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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의 결과와 은총의 필요성(2016-07-1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7-17

 

죄의 결과와 은총의 필요성(2016-07-16)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십계명은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즉 천주님의 자녀로서 초자연적인 생명을 이곳 지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즉각 반론이 제기됩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따라가기는 너무나 힘듭니다. 그 누구도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루터가 지나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흔히 더 나아가 말하길, 천주님이 율법(계명)으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계명을 지키게 함으로써 사람을 구원시키려는 첫 계획을 세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개신교인에 따르면, 천주님은 새로운 계약을 세웠으니, 율법(계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니,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율법(계명)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개신교인의 접근법 안에는 악마의 커다란 기만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진리는 두 개의 간단하고 핵심적인 진리로 요약됩니다. 1/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르시길, “나 없이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왕15:5) 2/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하여 우리는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만 한다. 같은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길, “나는 포도나무줄기요, 너희는 그 가지라. 내게 머무는 자는 나 또한 저에게 머무르매 많은 실과를 맺느니라.“(요왕15:5) 바오로 성인께서는 이르시길, “나를 견고케 하여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나 모든 것을 능히 할 수가 있노라.“(필립피4:13) 


개신교인들의 접근법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이해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길, 구약의 율법(계명)은 우리가 세 가지 종류의 계율을 구별해야 한다고 합니다.(열왕기 상 8:58) 1/첫 번째 계율의 종류와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과 같은 도덕적 계율입니다. 2/둘째로, 전례의식의 계율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 희생제사, '깨끗하지 못한 음식’을 피하는 것 등이 포함된 많은 목욕, 몸의 청결 등이 있고, 3/세 번째 계율은 ‘치리적(治理的) 계율’이라고 부릅니다. 치리적 계율은 특정한 죄에 대해 특정한 처벌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도덕적 죄들은 사형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우상숭배, 신성모독, 살인, 간통, 동성애 등이 그렇습니다, 이보다 낮은 처벌로서 도둑질이 해당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길, 전례의식에 관한 계율은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의 전례는 신약의 새로운 전례, 칠성사,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로 대체됩니다. 미사의 희생제사는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로 표현되고 예표(豫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세는 할례를 대신하고, 보속은 구약의 세정식(목욕)을 대신하며,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는 구약의 모든 많은 희생제사를 대체합니다. 이러한 영역 안에서 신약은 표상(表象)으로 나타난 실체를 가져옴으로써 ‘구약을 실현’하며, 그러한 실체는 (그림자와 같은) 현상을 물러나게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 오심을 부인하는 그런 등가(等價)의 효과가 됩니다. 로마를 가르키고 있는 도로 표시판은 로마 밖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여러분이 로마에 도착할 때는 이와 같은 도로 표시판은 로마 안에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로마에 있지 않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구약의 전례는 메시아께서 오심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분이 이미 오셨음을 은연 중에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바오로 성인은 “만일 너희가 할손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아무런 신익(神益)도 주시지 못하시리라.“(갈라타5:2) 이것이 바오로 성인께서 우리가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갈라타5:18) 하셨을 때 주요 요점입니다. 성인께서는 교회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구약의 전례를 부과하려고 한 ‘바리세인들의 이단’(종도행전15:5)을 반박하십니다. 


두 번째 종류의 계명은 신약에 와서 완화됩니다. 예를 들어 간통을 범한 여인이 그리스도 앞에 불려 나왔을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왕8:7) 그리고서 주께서 돌을 던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여인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나도 너를 죄로 판단치 않을 것이니, 가서 이후로는 다시 범죄치 말라.“(요왕8;11)  이는 사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성 바오로는 친히 가르치시길, “상관을 두려워함은 선행 때문이 아니라 악행 때문이니라. 너 권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면 선을 행하라, 이에 너 저들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저 상관은 네 유익을 위한 천주의 심부름꾼이니라. 그러나 너 악을 행하였으면 저를 두려워할지니, 대저 저는 연고 없이 환도를 차고 있는 것은 아니니라.“(로마13:3-4) 사형은 신약시대 당시에 좀 더 중한 범죄 이를테면 냉혈한 살인자에만 적용됩니다.


세 번째 종류의 계명은 도덕상의 계명으로서 신약에서 폐기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좀 더 높은 완벽할 정도로 격상됩니다. 산상수훈은 이를 보여줍니다. “옛 사람에게 이르신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 받을 죄인이라 함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제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심판 받을 죄인이요,“(마테오5:21-22)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는 자는 죽이지 않기 위해 계명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높은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주님 이르시길, “옛 사람에게 이르신 바, 간음치 말라 하심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란한 마음을 두고 여인을 쳐다보았으면 이미 제 마음 속에 그 여인을 간음하였느니라.“(마테오5:27-29)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십니다. “음탕함과 온갖 정결치 못한 것이나 탐욕은 너희에게 있어 말에라도 오르지 않게 하라.. 모든 음탕한 자와 정결치 못한 자와 탐욕 많은 자는 이 우상을 숭배하는 자와 같은 자로서 그리스도와 천주의 왕국에 있어 상속을 받지 못하느니라.“(에페소5:3, 5) 그래서 도덕상의 계명은 아직도 신약에서도 묶여 있는 것이며, 심지어 더 높은 완벽함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을 속이는 것은 바로 저들이 바오로 성인의 말씀, “우리는 법률 아래 있지 않다“(로마6:14 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부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이 말씀들을 설명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명하시길, 우리가 계명 아래에 있지 않음은 계명을 위반해도 된다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성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계명을 지키는 데에 힘을 부여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은 계명을 준수할 힘이 없고 계명은 저들을 견책하니, 왜냐하면 저들이 계명(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명에 짓눌린 것처럼 느낍니다. 그것이 ‘계명 아래에”(짓눌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으로 인해 힘을 받은 이들에게는 계명이 친구가 됩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킵니다. 실제로 계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친구로서 이들과 함께합니다. 잠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계명은 등불이요, 법률은 빛이라“(잠언6:23) 그들은 계명에 짓눌리지 않고, 계명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계명과 함께’(코린토 전9:21)합니다.


이것은 바오로 성인께서 분명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악에 지배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이미 법률안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총 아래 있음이니라. 그러면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이뇨? 우리는 법률 아래 있지 않고 오직 성총 아래 있으므로 범죄할 자유가 있겠는가? 아니로다. 너희가 순명하기 위하여 어떤 이에게 너희 자신을 노예로 바치면 너희는 그의 노예가 되어 순명하게 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혹시 너희 자신을 죄의 노예로 바쳤으면 죽음에 이를 것이요, 혹 순명의 노예로 바쳤으면 의화(義化)에 이르리라. 너희는 죄의 노예이었으나, 그러나 너희는 너희게 인도된 교리의 형식(그리스도적 교리)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였으니, 천주께 감사할지니라. 그런데 죄에서 해방된 너희는 의덕의 종이 되었도다. 나 너희 인간적 허약한 육체 때문에 인간적 상례를 따라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가 (이전에) 불법하게 살기 위하여 너희 지체를 부정(不淨)과 불법에 봉사하기로 바친 것과 같이, 이제는 성화되기 위하여 너희 지체를 의덕에 봉사하기로 바칠지니라.“(로마6:14-19)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의화(義化)되어 성화(聖化)로 이끄는” 것임을 이 구절에서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화’가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명에 순명하는 것이 의화 다음에 오는 것이지 의화(義化)에 앞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화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계명을 지킬 힘을 받는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신앙으로 인하여 구원되었음은 이 성총으로 말미암음이며, 또한 이는 너희에게로부터 조차 온 바가 아니니, 대저 천주의 선물인 연고니라. 또한 선행으로부터 조차 온 바도 아니니, 이는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를 위함이니라. 대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선행을 위하여 조성함을 받은 천주의 조물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선행 안에 거닐으기를 위하여 천주 미리 갖추어 놓으신 선행이니라.“(에페소2:8-10) 선행이 의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화가 되고 나서 착한 행실이 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는 초자연적인 목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활, 천주님의 자녀로서 천주님의 생활과 행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이 인간의 본성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천주님의 성총, 우리가 받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주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심지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도 그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천주님의 양자(養子)로서의 생활입니다. 이와 같은 생활은 우리 본성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주님의 자녀로서 값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유일한 독생 성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 은총이 우리가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일곱 가지 ‘성신의 은총’의 원천입니다. 이 은총이 우리의 본성을 이러한 초자연적인 생활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연적 계명조차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이 두 번째 이유는 성모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하신 성총으로 인하여) 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원죄를 자기고 태어난 우리 모두에겐 해당이 됩니다. 실제로 죄는 세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점, 이로 인한 처벌, 그리고 상처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죄의 첫 번째 결과는 ‘죄의 오점’이다. 이것은 마음의 어두움이며, 성화은총의 박탈이다. 죄의 행동은 지나가나, ‘죄의 상태’는 남는다. 그곳에서 영혼은 성화의 은총을 빼앗긴다. 천주님을 거스르는 반란의 상태이며 영신의 빛을 박탈당하고 어둠 속에 있는 상태다. 그래서 ‘오점’이라 부른다. 이러한 죄의 첫 번째 결과는 성세로 ‘씻겨진’다. 만약 사람이 성세 후에 대죄를 지면, 이러한 죄의 오점은 보속의 성사(고해와 보속)으로 깨끗해진다. 실제로 이러한 성사들은 성신의 빛으로 영혼을 채워주시어 죄의 어둠을 쫓아내는 성신의 감미로운 현존으로 성화의 은총을 돌려준다.


죄의 두 번째 결과는 벌을 초래한다. 정의는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보상하도록 요구하며, 처벌이 정의의 요구사항을 채워준다. 천주 선하시니, 악이 퍼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천주께서는 악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지 않도록 하신다. 정의는 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죄는 처벌이 마땅하다. 간단한 사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도적질 했다면,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가 반드시 그대로 갚아야 한다. 깨뜨린 것을 복구할 필요가 있다. 성세는 모든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처벌 모두를 용서한다. 그러나 만약 성세 후에 죄에 빠지면 그러면 보속의 성사가 죄를 용서하는 것이지만 죄로 인한 벌을 모두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보속의 필요성이 있으니, 벌로 인한 것을 갚아야 한다. 우리의 보속은 주님의 희생, 천주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즉, 벌에 대한 배상을 하는 그 속죄의 희생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일치됨으로 가치가 있다.


죄의 세 번째 결과는 매우 중요합니다: 죄의 상처입니다. 죄는 우리 본성 안에서 상처를 괴롭힙니다. 원죄는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상처를 건드리고 우리 자신이 짓는 죄는 그 상체에 더 보탭니다. 인류를 돌아보면, 그는 악과 죄의 양으로 인해 압도당할 것입니다. 인간이 천주님에 의해 선하게 창조 되었다면 어찌 그리 쉽게 죄를 짓는 것이 가능한가요? 실제로 천주님은 인간을 처음 조성할 적에 선하게 만들었지만 첫 인간인 아담이 자신의 죄로, 원죄로 자기 자신과 후손들을 침몰시켰습니다. 우리는 첫 아담이 도입한 악을 치유하기 위해선 새 아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성총은 우리의 본성을 치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전능하신 천주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제 2위격이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치유(治癒)하는 데에 강력하십니다. 주님의 권능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모친이신 복되신 마리아께 주신 탁월한 은총이니, 성모님을 주님께서 원죄의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하시어 성모님이 ‘원죄로부터 보존되신’분이시며, 그리하여 무염시잉태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만이 유일하게 결코 원죄를 지지 않았습니다. 죄의 상처도 갖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무염시잉태는 저 탁월한 치유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예방하는 치료책입니다.


죄는 무엇으로 구성되나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명하기를, 악에 이끌리는 어떤 특정한 경향에서 구성되는 네 가지가 겹친 상처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의 기능 안에 있는 어떤 무질서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무지로 상처받는다. 우리의 의지는 악의로 상처받는다. 우리의 강렬한 취향은 약함에 의해 상처 받고, 우리의 정서적인 취향은 정욕으로서 상처받는다. 우리 지성 안에 있는 무지의 상처는 진리를 얻고자 하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다. 결론을 너무 쉽게 내리거나 이해하는 데에 실패를 한다. 우리 의지 안에 있는 악의(惡意)의 상처는 주로 이기심이어서 천주님을 우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우선한다. 약함의 상처는 특히 어려움에 있어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려는 힘의 결핍을 의미한다. 정욕의 상처는 세속적인 물건과 쾌락을 향해 지나친 경향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쉽사리 어떤 사례에서 이러한 상처를 보게 된다. 술에 취한 사람은 너무나 많이 다시 취하는 경향을 가진다. 아이의 첫 번째 거짓말은 항상 어색하지만, 그 다음은 쉽게 거짓말하게 된다. 폭풍우로 인해 나무가 한쪽으로 넘어질 때, 농부는 이 나무를 곧장 뒤로 밀어내어 반대편에서 나무를 당기는 밧줄을 둔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할 적에, 규율과 고행의 실천으로 이러한 악한 경향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누 만일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자기를 끊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루까9:23)


성세 성사로써 우리가 말했듯이, 죄의 오점은 씻겨지고, 죄로 인한 벌이 완전히 면제되고 죄의 상처의 치료과정은 시작됩니다. 훌륭한 의사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를 깨끗이 하고 상처 위에 약을 발라 주며 붕대로 감싸고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길, 이제는 조심하거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데세다 우물에서 치료한 남성에게 이르시길, “너 이미 나았으니, 다시는 범죄치 말라. 두리건대 무슨 더 언짢은 것이 네게 당할까 하노라.“(요왕 5:14) 많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성세의 은총에 충직했으며 교회 역사를 통하여 많은 성인들 또한 그러했으며 이를 테면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가 그랬습니다. 성세 후에 만약 죄에 도로 떨어지면, 상처는 다시 열리고, 그리고 그가 자주 죄에 떨어지면 “그 사람의 나중은 처음에 비겨 더 언짢으리라“(루까11:2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도(宗徒)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깨어 기구하여 써 유감(미혹)에 들지 아니케 하라. 영신은 과연 날래나 육신은 연약하도다.“(마테오26:41)


이러한 상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이 필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초자연적인 행복에 우리가 부름을 받기 위해서 2/우리 본성 안에 있는 죄의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치유하는 은총이며 끌어올리는 은총입니다. 죄의 상처로부터 우리의 본성을 치료하고 천주님의 어린 아이 생명으로 끌어올립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치료되어야 할 필요성도 없이, 그리고 보속이나 성사도 없이 천주님의 자녀의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는 척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그리고 보속이나 성사 없이도 타고난 선함을 성취하기에 충분하다는 척하는 것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지 않고 죄로부터 치료된다는 것은 불가능할겁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하니, 그러면 어떻게 그 은총을 얻을까요? 기도와 성사입니다! 기도와 성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주기 위한 두 가지 수단입니다. 그러나 요청 받지 아니하고 주께서 주시는 많은 은총이 있습니다. 사실, 만약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은총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회복의 길 위에서 시작도 못할 것입니다. 첫 번째 은총은 항상 공로가 되지 않으나 사람은 반드시 은총에 협력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이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을 모두 예상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크게 속이게 됩니다. 훌륭한 전문가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재능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 재능을 결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저주를 들을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쓸데없는 종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절치통곡함이 있으리라.“(마테오25:26,30)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강론에는 많은 교리가 있었지만,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요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훌륭한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도덕적인 계명을 실천할 수 있고,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를 행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은총은 죄의 네 가지 겹친 상처로부터 우리를 치료하며 우리의 본성을 천주님의 어린아이 생명으로 이끌어 올립니다. 열렬한 기도와 성사로써 치료하고 끌어올리는 은총을 풍성히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에게 기도합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풍성하게 성총을 주실 것이고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충실히 협력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가게끔 하실 것입니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

(성비오10세회 아시아관구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