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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9계명 -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2016-06-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6-13



제 9계명 -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2016-06-1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두 계명,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 그의 아내와 하인, 소, 나귀 등 네 이웃의 어떤 재산도 탐내지 말라”(출애굽20:17)라는 계명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비록 이 계명은 언뜻 보기에 단지 한 계명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웃 아내에 대한 욕망의 본질이 이웃의 물건에 대한 욕망의 본질과 확실히 다르게 때문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교회의 전통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제 6계명과 제 7계명으로서의 두 개의 서로 뚜렷한 의무, 두 개의 뚜렷한 계명을 보게 됩니다.


 처음 십계명을 시작할 적에 개신교인들은 제 2계명으로서 “어떤 물건 새긴 것이나 그린 것도 도무지 만들지 말찌라.“(출애굽20:4)를 보여주지만, 사실 이 계명은 제 1계명으로서 아주 똑같은 죄, 우상숭배금지의 죄를 금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제 1계명과 분리되지 않는 계명입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이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그들을 숭배하지도 말찌며, 그들을 섬기지도 말찌니“(출애굽20:5) 여기서는 반대로 욕정의 죄는 탐욕의 죄와는 다르다는, 간통죄가 도적질과는 다른 만큼 그 차이를 분명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두 개의 다른 의무, 그리고 그래서 두 개의 뚜렷한 계명에 대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명에 관한 전통적인 분류를 지켜야 하고 개신교를 모방해선 안 됩니다. 불행히도 많은 (가톨릭) 현대주의자들의 교리문답은 개신교가 의도하는 분류를 따르는 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역자 주: 십계명 분류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릅니다. 본래 십계명은 번호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기에, 개신교는 필론의 분류를, 가톨릭은 아우구스투스의 분류를 따릅니다)


 그래서 제 9계명은 욕정의 죄를 금합니다:”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여기서의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것을 바라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천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거룩함 (잘못된 외적인 행동을 피하는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내적인 거룩함 (그릇된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조차도 금함)도 요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매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이르신 바, 간음치 말라 하심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란한 마음을 두고 여인을 쳐다보았으면 이미 제 마음 속에 그 여인을 간음하였느니라.“(마테오5:27-28)


 악한 생각은 악한 행동을 이끕니다. 그리고 선한 생각은 착한 행실로 이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말씀하시길, “성인은 그 마음에 선한 것을 쌓은 데서 선을 발하여 내고, 악인은 그 악한 것 쌓은 데서 악을 발하여 내느니, 대개 마음에 쌓인 것을 입으로 말함일새니라.“(루까6:45)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뿌리에 박혀있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악한 행실만을 피할 뿐만 아니라, 악한 욕망과 악한 생각을 피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매,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니, 대개 악한 생각과 살인함과 간음과 사음과 투도(偸盜)와 망증과 설독함이 마음에서 발하여 나느니,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요, 손을 씻지 아니하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느니라.“(마테오 15:18-20)


 눈은 영혼의 창입니다. 눈을 통하여 악한 생각과 욕망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시길,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네게서 멀리 버리라. 한 눈을 가지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으니라.“(마테오18:9)

 거룩한 욥은 이미 구약에서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내가 내 눈과 언약을 했으니, 어찌 내가 처녀를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야훼께서 내리시는 것은 무엇이며 높은 곳에 계신 전능자(全能者)께서 주신 기업이 무엇이겠느뇨?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않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않느냐?“(욥기31;1-4) 욥의 말에서 나온 이러한 말들은 아주 대단한 정결의 덕행으로서 단지 행위만이 아니라, 생각에서의  덕행인데 이는 신앙 정신의 열매인 것입니다. “야훼께서 자신의 길을 고려하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 천주께서 모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면서 삽니다. 천주께서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밤과 낮에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천주 대전에 보이지 않는 조물이란 도무지 없으며, 우리가 셈 바쳐야 할 천주 대전에는 모든 것이 다 알몸으로 나타나느니라.“(헤브레야4:13) “사람은 일어나는 사물을 보나, 천주께서는 마음을 보시니라”(1sa16:7)


자, 현대 세상에서는 상상력을 거부하는 것 같이 눈으로 보는 불결함이 너무나 많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포르노가 공개적으로 길에서, 신문, 잡지, 인터넷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널려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되는 것이요, 제 9계명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비록 덜한 불결함은 소죄일지는 모르나 (유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빼고) 의도적이고 이에 몰입하는 핵심적인 호색잡지는 설령 이것이 제 6 계명을 거스르는 외부적인 행동이 따르진 않더라도 두말할 나위 없이 제 9계명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이에 관련된 것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눈이 만일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버려라. 한 눈을 가지고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 지옥에 가는 빠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는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이 꺼지지도 아니하느니라.“(말구9:46-47) 우리 주님은 “눈을 감으라” 하지 않고 “눈을 뽑아 버려라” 했습니다! 만약에 텔레비전이 여러분에게 악한 표양을 보인다면, 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나의 부친은 의도적으로 집에다가 TV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현명한 결정에 천주께 감사 드립니다. 부친께서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3명의 아들이 사제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TV에 해당되고, 인터넷에도 해당이 됩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많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수단이 되었기에 반대할는지 모르나, 그러면 다른 일에, 즉 불필요한 일에 절대적으로 사용하게 해선 안됩니다. 쓸데없는 검색은 피해야 하고, 분명한 외설을 피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절제와 극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빠질수록, 자신의 죄를 배상하도록 해야 하고 미래의 죄를 예방하자면 자기 자신을 이길 필요가 있습니다.


 성신회 총장으로 계실적에, 르페브로 대주교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떠났거나, 심지어 총장상인 대주교가 있을 적에도 몇몇 현대주의 사제들이 TV가 켜진 방에 있으면서 저녁기도를 위한 성당에는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주교께서 SSPX를 설립했을 때, “우리의 TV는 감실이다.” 하시면서 사제들의 숙소에 TV를 두지 않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TV 앞에 있을 때에 우리는 감실 앞에서 보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제 9계명을 거스르는 죄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입니다. TV 앞에서 또는 인터넷으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 대신에, 또는 이러한 현대의 방송 매체로 부터 나오는 독극물을 우리 영혼에 붓는.... 한정된 시간을 남용하는 것 대신에, 우리가 복된 성사를 묵상할 때에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묵상은 초자연적인 진리 앞에서의 사랑스런 표정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의 기쁨으로 영혼을 채웁니다. 아르스의 성 Curé가 어느날 교회 좌석에 그냥 앉아 있는 어느 남자를 발견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무얼하고 계신가요?” 남자가 대답하길,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고, 주님은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이것이 묵상입니다. “주 안에서 기쁨을 느낄지어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청하는 바를 너에게 주시리라.“(성영36)


 부모들은 자녀들을 감독할 필요가 있고, 부모의 통제 없이 자녀들이 접근하게 해선 안 됩니다. 참으로 정욕의 상처가 있으니, 심지어 성세로서 원죄를 씻어냈어도 남아 있습니다. 성세는 과정을 치료하지만, 그러나 그 치료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치유하기 위해서 또는 힘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조심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어린 나이 때에 부모들의 절제로부터 배우는 자녀들은 복이 있습니다! 저러한 통제 없이 자녀들을 방치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잔인한 것이며 부모의 의무를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기에, 나쁜 생각을 밀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 항상 그곳으로....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세요. 채찍으로 찢겨진 주님의 온 몸을 묵상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죽으신, 못으로 뚫리신 그분의 발과 손을 묵상하세요. 여러분을 위한 사랑으로 인해 창으로 뚫린 성심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묵상하시고, 주님과 성모님이 느꼈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그러면 악한 생각이 빠르게 생각으로부터 사라질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에 대한 치료책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생각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독서를 통제해야 하니, 여러분이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양서를 읽고 성인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성인들의 저작을 읽고, 특히 모든 복음서를 읽기 바랍니다.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어울립니다. 인간은 단지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며, 자신의 이성으로 욕망을 지배해야 합니다. 모든 운동은 어떠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행동 역시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행동은 목적을 알고 있는 이성에 속해 있고 일부러 이 목적을 원합니다. 우리 열정의 통제를 버리려고 하는 우리 마음이 바로 그것이고, 그리하여 열정이 잘못되고 있음을 통제하기 보다는 이러한 열정을 그대로 놔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우리의 행동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주님께 우리가 다가갈수록 할 것입니까? 아니면 피조물에 의해 이끌려, 통제되지 않는 쾌락에 의해 우리 자신을 타락하게 할 것인가요?


 이냐시오 성인께서 권고하신 바처럼, 양심을 성찰하는 관습은 죄를 피하기 위하여, 특히 제 9계명과 제 10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피하기에 매우 유익한데, 매일 아침에 우리가 거룩한 길로 나아가기로, 천주께 가까이 가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가도록 단호한 결심을 다지며, 그리하여 주께서 점점 더 우리 안에서 지배하시도록, 그리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여 우리가 그러한 목적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우리 행동을 반성하여 우리가 행동의 곧은 선으로부터 이탈했는지 점검하고 그날의 실패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오로지 조금씩 바라보면서, 이러한 실패의 사례를 찾고, 앞으로는 그런 것을 피하면서 그리고 그 다음날은 점점 나아지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하여 실패가 점점 줄어들도록 하십시오.


 또 다른 좋은 관습이란 천주께 도움을 요청하거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며, 그리고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천주님을 바라는 욕망, 또는 많은 은총을 구하거나 혹은 우리가 주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과 주님의 관심 안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등의 소박한 말로 사랑하는 천주께 말씀 드리는 것 같이, 우리 마음이 예수 성심을 향한 사랑의 작은 화살과 같은 작은 ‘애절한 기도’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화살, ‘거룩한 열망’은 우리 마음을 선하고 거룩한 생각에 많은 집중을 하게 하고 위험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자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뜻과 온전한 영신과 온전한 힘으로”(말구12:33) 천주를 사랑한다면 그와 같은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르치길, 애정과 욕망은 마음이 원한 목표의 이해를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거룩한 것에 두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거룩한 욕망에 매달릴 것입니다.


 제 9계명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완벽한 순명의 사례는 티 없으신 탁월함에 빛나는 성모 마리아이시니, 그분은 정결과 모든 덕행을 거스르는 최소한의 소죄조차도 결코 범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천주께서는 이러한 티없는 무결(無缺)을 사랑하셨습니다! 천주님은 지극히 선하심의 바로 그 원천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회개하는 영혼을 사랑하시는데, 이러한 영혼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이 동정이신 자신의 모친을 사랑했음을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제 9계명과 다른 모든 계명을 항상 점점 더 잘 지키도록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중재를 통하여 천주님의 사랑을 요청하고 그리하여 우리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비오10세회 아시아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