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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1계명 마무리와 제 2계명(2016-02-0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2-08




1계명 마무리와 제 2계명(2016-02-0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지난 번 미처 설명하지 않았던 흠숭(欽崇)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신성한 것, 특히 성사(聖事)에 대한 적절한 이용에 관한 것입니다. 참 천주이자, 참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곱 가지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하고, 풍성한 은총의 수단인 성사를 헌신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과 천주께 영예를 드리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수단들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칠 성사는 구령에 필요하다고 성 교회는 가르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성세와 거룩한 성체의 필요성을 가르쳤습니다. “나 진실히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아무라도 만일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능히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라.“(요왕3:5)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게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요“( 요왕6:54) 성사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 특히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자주 이용하는 것은 천주께 큰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이 성사는 우리에게 풍성한 성총을 주시는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성사를 남용하는 것은 극히 비통할 죄이며, 신성모독 죄이고, 제1계명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이것은 알면서 대죄를 고해하지 않고 숨길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심상의 대죄를 지은 상태로 거룩한 성체를 받을 때, 오늘날 흔히 일어나는 잘못된 영성체에서 생깁니다. 많은 이들이 고해를 무시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은 고해성사도 보지 않고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하러 가니, 많은 신성모독의 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우리 주님이 마땅히 받아야 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현대 시대에 불행히도 일어나는 또 다른 신성모독의 사례는 성직자와 봉헌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불결한 부정(不淨)행위입니다. 이는 신품성사의 남용이며, ‘봉헌된 자’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르길;”마음으로 믿어 의화(義化)될 것이요, 입으로 고백하여 구령하리라.“(로마10:10) 내적인 신앙은 천주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외적인 신앙고백 역시 천주님을 현양(顯揚)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재판정(裁判廷)에서 치명자(致命者)들은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박해를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증인’이며,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림으로서, 그리고 자발적으로 신앙의 진리에 대해 증언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명(순교)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2계명의 목표 대상, 즉, 신앙고백으로서 천주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初代)교회 당시에 체포된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신앙 때문에 법정에 끌려 나갔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혔고 고문도 당했지만 그곳에서 죽지 않았고 나중에 방면되었는데, 그런 신자들을 우리는 ‘고해자’라고 하니, 왜냐하면 신앙을 여러 사람 앞에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후일, 성 교회는 거룩한 생활로서 가톨릭 신앙을 공개적으로 밝힌, 그러나 치명하지는 않았던 성인들에게까지 ‘고해자’라는 명칭을 확장시켰습니다.


천주님은 진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왕14:6) 그리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 증언하면서 그 진리를 옹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사람 앞에서 증거하면 나 또한 저를 하늘에 계신 내 성부 대전(臺前)에서 증거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모르노라 한 자는 나 또한 저를 하늘에 계신 내 성부 대전에서 모르노라 하더라.“(마테오10;32-33) 무슬림처럼 타인을 죽이는 것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진정한 치명자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박해자로 인해 치명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신앙고백에 반대되는 죄는 천주님에 대한 잘못된 어떤 것을 단언하는, 또는 주님에 대한 진리를 부인(否認)하는, 특히 섭리에 대해서 천주님을 비판하는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와 같은 어떠한 신성모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에 대해 겸손하게 기도해야 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천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성총을 주십니다….(개신교처럼) 자기들 방식대로 천주님의 말씀을 ‘재해석’하고 실제적으로 참 의미를 공허하게 만드는, 너무나 많은 교리를 부인(否認)하는 이단자들은, 저들이 가톨릭 신앙을 부인하게 될 때, 비록 저들이 깨달치 못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과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또한 (개신교처럼)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현존을 믿지 아니하고 성체를 부인하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천주사랑의 가장 큰 표시를 부인하는 것이며, 천주님의 자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신앙에 대한 그 밖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대해 찬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이단이며 제 1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거부로서 이와 같은 진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이자 제 2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의 전형적인 사례는 우리 주님께서 악신이 들렸다고 말한 바리세인들에 의한 저주입니다; “우리가 너더러 사마리아인이요 부마(付魔)하였다 한 말이 어찌 잘한 말이 아니리요? 예수 대답하시되, 나는 부마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성부를 존경하거늘, 너희는 나를 능욕(凌辱)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되, 구하여 주시고 판단하여 주실 자 있느니라.“(요왕8:48-50) 다시 말하면, 조심하십시오, 여러분도 천주님의 심판에 있어서 이와 같은 독성죄(瀆聖罪)의 변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속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로써 천주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은 숨겨진 진리를 대할 때에 우리가 말하는 그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써 천주님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이니, 예를 들어 ‘반 현대주의 맹세’입니다. 천주 홀로 그 마음을 알고 계시며, 그가 진정 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이 맹세로서 우리가 참 신앙에 밀착하며, 현대주의자들의 오류를 거부하는 증인으로서 주님을 받아드립니다. 이것이 최고의 지식과 그분의 정의(正義)를 드높이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단어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한 증인으로서 천주님을 받아드리는’것입니다. 사람은 가볍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고 매우 조심스럽게, 이와 같은 오직 진지한 말만을 하고, 가치가 있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말해야 합니다. 반(反)현대주의자 맹세의 사례에서처럼 언어가 적절히 행해지면, 덕행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 행하여진다면, 비통할 죄가 됩니다. 이것은 특히 거짓된 어떤 것을 맹세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위증이라는 극히 비탄할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경솔하게 특히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또는 진짜 필요 없는 것을 맹세할 때, 이러한 역시 신성모독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헛되이 천주님의 거룩한 이름(聖名)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있을 수 있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단순히 천주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인들의 거룩한 이름을 아무런 필요도 없이 대화 중에 이와 같은 거룩한 이름을 섞어서 거명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거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어떠한 존경심도 없이, 어떤 사람들은 천주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 또는 어떤 성인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거론합니다. 이것은 심히 잘못된 일입니다. 열렬한 기도는 천주님의 성명(聖名)을 적절하게 거명하는 것인 만큼 천주님께 큰 영광을 드리는 것이지만, 천주님의 성명을 부적절하게 거명하는 것은 거의 맹세를 하는 것만큼이나 죄가 되는 것이니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 역시 신성한 물건에 연관된 말을 사용하는 것에서도 해당됩니다. 이를 태면 지옥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항상 올바른 그 문맥 밖에서,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표현, 즉 “이 좋은 시간 신나게 (x나게) 놀아라” 하는 가운데 hell(지옥) 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참고: 영어에서 흔히 hell과 Jesus이라는 말이 욕으로 많이 쓰임) 복음서에서 주님은 이것을 꾸짖었습니다. 이러한 범위에서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서하지 말라. 하늘로도 맹서하지 말지니, 천주의 어좌(御座)가 되는 연고요, 땅으로도 맹서하지 말지니, 천주의 발판이 되는 연고요, 예루살렘으로도 맹서하지 말지니, 대왕의 도성(都城)이 되는 연고요, 네 머리로도 맹서하지 말지니, 머리털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혹 검게하지 못하는 연고니라. 너희 말은 그런 것은 그렇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할지니, 대개 이에서 더 보태는 것은 악에서조차 오는 것이니라.“(마태복음 5:34-37)

구약시대에서 열렬한 유대인들은 결코 천주님이 모세에게 가르친, 즉, 드러난 거룩한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성서가 쓰였을 당시에 유대인들은 ‘야훼’, ‘예호바’라고 읽는 대신에 ‘아도나이’ 라고 읽었는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200년간 성서가 그리스어로 변역이 되었을 당시에 천주님의 이름이신 이것을 ‘키리에’(주님)이라고 번역하였으니, 이것이 ‘아도나이’ 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종도들이 그러한 관습을 따랐기에,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때 종도들은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 이라는 의도로서 부른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만약 어느 누구든지 거룩한 이름이나 다른 거룩한 단어를 아무런 존경심도 없이 그의 대화 속에서 섞어 쓰는 나쁜 버릇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이러한 나쁜 습관을 이기기 위해서는 강렬하게 맞써 싸워야 합니다. 매 시간 그가 행한 일을 보속함으로써, 그리고 매번 기도로써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나쁜 언어 사용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면서 고의적인 그의 입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나쁜 습관을 극복하려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한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대죄를 완전히 범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충직하게 이러한 습관을 맞서 싸우면, 그리고 이러한 나쁜 언어로부터 벗어난다면, 완전한 동의가 부족이 되어 소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즉각적인 보상과 기도로써, 거룩한 이름의 영광과 이웃에게 대한 교훈을 위하여 이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승리를 얻게 됩니다

거룩한 이름을 불러 일으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천주께 약속할 때이며, 그리고 이것을 ‘서원’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모친인 교회는 항상 성서 복음상의 세 가지 서원에 대하여, 또는 오히려 세가지 성서 복음상의 권고를 준수하라는 서원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다른 서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포로 구원을 위한 자비의 성모회’ 회원들은 만약 타인을 구령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들을 무슬림의 노예로 주는 서원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자신의 몸을 내주는 거룩한 교환을 합니다. 또한 예수회는 전교(傳敎)의 서원을 하는데, 교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 전교 사업을 하러 갑니다. 예수회 초창기에 많은 거룩한 예수회원들은 매우 어려운 전교활동을 하였는데, 성 요한 데 브레베우프 같은 성인들은 캐나다에서 치명자로 죽었습니다. 서원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사제와의 분명한 사전 약속이 없다면, 신자들은 서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서원을 천주께 드리는 공식적인 약속이기 보다는 단순히 ‘좋은 결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토마스 성인은 서원의 좋은 점을 설명하니, 이 서원이란 매년 단지 나무의 열매만을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는 온전한 나무 한 그루를 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온전한 나무 한 그루 전체를 주는 사람은 열매에 대한 바로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 열매들은 나무를 준 바로 그 사람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성서 복음상의 서원으로서 그 사람은 더 이상 어떠한 것도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이고, 심지어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도 소유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입니다. 천주님의 영광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약속했던 것에 대해 천주님을 촉범할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리고 서원은 또한 우리가 약속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킵니다. 특히 순명의 서원을 통하여 세 가지 공로를 얻게 됩니다. 그 자체 좋은 행실의 공로(기도)와 순명의 공로 그리고 서원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서원을 못 이룬다면, 삼중의 죄를 범합니다. 그 자체 의무의 실패, 순명의 실패, 서원을 깨뜨린 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적에,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애정을 신앙과 자비로써 주님의 것으로 순응시키고 그래서 우리의 언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메아리가 되어야 되며, 우리의 대화는 선하고 교훈적이어야 합니다. 주 이르시되,”선인(善人)은 그 마음에 선한 것 쌓은 데서 선을 발하여 내고, 악인(惡人)은 그 악한 것 쌓은 데서 악을 발하여 내니, 대개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함일새니라.“(루까6:45)


만약 주께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시면, 우리의 대화와 언어들은 거룩해야 되고 저속해선 안됩니다. 언어는 선하고 교훈적인 화제가 되어야 하고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삼가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천주님의 거룩한 이름 사용에 대하여 명령하지만, 또한 이 계명은 대체로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참 가톨릭신자의 대화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언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언어 안에서 우리 주님을 촉범하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신성모독, 맹세, 저주, 더러운 말, 상처 주는 (모욕적인)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언어는 거룩하고 깨끗해야 합니다;”누가 너희 중에 지혜롭고 민첩한 자이냐? 그는 자기의 행하는 것이 지혜에서 말미암은 양순으로써 (된다는 것을) 착한 행실로써 보일지니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치열한 질투와 투쟁욕을 너희 마음 속에 품었다면 자랑하지 말며, 또한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자 되지 말지어다. 대저 이와 같은 지혜는 위에서부터 내린 것이 아니라 오직 지상적 것이며, 욕욕과 마귀로 말미암는 것이니라. 대게 질투와 투쟁이 있는 그곳에는 불목(不睦)과 온갖 악행이 이루어지느니라. 그러나 위로부터 내린 지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결백하며, 다음으로는 평화를 즐기며, 잘 양보하며, 남의 청을 잘 들어주며, (선에 동의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로 가득차며, 편벽됨이 없으며, 겉꾸밈이 없느니라.“(야고보3:13-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을 호흡하는 완벽한 말씀인 성부의 말씀, 모든 사물 위에 계신 천주의 사랑이자 이웃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주님의 말씀은 은총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이가 예수를 증거하며 그 입으로 발하신 아름다운 말씀을 기이히 여기며…“(루까4: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실 적에, 그러면 우리의 대화는 주님께 가치가 되니, 바오로 성인께서 티토에게 이르기를;”그대 자신의 착한 태도를 모범으로 뵈어 주며,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완전무결하게 하고 진중하게 할 것이요, 그 말은 건전하고 비난할 곳이 없도록 할지라.“(티토2:7-8) “어떠한 일을 하든지, 혹은 말로나 혹은 행실로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명(聖名)을 의지하여 행할지라“(콜로새3:17)

천주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입을 사용하도록 하고, 참된 가톨릭인의 입에서는 부적절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합시다. 이러한 언어의 조심은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부모가 나쁜 말을 전혀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그리고 천주님의 이름을 존경을 다하여 사용한다면 자녀들은 쉽사리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대화를 통해 구별할 것이고, 옳지 않은 대화를 하는 이들을 자연적으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들이 집에서 배우지 않았던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서 “너 그 말 어디서 배웠니?” 말하게 되면, 그 자녀는 ‘그와 같은 말을 쓰는 아이들을 피해야 되겠구나’ 하고 즉각 깨달케 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당신의 모범과 기도로써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가 항상 훌륭하고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게 하소서! 복음서에서 성모님은 언어 사용에 있어 극도로 말을 아끼지만 지혜로 넘친 말을 사용하신 것은 항상 본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이 조금 더 말씀을 하신 유일한 때는 마니피캇에서 행하신 천주님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천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인식하고 노래하시길:”내게 크게 베푸신 자는 전능하시고, 그 이름이 또한 거룩하시도다.“(루까1;49)

천주님의 성명,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이여, 영원히 축복받으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