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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칠성사(七聖事)에 관한 일반적인 개요(2016-09-10)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9-12




칠성사(七聖事)에 관한 일반적인 개요(2016-09-10)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천국으로 가는 길이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해 그 길을 따를 수 있고, 주님은 그 은총을 주시니, 특히 기도와 성사를 통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에는 은총의 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였으니, 오늘은 성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지혜롭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너무나 풍성하게, 경이롭게 주셨으니, 특히 성사를 통해 주셨습니다. 


성사는 우리의 영혼 구령(救靈)을 위해 은총에 신호를 보내고, 은총을 만들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지각(知覺)표시가 있는 성별화(聖別化)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칠성사(七聖事)를 제정(制定)하셨는데, 그것은 성세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 신품성사와 혼배성사입니다. 성사의 목적이 은총을 주시는 것이기에, 성사는 우리에게 천주 생명을 주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를 주시는 것이니,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사를 제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신호를 제정하실 수 있는 분이요, 성사에 효험을 주시고 영혼구령을 위해 그 성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성사가 주는 신호는 지극히 신성(神聖)하고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의 수단이며, 우리가 천주님을 찾게 되는 수단이고, 천주님과 일치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사의 신호는 거룩한 것에 대한 모든 존경심을 가지고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성사를 훼손시키는 것은 대죄이며, 신성모독의 대죄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방법으로 이러한 성사를 관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는 우리가 그 성사를 값지게 받도록 준비시키고 그 성사 안에 담긴 많은 은총을 구현하기 위해서 의식(儀式)으로 성사를 감쌌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전례(典禮)’라고 합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성 교회는 최고의 기도와 전례를 지켜왔고, 그와 같은 지적은 가톨릭교회의 전례가 위대한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전례는 경이로운 진주를 위한 지극히 아름다운 신전(神殿)과 같습니다. 교회의 옛 정신은 교회 교부 때부터 우리에게 전승된 이 거룩한 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성전聖傳), 위대한 보물입니다. 전례에 대한 현대 교회의 공격은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이러한 교회의 보물을 붕괴시켰고 교회전례를 빈궁(貧窮)하게 만들었습니다. 거룩한 전통으로써, 수세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거룩한 보물의 결실로 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전례의 첫 번째 목적은 거룩한 것을 거룩한 방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전례는 단지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해지는 언어가 문제가 아니라, 라틴어와 같은 신성한 언어는 보다 존경심을 갖게 하고 전례의 주요 목적을  이루게 합니다. (거룩한 언어가) 미사에 쓰이면서 신자들은 쉽게 기도를 따라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성한 신호인 칠성사는 ‘감각(感覺)의’ 신호입니다. 성사는 보고, 들을 수 있으며, 때때로 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신호가 갖는 꽤 중요한 측면입니다. 참 종교인 가톨릭종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종교입니다. 천주성자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 우리와 같은 신체인 감촉할 수 있는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사, 우리 안에 거하셨도다”(요왕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정한 임마누엘(Emmanuel), 우리가 볼 수 있고, 감각으로 느끼며 만져보게 되신 참 천주이십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예수성심에 머리를 기댔던 사랑스런 종도인 성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당초(當初)로부터 계신 바며, 우리가 들은 바며, 우리 눈으로 본 바며, 보고 또 본 바며, 또한 우리 손이 치다루던 바를 생명의 말씀(그리스도)에 대하여 (나 너희들에게 전하노라). 생명은 나타나시니라. 성부께 계셨고 또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보았으며, 이를 증거하여 또한 너희들에게 전하는 바니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또한 들은 바를 너희들에게 전함은 이 너희로 하여금 우리와 더불어 합치하기를 위함이로다. 우리들의 이 합치(合致)는 성부와 및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니라. 우리 이를 너희들에게 써 보냄은 (너희들로하여금즐거워하기를위함이며,또한)우리들의즐거움이창일(漲溢)하여지기를위함이니라.”(요한1서1;1-4)


그래서 예수와 함께 보고 듣고 감각을 느끼는 접촉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계신 천주님께서 행하신 것에 대한 확실함과 그분의 현존이 주시는 큰 위안을 줍니다. 성사는 우리 주님과의 이러한 접촉을 지속시킵니다. 뒤에서 우리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성처럼, 성사를 통하여 우리 주님과 접촉하고 있는 신자들은 커다란 은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사는 세 가지 이유로 보고 듣고 감지(感知)하는 것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칩니다. 1/모든 인간의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감각의 자료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 생각을 추상화 할 수 있고, 그 위에 영적생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인간은 죄 때문에 타락하였고 세속적인 사물을 사랑했기에, 천주께서는 우리가 떨어진 그곳에 눈에 보이는 감각할 수 있는 치료책을 두시어, 이를 영적인 사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3/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주님의 성 육신 때문이다. 인간은 교만으로 죄를 지어 그래서 죄에 대한 치료책은 보이는 사물 안에 즉 저급한 사물 안에 이를 찾는 겸손이 포함된다. ‘주님께로 직접 가는’것을 주장하는 (개신교인) 사람들과 성사(聖事) 동기에 대해 성사의 이러한 감각적인 신호를 거부하는 사람들(현대주의자)은  교만과 죄로부터 우리를 구령(救靈)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까지조차 자신을 낮추신 육화(肉化)되신 말씀에 의해 요구되는 겸손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성사들은 신호입니다: 성사는 주어진 가장 우선적이고 으뜸인 은총을 알려주는데 이 은총은 새로운 계명인 성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입니다. 성사는 효력이 있는 신호 즉, 성사가 신호하는 것에 영향을 끼칩니다. 성사는 성사가 보내는 효력 있는 권능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 안에서 성화은총을 만들고 이를 증가시키기 위해 성사를 사용하십니다. 교회는 가르치길, 성사란 성사가 행한, 즉 은총이 주어진다는 (“ex opere operato”) 바로 그 사실로부터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그리스도의 말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네게 세례를 주노라.” 발음하는 동안에 아기에게 성세의 물이 흘렀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 아기의 원죄가 씻기고, 그 영혼은 성화은총으로 가득 차있으며, 그리하여 그 아기가 천주님의 양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일원이 되고, 성신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음을 압니다!


만약 사람에게 은총에 대한 조당(장애)이 없다면, 은총은 성사 안에서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람이 고해성사 때에 대죄를 숨긴다면, 숨기는 행위는 은총에 장애가 되어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장애(조당)가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그 사람이 조당이 제거된 경우 더 유익하여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사에 열성적으로 다가갈수록, 더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거룩한 모후인 교회가 성사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전례로 훌륭하고 열성적으로 우리더러 받아드리라 준비시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훌륭한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피정에서 잘 준비된 총 고해는 매우 유용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큰 열정으로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 이러한 놀라운 은총의 근원으로부터 은총을 풍성히 받도록 합시다.


성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가요? 성사는 세 가지 영적생활을 의미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칩니다. 첫째, 특별한 은총이니 성사는 특별한 은총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성세성사는 죄를 씻어냄을 의미합니다.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인을 강화시키는데 마치 운동선수가 운동을 위해 (준비운동인)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전투를 위해 성유(聖油)를 받습니다. 종부성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 등으로 양육된 영혼을 먹이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로, 성사는 은총의 원천을 의미하는데, 이 원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 말씀하시길, “우리는 저의 죽음 안에 받은바 세(洗)로 말미암아 저와 함께 묻혔노라”(로마6:4) 견진성사로서 우리는 매우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우리 이마에 바로 그 십자성호로써 표시됩니다. 성체성사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을 분리 제헌하면서, 제대 위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하는 주님의 실제현존을 나타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의 보속과 고통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보속과 고통을 일치시킵니다.


셋째로, 성사는 은총의 최종목적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사가 우리를 이끄는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천국잔치에 참여하기에 필요한 하얀 옷을 우리가 성세 받을 때에 받습니다. (마테오22;12) 혼배성사는 영원한 지복직관이 있게 되는 그곳에서 천주님과의 완벽한 일치인 그리스도와 영혼과의 영적인 결혼을 의미합니다.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세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 진실히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아무라도 만일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능히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라.”(요왕3:5) 이와 같이 성세성사도 그렇습니다.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너희가 인자(人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게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요”(요왕6:54) 만약 사람이 성세 후에 대죄에 떨어지면, 그는 고해성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赦)한즉 사(赦)하여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즉 머물러 있으리라.”요왕(20;23) 만약 주님께서 이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종도(宗徒)들과 주교들 그리고 사제들에게 주셨다면, 신자들에게 쓰이기 위함입니다. 비록 견진성사와 종부성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만약 이 두 개의 성사를 심각한 무시나 경멸로 인해서 받지 않는다면, 그는 죄가 있을 것이며 구령되지 못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품성사와 혼배성사는 각 개인에게 다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전체적으로는 교회에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제가 필요하고, 혼배성사로서 봉인된 훌륭한 가톨릭 가정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르치길, 주께서 요단강에서 성세를 받았을 적에 성세성사를 제정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성신강림절에 견진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최후의 만찬 동안에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하셨을 적에, 열두 종도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저들의 계승자들에게도 주께서 행하신 것을 하도록 하면서, 즉,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성혈로 성변화 시키는 신품성사(神品聖事)를 제정하셨습니다. 가나(Cana)의 혼인잔치에서는 혼배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주께서 종도들을 보내어 환자들에게 성유를 바르라는 사명을 주실 적에 종부성사(終傅聖事)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종도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신 부활 날 고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사를 제정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주님은 성사에 대한 효력을 종도들에게 주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도 덜도 아닌 칠성사를 제정하셨다고 정의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오직 두 개의 성사만 있다고 하고, 저들은 견진성사, 종부성사, 혼배성사, 특히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를 거부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지극히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너무나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며 초대교회의 증언과도 배치(排置)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운동자들에게서 반대되는 오류를 찾을 수 있으니, 성령운동자들은 실제적으로 8번째 성사를 촉진(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수(按手)로써 성신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안수에 의한 성령운동은 1900년 기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성사, 성서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성사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주는 것은 ‘성령(聖靈)’이 아니라,  큰 속임수인 ‘거짓 영’을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서에는 성신이 안수로 인해 주어지는 한 가지 성사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견진성사입니다. 그러나 견진이 모든 이의 안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교의 안수만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종도행전 8장에서 분명히 나오는데, 부제인 필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들을 개종시키고 성세를 주는 장면에서 찾아보지만... 그러나 이는 성령충만함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 그들을 안수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종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오게 해서 안수로 성신을 줍니다. 이것이 견진이니, 견진은 오직 주교만이 할 수 있고, 오직 한번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운동자들이 주는 것은 견진이 아니라, 동등하게 8번째 성사가 그럴듯하게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성신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세 개의 성사는 영혼에 특별한 특성을 각인(刻印)시킵니다. 성세성사는 우리 안에 천주님의 자녀표시를 각인시키고, 견진성사는 그리스도 군사표시를 우리 안에 새기는 것이며, 신품성사는 그리스도 관리자라는 표시를 받는 이들에게 각인합니다. 이러한 표시는 영적인 것이고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표시는 영원히 남습니다. 가치 있게 살아간 이들에게는 천국에서 영광의 표시가 되는 것이고, 무가치하게 살아간 이들에게는 지옥에서 수치스런 표시가 됩니다. 이러한 특징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리자로서 우리가 값있게 살아갈 필요가 있는 모든 실제적 은총을 우리에게 주는, 영혼 안에서 끊임없는 나오는 은총의 샘과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령(救靈)을 위해 풍성히 넘치는 은총을 주십니다!


각 성사에서 교회는 ‘재료(질료)’, ‘형상’ 그리고 ‘관리자’를 구별합니다. ‘재료’는 때때로 물질적인 요소, 이를테면 성세 때의 물이나 견진 때의 성유, 때로는 신품성사 때의 안수나 혹은 고해성사 때에 죄의 고백 (이와 더불어 통회경과 배상)과 같은 외적인 행위입니다. ‘형상’은 신호의 의미를 완성시키는 관리자의 말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성세 때의 언어는 물을 부으면서 하는데 단지 신체를 씻는 것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의미를 가지고 신성한 씻김을 나타냅니다. 또한 죄를 사(赦)하는 사제의 언어는 사제들에게 그 힘을 부여함으로써, 죄에 대한 용서를 실제적으로 효험 있게 하여 단지 죄에 대한 슬픈 행위를 넘어 그 위에 회개행위를 끌어올립니다. 성세 때의 ‘형상’은 항상 성사의 관리자에 의해 발음되는 몇 마디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 관리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제가 “나 너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洗)를 주노라.” 할 적에 세(洗)를 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죄를 사(赦)하노라.“ 할 적에 죄를 사(赦)해주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제가 ”이는 내 몸이니라...이는 내 피의 잔이라..“ 말할 적에,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이 되는 것이지 사제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리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이 위대한 진리로부터 두 가지 결과가 있으니, 첫째, 관리자는 반드시 거룩해야 되며, 둘째, 성사의 효험이 항상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있는 것이기에 비록 관리자가 거룩하지 않다하더라도 그 성사는 유효하고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거룩하지 못한 관리자가 성사를 행하고, 주어진 성사가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비록 이를 관리한 그 관리자가 (죄를 범하여) 이를 수행할 적절한 위치에 있지 않지만 그 성사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은총을 받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성인은 말합니다: “베드로가 성세를 주면, 베드로를 통해 세(洗)를 주시는 이는 예수이시며, 유다가 성세를 주면, 유다를 통해 세를 주시는 이도 예수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위대한 선물을 고마워해야 하고, 우리가 받은 성사에 감사해야하며, 이에 걸맞게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성세를 기억해야하며, 천주님의 가치 있는 자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견진성사를 기억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살아가야 하고 죄와 맞서 강해야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과 자비로써 주님의 통치를 확장해야 합니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성사이자, 가장 거룩한 성사인 성체성사를 고마워해야하니, 이 성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그분과 온전히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과 어우러져 가치 있게 살아갑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앞으로 죄를 피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과거의 죄에 배상하면서 고해성사를 감사해야 합니다. 자주 그리고 열성적으로 이 두 가지 성사를 받음으로써 성사에 대한 고마움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종부성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해야 합니다. 종부성사를 받을 은총을 기구함으로써, 그리고 죽음을 앞둔 우리의 가톨릭 친구들과 친족들에게 이 종부성사를 제공함으로써 고마움을 표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제들의 가르침 (사제들은 그가 받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의무에 충직할 때)에 순종함으로써, 신품성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부부된 자의 침소는 더럽히지 말아야”(헤브레야13;4)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혼배성사를 고마워해야 합니다.


복되신 마리아여, 놀라운 은총의 통로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큰 신심과 고마움을 가지고 성사를 이용할 수 있는 은총을 얻어 주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한 지복직관에 도달하도록 하게 하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