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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에 관하여(1):일반론 (2017-02-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2-13



고해성사에 관하여(1):일반론 (2017-02-1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일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보속의 시간이 시작되는 칠순 주일입니다. 그래서 고해 성사에 관해 지금 전해드리면서 성사(聖事)에 관한 강론을 연속으로 계속하기에는 꼭 들어 받습니다. 이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죄를 온전히 극복하고 열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매우 유용하고도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성사에 관한 모든 교리는 생활에 관한 교리입니다. 성세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이고, 견진은 저 생명을 강화시킵니다.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성세 때 받은 저 생명이 우리의 세속생활을 통하여 천국에서는 영생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라 말하는 겁니다. 천국은 성세 때 받은 새 생명의 씨앗이 견진 때 성장하여, 그리고 성체로 양육되어서 그곳에서 완전히 꽃을 피우는 곳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니, 나 마지막 날에 그를 부활케 하리라. “(요왕6:55)


그러나, 천국에서 성인들의 신분 차이에는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니, 천국에 계신 성인들은 저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지만 이곳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분은 불행하게도 성세 때 받은 저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옥좌 심판 때까지 성세 때 받은 순수함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들이 성세 때의 순수함을 지키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한 대죄로 인하여 영적인 죽음으로 분명히 떨어지며, 이로 인해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살지 않게 됩니다. (갈라타2:20)


그러나 성세 이후 대죄로 떨어진 사람들을 위한 ‘두 번째 기회’는 없는가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이에 베드로 예수께 나아와 아뢰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득죄하는 것을 나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나 하리이까?” 예수 저에게 가라사대 <내 네게 일곱 번까지라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하노라>“(마테오 18:21-22) 그래서 천주께서 한번 이상 더 용서함을 주시나 겸손하고도 통회하는 마음으로 천주께 자주 돌아오면 다시 용서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천주시여, 통회(痛悔)의 정신이 나의 제사이오니, 부서지고 겸비하여 진 마음은, 천주시여 당신이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다.“(성영50:19)


고해성사로서 성세 이후 범한 죄들은 죄를 용서할 권능에 의하여 사면되는데, 이 권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니, 왜냐하면 그분은 참 천주이자 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기억해보세요. 반신불수를 앓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데, 그의 친구가 우리 주님을 그에게로 모셔오지만 밀쳐대는 엄청난 군중으로 인해 들어가야 할 집에 못 들어가니, 사람들은 이 환자인 남자를 지붕으로 데려가 지붕을 뜯고 이 남자들 주님과 모든 참석자들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들 친구들이 지붕을 벗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 대담한 사람들이네”라고 중얼거린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 환자가 우리 주님 앞에 내려 놓여질 때, “예수 저들의 신덕을 보시고 반신불수더러 이르시되,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를 사하니라.> 하시니, 문득 학자 중 몇이 제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천주를 설독(褻瀆)하는도다.”하거늘, 예수 저들의 생각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 너희 마음에 악한 것을 생각하느냐? 네 죄를 사하느니라 하거나, 혹 이르되 일어나 다니라 하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쉬우뇨? 인자 세상에서 사죄하는 권이 있는 줄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리라.>하시고, 이에 반신불수더러 이르시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일어나 제 집으로 가더라.“(마테오9:2-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도들에게 바로 그 같은 권능을 주셨을 때, 고해성사를 제정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赦)한즉, 사하여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즉 머물러있으라.“(요왕20:23) 만약 우리 주께서 당신의 종도들에게 저 권능을 주셨다면, 종도들이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사죄권을 사용하도록 위함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 이 말씀을 하셨으니, 왜냐하면 고해성사는 출생과는 매우 다르고 오히려 영적인 부활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세 이후 죄로 인해 죽은 이들은 고해성사로 인하여 영혼의 생명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죄가 영혼 안에서 일으키는 해악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죄는 영적인 존재 상태로 있는데 천신이든 사람이든 이들이 너무나 많이 피조물을 사랑함으로써, 창조주에게 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에게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둠으로써,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을 더 좋아함으로써, 창조되지 않은 무한하신 천주님의 선보다는 만들어진 선을 더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천주님으로부터 단절시킵니다. 무한하시고 끝이 없으신 천주님의 선하심보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선을 더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비이성적입니다. 저런 무질서한 의지는 그 자체가 죄가 갖는 바로 그 악함이요, 죄의 오염이고, 영혼의 죽음이니, 왜냐하면 죄는 자비(사랑)를 빼앗기 때문이요, 자비는 천주님과 영혼을 묶는 ‘완덕(完德)을 매는 끈’(골로새3:15)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의 ‘죄의 오물’이라 부르니, 영적인 죽음, 천주님의 초월적인 진리의 빛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택하는 이러한 선택은 천주께 대한 엄중한 해악이요, 최고 존재자이신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경배를 거부하는 것이니, 천주님은 모든 영적인 본질에 의해 최고로 사랑 받으실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이런 큰 모욕은 정의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징벌이 요구됩니다. 죄는 반드시 속죄, 배상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어떤 분명한 “마땅한 징벌”이 있기 마련이고 저 빚은 또한 죄라 부릅니다. 악은 퍼질 수 없습니다. 천주께서는 악이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천주님의 선하심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악은 그와 같은 징벌로 배상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죄는 우리 본성 안에서, 우리의 본성의 권능 안에서 은총을 무질서로 만듭니다. 그래서 이 은총들은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됩니다. 저 상처에는 약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는 파괴 되기가 쉽고 빨리 파괴 됩니다. 치료하고 다시 재건하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게 된다면 인류의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는 죄의 드라마요 죄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일하신 독생성자를 보내신 천주 성부 덕분에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을 영적인 생명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인을 천주님께로 회두시키고 무질서한 길로부터 되돌려서 생명의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영혼 안에서 행동하게 하며 죄인의 의지 주변에서 변화시키는 천주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영혼 안에서의 저러한 천주님의 행위는 고해성사를 선행(先行)합니다. 그 어느 죄인도 저러한 회두의 은총을 공로로 세울 수 없습니다. 선한 신자들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 은총을 얻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관리자인 사제는 보속과 회개를 하도록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습니다. 천주께서 영혼 그 자체 안에 천주님의 성총을 주시지 않고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사제들의 훈계는 단지 그의 귓전만을 때리는 것이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이 이러한 천주님의 은총의 자비로부터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많은 위대한 성인들은 보속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영혼이 천주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감동을 받고, 천주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자신의 이러한 반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알기 시작하면, 죄인의 용서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찾게 되고 또한 죄로 인해 도입된 모든 악을 교정하기 시작하며 죄의 상처를 치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영혼에게 주어진 영혼의 기회가 고해성사 입니다. 이 고해성사는 성세 이후 범한 진실하고도 깊은 통회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아울러 사제에게 이러한 죄들에 대한 적절한 고명과 함께, 그리고 사제에 의해 부과된 보속을 행함으로써 이러한 영혼은 그 죄에 사면을 얻을 수 있고 치료 과정을 시작합니다.


고해성사는 법정과 비슷합니다. 천주님의 자비가 이루어지는 법정입니다. 고해하는 자는 죄를 범한 사람인 피고이며 죄인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판사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종도들에게 저 권능을 주신 말씀 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 고해성사의 관리자(사제)는 죄를 용서하거나 죄를 그대로 두게 하거나 진정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사제가 이 세상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면, 죄는 천국에서 잊혀지고, 만약 이 세상에서 죄를 그대로 놔두면 다음 세상에서도 그 죄가 남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판에서 좋은 판사가 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에 의해 임명된 판사에게 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천주자비의 판단으로, 죄를 사하는 자비로운 재판을 나눠줄 저 책임을 지면서, 분별력 있게 종도들과 그의 계승자들을 판사들로서 임명하셨습니다. 사제들은 반드시 보속이 적절하게 처리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의 관리자는 사제입니다. 사제서품식 거의 끝 무렵에 주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새로 서품된 사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하여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즉 머물러있으라.“(요왕20:23)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명하길, 그리스도 신비체를 넘는 이 권능은 사제가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넘는 그 권능으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사제는 성체를 만들 수 있고,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로 변화시키면서,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듭니다. 그렇지만 사제는 또한 성세 및 고해성사를 통하여 준비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저 몸을 가치 있게 받아드리도록 다룰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핵심이 성세 이후 범한 죄 자체에 많은 연관이 있기보다는, 이러한 죄에 관한 회개의 행위에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의 이러한 행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통회, 고명(고해), 보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제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통회하는 고해자에게 사(赦)해주고, 고해자는 사제가 부여한 죄에 대한 보속(배상)을 이에 맞게 행합니다. 만약에 고해자가 이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특히 자신의 죄에 대해 진정으로 통회하지 않으면, 그 고해성사는 적절한 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고, 그리고서 이는 신성모독의 죄가 첨가되는 악한 고해가 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행위인 통회, 고명 그리고 보속은 성세 이후에 범한 죄에 관한 것입니다. 성세 이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물론, 천주님을 상하게 한 슬픔으로 연유하여 그 죄에 대해서 반드시 통회해야 하고 이에 대한 배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천주님의 자애로우심 안에서 천주께서는 천주께 처음으로 다가갈 때 모든 죄와 모든 벌을 용서하심을 아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에 대한 슬픔은 참으로 좋은 것이고, 이는 성세 이전에 상해드린 천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지만, 용서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기쁨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 행하게 되는 보속이 천주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오듯이, 주님의 성혈로 인하여 이런 죄에 대한 배상을 드린 그리스도와 일치하고자 하는 소망은 진정 좋은 것이지만, 이미 완전히 주어진 용서를 얻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이러한 과거의 죄에 대한 상처에 대해 치료를 위한 통회는 필요합니다. 만약 성세 후에 곧바로 죽는다면, 그는 곧장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세에서 이루어지는 저 최초의 은총을 고마워하지 아니하고 대죄로 인하여 잃어버리면, 그가 진정한 통회로써 천주께 돌아오겠지만 그 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천주께서 용서를 다시 주시지만, 회개하는 죄인에 의해 이루어진 보속의 일부는 남게 될 것이고, 만약 훌륭한 고해를 하고 나서 죽으면, 그는 천국에 가겠지만 곧장 가질 않고 연옥은 보속을 완전히 마쳐야 할 곳입니다. 고해 후에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지상에의 그 시간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일치함으로써,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우리 과거의 죄를 보속함으로써 연옥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우리가 과거의 죄를 배상할 수 있을 때의 시간입니다. 고해성사는 죄에 대한 용서와, 그 죄로 인해 생긴 처벌에 대한 용서를 얻으며, 그리고 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매우 큰 효력이 되도록 우리의 보속을 끌어올립니다.


보속이란 덕행, 정의의 덕행 일부, 뭔가를 우리가 훔쳤거나 과거의 죄에 대해 보상하는, 그 되갚음으로 인한 덕행이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명합니다. 보속의 덕행은 참 신앙의 결과이며, 그것은 죄의 추루함, 죄의 뿌리 깊은 악함을, 그리고 어떻게 죄가 천주님의 무한하신 선에 상처를 입혔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신경(信經)에서, “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 하듯이 천주님의 심판에서 신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죄의 사면을 얻고자 하는 망덕의 결과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이와 같은 망덕이 없으면 보속은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덕행이 되기 위해서는 보속은 사랑으로 인해 알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죄에 대해 후회하니,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천주님의 선하심을 우리의 죄가 상하게 함을 통회해야 합니다.


내일은 제가 고해성사의 세 가지 행위를 좀 더 자세히 전하고자 하는데, 이 세 가지는 고해성사의 핵심과 같습니다. 오늘은 고해성사에 대한 공부를 더하겠습니다. 형태는 사제의 말에 있는데 그 죄로부터 죄인을 사하는 것인 자비에 심판입니다. “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아멘”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이름을 부름으로부터 이 효력이 나온다는 것을 주목하세요. 이는 마치 성세 때에 어린 아기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영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는 거룩하시며 모든 거룩함에 으뜸 원인입니다. 사한다는 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란 영혼이 묶여 있는 사슬이고 고해성사에 의하여 그 죄로부터 방면이 된다는 것입니다”(뜨리덴틴 공의회의 교리)


아론의 사제직에 따라 구약에서는 사제들이 저러한 권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사제들은 저들의 신체적인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문둥병자를 단지 선언한 것이지, 그들을 실제적으로는 깨끗하게 할 권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며, 저들의 몸이나 영혼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사제들이 멜기세덱에 사제직에 따라 죄로부터 사면할 권능을 갖게 되는데 영혼을 실제로 깨끗하게 하는 권능입니다. 구약에서는 크고 비싼 희생제물이 요구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천주께서는 단지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영혼을 희생제물로 원하십니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에 의해 부과된 보속은 흔히 사면을 앞서서 이루어졌고, 혹독한 회개의 실천이 여러 달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해를 거치면서... 교회는 저 보속의 실제적인 행위 이전에 고해에 의한 간단한 고해성사를 받아 들임으로써 이러한 외적인 보속 행위를 경감시키고, 심지어는 죄를 사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보속이 너무나 가볍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고,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과거의 죄와 세상에 영혼 구령에 대해 보속이 계속된 것처럼, 너무나 쉽게 주님이 용서하시는 것과, 그리고 너무나 빈번하게 이러한 위대한 고해성사를 헌신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또한 생활을 통하여 모든 우리의 고통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많은 고마움을 표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공적인 죄에 대해서 공동고해가 요구되었는데, 이를테면 배교나 재판정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행위에 있어서 공동고해가 있었습니다. 특히 커다란 보속이 마땅한 세 가지 대죄가 그러한데, 배교, 살인 그리고 간통이었습니다. 천주께 고해자의 회귀를 독려하기 위하여 교회는 비밀과 사적인 고해로서 점점 더 개별적인 고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고해를 듣는 사람은 고해의 비밀에 묶여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고해 당시 그가 들었던 것을 발설하는 것은 엄중한 죄가 됩니다. 성 요한 노이먼(St. John Nepomucene) 치명자는 고해의 비밀을 누설할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해의 전통의식은 고해자의 입장에서 겸손의 자세가 있어야 하니, 자신의 고죄를 고명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고해성사 시작에서 고해자는 “나 전능하신 천주와…“로 시작되는 고죄경을 하고 가슴을 칩니다.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특히 고해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을 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미리 기도를 해두는 것이 권장됩니다. 이 기도는 고해자에게 큰 겸손과 통회를 주게 됩니다.


고해자는 사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찾으면서, 신앙의 정신으로 이 고해성사를 접근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행동하고, 그래서 사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네 죄를 사하노라.” 말할 적에 이를 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이시고, 죄를 사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설령 그 사제가 보잘 것 없는 관리자일지언정, 통회하는 고해자의 유익을 위해 사제를 통하여 죄를 사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고해성사의 열매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생명을 회복시키면서, 영혼 안에서 성신의 사랑을 부으면서 죄 자체를 모두 사면하는 것이니, 성신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천주님을 지금 사랑하시고 또한 고해자의 통회는 그래서 완벽한 통회로 바뀝니다.


두 번째 열매는 죄로 인하여 초래된 영원한 벌을 사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더 이상 지옥의 벌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죄로 인한 잠벌(暫罰)의 상당한 부분을 사해줍니다. 그러나 고해자가 보속으로서 바쳐야 할 일부는 남기 마련인데, 그건 내일 설명하겠습니다.


세 번째이자 고해성사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영혼의 치료입니다. 죄는 영혼에 무질서와 상처를 주는데, 치료가 필요하고 약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저 고해성사의 특별한 열매요, 영혼을 위해 치료가 되며, 다시 죄에 떨어지지 않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자주 고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대죄에 떨어지면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빈번한 고해를 통하여 소죄에 맞서서 싸우는 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죽고 나서 의사를 부르면 현명치 못합니다. 이와 같이 대죄에 떨어지면 고해성사라는 치료약을 받아야 합니다. 진흙탕에 떨어지고 나면 샤워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진흙탕으로 떨어지지 않아도, 몇 달 지나면 샤워를 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주 고해를 해야 하고, 대죄에 떨어지면 즉시 고해하러 가야 합니다. 최소한 매달 한 번 고해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니, 예를 들어 첫 금요일과 첫 토요일이 좋겠지요. 이보다 더 자주하면 더 좋습니다. 자주 이루어지는 고해는 죄의 상처를 치료하는 위대한 수단이고 진정으로 더 열성적으로 됩니다.


오직 복되신 성모님만이 고해성사가 필요 없으니, 성모님 홀로 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세 이후 소죄를 지은 사람 누구든 고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르치길, 고해성사는 성세 이후 대죄로 떨어진 사람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약 시간상으로 고해자를 찾지 못하면 상등통회가 필요한데, 이 상등통회는 가능한 한 빨리 실제 고해를 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하며, 그래서 최소한 “소망 가운데” 이 고해성사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200년 기간 동안에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당시 그들은 사제 없이 신앙을 보존하였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고 일본인 치명자들이 다른 신자들을 위해서 얻은 매우 특별한 은총의 열매입니다.


하자 없으신 동정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는 이 고해성사의 위대한 사랑을 얻게 하소서! 성모여, 우리를 도우사 이 보속의 성사를 열심히 자주 이용하게, 우리 영혼의 깊은 치료를 얻도록, 그리하여 더 충직하게 살아가도록, 좀 더 조심하여 죄를 피하면서 천주님의 성총에 다가가도록, 참 사랑과 너무나 반대되는 천주님의 자비를 남용하지 않도록 하게하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