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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성신강림 후 제17주일(2016-09 -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9-12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성신강림 후 제17주일 (2016 - 09 - 11)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바오로 성인은 경고(警告)합니다:”너희는 미혹(迷惑)되지 말지니, 나쁜 교제(대화)는 좋은 품성(品性)을 부패케하느니라.“(코린토 전15:33)


최근에 (말레이시아) 신자 한 분이 저에게 지역 교구의 신문에 나온 “지옥의 두려움’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를 보여주었는데, 그 기사의 요지는 오히려 신자들의 마음에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기사 내용의 첫 단락입니다.


“지옥이란 기본적으로 행복한 사람을 기다리는 결코 끔찍한 놀라움이 아니다. 지옥이란 오직 오랜 기간 동안에 너무나 철저하게 마음이 뒤틀린, 행복을 불행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오만한 멸시를 갖는 교만과 이기심이 넘쳐흐를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여러분이 영원한 지옥의 측면에 대해서 필히 따뜻한 마음을 갖는다면, 다른 쪽에서 그 지옥이라는 끔찍한 놀라움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잘 알지 못하면서, 어디선가 그 선을 따라가다가 여러분은 그 배('기회'를 뜻함)를 놓쳤고 그래서 여러분의 생활은 끔찍이 잘못된 것이다.”(말레이시아 코타 키나블로, 사하 Of Kota Kinabalu, Sabah, Malaysia) 

이 기사는 다른 가톨릭 신문 (catholic register)에도 많이 복사되어 있습니다.다. .

 

다시 말하면, 지옥이란 “철저히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가장 사악한 사람들에게만 대상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지옥이 해당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이들’에게는 지옥이 분명히 해당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인간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천주님을 사랑하느냐 또는 사랑하지 않느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는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만이고 영혼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등한시하게 만들며 결국 신자들을 지옥으로 이끕니다.


천주께서 에제키엘에게 말씀하십니다:”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 안에서 찾으리로다.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에제키엘33:7-9)


주교와 사제들은 또한 ‘천주님의 집을 살피는 파수꾼’으로서 신약에서 세워진 것이고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지옥불의 위험에, 그 위험에 빠진 죄인들을 경고하는 것이 저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주교와 사제들이 죄인들에게 경고하지 않고, 오히려 죄에 빠진 죄인들에게 편안한 위안만을 준다면, 죄인들은 죄 중에 죽을 것이나, 주님의 불충한 관리자인 사제들은 죄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기에 저 사제들에게도 심판(저주)의 죄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경고하는 자는 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그가 그 대상자를 경고하는 바로 이유이니,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이 위험을 피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은 쏘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냥감을 경고하지 않고 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가 다치지 않길 원하기 때문에 아이를 경고합니다. 위의 성서 다음에 천주께서 에제키엘에게 이르시길, ”주 야훼의 말씀에 나의 생활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에제키엘33;11) 그래서 위협하는 징벌의 그 경고는 죄인들의 회두를 바라는 천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악한 사람들을 규정짓습니다. “천주를 두려워함은 저들의 모르는 바로다-Non est timor Dei ante oculos eorum”(로마3:18) 그와 반면에 거룩한 사람인 욥은 찬미를 받으니, “우스(Hus)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수하고 정직하여 야훼를 경외(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자라.“(욥1:1)


그래서 주님을 두려워함은 영성 생활의 필수적인 기본요소,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심지어 성 육신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조차 “천주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이사야11:3) 왜 그런가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성신의 선물이며, 다윗이 성영에서 노래했듯이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성영110:10) 아름다운 구절에서 거룩한 사람인 욥은 지혜를 찾습니다:”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야훼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또 사람에게 이르시길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明哲)이라.“(Job 28:20, 23, 28) 이처럼 성영의 저자는 노래합니다. “아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에게 주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치겠노라. 생명에 애착하고 복 누리려 하여, 수(壽)하기 원하는 자는 누구뇨? 너는 네 혀를 억제하여 악한 말을 하지 말고, 또 너의 입술들을 억제하여 간교한 말을 하지 말찌로다. 악에서 물러나고 선을 행할지어다. 평화를 찾고 그를 쫓을지어다.“(성영33:12-15). 
 
죄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죄를 피하지 않고 진실로 선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를 피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고 자신들이 ‘본질적으로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사람은 자신 및 타인을 단지 속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날에 많은 이가 내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들이 네 이름을 의지 하여 후래(後來) 사정을 미리 말하지 아니하였사오며, 네 이름을 의지하여 마귀를 쫓아내지 아니하였사오며, 네 이름을 의지 하여 많은 영적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테오7:22)


저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만든 점을 지적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시길, “나 그때에 저들에게 밝히 이르되, 나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악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리라.“(마테오7:23) 왜냐하면 저들은 죄 피하길 등한시했고, 악행을 행했기 때문에 거룩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것이며, 천주님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니, 즉 저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천주님은 최고의 존재자, 최고의 선, 최고의 지성입니다. 인간이 천주님을 찾을 때, 그리고 천주님에 관한 지식을 찾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반드시 인간은 ‘악을 떠나 선을 행할’(성영33;15) 필요가 있습니다. 악을 피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서 천주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이것은 지옥을 참으로 두려워할 때 매우 유용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치시길, 사람으로부터 악을 제거하고 그들을 선으로 이끄는데 있어서 천주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다. “Nihil enim est quod tantum revocet homines a malis et ad bona inducat quantum Dei timor et amor.” (super Iob, pr.)


복음서의 많은 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죄인들에게 죄를 끊으라는, 죄의 기회를 끊으라는, 그리고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교훈을 하기 위하여 이러한 지옥의 두려움을 사용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손을 베어 버리라. 너 병신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멸치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는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리라. 네 발이 만일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발을 베어버리라. 절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꺼지지 아니하는 불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는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리라. 또 네 눈이 만일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눈을 뻬어 버리라. 한 눈을 가지고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는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리라.“(말구9:42-47)


이러한 주장이 우리의 구원에 유용하지 않다면 왜 우리 주님께서 이처럼 너무나 많이 이 주장하시나요? 성서 전체에서 지옥에 관하여 가장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우리가 흔히 길을 잃은 양이며, 그래서 올바른 길로 와야 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대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가톨릭교회는 지옥에 대해 무엇을 가르칩니까? 첫째, 지옥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헛된 말씀으로 위 내용처럼 위협하는 게 아니고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지옥은 존재하며 텅 빈 곳이 아닙니다. 우르 본 발다사르(Urs von Balthasar)와 같은 나쁜 신학은 지옥은 텅 비어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신학은 교회교부들의 가르침, 교회박사들 그리고 성인들의 가르침과는 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하고 주님을 조롱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보시오. De Civitate Dei, lib. 21.)


참으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자 자기 영광과 모든  천신 중에 옹위하여 와서 자기 영광 보좌에 좌정하고, 또 만민이 그 앞에 모이리니, 이에 저들을 양편으로 갈라 세우기를,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세움과 같이 하여, 양은 자기 우편에 세우고, 염소는 좌편에 세운 후에...”(마테오25 :31-33) 어떤 사람들은 오른쪽에 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왼쪽에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 장면은 아주 나쁘게 묘사되었습니다.

“왕이 우편에 있는 자들에게 가로되, 내 성부의 강복한 자들아, 세상 배포할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와서 차지하라. 대저 나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고, 나 목 마를 때에 내게 마실 것을 주고, 나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집에 대접하고, 나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히고, 나 병들었을 때에 내게 문병하고, 나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보았음이라. 그 때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들이 주의 주리심을 보고 먹였사오며, 목마르심을 보고 주께 마실 것을 드렸사오며, 어느 때에 주 나그네 되심을 보고 집에 대접하였사오며, 또 헐벗음을 보고 입혔사오며, 또 어느 때에 주의 병드심과 혹 옥에 갇히심을 보고 찾아뵈었나이까?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 미소한 형제 중 하나에게 베풀 때마다 곧 네게 베푼 헴이라.”(마테오25;34-40) 모든 비용을 치루더라도 추구되어야 할 아름다운 말씀, 아름다운 보상입니다!


그러나 “그 좌편에 있는 자들에게 가로되, 앙화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악신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불로 가라. 대개 나 주렸을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에 내게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집에 대접치 아니하고, 헐벗을 떼에 나를 입히지 아니하고, 병들고 혹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보지 않았음이라. 이에 저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 등이 주의 주리심과 목마르심과, 나그네 되심과, 헐벗음과, 병드심과 옥에 갇히심을 보고 받들어 모시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에 대답하여 이르되, 나 너희게 진실히 이르노니,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아니 베풀 때마다 곧 내게 아니 베푼 헴이니라 하리니, 이에 저들은 영벌(永罰) 중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생(永生)으로 가리라 하시리라.”(마테오25:41-45) 놀라운 말씀이지만 우리 주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주님이 모두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옥은 빈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르시길, “인자(人子) 장차 그 천신을 보내어, 무릇 악한 표양을 주는 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불가마에 던지게 하리니, 그 곳에 절치통곡함이 있을 것이요,”(마테오13;41-42) 만약에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가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절치통곡”함이 있겠나요? 그러므로 지옥은 빈 곳이 아닙니다.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악을 행하는” 저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지옥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저들은 영벌 중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생으로 가리라.”(마테오25:46)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교부들은 지적하길, 지옥의 영원한 지속은 천국의 영원한 지속과 발을 맞추어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설정된 것이라 합니다. 만약 사람이 한쪽을 부인하면, 다른 한쪽을 부인하게 되거나, 다른 쪽과 더불어 한쪽을 설정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한 올바른 길에 서도록, 악한 죄악의 길을 막게끔 도와주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합니다. 많은 선한 영혼들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두려움은 죄의 생활을 깨끗이 끊어버리는, 죄를 강하게 뿌리치고, 죄의 기회조차도 타협하지 않고, 유혹 특히 육신의 유혹을 강력하게 저항하게끔 도와줍니다.


지옥을 멀리한다 해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단지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사람이 천주님을 멀리하고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유혹된다면 지옥은 매우 유용합니다. 눈을 뜨세요! 여러분이 어디로 가는지 보세요! 지옥에 가기 싫다면, 지옥으로 인도하는 그 일을 왜하고 있나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에서 떨어지게 하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강력하게 돌아오도록, 죄의 길을 멀리하여 덕행의 길로 되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죄를 지은 후에 천주님께 항상 돌아올 수 있다” 말하지 마세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르시길, 천주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항상 받아드린다고 약속은 하지만, 그러나 내일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라 합니다. 천주께 돌아오는 시기는 지금이며, 천주께 죄를 짓지 않는 시기도 지금입니다! 진정 “주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초이니”(성영110;10)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죄인들이나 또는 유혹 받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인들의 역사를 보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심지어 아주 순수한 영혼에게도 매우 유용할 수 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결코 대죄를 짓지 않았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어느 날 지옥에 대한 환시를 보았습니다. 만약 성녀가 취하고 있는 미지근한 길을 계속 걷는다면 성녀는 어디로 갈까 하며 그곳을 환시를 통해 보았습니다. 미온적이고 소죄를 짓는 것은 대죄로 이끄는 비탈길이며 그리하여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녀는 그와 같은 환시를 자신의 온 생활에 대한 가운데 가장 큰 은총으로 생각했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이는 성녀에게 진정한 충격, 참된 열정의 길을 돌아가도록 하는 자극을, 그리하여 자신과 많은 이들을 성화시키기 위해 보속을 행하게 했습니다.


파티마의 세 어린이, 10살, 9살, 7살 먹은 루시아, 프란치스코, 야친타를 또한 생각해보세요. 저 세 아이들은 무척 순수했습니다. 성모님은 친히 그 아이들에게 지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은 가엾은 죄인들이 가게 되는 지옥을 보았다.” 그리고 이 환시는 순수한 이 아이들에게 영혼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와 보속이라는 엄청난 열정을 주게 되는 아주 큰 은총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옥에 관한 교회의 진정한 교리는 우리의 영성 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이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천주께서 조롱 받지 않으신다.”는 점을 이해시켜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들 것입니다. 육신에 뿌리면, 육신에 대해 뿌린 썩은 것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영 안에서, 영적인 것에 대해 뿌리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갈라타6:-8)

어떤 이들은 반박합니다. 천주님을 전혀 알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천주에 의해, 천주를 위해 조성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조성하시고, 오, 주여.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성 아우구스투스는 말씀하십니다. 만약 인간의 자신의 지성을 사용한다면, 천주님이 계시다는, 모든 만물을 조성하신 천주가 계시다는 등의 그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듣고자 하질 않으니, 왜냐하면 천주께서 최고의 제정자이시며, 그분의 계명을 준행해야 하는 점을 알지만, 그 계명을 준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영에서 이 글을 읽게 됩니다:“주께서는 하늘로부터 사람의 자식들 위를 바라다보시며, 혹시나 깨닫고 천주를 찾는 자가 있는지 보시려 하시는 도다.”(성영13;2) 성영의 저자는 계속하여, “모두 함께 탈선하고 완악하여졌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성영13:3) 한 것처럼, 사람은 깨우치기 어렵습니다.


천주님을 좋아하지도, 천주님을 찾지도, 그리고 귀찮아하여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며, 저들의 무지는 악한 의지의 열매이니, 악한 의지는 세상의 사물을 사랑하고 회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대로 저들은 소경입니다. “저들은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니, 소경이 만일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지느니라.”(마테오15;14) 저들의 무지가 저들을 변명하지 못합니다. 이와 반대로, 저들의 소경은 저들이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는 믿을 필요가 있고, 지옥에 떨어지기 위해서는 믿을 필요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세를 받는 자는 구령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죄로 판단함을 받으리로다.”(말구16:16)


다른 사람들은 반대하면서 말합니다: “이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너무 약하다. 천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그분을 믿고 있음을 충분히 만족하신다.” 이는 진실이 아닙니다! 성 베드로가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베드로 전1:16)라고 쓰셨듯이 천주님은 우리가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해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대하면서 말합니다: “천주님은 계명을 따르지 않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저주하실 수 없어.” 이는 어리석은 핑계, 어리석은 자기 기만입니다. 이것은 복음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대개 멸망하는 데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또 그 길이 너그러우매 그리로 들어가는 자 많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어떻게 좁고 또 그 길이 간삽한고! 찾아 얻는 자 적도다.”(마테오7;13-14)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영생의 생활로 인도하는 길과 문을 보여주는 성인들을 따르십시오!


“나 가끔 너희들에게 말하였음과 같이, 이제 다시 나 울며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되어 거닐으는 자 많으리라. 그들의 최후는 멸망이로다. 그들은 배(腹)를 신(神)같이 위하고, 수치(羞恥)스러운 일을 자랑으로 여기며, 지상의 것만을 탐하느니라.”(필립피3:18-19)라고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적’이라는 점이 어려운 것 가운데 가장 핵심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바오로 성인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친구’가 되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같은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받을지며, 또한 우리의 표양을 따라 거닐으는 자들을 살펴볼지어다…그러나 우리는 천국의 신민권(臣民權)을 가졌으며, 또한 우리는 저 천국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로 내려오실 것을 기다리노라.”(필립피3:17-20)


바오로 성인께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너희 구령(救靈)에 더욱 힘쓸지어다.”(필립피2;12) 주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은 그래서 유익하고 유용합니다. 성영(聖詠)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은 순전(純全-거룩함)하매, 길이 머무나이다. 주님의 판단은 참되매, 다 함께 의롭나이다.”(성영18;10)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영혼의 표시이며 천주께 범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주님을 슬프게 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신랑을 기쁘게 하려는 선한 신부의 ‘정결한 두려움’입니다. 꺼림칙한 가운데 우리가 살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매우 단호하고 아주 의도적으로 죄를 피하게 해줍니다. 대조는 절대로 안 되고 소죄도 타협이 없게 합니다.


소죄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고의적인 소죄, 이를테면 작은 일에 있어서 고의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게으름과 같은 연약함의 죄 그리고 인내심 부족과 같은 연약함(과 놀람)의 죄, 이것은 놀람 속에서 너무나 쉽게 일어납니다. 첫 번째의 고의적인 소죄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진정 위험합니다. 이 죄는 열정을 제거하고 대죄로 쉽게 떨어집니다. 죄를 받아드리게 되면 죄에서 벗어날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게 됩니다. 작은 일이기 때문에 대죄는 아니지만 그러나 매우 고의적인 죄가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천주께 대해 건강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영성 생활에 매우 해악이 되는 이러한 고의적인 죄를 없애게 됩니다. 이것이 데레사 성녀가 지옥의 환시를 통해 받은 은총입니다.


다른 소죄, 만약 소죄임을 깨달자 마자 회개한다면, 그리고 그 소죄에 대해 보상하기 위한 작은 배상의 행위를 하게 되면 이러한 소죄는 우리 영혼에 아주 유익한 배상이 되고 겸손과 열정의 행위가 됩니다. 소죄에 대한 배상의 행위를 무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소죄에 관련하여 우리는 양심의 꺼림칙한 두려움에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천주님을 두려워함은 우리가 배상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살게 하며, 겸손하게 하고 그래서 덕행의 기회로 바꾸게 합니다.


참으로 사람은 양심의 꺼림칙함과 섬세함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꺼림칙함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대죄와 소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는 죄와 죄가 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지는 좋은 것이 아니고, 혼란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섬세함은 전혀 무지가 아닙니다. 어떠한 죄도 피하고자 하며, 큰 죄나 아주 작은 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양심의 섬세함은 영혼에게 매우 훌륭한 것이고 매우 유용합니다. 모든 성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다면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종도들에게 기도합시다. 종도들은 천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그 중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치셨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성신의 이러한 은총을 얻게끔, 그리하여 우리가 신자들의 마음에서 이 거룩한 두려움을 파괴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피하도록 하게 합시다.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이여, 우리를 위해 성모님 안에서 너무나 빛나는 이 아름다운 양심의 섬세함을 얻게 해주시어 우리가 천국에 도달하게 해주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