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리

Home > 신앙과 교리 > 미사강론

제목 은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성신강림 후 제9주일(2016-07-1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7-17

 

 



은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성신강림 후 제9주일(2016-07-1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하니, 즉, 우리 주님의 도움으로 먼저 원죄와 우리 과거의 죄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두 번째로는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천주님의 자녀의 생활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서, 천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은총은 우리의 본성을 치료하고 끌어올립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작용하나요?


바오로 성인은 로마인들에게 서간을 쓸 때 답변을 주었습니다:“우리에게 베퍼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입(注入)되었느니라.”(로마5:5)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명하시길, 사랑은 성신의 가장 높고 최상의 선물이지만 다른 모든 덕행과 함께, 초자연적인 덕행, 소위 ‘주입된 덕행’과 함께 오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덕행들은 성신에 의해 우리 영혼에 부어진 (주입된) 덕행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처는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이라는 점을 여러분은 기억합니다. 성신은 우리에게 선으로 이끌리는 경향을 주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치료합니다. 이러한 덕행들은 분명히 모든 영역에서 선을 행하려는 경향입니다.


성신의 으뜸이자 근본적인 선물은 ‘성화(聖化)의 은총’인데, 이 은총은 우리 영혼의 바로 그 핵심 안에서 기품을 갖추게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토마스 성인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갈라타인들에게 글을 씁니다: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느니라.”(갈라타2;20) 몸의 일부가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몸의 이루어 생활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몸의 일원은 그리스도 생활을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성화의 은총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몸에 ‘접목’되어 있습니다. 천주성의 수액(樹液)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고 우리가 의롭게 되어 천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 줄기요, 너희는 그 가지라. 내게 머무르는 자는 나 또한 저에게 머무르매 많은 실과를 맺나니”(요왕15:5)


영혼의 핵심 안에 흐르는 이러한 훌륭한 기품은 우리의 능력 안으로 흘러들어와 ‘주입된 덕행’, 신덕, 망덕 애덕과 그리고 모든 주입된 덕행과 함께 그곳에서 꽃을 피웁니다. 이러한 덕행으로서, 특히 사랑으로써 우리의 의지는 천주님을 거스르는 반란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천주님을 모든 사물 위에 두고 사랑하며, 그러므로 ‘열매를 맺은’ 가운데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거짓으로 말하듯이, 이것은 단지 ‘선언에 불과한 의로움(의화)’ 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신덕으로 인하여 우리 (가톨릭신자)는 천주님에 의해 계시(啓示)되고 그분의 교회인 가톨릭교회가 가르친 모든 진리를 믿고자 합니다. 망덕으로 인하여 우리는 천국을 갈망하고, 그리스도의 도움 안에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신뢰를 가지게 됩니다. 애덕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사물보다 더 천주님을 사랑하고 천주님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선에 이끌림으로써, 이러한 덕행은 죄의 상처인 악의 경향을 교정함으로써 날마다 힘을 얻게 되어 치료가 됩니다. 이러한 덕행들은 조금씩 악의 경향을 줄이며 상처를 치료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피하고자 조심한다면 날마다 힘을 얻어 치유하게 되고 또한 우리는 이러한 덕행들이 천주님의 자녀들이 지니는 덕행임을 알게 됩니다. 올바른 자녀는 자기 아버지를 무척 신뢰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믿으며, 또한 자기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아이는 자기 능력에서 한참 벗어난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신뢰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 산속에 사는 사촌들을 방문하였고 우리 아버지는 나를 아버지의 어깨에 태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산이라도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천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동등한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계신 성부에 대한 아이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덕행들, 우리 영혼 안의 은총의 효과는 우리의 본성을 치료하고 끌어올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생활의 모든 영역 안에는 도덕적 덕행이 있습니다. 토마스 성인은 이 덕행들을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이곳에서 모든 것을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습니다. 신중, 정의, 강용 그리고 절제라는 사추덕(四樞德)을 몇 가지 부속된 덕행과 함께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입된 신중함의 덕행으로써 우리는 천주님의 계명에 따라 궁극적인 목적 즉, 천국을 향하여 올바른 수단을 선택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님을 향해 자기들의 생활을 교정하지도 하지 않거니와 실생활에서 천주님의 계명을 무시합니까? 초자연적인 신중함은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거니와, 천국의 길을 향하던 성인들을 모방합니다.


주입된 정의의 덕행으로 인해 우리가 은혜 입은 바를 타인에게 주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특히 무엇보다도 믿음의 덕행으로서 천주께 은혜 받은 바를 우리가 흠숭함으로서 천주님을 경배하니, 이는 천주님의 자녀로서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덕행은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고 ‘천주님의 영광’(코린토 전 10:31)을 위하여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부모를 존경하고 합법적인 권위가 있는 이들을 존경하고 모든 합법적인 명령을 따르게 합니다. 저 덕행의 가장 높은 실천은 순명이라는 성서 복음의 권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입된 강용(剛勇)의 덕행으로, 우리는 유감(유혹)에 저항하여서 강해지려하고,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며, 이곳 지상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가운데 선한 모습으로 인내하고 견디어 내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치명자들처럼 신앙을 고백할 용기를 가지려하고, 선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려하고, 악을 추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강용의 덕행이 보여주는 최고의 실천은 순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절제의 주입된 덕행으로 인하여, 쾌락과 안락에 관해 모든 지나침을 피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죄를 배상하기 위하여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부인하고 합법적일조차도 자발적으로 멸시합니다. 절제의 덕행이 보여주는 가장 높은 실천은 세속적인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육체의 모든 쾌락을 멸시함으로써 청빈과 정결 그리고 심지어 완벽한 동정이라는 복음의 권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그러나 신부님, 만약 우리가 이러한 주입된 덕행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아직도 악에 이끌리고 선을 행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그 이유는 바로 저들의 선한 경향과 함께, 이러한 주입된 덕행들은 초자연적인 수준에 있는 것이고, 반면에 악한 경향과 함께 죄의 상처는 자연적인 수준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라 그러므로 더 쉽게 느낍니다. 바오로 성인은 서간에서 이러한 투쟁을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육체는 영신을 거슬러 욕구하고, 영신은 육체를 거슬러 욕구하나니, 그 서로 반대됨은 너희로 하여금 욕구하는 바를 행하지 말게 하기를 위함이니라.”(갈라타5:17) 이러한 주입된 덕행들은 선을 향해 강력한 경향을 지니지만,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부분에서 의식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덕행이 되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혼의 힘이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절한 동기, 초자연적인 동기, 신앙의 동기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과 강력한 자동차를 비교해봅시다. 포르쉐를 비교해보죠. 가속기를 밟을 때 자동차의 힘을 느낄 수 있으나, 기어를 중립에 놓으면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 힘을 가지고 실제 움직이게 하려면, 기어를 넣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엔진의 실제 힘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덕행을 위해 여러분은 신앙의 동기를 가지고, 신앙의 빛으로 살아감으로써 기어를 넣어야 합니다. 성 베드로의 서간에서 이를 꾸준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천주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신다.“를 항상 기억한다면, 하늘에 계신 성부의 사랑스런 눈앞에서 살아가듯이 살아가세요. 그러면 분명히 우리가 많은 악을 피할 것이고 우리의 의무에 훨씬 더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면 만약 아버지가 자기 바로 뒤에 있으면, 그는 옳은 일을 하려고 더 집중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교과 공부를 더 할 것입니다. 천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보시며,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 들으시고,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조차 아십니다. ”천주 대전에 보이지 않는 조물이란 도무지 없으며, 우리가 셈 바쳐야 할 (천주) 대전에는 모든 것이 다 알몸으로 나타나느니라.“(헤브레야4;13)  ”사람은 보이는 사물만 보지만, 그러나 주님은 마음속도 보신다.“(1Sa 16:7)


또한 만약 우리가 천주성자께서 천국에서 내려 오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우리가 죄에 죽게 하여 제 3일에 다시 부활하사, 우리가 새로운 생명 안에서 천주님께 들어가 살아갈 수 있도록(로마서6;4,11) 한 점을 꾸준히 묵상한다면, 만약 우리가 항상 우리 눈앞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보게 되면, 어찌 감히 우리가 새로운 불충으로서 주님의 고통을 추가시킬 수 있는가요? 어찌 그와 같은 생각이 모든 사물에서 천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고, 천주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려하고, 모든 덕행을 실천하려는 우리 안에서 커다란 열정이 불붙지 않으리요? 그래서 훌륭한 가톨릭 가정에서는 방마다 십자고상과 성화(聖畫)가 있고 그리하여 이와 같은 거룩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일어나게 하여 우리를 도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게끔 합니다! 이것이 바오로 성인께서 에페소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너희는 천주의 사랑하시는 자식답게 저를 모범할지어다. 또한 너희는 그리스도 너희를 사랑하사 당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삼아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드리셨음과 같이 사랑 안에 거닐을지니라.”(에페소5;1-2) 모든 완벽한 사랑의 모범으로서 십자기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한 후에 바오로 성인은 계속하여 결론을 끌어냅니다:“음탕함과 또한 온갖 정결치 못한 것이나 탐욕은 너희에게 있어 말에라도 오르게 하지 말아 써, 마땅히 성도답게 할지니라.”(에페소5;3)


바오로 성인은 또한 또 다른 초자연적인 동기를 보여 줍니다:“너희는 너희가 천주의 성전이요, 천주 성신이 너희 안에 거처하심을 알지 못하느냐? 누 만일 천주의 성전을 범하면 천주 그 사람을 멸하시리니, 대저 천주의 성전은 거룩하신 연고니라. 그 성전이 곧 너희니라.”(코린토 전3;16-17) “너희 육신은 천주께로부터 받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신의 성전이며,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느냐?”(코린토 전6;19-20)


바오로 성인은 서간 천체를 통하여 모든 덕행의 실천을 위해 신앙의 이러한 높은 동기를 주십니다. 정확히 이것이 제가 바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주님의 자녀로서 값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은총에 순응하는 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신앙의 이러한 모든 동기를 가지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주입된 덕행을 실천하는 동기는 신앙의 동기이고 그리고서 신앙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이러한 주입된 덕행의 온전한 힘을 느끼고, 선한 일을 하려는 힘을 느끼며, 유혹을 극복하려하고, 자신을 억제하고 고행하려 하며, 천주님의 계명에 대해 충직하고자 하려는 힘과, 성인이 되려는 힘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은 우리의 본성을 치료하고 끌어올립니다. 우리는 천주성부의 자녀로서, 천주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원으로, 성신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살아갑니다.


주입된 덕행은 우리 영혼 안에서 새롭게 분출되는 은총으로 인해, 이를테면 성사와 기도를 통하여, 또한 공로의 열매로서 증가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공로를 세울 수 있고 공로의 증가도 얻습니다. 또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덕행의 실천으로 교감하는 자연적 덕행을 세우고, 이러한 자연적인 덕행은 이성의 빛 안에서 선한 행실을 반복함으로써 정상적으로 습득됩니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오랫동안 연습함으로써 바이올린 연주자가 됩니다. 이성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닌 신앙의 이러한 동기가 빛으로 우리의 이성을 채우고, 천주님을 강렬히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채웁니다. 이러한 주입된 덕행으로 이루어진 선한 행실의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우리 본성의 상처와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자연적인 덕행을 또한 얻습니다. 그리고 같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자연적인 덕행이 커갈수록, 우리의 본성 역시 치유되고 상처는 줄어듭니다.


매우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천주님은 우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감미롭고 부드럽게 우리를 이끌어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주입된 모든 영혼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합니다. 그러나 강요하시진 않습니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에 협력해야 되고 주님이 우리 영혼 안에 부어주신 사랑과 덕행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총에 협력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신앙으로 살아야’(로마1;17)합니다. 우리 생활에서 이러한 신앙의 관점을 가져야하고 신앙을 생각함으로써 이러한 덕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 부어진 사랑과 모든 이러한 주입된 덕행은 우리로 하여금 위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를 선한 행실로 이끕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주님을 위해, 천주께 충성하기 위해, 신앙의 빛 안에서 일부러 선택함으로써 은총에 협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사례에서,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범으로 인해 이와 같은 천주님의 자녀 생활에서 많은 지지와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묵상의 모범이자 신앙과 덕행의 모범이신, 갈멜회의 수호자이신, 갈멜회 성모님의 축일을 지냈습니다. 교회 전례에서 교회는 매일 우리에게 성인이나, 혹은 거룩한 길을 걷는 가운데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어떤 신비를 보여 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천주님의 성총, 치유하고 끌어올리는 은총, 우리 본성의 상처가 치료되고, 우리의 생활은 천주님의 자녀가 되는 생활이 되게 함으로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총과 진리가 충만“(요왕1:14)하십니다. ”우리 모든 이가 그 충만함으로조차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으니“(요왕1;16) 우리는 기도와 성사를 통하여 습관적으로 저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성신을 주심으로써, 우리 영혼 안에 사랑과 모든 주입된 덕행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천주님과 모든 선에 이끌리도록 하시는 성신을 주심으로서, 우리의 악한 경향을 치료하십니다.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도우사,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항상 순명하고, 주님의 선행(先行)되는 은총에 온 마음을 다하여 협조하고,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왕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