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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에 관하여(2): 심화과정 - 칠순주일(2017-02-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2-13




고해성사에 관하여(2): 심화과정 - 칠순주일(2017 .2. 12)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어제 우리는 고해성사의 일반적인 모습을 공부했는데, 오늘은 고해성사의 세 가지 행위인 통회(痛悔), 고명(告明) 그리고 보속(補贖)에 대해 좀 더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죄는 천주님과는 반대되는 것이고, 천주님의 최고의 선을 거부하는 피조물이며, 영혼이나 영성의 아름다움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천주님은 죄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주님은 죄인은 사랑하시나 죄는 미워합니다. 천주께서는 분명히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 있어서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의사가 환자들을 돌보지만 질병 자체를 미워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의사가 저 질병을 미워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에, 저런 질병을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합니다. 천주께서 죄를 미워하시지 않으면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변치 않으시기에, 죄인이 변하지 않는 한, 자기의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지 않는 한, 천주님의 성총으로 돌아와서 천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통회란 죄를 깊이 혐오하는 것입니다. 통회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갈고 으깨고 산산조각 낸다.”는 뜻입니다.


통회란 내적이고, 초자연적이며, 포괄적이고 가장 우위에 있음이 틀림없고,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통회는 내적인 것이 틀림없으니, 즉, 통회하겠다는 겉모습만을 갖는 것, 심지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도 부족합니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면, 마음은 계속 죄를 짓고자 한다면 진정한 통회가 아닙니다. 이는 단지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상적인 느낌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통회란 죄의 악한 의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으깨는 마음에서 나오는 죄의 혐오입니다.


통회는 초자연적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도둑이 잡혀서 감옥 안에 갇히면, 진정한 통회로 볼 수 있는 충분한 동기가 아닙니다. 통회란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천주께 대한 사랑에서 진정한 죄악을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신앙적 견지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많은 값을 치루셨구나.. 함을 보여주는 곳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지옥을 두려워하기에 죄를 혐오하는 것도 훌륭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초자연적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통회를 얻기 위한 훌륭한 수단입니다. 많은 영혼들이 지옥을 진정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든 지옥의 두려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옥에 대한 두려움처럼 그러한 동기가 흥미를 일으키는 동기라면, 그러면 그걸 ‘마찰(갈등)’적 동기라 부르고 훌륭한 고해가 되게 합니다. 만약 동기가 보다 고차원적이고 진정한 사랑의 동기, 즉, 우리 죄로 인해 상처받으신 천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완전한 통회인, ‘상등통회’라고 합니다.


상등통회는 즉각 죄의 사면을 받지만 그와 반면에 고해소에는 (나중에라도) 꼭 가야 합니다. 천주님께 대한 순명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 고해소로 갈 수 있다 한다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고해소로 가는 의지가 없으면 상등통회라 할 수 없습니다.


통회는 포괄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몇 가지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죄를 계속 사랑하려 하려 하면 그런 통회는 부족합니다. 사음죄(邪淫罪)를 범한 미혼의 젊은 여성이 임신하고, 이어서 낙태를 한 예를 들어보죠. 그 여성은 낙태의 죄를 두려워할 것이고 그래서 그 심각한 죄를 범한 것에 대해 진정한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사음죄를 혐오하지 않는 한, 그 여성은 진정한 통회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슬픔은 포괄적이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로, 도둑이 집에 들어가서 훔치고 나서 발각되어 주인을 쐈습니다. 그가 도덕질을 혐오하지 않는 한, 슬픔만을 갖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쏜 것도 죄가 되니) 그가 저지른 모든 대죄를 혐오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통회는 최상위적인 것입니다. 저 뜻은 다른 어떤 악보다도 어떤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보다도 더 가장 커다란 악으로서 죄를 혐오해야만 합니다.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으려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초대교회 당시에 박해의 첫 번째 물결이 왔을 때, 일부 신자들은 신앙에 떨어졌고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의 배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워서 자신들을 바로잡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며 배교한 것을 혐오한다고 말하면서 판사에게 갔습니다. 이후 그들은 박해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자기 피로써 자신들의 죄를 씻고 치명자로서 교회에 의해 경배 받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진정으로 자기들 죄에 대해 ‘최고의’ 슬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또 다른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이가 아파서 죽어간다고 하자. 그리고 이교도인 친구가 미신요소가 있는 부적이나 약물 또는 미신적인 의식을 써 보자 제안할 때, 죽어가는 환자는 죄를 짓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고 한다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를 숨은 치명자로서 비유합니다.


우리의 통회는 가장 커야 하고 또한 가장 강렬하고 완벽해져서 모든 반감과 무관심을 배격해야 합니다. 신명기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주 네 야훼를 찾고자 할 때, 너 주를 찾으리니 만일 모든 영신을 다하여 온 영혼을 다하여 찾는다면 주를 찾으리라.“(신명기4:29) 그리고 예레미야에서는: “너희가 온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려 한다면, 나를 찾고 만나게 되리라. 주의 말씀이라.“(예레미야29:13)


그래서 통회가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이고, 초자연적이며, 포괄적이고 최상위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확고한 목적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혐오는 거짓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통(姦通)을 범한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히 요구합니다: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 짓지 말라.”(요왕8:11) 또한 주께서 배세다 우물가에서 치료한 남자에게 말씀하시길: “너 이미 나았으니, 다시는 범죄치 말라. 두리건대, 무슨 더 언찮은 것이 네게 당할까 하노라.“(요왕5;14)


단호한 의도는 반드시 포괄적이고 효력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대죄를 피할 의도를 가져야지 일부만 피해서는 안 됩니다. 위에서 예를 들어 훔치고 죽인 사람은 살인과 도적질 둘 다 피할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음(邪淫)을 행하고 낙태를 한 젊은 여성은 낙태와 사음 둘 다, 그리고 어떠한 죄도 다 피해야만 합니다.


단호한 의도는 효력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그 뜻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피할 적절한 수단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손을 베어 버려라. 너 병신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멸치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서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네 발이 만일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발을 베어 버려라. 절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꺼지지 아니하는 불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서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또 네 눈이 만일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버리라. 한 눈을 가지고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으리니, 거기서 그 독충이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말구9:42-47)

다시는 결코 죄에 떨어지지 않을 확실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다시 죄에 떨어질는지 모를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도를 갖겠지만, 그러나 저와 같은 단호한 의도는 훌륭한 고해와 죄를 짓지 않는 참된 노력으로 상당 기간 성공한 생활이 뒤따르는 진정한 노력이야말로 확실한 표시입니다. 만약 고해를 한 이후에, 죄의 기회를 피할 노력을 전혀 하지도 않고 과거의 옛 악습으로 곧장 떨어진다면 죄를 피하겠다는 확고한 개전(改悛)의 의도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고해는 참된 통회의 결핍으로 인해 무효가 될 것이고, 그래서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해한 후에는 죄를 피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합니다.


저 단호한 의도는 훔친 물건을 배상할 의도를 포함하는데, 만약 훔쳤거나 그가 범했을지 모르는 악한 표양에 대해서 이를 갚거나 상처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훌륭한 고해는 죄를 그저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보속으로 이끄는 것이니, 만약 경찰에 잡히지 않았더라도 세속법의 집행을 기다리지 않고서 훔친 물건을 자발적으로 되돌려주고 저지른 손상을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만약 천주님으로부터 용서를 얻고자 한다면 자기 이웃에 대해 용서를 해야 합니다. “너희가 만일 사람에게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성부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마테오6:14)


고해성사의 두 번째 행위는 자기 죄를 고명(告明) 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고명하는 것이니, ‘변명’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심리학자에게 자신의 양심을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범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진정으로 ‘보속의 법정’, 자비의 법정이지만 참으로 진정한 법정으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명해야 합니다.

고명은 완전해야 하니, 즉, 모든 대죄와 그 횟수까지 고명해야 합니다. 대죄는 큰 죄이기 때문에, 횟수를 세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천주님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멀어졌다가 되돌아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죄를 세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 기간과 죄가 되는 행위의 빈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5년간.... 1주일에 두 번 가량..” 이렇게 고명해야 합니다. 대략적인 횟수를 밝히면, 부족한 것보다는 조금 더 많이 고명하는 것이 항상 좋습니다.

죄를 범함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약함이 더해지는 환경을 말할 필요가 잇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에게 폭행한 것은 나쁘지만, 그것이 가족을 때린 거라면 더 나쁜 것입니다. 제 4계명을 거스르는 죄가 추가됩니다. 또한 정결을 거스르는 죄는 더 중죄가 되는 추가되는 여건인데, 예를 들어 강간이나, 근친상간 또는 부자연적인 악(동성애 등)입니다. 그러나 죄와 관련이 없는 환경을 고명할 필요는 없으니, 즉, 훔친 물건의 색깔 등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명은 간략해야하고도 조리에 맞게 요점만을 말해야지 쓸데없는 장황설로 죄를 물 타기 하면 안 됩니다.

고해 시에 대죄를 의식적으로 감추는 것은 성사를 무효하게 만들고 신성모독의 죄가 추가 됩니다. 저런 나쁜 고해를 하는 사람은 이 죄와 모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모두 고해해야 하며 신성모독죄도 첨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잊어버린 죄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여타의 죄와 더불어 잊어버린 이러 저러한 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죄들은 행해진 포괄적인 통회와 고명에 실질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잊어버린 죄들이 대죄라면, 다음 번 고해할 적에 꼭 고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안 하다가 천주께로 돌아올 때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어떠한 죄가 되는 행위 (부정에 관한 것 등)를 모를 것이고, 그리고 나중에 영성생활이 성장되었을 때, 그런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달게 됩니다. 그런 경우 평화를 누려도 됩니다. 이런 죄들은 그 사람이 죄가 됨을 알고 있었을 때 그때 고명되어야 하지만, 예전에 행한 고해가 훌륭했기 때문에, 죄를 감추고자 하는 나쁜 의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진짜 무지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하여) 말로 고명을 할 수 없다거나, 사제가 귀머거리라서 혹은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몸짓 언어와 같은 표시나 종이 위에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도 고명은 충분합니다. 병원에서 누워 있다면, 그리고 말은 할 수 없지만 들을 수 있다면 손으로 지적함으로써 사제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고명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양심의 성찰로서 훌륭한 고해를 준비하는 것이 유용한데, 이 양심의 성찰은 새롭게 그리고 더 큰 통회를 하게끔 자극을 주기도 합니다. 매일 행하는 양심의 성찰은 1주일에 한번 고해하도록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피해야 할 죄의 기회를 살피게끔 도와줍니다.

개신교인들은 사제에게 죄를 고해할 의무를 거부합니다. 고해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고해의 필요가 없다면, 왜 주께서 종도들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능을 주셨나요? 종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심으로써, 우리 주님은 신자들이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종도들과 그의 계승자들에게 가길 원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명(告明)할 의무를 거부하는 자는 사실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거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죄를 고명한 후에, 사제는 흔히 몇 가지 영적인 충언을 줍니다. 이러한 권고는 매우 유용하고 신자들은 그 권고에 집중하여서 고해 시에 사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있음을 명심하면서 실생활에 옮겨야 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러한 권고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서 사제는 고해한 사람이 행할 보속을 주게 됩니다. 이 보속은 지체 없이 그리고 열심히 행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보속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죄로 인해 생긴 남아있는 벌의 빚에 관한 용서가 더 촉진됩니다. 죄의 엄중함이 준, 고해 후에 사제가 준 보속은 죄를 사한 이후에 행하는 통회의 기도 말에 그대로 있듯이, 남아있는 빚을 완전히 갚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모든 선한 행실을 다하면서 끈기 있게 고통을 감당하면서 죄의 사함으로 들어가,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충직하게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제는 고해한 사람에게 몇 가지 기도를 하게 하거나, 금식 또는 고행(금육)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게 아닌) 타인에게 자선행위나 다른 선업을 행하도록 합니다.

죄에 대한 핵심적인 보속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갚아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니, 성 요한이 말씀하시듯이 주님은 “우리 죄를 구속하신 분이요, 우리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구속하신”(요안1서2:2) 분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구원의 희생제물로서 수난과 죽음을 제헌하신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의 작은 보속은 죄의 대한 용서를 얻기에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보속에 필요성을 전혀 억누르는 것과는 별도의 우리 주님의 보속은 보속에 보속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천주님의 선하심이 피조물의 선함을 억누르지 않지만 바로 그 원천이자 제1 원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것을 다 갚았기 때문에 우리가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인들은 천주님의 바로 그 선하심을 거부하는 겁니다. 천주님은 피조물의 선함을 누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피조물 안에서 모든 선을 일으키는 바로 첫 번째 원인입니다.

사실, 죄에 대한 용서의 첫 번째 원인은 사랑의 영(靈)이신 성신입니다. 이와 같은 천주님의 선하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수난의 효력을 억누르지 않으며, 이 수난은 주님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고 그분의 천주성은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수난은 죄의 용서가 되는 두 번째 원인입니다. 첫 번째 원인이 두 번째 원인을 누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두 번째 원인의 효력의 원천이어서 용서에 대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보속이 그 자체 매우 적다 하더라도 누르지 않고 오히려 죄의 용서를 얻게 하는 우리 보속의 효력을 일으키는 바로 그 원천입니다.

통회와 회한의 저 정신을 가져야 하니, 즉, 천주님을 상하게 했던 것에 대한 지속적인 슬픔입니다. 이와 같은 슬픔은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없음을, 우리가 무가치한 종(奴)임을 기억하게 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해줍니다. 이와 같은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기회를 피하게 하고, 우리 영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가 혐오하는 이러한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충직하게 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계속적인 통회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죄에 대해 결코 울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옛 악습에 도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죄를 더 보속하면 할   수록 연옥에서 할 일이 더 줄어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지금이 바로 자비의 시간입니다. 이제 곧 정의(正義)의 시간이 올 것입니다: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너 호리(가는 깃털 毫釐)라도 다 갚기 전에 거기서 (연옥) 나오지 못하리라.”(마테오5:26)

모든 과거의 죄에 대한 슬픔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해 이후에 남아 있는 이러한 잠벌을 더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성세 이후의) 온 생활에 대한 총 고해를 하는 피정의 기회를 특별히 갖는 것이 좋습니다. 훌륭하게 이루어지는 피정은 흔히 더 나은 통회를 준비하게 하며, 더 완전한 고명과 더 열정적인 보속과 배상을 하게 합니다.

보속과 양심의 가책(회한과 뉘우침)의 핵심요소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거니와 ‘그리스도 십자가의 적’(필립피3:18)인 존재로 죽님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홀로 놔두고 떠날 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고통 받고 주님과 함께 영광스럽게’(로마8:17)되기 위하여 주님과 일치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충분히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개신교인들의 생각이지 가톨릭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고해성사가 죄를 계속 짓도록 허용하는 것이 절재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살기 위하여 죄에 죽는”(로마6;11) 것입니다. 이것은 “묵은 사람을 그 행실과 더불어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입은”(콜로새3:9-10) 즉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우리에게 큰 신심을 주시어 고해성사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 영혼이 반복하여 깨끗해짐으로써 성모님께서 시초 때부터 완벽하게 지니신 그 완벽한 정결, 천국으로 가기 위해 요구되는 그 완벽의 정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