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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극히 조촐하시고 겸손하신 성모님 - 성모무염시태 축일(2016-12-0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2-09







지극히 조촐하시고 겸손하신 성모님- 성모무염시잉모태축일(2016-12-08)


성모무염시잉모태(聖母無染始孕母胎)의 교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천주섭리는 이 교리에 대해 조명할 온전한 빛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르길, 이제 천주님은 필요 없으며 그저 자신의 타고난 이성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모무염시잉모태는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리하여 우리가 네 가지 죄의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게 해주니,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티 없으신 아름다움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을 더 잘 이해합니다. (어두운 것을) 완전히 흰 것에 가까이 두게 될 때 사람은 그 사람의 어두움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낙심께 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러한 (성모님에 관한) 묵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힘을 보여주며, 따라서 자신감으로 우리 영혼을 끌어올리고... 예,...천주님은 능력이 있으시니, 우리를 죄로부터 적극 구원하시고자 하며 우리를 성화시키려하니, 베드로 성인 이르시길, “지극히 위대하고 존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심은 이 너희로 하여금 이를 인하여 세속의 육감적 쾌락과 및 부도덕함을 피하여 천주성에 참여하는 자 되기를 위하심이니라.”(베드로 후 1:4)


사람이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한낮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 더 드러납니다. 우리 인간은 중력의 법칙, 물리학의 법칙, 원자의 법칙, 생명의 법칙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이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지만 그들이 그 법칙을 만든 게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 과학의 법칙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빛과 따뜻함을 주는 태양에 의존해 있습니다. 농작물은 비에 의존하고 이에 따라 식량을 이용하는 등... 많은 여러 가지를 자연의 법칙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백만의 은하계 중 하나인 작은 태양계 가운데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사는 극히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성영의 저자와 더불어 경탄하여 말하길, “인간이 무엇이건대, 당신은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또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건대, 당신은 그를 돌보시나이까?”(성영8:5) 지구라는 작은 행성 위에 사는 아주 작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포함하여 그가 조성한 모든 것, 모든 사물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천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에 의존하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는 움직임 가운데에서, 시작의 행위를 줄뿐 아니라 존재에 있어서도 피조물을 보존하고 있으니, 우주의 공통 선익을 위하여 피조물의 적합한 행위에 대해 조물주의 법칙으로 줌으로써 피조물을 안내하고 있으니 이것이 최고의 운행하는 자입니다.


천주님께 대한 두 가지 의존성이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조건으로부터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우리는 천주께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 안의 선한 모든 것은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제 1원인으로서 천주께 의존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도 천주께 의존합니다.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건강을 주시지 않는 한, 제 1의 움직임이신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요 마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천주께서 은총을 거두실 때, 그리고 아프거나 할 때에 이러한 은총을 겨우 깨달고 하는데 예전에는 당연히 여기던 것을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압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천주님에 의존해야함’을 말하는 소리를 듣길 싫어하는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천주께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떼어 놓는 것이라 하지만, 이러한 공포감이야말로 가장 비이성적이고 단지 큰 교오(교만)를 드러날 뿐입니다. 실제로 아기가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기를 해치고 있는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는 혼자 있을 때보다 엄마 품안에 있을 적에 훨씬 더 행복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주님 품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훨씬 더 위대하고 좋은 것입니다. 왜? 천주께서 모든 선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은 천주로부터 옵니다. 천주님은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주님께 의지하고 천주님 품 안에서, 그분의 성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다! 그러므로 천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 자유 안에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이라는 죄의 핵심을 건드립니다. 이와 같은 교만은 참된 자유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닫게 합니다. 겸손은 진리와 어울립니다. 겸손은 진리에 따라 우리 마음을 올바른 곳에 놓습니다. 그래서 왕 중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내 멍에를 매며, 또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내게 배우라. 이에 너희 영혼에 평안함을 얻으리라.(마테오11:29)” 하십니다. 왜 주님이 겸손하신가요? 그분은 참 천주이자 참 사람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인간적 본성을 천주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시고, 그러한 인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요왕10:18)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청하시는 성부의 계명을 따랐습니다. 이는 혹독한 계명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계명을 준행함으로써 주님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은하계에서 가장 작은 원자 안의 소립자에 이르는 모든 물질적 피조물들은 천주님이 설정하신 법칙인 중력이나 전자기 등의 법칙이라는 계명에 완벽히 준행하고 있다는 것을 묵상하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온 우주 안에서 천주님의 법칙을 안벽하게 따르지 않는 입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할 할 수 있겠지요. “저 물질들은 자유가 없고 그저 맹목적인 움직임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저 물질들의 순명은 석양의 아름다움, 꽃의 아름다움, 무지개의 아름다움 등의 저 물질 창조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은 영적인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셔서 저들의 맹목적이 아닌 사랑으로 인한 순명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천주께 순명하는 이것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천주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도록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천주님의 계명을 따르도록 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죄란 분명히 천주께 복종에 대한 이러한 거부, 천주님 계명에 대한 순명의 거절,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진리에 대한 부인입니다. 천주께 대한 이러한 반란은 “나는 섬기지 않겠다.(Jer2:20)”라는 사탄의 외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반란의 외침을 반복합니까! 이기심, 폭력, 도둑질, 살인 모든 종류의 불결함, 뒤따르는 신체의 질병 등등....이러한 반란은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악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천주님의 계명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실제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그리하면 천주님의 계명에 따라 상을 받을 것이요, 순명하지 않으면 천주님의 계명에 따라 벌 받게 될 것이다. 천주님이 악에 대해 마지막 말을 남겨두시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주님은 선이시다. 그분은 죄로 인해 깨진 질서를 회복하실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죄는 사랑의 질서든 정의의 질서든 반드시 천주님의 질서 안으로 와야 한다. 천주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신다. 이곳에서 보속과 참된 회개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벌하든지, 그러면 천주님은 다음 세상에서 나머지 벌을 우리에게 남겨두실 것이다. 또는 고집피우고 이 지상에서 천주께 돌아오길 거부하게 되면 천주님은 다음 세상에서 우리를 벌하실 것이다. 그래서 천주님을 거스르는 반란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지만, 이 반란은 교만으로 인해 생겨난 앞을 못 보는 맹인인 것입니다.


성모무염시잉모태는 교만과는 반대입니다. 성모님이 잉태되실 시작부터 성모님은 성총을 가득히 받으셨고 천주님 계명에 온전히 순명하셨으며 항상 완전한 겸손으로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셨으니, 이는 천주에 대한 성모님의 응답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주의 종이 여기 대령하오니 네 말씀과 같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루까1;38) 이것은 왜 성모님이 다른 모든 것 위에 가장 높이 현양(顯揚)된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테오23:12, 루까14;;11,18:14)


은총은 죄에 대한 치료약이고 죄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천주님께 대해 우리 자신을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낮추고, 천주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인식하며, 천주님에 관하여 우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과거의 죄에 대한 진실을 인식함이니, 천주성총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죄를 혐오하고 기꺼이 배상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천주님께 굴복하는 것은 우리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니, 이는 계시된 천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성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를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망덕으로 이끄는 것이니,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하여 온순하게 그분의 길을 따르게 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니, 우리의 의지를 완전하게 굴복시킴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서 첫째 짜리를 천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세속적인 생각이 간섭하여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떨어지는 틈을 주지 않도록 합시다.    

천주께 대한 이와 같은 자발적인 복종은 자유를 결코 빼앗질 않습니다. 반면에 이것은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를 세속적인 매력과 결속에 대한 노예로부터 해방되게 하며, 우리 영혼에 도달 할 수
없는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설령 우리 몸이 고통 받는다 하더라도 천주님의 은총은 이러한 고통을 엄청난 사랑이라는 보석 안에서 거대한 보상으로 바꿔줍니다.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현시(現時)의 고난은 우리에게 (주실 것으로) 나타날 장래의 영광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노라.”(로마8;18)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성모님 안에서 봅니다. 성총이 가득하심으로써 성모님은 천주께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모님의 자유를 전혀 억압한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항상 자발적으로 하신 것은 천주님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천주께 대한 순명은 자유를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입니다. 반면에 사랑으로 인한 순명은 하고자 하는 의지 안에서 무엇이 옳고 사랑인가를 알아보는 지성 안에 있는 첫 번째 빛을 암시합니다. 반면에 천주께 대한 불순명은 지성 안에서 빛의 거부와 의지 안에서 악의 의지 –교만- 을 암시합니다. 천주께 대한 불순종으로써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됩니다.


천주님은 최고 높으신 분이므로 천주님의 자유는 최고이며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따라서 천주께 복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는 피조물의 자유이며, 그러므로 이것은 그 자체 고유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주로부터 궁극적인 법칙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주께 순명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의 순명은 천주께 이익이 되지 않으니, 천주님은 더 이상 좋아지거나 더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명은 우리에게나 우리 동료에게도 훌륭하고 유익한 것이니, 성모님의 사례에서 분명하듯이 성모님은 더 큰 행복을 위해 우리의 더 큰 유익을 위해 하늘과 땅의 여왕이 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변화되어 천주께 영광이 됩니다. 저 영광은 천주님 안에서 천주님을 더 좋게 하지는 않으나 그분의 피조물 안에서 천주님의 지혜를 비추는 것입니다. 천주님의 저 영광은 그분의 피조물을 행복하게, 영원한 행복에 있는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하자 없으신 동정녀는 천국에 있는 천신과 성인 위에서 성모님이 받은 최고의 완벽한 올림에 의한 성총의 권능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커다란 자신감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은총의 통로가 되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입니다.


또한 은총의 권능은 천주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커다란 죄인들을 위대한 성인들로 변화시키는 자비를 보여주실 때에 분명합니다. 천주께서 동정녀 마리아 같은 무구(無垢)한 영혼을 사랑하시든지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든지 간에 천주님은 항상 그들을 성인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분명히 천주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니, 천주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남아 있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치료하고자 하시며, 그리하여 우리가 죄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 더 이상 그대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죄짓지 말라.”(요왕8;11) 예수께서는 또한 베세다 우물에서 치료한 절음 발이에게 이르시되, “너 이미 나았으니, 다시는 범죄치 말라. 두리건대, 무슨 더 언짢은 것이 네게 당할까 하노라.”(요왕5:14)


루터와 카스퍼 추기경과 같은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은 “더 이상 죄 짓지 말라”는 주님의 이 훈계를 잊고 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죄인들은 죄 안에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국으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원과는 아주 많이 반대되는 것입니다. 카스퍼가 주장하는 자비는 우리 주님의 자비와는 완전히 상반됩니다. 루터나 카스퍼 추기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죄 속에서 살게 함으로써 지옥으로 이끄는 사기꾼입니다.


성모님은 티 없으시고 자비의 모친입니다. 그분은 기장 높은 정도에 이르도록 천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점에서 분명한 것은 성모님이 모든 죄로부터 보호되고 보다 높은 모습으로 구원되었다는 점입니다. 성모무염시잉모태는 천주님의 자비가 사람이 죄에서 결코 남아있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며, 천주님의 자비는 죄와는 너무나 반대가 되고, 천주님의 탁월한 걸작품이신 성모님은 죄로부터 완벽히 보호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은 자비를 받으시고, 차례가 되어 성모님이 천주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배부하십니다. 그러나 하자 없으신 분으로서 성모님은 우리가 죄의 오물에 남아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십니다. 어느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진흙탕 속에 있는 것을, 죄의 더러운 오물 속에 그대로 놔두고 보고만 있는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깨끗이 할 것이요, “어린 양의 피에다 자기의 옷(영혼)을 씻어 희게 한 자들”(묵시록7;14)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 성모님을 하자 없게 하시고 너무나 많은 죄인들을 치료하고 성화시키는 모든 놀라운 은총, 이 모든 은총들은 십자가 위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천주 자비의 최고 현현(顯現)입니다. 천주 성자께서는 우리 죄로 인해 당신 자신을 벌 받게 하여 성부께로 부터 우리의 빚을 탕감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성화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천주의 사랑이 그 얼마나 멀리 갔는가를 보여줍니다! 저 희생은 우리 제대에서 날마다 제헌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는 천주 자비의 통로입니다. 이 미사에서 죄인들은 회두의 은총을 얻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이 죽으신 후, 성 루까는 주목하기를, “구경하던 모든 백성도 그 모든 일을 보고 제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루까23:48) 기록하였으니, 저들의 가슴을 치면서 그들은 최고의 희생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천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자 없는 희생제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이다 라고 로마 전례예식서에 쓰인 것처럼 저 안에서의 희생제물이 ‘순수한 희생, 거룩한 희생, 무구한 희생’이 되어 제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하자 없는 생활의 원천이 됩니다. 영혼을 깨끗이 하여 무구(無垢)하게 해줍니다. 우리 성모님의 무구하심이란 성육신 바로 그날에 우리 주님을 받아드릴 수 있는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티 없이 깨끗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자 없는 희생이신 우리 주님과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성모님은 또한 하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미사의 거룩한 희생과 매우 일치되어있습니다.

매번 미사 때마다 어린 양의 성혈 안에서 깨끗해진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하기 위해 준비되는 것이니, 그곳은 “고양(어린 양)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명부(名簿)에 기록되어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들어가지 못하는”(묵시록21:27)곳입니다. 

 하자 없으신 동정녀여,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은총을 얻으소서! 아멘.


 프랑소아 례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