선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란 천주님을 소유할 때에만 오직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주님을 소유하는 것은 영원한 지복지관에 있을 것입니다. 이 지복직관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천주님께서는 천주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조성하셨고, 천주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너 하나이신 참 천주와, 너 보내신 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것이 곧 영생이로소이다.“(요왕17:3) “오 주여, 당신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조성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평안히 쉬기 전까지는   우리가 불안하나이다.”(성 어거스틴)

우리가 어떻게 천주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천주님과 함께하는 영생에 도달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원히 천주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천주님에게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성부께로 나오지 못하느니라.“(요왕1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로 가는 길이며, 그분은 천주께로 가는 유일한 분이시며, 다른 이는 도무지 없습니다. 모든 “법률”은 입법자의 어떤 “말”로 구성이 됩니다. 천주님의 말씀은 분명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 제2위격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계명입니다. 성 육신에 의하여 영적인 영원한 계명이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이것을 인간의 언어로 비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마음 속에서 그 말(생각)을 발음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몸을 이 언어에게 주게 됩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 말을 분명히 표현합니다. (소리의 파동은 물리적인 진동입니다) 천주님의 성 육신화된 말씀은 우리의 계명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계명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하셨고 그러니 우리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은 무엇인가요? 또는 개신교인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그저 주님만 단지 믿어야만 되고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된다(또는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말도 안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곳에 존재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천주의 사랑하시는 자식답게 저를 모범할지어다. 또한 너희는 그리스도 너희를 사랑하사 당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삼아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드렸음과 같이 사랑 안에 거닐을지라.“(에페소 5:1-2) “그러므로 나 너희를 훈유하노니, 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른 것 같이 너희는 내 표양을 따를지어다.“(코린토 전 4:16. 11:1) 친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너희게 표양을 주어 써 내가 너희게 행함과 같이 너희도 이같이 행하기를 위함이로다.“(요왕13:15) 그리고 성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너희를 위하여 고난 받을 당하셨으며, 이로써 너희들에게 표양을 남기사 써 너희로 하여금 저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기를 위함이니라.“(베드로 전 2:21)

그러나,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 천주님에게로 가는 길인 천주님의 계명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태초부터 천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계명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이성(理性)의 빛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많이 죄기 때문에, 자연법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모세에게 기본적인 계명인 십계명을 주신 것이고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대비하여 준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전례에 관한 의식법(儀式法)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희생제물에 관한 모든 교훈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님은 어느 특정한 범죄에 대한 특정한 처벌이 제시된 “사법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십계명으로서의 도덕교훈, 의례(儀禮)에 관한 교훈, 그리고 사법적인 재치권(裁治權)에 대한 교훈입니다.

성 교회는 가르치길, 구약의 의식(儀式)에 관한 전례법(典禮法)은 그림자로서(콜로새2:17, 헤브레야8:5) 신약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빛으로 대체되거나, 혹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인물(코린토 전10:6)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사법적 재치권은 특히 어떤 죄의 엄중함에 대한 표시가 나오는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구약시대에 죽음으로써 처벌받은 그 사법적 재치권이란 대죄를 의미하니, 우상숭배 죄, 신성모독죄, 살인, 간통 등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고통 받게 되는 처벌이 훨씬 자비롭지만 이러한 죄들은 대죄로 남아있고 그 사람이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보속이 없다면, 그는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게 마땅합니다. 구약에서의 도덕상의 법이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도덕상의 법률은 그리스도에 의해 보다 높은 수준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의덕(義德)이 학자들과 바리서이의 의덕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테오5:20) 그리고 신약에서는 훨씬 더 높은 거룩함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주님은 여러 계명을 설명하십니다:”옛 사람에게 이르신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죄인이라 함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제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요….. “(마테오5:21-22)

 개신교인들은 성 교회의 지혜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가르침을 구별할 수 없으며,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의 율법이 더 이상 신약에서는 묶여있지 않다고(관련 없다고)생각합니다. 이는 악마의 커다란 속임수이니, 악마는 개신교인들이 죄를 계속 지어도 되는 것처럼, “오직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듯이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무릇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이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성부의 뜻을 봉행하는 자 천국에 들어가리니, 저 날에 많은 이들이 ‘주여, 주여, 우리들이 네 이름을 의지하여 후래(後來) 사정을 미리 말하지 아니 하였사오며, 네 이름을 의하여 마귀를 쫓아내지 아니 하였사오며, 네 이름을 의지하여 많은 영적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나 그때에 저들에게 밝히 이르노니, ‘나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악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리라.“(마테오7:21-23)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주여, 주여”하는 자)라고 해서 그 모두가 아니라, 오직 성부의 뜻을 따라 행하면서 계명을 실제적으로 지키는 자 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로마인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법률을 듣기만 하는 자들이 천주 대전에 의화(義化)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이를 준행하는 자들이 의화될 것임이니라.“(로마2:13)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요구됩니다:“너희가 나를 사랑하다면, 내 계명을 지키라”(요14:15) 그리고 “너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모든 힘과, 모든 뜻으로, 상주 네 천주를 사랑하고, 또 네 가까운 자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까10:27)는 “ 가장 크고 으뜸가는 계명 “(마테오22:38)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가 “계명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의롭게 되기 때문에 계명들을 충직하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화(義化)는 계명을 지키고 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계명 준수 이전에 오는 것입니다.


천주님께서는 우리의 과거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성신으로서 우리 영혼에 은총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포도나무 줄기요, 너희는 그 가지라. 내게 머무는 자는 나 또한 저에게 머무르매, 많은 실과를 맺느니, 대저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함일새니라.“(요왕15: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데에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살아감으로써, 신덕, 망덕, 애덕에 의한 그분의 사랑으로서 만이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는” 등 많은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선행을 위하여 조성함을 받은 천주의 조물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선행 안에 거닐으기를 위하여 천주 미리 갖추어 놓으신 선행이니라.“(에페소2:10) 주님은 우리가 진정한 선업을 하도록 힘을 넣어주시는 분이니,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를 현양케하라.“(마테오5:16) “천주께서는 능히 온갖 은혜를 너희에게 풍족하게 하사, 너희로 하여금 만사에 있어 항상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며, 또 온갖 자선 사업에 참섭(參涉)하게 하실 수 있느니라.“(코린토 후 9:8)처럼,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 그리고 성부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법률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은총은 우리가 기도와 성사를 통하여 받습니다. 그러니 매일 기도하십시오! 선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특히 유혹의 시기에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기도하면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옛 법률을 받은 것처럼, 우리 주님도 마태오 복음의 5,6,7장에 나타난 유명한 “산상 수훈”을 통해 새 법률을 그 산에서 발표하셨습니다. 그 산상수훈은 성서의 진복팔단으로 시작하여, 새 법률, 완벽에의 더 높은 요구사항으로 넘어갑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 완전하심 같이 완전한 자 되어라” (마태오 5:48). 성 루까 복음에서는, 같은 명령이 같은 분위기를 갖고 전해집니다. “이러므로 너희 성부 인자(仁慈)하심 같이 너희도 인자하여라.”(루까 6:36)

구약 성서는 돌판에 많은 히브리인들의 마음의 딱딱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지 50일 뒤인 첫 번째 부활절(Easter) 때 시나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약 성서는 “먹으로 쓰여지지 않고 오직 사람의 마음이라는 혈육판(血肉板)에 쓰여져 있느니라.”(코린토 후 3:3) 천주님의 영(靈)은 따라서 새 부활절의 50일 후인 성신강림절에 종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은 모두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걸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이 새로운 계명인 천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곧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할지니라” (요왕복음 13:34) 천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천주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을 말합니다. (로마 8:14) 그것은 우리가 천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데, 즉 우리가 노예적인 공포 때문이 아니라, 천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계명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새해의 시작에, 우리가 강한 결심을 하고, 계명에 순종하고, 천국으로 이끄는 길을 걷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본받는 삶을 삽시다. 우리가 성세(聖洗) 때의 약속을 새롭게 합시다. “나는 사탄과 그의 모든 행실과 그의 모든 것을 끊어버립니다” 즉, 그의 속임수와 유혹을…, 나는 차라리 시편의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계명의 길을 달릴 것입니다. “당신이 내 마음을 흡족하케 하실 제, 나는 당신 계명의 길을 달리겠나이다.”(시편 118:32)

우리는 성인들의 모범를 통해, 특히 천주님의 영(靈)에 매우 충실했기에 절대 계명의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셨고 전혀 죄를 짓지 않으셨던 성모 마리아님의 모범를 통해 계명의 길을 가도록 크게 장려받습니다.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의 길을 가도록, 진실로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천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 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