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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아성세와 견진성사에 대해(2016-11-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1-14





유아성세(乳兒 聖洗)와 견진성사(堅振聖事) (2016-11-12)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교리에 대해 계속 강론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 성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세에 관하여 한 가지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성세를 신속하게 주는 것은 가톨릭 부모가 가져야 할 중대한 의무(義務)입니다. 부모는 자연적인 생명과 초자연적인 생명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천주님의 본래 계획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아담은 본성과 은총을 함께 묶어주는 본래의 정의(正義)를 상실했습니다. 그 이후 은총은 의도했었던 본성에서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성화(聖化) 은총을 뺏긴 채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이 뺏긴 은총은 아이들에게 있어야 했는데 이것이 원죄입니다.


천주님의 의도는 아이들이 자연 및 초자연적 생명을 갖는 것이기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새로운 탄생으로서 성세라는 수단으로 인해 저 초자연적인 생명을 지체 없이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즉 새 아담의 생명이며 성세로서 그 사람은 그분의 일원이 됩니다. 자녀가 성세를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오랫동안 부모가 이를 방치하는 것은 엄중한 죄가 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나 아이들은 성세에 대해 말하지 않으므로 아이들이 선택하게끔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반대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자연적인 생명을 받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뿐더러, 또한 그 누구도 생명 받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은 선물이며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만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생명이 그 후에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이는 생명 본래 자체가 나쁜 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 그 자체가 좋은 것이고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준 것에 대해 비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부족한 교육을 시켜서, 부모가 잘 보살피지 못해서 과오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생명을 준 것에 있어서는 잘못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초자연적인 생명은 놀랄만한, 자연적인 생명보다도 훨씬 더 귀중하고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부모는 이와 같은 놀라운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해 결코 비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곳에는 훌륭한 가톨릭 교육을 추가하여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몇 가지 실패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아기일 때 영적인 생명을 주는 것에서는 잘못이 없습니다.


어떤 개신교인들은 ‘세례란 단지 믿음 행위의 표시에 부과하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하여 어린 자녀들의 세례 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이라는 존재는 믿음의 그런 행위를 표현할 수 없기에, 세례는 이들에게 쓸모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유아 성세를 실천했던 교회의 옛 전통, 종도들의 전통에 어긋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원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이들이 실제적인 어떠한 죄를 지을 수 없기에, 그리고 만약 그 아이들이 만약 전혀 죄가 없다면, 성세는 그 아이들에게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며, 성세는 ‘죄를 사(赦)하는 것’(종도행전2;28)이기 때문에 분명히 곧바로 유아성세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기를 버려두고 금하지 말라. 대저 천주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루까18:16)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는 것은 저 아이들이 주님의 몸과 합치됨으로써 성세가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과 종도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온 교회에 내려온 이 계명에 관련하여 항상 아이들에게 성세를 주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사는 것을 동의한다면, 즉, 믿음을 가진 배우자가 평화롭게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도록 허용한다면, 가톨릭 배우자의 자녀들은 ‘거룩하다’ 말씀하신 그곳에서 유아 성세의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저 비신자인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비신자인 아내는 (그 신자인) 형제로 말미암아 성화될 것임인 연고니라.“(코린토 전7:14) 자녀들은 성세를 받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는 많은 사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들을 회두로 인도하기 때문에 ‘성화’됩니다.


더욱이 유아성세를 분명히 입증하는 구약에서 성세의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할손례는 태어난 아기에게 8일만에 주어집니다! 성 치프리아노는 질문한 주교에게 연간 250개의 답변을 주는데, “아이들이 할손례를 위해  8일을 기다리는 것처럼 성세도 8일을 기다려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카르타고 공의회는 성 치프리아노 주변에 모여서 만장일치로 답변을 합니다: “8일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두 번째 형태는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다 구름 아래 있었고, 다 바다를 건넜으며, 다 모이세에게 속하게 하는 세(洗)를 구름과 바다에서 받았고“(코린토 전 10:1-2) 이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신으로 다시 태어난’(요왕3;5) 성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인들이 바닷가에 자기 아기들을 놔두지 않고 아기들도 부모 품에 안겨서 홍해를 건넜다는 사실은 (물을 통한) ‘유효한’ 건넘(성세)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모에 의해 문답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유아성세는 유효한 성세입니다.


부활에 있어서 참 신앙을 거부하여 성서를 반대한 사두개인들에게 우리 주님은 답변하십니다: “너희는 성경과 다못 천주의 전능(全能)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렇듯이 그르침이 아니냐?“(마테오12:24)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는 또한 개신교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유아 성세의 주제에 관하여 사례가 있지만 모든 저들의 오류와 유사할 겁니다. 그러나 저들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말씀과 신앙의 유산에 신뢰의 근거를 둔 교회의 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우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바오로 성인은 이르시길, “천주의 집안이란 곧 생활하신 천주의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이요, 기초이니라.“(티모테오 전 3:15) 그리고 종도들의 행적을 제대로 밟고 있는 교회는 바로 가톨릭교회입니다.


두 번째 성사는 견진 성사입니다.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면서 (신앙이)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진(堅振)의 의미는 그 말이 갖는 것을 뜻합니다; 확인하고, 강화시키며, 성세 때에 받은 생명을 확고히 하고 단단하게 합니다. 견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드는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실제로 죄와 악마와 세상과 심지어 우리 내부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경향과 맞서 전쟁을 수행합니다. 성세 때에 우리는 사탄을 끊어버리고, 그의 일을 끊어버리고, 모든 악의 유혹을 끊어버립니다. 전쟁이 오고 있는 곳에서 우리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끊어버릴) 힘이 필요합니다. 견진이 되게 하는 것은 성신의 특별히 넘치는 은총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신강림 날에 이 견진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종도들과 최초의 12명 제자들 위에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성신강림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고 그때 종도들은 탁월한 방법으로 받았으니, 성유(聖油)가 아니라 성신의 실제적인 불길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신으로 감도된 종도들은 성유를 도유(塗油)하고 아울러 안수(按手)로서 다른 이들을 견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도행전에서 우리는 견진과 성세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부제(副祭)인 빌립보는 사마리아로 가서 많이 이들을 개종시키고 성세를 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이 견진성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종도들에게 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새로 성세 받은 이들에게 안수를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종도들이 성신강림절에 받았던 것과 같은 똑 같은 성신을 받습니다.


견진성사의 핵심은 성유로 인한 도유(塗油)인데, 이는 이마에 십자가를 표시합니다. 성유는 발사향이 있는 올리브 기름입니다. 리구오리(Liguori)의 성 알폰소는 말씀하시길, 만약 발사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조건부로 견진성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만약 다른 기름을 사용한다면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새미사( the Novus Ordo)가 ‘올리브 기름이나 또는 다른 야채기름’을 쓸 때, 이는 무효한 견진성사의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성신강림절에 오신 성신의 불을 나타냅니다. 또한 성신의 상징인 비둘기는 (노아의) 대홍수 이후 올리브 가지를 천주님과의 화해의 표시로서 가져왔습니다. 평화는 성신의 열매(갈라타5:25)입니다. 또한 운동선수들도 자신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기름을 발랐습니다. (현재도 선수들은 여러 종류의 기름을 바릅니다) 도유는 십자가의 표시로 이마에 바르는데 이곳은 우리 피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수치로 여겨서는 안 되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되는, 천주께로 조차 나오는 능력“(로마1:16) 이기 때문입니다.


견진성사에서 전통적인 형태는 주교가 이마에 도유(塗油)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말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의 표시로 그대를 표시하노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인하여 구원의 성유(聖油)로서 그대에게 견진을 주노라.” 


견진성사의 관리자는 주교입니다. 주교는 고위사제이고 새로 태어난 신자에게 완전함을 가져다  주는 분입니다. 신전교회(神戰敎會)의 대장입니다. 이 견진성사의 중요성은 주교가 견진을 준다는 그 사실로 인해 분명해집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특별한 대표직을 띤 사제가 이 성사를 줄 수는 있습니다. 이 경우는 제법 큰 교구에서 있게 되는데 그 교구 대리장이 이런 대표 위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는 주교가 아프거나 그래서 이 견진성사를 관리할 도움이 필요할 때 생깁니다. 오직 교황만이 이러한 대표 위임을 줄 수 있습니다. 가톨릭 동방전례의 사제들은 성세 후 바로 견진해 줄 저 위임자를 갖게 하지만 그것은 서방 전례에서는 관습이 아닙니다.


견진은 영혼 위에 어떤 특징,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특징을 각인시켜 치명할 정도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성신의 저런 특별한 은총, 강용의 은총은 치명자(致命者)에게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치명하는 신자는 죽음이나 고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짓기보다는 오히려 죽기를 원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죽기를 원합니다. 저러한 견진 특성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러므로 죄에 맞서 강해져야 하며 유혹에 맞서서 항상 ‘아니오’라고, 천주에 대해서는 ‘예’라 해야 합니다. ‘그러나’도 안 되고 ‘뒤로 미루어서도, 주저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죄를 허용해선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충성을,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충성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노라.”(묵시록2;10)


훨씬 평범한 환경에서 조차도 견진성사의 특별한 성사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말과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할 용기를 가지게 하고, 신앙의 소박한 고백으로 인해 전교자(傳敎者)가 되게 합니다. 거룩한 생활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한 커다란 수단입니다.

견진 성사는 생활(살아있는)하는 성사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받기 위해서 은총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죄 지은 상태에서 견진을 받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12살 이전에 아이들에게 견진을 주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신앙 안에서 강하게 되어 사춘기에 겪는 영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견진의 기회를 주는 것은 의무입니다.


견진성사 전례는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성신강림 만과 찬미가인 “Veni Sancte Spiritus” 노래를 함으로써 성신을 불러들이는 거룩한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모두 무릎을 꿇고 주교는 서서 모든 이들에게 손을 뻗어 이사야 예언에 따라 일곱 가지 영(靈)을 부릅니다:”야훼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이사야11:2-3)

그리고 나서 주교는 앉고 견진 받을 신자를 오라하여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 견진자 뒤에서 대부모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오른손을 얹습니다. 주교는 성유를 엄지손에 찍어 견진자의 이마 위에 대고 십자가 표시를 도유(塗油)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십자가의 표시를 주고 구원의 성유로써 그대에게 견진을 주노라 “합니다. 견진자는 “아멘’으로 답합니다. 이것이 견진성사 자체의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후 주교는 저항할 능력인 강인함을 확인하는 상징으로서 견진자의  뺨을 살짝 칩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가 성신의 성전임을 상기시켜줍니다. 그 후,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서, 새로 견진을 받은 신자는 일어서서 자신이 준비된 군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지금 선언할 신앙을 지키고자 신경(信經)을 암송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승리의 은총을 얻게 될 모든 기도의 모범인 천주경을 암송합니다. 또한 가장 보편적인 기도인 성모송을 암송하는데 이는 우리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치명자들의 여왕이신 성모여, 예수의 모친이 되시는 영보고지 그 날과, 교회의 모친이 되시는 성신강림절 그날에 성신으로 가득 차신 성모여, 견진 받은 모든 이들을 특별한 가호 아래 불러들이시고, 저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군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견진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견진을 상기시키고 천국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때까지 진정으로 살아가게 도와주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성모님의 기사’가 되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