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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1계명 - 제 2부:흠숭(2016-02-0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2-08



제 1계명 – 제 2부:흠숭(2016-02-06)


지난 번에 우리는 제 1계명의 내적 요구조건을 알아봤는데, 이는 생명의 계명이며 먼저 신덕, 망덕 그리고 애덕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치면서 천주를 향해 온전하게 우리가 살아가도록 묶어주는 생명의 계명입니다. 진리요, 길이요 그리고 생명으로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주는 진리, 천국으로 가는 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자비의 생명이신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진정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신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혼과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사는 모습을 외적으로도 밝혀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또한 몸을 통해서도 천주를 섬겨야 합니다. 이는 흠숭(欽崇)으로 이루어집니다. 성 토마스는 이 행위를 “수도생활의 덕행”이라 부르며, 우리가 천주님을 경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덕행입니다. 다른 이를 공경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떤 이의 탁월성에 대한 증언을 주는”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흠숭은 천주님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증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타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이 천주 홀로 최고의 존경을 받는 훔숭의 예(禮)를 가지고 있는 것은 쉽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도움을 받아 그 관념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 보면 “공경(恭敬)”은 천주님뿐만 아니라, 어떤 피조물, 즉 제 4계명은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명합니다. 천주께 드려야 되는 것은 “최고의 공경”입니다. 토마스 성인에 의한 공경에 대한 정의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공경은 어떤 이의 탁월성에 대해 주어지는 증언입니다. 천주께 속한 최고의 탁월성, 절대적 탁월성이 있고 우리는 흠숭으로 그 증언을 그분께 드립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관련하여 어떤 피조물에서 찾게 되는 상대적인 탁월성이 있고,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뛰어넘는 상대적인 탁월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탁월성은 부모 공경에 대한 자녀들이 갖는 의무의 기반이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성인들은 평범한 신자들을 뛰어넘는 상대적인 탁월성이 있으며, 이 탁월성은 우리가 알듯이 성인들께 드리는 공경의 기반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매우 합법적이며 오히려 의무입니다. 이 성인공경이 천주께 드리는 흠숭지례를 절대로 뺏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인들께 “상대적인 공경”만을 드리는 것이고, 천주께는 최고의 공경인 흠숭지례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모님은 특별한 위치가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성모님께는 우리가 “하이퍼들리아”를 드리니, 즉 “상경지례(上敬之禮)”로서 천주께 드리는 흠숭지례는 아닙니다. 더욱이 예술가의 예술작품을 공경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탁월성을 찬양하는 아주 좋은 방법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인들은 천주님의 작품입니다. 천주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천주께서는 성인들에게 위대할 정도로의 거룩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을 공경함으로써, 우리는 그 성화(聖化)시킨 분께, 천주께,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께 커다란 공경을 드리니 천주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성인들을 조성하신 분입니다. 성인 공경을 거부하는 자들은 천주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며, 사실 그들은 천주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림 작품을 칭찬하지 않는 이들은 사실상 그 화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는 우리 이웃에 있어서 우리가 공경할 네 가지 종류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학문, 덕행, 권위 그리고 기원의 탁월성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봅시다: 예를 들어 위대한 연구를 한 이들에게는 적절한 호칭, ”박사”, “교수” 등의 직함을 주어 이에 해당되는 학문의 탁월성을 공경합니다. 그들에게 노벨상을 줌으로써 위대한 과학자들의 발견을 칭송합니다.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는 학교에서 학기말에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표창장”을 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뛰어난 상대적인 지식의 탁월성입니다. 성 교회에서는  어떤 성인들은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어거스틴은 ‘교회박사’ 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덕행의 탁월성을 공경합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용기를 보여준 군인들에게는  무공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그리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거나 보호하는 데 있어서 큰 용기를 보여준 소방수나 경찰관에게도 이에 합당한 공훈메달을 줍니다. 교회에서 흔히 성인들에게 주어지는 공경은 저들의 ‘영웅적인 덕행’에 대한 증언이니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또한 예를 들어 왕과 시민사회 당국 또는 군(軍)당국에 있는 권위의 탁월성을 공경합니다. 베드로 성인은 “제왕을 공경하라”(베드로 전 2;17)고  명령까지 합니다. 그리고 성 바오로는 이르길:”이러므로 모든 이에게 너희 책무(責務)를 이행할지니, 세금을 바칠 자에게는 세금을 바치고, 구실을 바칠 자에게는 구실을 바치고, 경외할 자는 경외하고, 존경할 자는 존경할지니라.“(로마13;17) 세금이나 조공을 내는 것도 시민사회 당국에 연유한 공경의 일부입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교황, 주교, 사제와 심지어 성신의 성전인 다른 교우를 공경합니다.”너희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천주를 경외하고, 제왕을 존경할지니라.“(베드로 전2:17) “서로 형제 간에 사랑함으로써 열렬히 사랑하며, 서로 남을 존경함에 있어 다른 이를 능가할지어다“(로마12:10)

공경에 대한 마지막 종류는 이해하기가 더 어렵지만, 그래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항상 가장 잘 아시는 분들도 아니며, 항상 가장 덕행이 뛰어난 분들도 아니며, 항상 권위가 높은 분들은 아닙니다. 비록 자녀들이 어릴 때는 권위가 없고 부모는 아이들을 능가하는 권위가 있지만 자녀들이 장성하여 자녀가 생겼을 때는 더 이상 통하는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른들도 자기 부모에게는 ‘공경’을 드려야 하고, 부모가 늙으면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왜 그리해야 하나요? 부모들은 자녀들을 뛰어 넘는 ‘기원의 탁월성’을 갖고 있고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부모로부터 너무나 많은 좋은 것을 받기 때문이라고 토마스 성인은 설명합니다. 생명이 가장 기본적인 유익한 것이기에, 이것이 없으면 그 어느 자녀도 자기 부모로부터 그들이 받는 모든 좋은 목록들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 목록은 길 것이고, 좋은 부모일수록 그 목록은 더 길 것입니다. 흔히 보건대,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 부모님께 얼마나 은덕을 입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때로는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의 은덕을 압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이러한 선물을 되갚을까요? 무엇이 생명을 동등하게 할까요? 성 토마스는 가르치길, 이와 같은 지배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받은 만큼을 결코 갚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빚을 지는 것이란 더 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배구조에서 우리가 갚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부모님을 공경함으로써, 부모님의 탁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부모로 연유한 공경은 또한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은 모든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해지니, 선생님, 후원자, ‘영적인 아버지’인 사제 그리고 무한한 가치의 보물을 주신 주님의 몸과 성혈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주성이신 성체이니, 그래서 역시 우리가 그들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네 가지 영역에서 천주님은 다른 모든 것을 무한히 능가합니다. 천주 홀로 절대적이고 최고로 아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창조물의 지식과 조성된 모든 사물 위를 능가하여 천주님께서는 친히 홀로 최고의 지성이십니다. 천주님만이 모든 좋은 것, 모든 덕행의 행위의 제1근본의 원인이자 모든 유익한 것의 최고 통치입니다. 천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최고의 지혜와 선, 자비, 정의, 친절과 질서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천주 그분만이 덕행에 대한 최고의 공경이 있게 되고, 다른 모든 덕행이란 이러한 천주님의 최고의 모범을 겨우 모방함에 불과하며, 으뜸가는 최고의 선으로서, 천주님에 의해 움직여진 것에 불과합니다.


천주님은 모든 창조물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위가 있으며,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이 모든 권위는 천주로부터 옵니다.(로마13:1) 그래서 다시 언급하건대, 천주님 홀로 최고의 경배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주님은 모든 선한 것들의 제1원인이고, 우리가 받은 모든 선한 것의 기원입니다. 천주님은 우리의 보편적 후원자입니다. 모든 다른 후원자들은 그들이 받은 좋은 점만 겨우 전달해주지만, 우리 부모님은 부모님이 받은 생명만을 우리에게 겨우 전달하지만, 오직 천주님 만이 생명과 모든 선의 저자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천주께서만  최고의 공경을 받을만하고 그 최고의 경배를 흠숭(欽崇)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천주님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이 훔숭이 흐른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이것은 천주님의 완벽성 앞에서 보이는 경배와 경외감(敬畏感)을 포함합니다. 성 미카엘처럼 우리는 외칩니다;”천주와 같은 자 누구인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천주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천주님은 무한히 모든 사물 위에 계시고, 무한히 탁월하십니다. 이러한 경배로부터 흠숭이 흐릅니다. 작은 비교를 해보죠. 동그란 원 안에서 사람은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을 하는 것, 이를테면 높은 곳에 단단히 걸린 밧줄 위를 걷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숨을 죽입니다. 저들이 어려운 일을 끝마치면, 우리는 경탄하는 가운데 박수를 칩니다. 이와 같은 경탄은 천주님의 무한하신 완전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천주님을 찬양하는 가에 대한 아주 작은 사례를 보여줍니다.

공경은 탁월성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 필요가 없는 절대적으로 아주 사소한 것이 아닌, 탁월한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지성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사물에 대한 증언을 줌으로써, 공경은 다른 이로 하여금 공경할 만한 사람들을 알게 해주고, 이것이 그들을 ‘영광스럽게’해줍니다. 그래서 천주님을 훔숭하는 것은 천주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천주님의 관대함에 대해 갚아드리는 우리의 작은 방법입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흠숭은 내적인 흠숭이니, 지난 번에 설명하였듯이, 이것은 신덕, 망덕 그리고 애덕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세 가지 덕행을 천주께서 직접 그 목적으로서, 우리가 천주를 믿고, 천주 안에서 바라고, 천주를 사랑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천주를 소유하기 때문에 천주님께서 주신 성서(신학)의 덕행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천주님이 목표가 아닌 오히려 천주공경에 대한 덕행이 있으니, 천주님의 탁월성에 대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증언에 의한 덕행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修道生活)의 덕행입니다. 수도생활의 덕행은 우리가 천주님을 흠숭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덕행입니다. 신, 망 애덕은 그 자체가 우월한 덕행이지만 이에 근접함으로써 수도생활의 덕은 매우 중요한 덕행입니다. 왜냐하면 이 수도생활의 목표가 우리를 천주님께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수도생활의 덕행은 우리 이웃과 관련된 모든  덕행의 목표보다 더 우월합니다.

내적 훔숭에는 기도와 신심(信心)이라는 두 개의 다른 행동이 있다고 토마스 성인은 설명합니다. 바로 ’기도’의 단어로써 여러분은 이 기도가 충직한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게 되지만, 기도를 완전히 몰입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갈 것입니다. 천주님의 첫 번째 계명은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는 것을 그냥 기억하도록 합시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친히 말씀하시되,”항상 기구(祈求)하라”(루까18:1)하시며, 성 바오로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테살로니카  전 5:17) 하십니다. 천주공경에 대한, 천주공경을 위한 우리 모든 행동을 제헌하는 데에 대한 의지의 민첩성으로서 신심을 정의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천주의 광영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라”(코린토 전 10:31) 그래서 미사에 늦게 오는 것은 분명히 신심의 부족이며, 마지못해 기도하는 하는 것도 신심의 부족입니다.

우리가 천주님을 공경함으로 인한 행동인 많은 수도생활 행동이 있습니다. 첫째가 찬양입니다. 천주님의 탁월성을 말하고. 천주님의 광영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성무(聖務)에 있어서 수사, 수녀 그리고 사제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성영(시편)으로 이루어지고, 옛 전통에 따라 매주 모든 사제들이 암송합니다. 오늘날 현대주의자들은 그러한 전통을 깨뜨렸고, 지금은 겨우 한 달에 한번 암송하고, 저들이 원치 않는 특정한 구절은 억압하여 안 하니, 저들은 성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시 다른 방법인 서원과 맹세라는 말로써 천주님을 공경합니다. 둘째 계명에 대해 말할 때, 그걸 보게 됩니다. 천주공경을 위해, 수도생활의 실천을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봉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수도자들이라 하는데, 수사와 수녀가 수도자이며 그들은 보통 세 가지 복음상의 권고인 ‘수도서원’을 합니다.

우리는 신체적인 활동, 예를 들어 부복(俯伏), 장괘와 같은 몸 동작으로 천주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작이 최상의 경배를 나타날 때, 그러한 동작을 ‘경배’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기 위해,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실재현존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서도 조차 주님께 우리의 경배의 예(禮)를 드립니다!

성 토마스 이르길, 우리는 천주님을 공경하는 차원에서 십일조(교회헌금)를 드리고,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이들 사제를 돕기 위해, 또는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물질적인)도움을 줌으로써, 천주님을 공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문맥에서 똑같은 행동이 최고의 공경이 아닌 소박한 공경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보면 어떤 위대한 성인들은 다른 이들 앞에서 부복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흠숭이 아닌 낮은 차원의 공경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을 보게 되고, 그 앞에서 야곱의 형제들이 부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 앞에서 부복하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열왕기24:9)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견진을 받기 위해 주교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성사 때에는 주님께 향을 제헌하며, 사제와 부제에게도, 심지어 복사와 교우들에게도 향을 제헌합니다. 맨 앞의 향을 제헌하는 것이 경배의 행위이며, 그 나머지들은 공경 차원의 행위입니다. 천주께서는 으뜸의 자리에 계시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명한 성서를 실천합니다. “서로 남을 사랑함에 있어 다른 이를 능가(凌駕)할지어다“(로마12:10)

공경의 외적인 행위 가운데, 천주께 준비된 경배가 하나 있으며, 이 경배는 피조물에게는 결코 제헌되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희생(제사)입니다. 비록 다르지만 우리는 천주를 찬미하고, 성인들에게는 낮은 차원에서의 공경을 하며, 우리가 천주께 기도를 하고, 또한 성인들에게도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주께 희생제사를 제헌하지만 그러나 여기서 피조물에게는 결코 희생제사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희생제사는 최고 높은 공경행위(흠숭이고, 절대적으로 천주께만 드리는 흠숭에 해당하는 적합한 행동입니다. 흠숭의 최고 행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우리의 구령을 위하여 그분이 제헌하신 희생제사, 몸과 성혈을 바친 희생제사, 그곳에서 주님이 고위 사제이자 희생물로서 드린 제사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교회에게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희생제사를 주셨고, 이것이 교회의 희생제사가 되도록,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가 되도록 주셨으니, 이것은 사제들이 주관하여 행해지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인 바로 그 제헌입니다.

흠숭에 거역하는 죄를 우상숭배라 부릅니다. 천주께 마땅히 드려야 할 흠숭행위, 특히 희생제사를 피조물에게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통탄할 죄이니,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에 천주께서 우상숭배에 대해 혹독하게 히브리인과 몇몇 이교도 나라들을 벌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앞에 이상한 신들을 놓지 말라“(출애굽20;3) 그리고 천주께서는 탈출 못하게 특히 모든 종류의 우상을 금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어떤 물 속에 있는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애굽 20:4)

개신교인들은 성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적절한 흠숭행위도 모르며, 제 1계명을 두 개로 잘라내어 이 두 번째 문장이 제 2계명인 것처럼 하니, 어떠한 조각상도 만드는 것을 금해 버립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천주님은 결코 모세더러 청동 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을 것이고(Num. 21:8) 언약의 궤 위에 두 개의 케루빔(출애굽25:18)을 조각하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조각(彫刻)된 물건’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바로 천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길, “그것에 절하지 말며, 그것을 섬기지 말라. 나 너의 전능하시고 질투하는 천주라“(출애굽20:5)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는 ‘저들을 경배하기 위하여’ 조각상이나 형상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두 개의 케루빔과 청동뱀이 경배되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면 금하질 않습니다. 사실, 후일, 에제키엘 치세에 히브리인들은 청동뱀을 경배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이 경건(敬虔)한 왕은 그걸 산산조각 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열왕기 후18:4) 청동뱀이 우리 주님의 구원의 증표(證票)로서 사용되는 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히브리인들에게는 복된 것이었지만, 이것이 그 자체가 경배되면 파괴되어야만 했습니다.

지혜의 영(靈)으로부터 오는 성인들의 지혜를 받고 나온 성 교회는 거룩한 그림과 조각상을 천국의 증표로서 적절히 사용할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성화(聖画)는 천국으로 가는 창입니다. 우리가 창(窓)을 바라볼 때, 유리에는 관심두지 않고, 오히려 유리창 넘어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화를 볼 때, 우리의 생각과 애정은 천국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엄마가 자녀의 사진을 바라볼 때, 엄마의 애정은 아이들에게 가는 것이지, 사진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분명한 것이니, 이것을 부인(否認)하는 것은 악한 마음에서 온다는 것이 오히려 분명합니다.


모든 그림과 거룩한 형상을 파괴한 ‘성상 파괴자(iconoclasts)’[주: 8-9세기 그리스 정교회]라고 부르는 이단이 이 있었습니다. 성 교회는 강력하게 이러한 이단을 거부했습니다. 성화, 성상 그리고 십자고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집집마다 각방에 하나 하나 놓는 것과 집안 한 장소에 작은 성물 보관소를 놓는 것은 훌륭한 것이니, 좋은 십자고상과 성화로 치장된 그곳에서 날마다 가족들이 모여 기도하는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 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림 그 자체를 경배하기 시작하고, 그 성물이 신호하는 성인에 대해서는 신심을 하지 않으면 우상이 됩니다. 가톨릭 종교는 모두 천국을 지향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속적인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흠숭하는 유일한 대상은 성체 안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삼왕이 주님을 경배한 것처럼,(마테오2;11) 그리고 주께서 치료한 소경이 주님을 경배한 것처럼(요왕 9:38) 주께서는 천주이시고, 성부와 동등하신 참 천주 중의 진정한 천주, 그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거부하는 것은 극히 엄중한 죄입니다.

유일하신 참 천주만이 계시기에, 사실 천주가 아닌 다른 ‘잡신’을 경배하는 것은, 그것이 부처든, 인도의 여러 신이건, 다른 거짓 신이건, 그것을 경배하는 것은 극히 무서운 죄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참 천주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 천주가 아닌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경배와 흠숭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理性)에도 극히 반대됩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은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힌두교 잡신, 이집트 잡신, 그리스나 라틴계의 이교도 신화에서 나오는 잡신의 신화에 믿음을 줄 수 있는가요? 모하메드는 알라가 자기에게 계시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계시에 있어 천주성의 기원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기적도 없거니와, 예언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오직 칼만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마적인 기원의 증거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1986년 아씨시에서 행한 것처럼, 유일한 참 천주를 거짓 신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것, 그리고 이 스캔들의 모습이 있은 후에 수십 차례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여러 거짓 신들과 동등해진 것은 제 1계명을 거스른 지극히 심각한 죄입니다. 천주님은 분명히 ”내 앞에 이상한 거짓 신들을 놓지 말라“(출애굽20:3)하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유일한 참 천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짓 신을 동등하게 놓아서는 안 됩니다. 교황이 저런 일을 할 때에는 극히 심각한 추문이며, 제1계명을 거스르는 엄중한 죄입니다.

거짓 신을 흠숭하는 것은 제1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며, 참 천주를 거짓으로 흠숭하는 것도 제 1계명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유대인과 이단과 함께 발생합니다. 구약의 천주는 지극히 거룩한  성 삼위일치이며, 실제로 유일하신 참 천주이십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모든 흠숭행위는 성 육신을 향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안 오셨던 것처럼, 주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거부하는 것과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그 자체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리세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성경을 궁구하여 거기서 영생을 얻을 줄로 여기고, 또 이 성경이 나를 증거하거늘“(요왕5:39)  “나 너희를 성부 대전에 송사할 줄로 여기지 말라. 너희를 송사하는 자는 곧 너희가 바라는 바 모이세이니, 너희가 만일 모이세를 믿을 양이면 혹시 또한 나를 믿었으리니, 대저 저가 나를 가리켜 기록하였음일새니라. 저의 기록한 글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왕5:45-47)

참 천주에 대한 거짓 경배는 또한 이단(異端)가운데 발견되는 데, 첫째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 교회와의 일치, 일치에 대한 사랑, 사랑에 대한 진정한 흠숭지례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단자들의 대부분은 흠숭 자체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미사를 파괴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매우 폭력적인 방법으로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미사는 신약시대의 가장 뛰어난 진정한 흠숭지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강론이 약간 길었지만 흠숭지례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고, 그래서 흠숭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는 것, 이것은 천주님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증언이라는 점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는 신, 망, 애덕, 특히 기도와 신심 가운데 내적인 경신지례(敬神之禮)로 이행되지만, 또한 찬미(소리 내어 하는 기도), 현양, 십일조(헌금), 특히 성 교회의 가장 큰 핵심이자 영원한 생명 안에서 천국에서의 흠숭지례를 위한 준비 과정인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라는 외적인 동작으로도 이행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당신은 십자가의 희생에 지극히 일치되셨기에,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이 천주님을 드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천주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