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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부성사에 관하여 - 사(춘)계 재일 토요일 (2017-03-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3-13



종부성사에 관하여 -춘계 재일 토요일 (2017-03-1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종부성사를 가지고 칠성사를 공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종부성사를 제정하셨으니 이는 신앙의 교리입니다. 실제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정의하기를, 새 계명에는 종부성사를 포함하여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고 하며, 그리고 이 모든 칠성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된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복음서를 보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침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기름을 발라주라고 종도들을 보내심을 보게 됩니다:“종도들이 떠나가 회개하는 강론을 하며, 마귀를 많이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기름으로 발라 낫게 하더라.”(말구6:12-13)


개신교인들은 종부성사가 성사(聖事)임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 야고보는 서간경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너희 중에 만일 앓는 자 있으면, 교회의 사제들을 저에게 오게 할 것이며, 이에 저 사제들은 주의 이름을 인하여 저의 위에 기구(祈求)하며 저에게 기름을 바를지니라. 이에 신앙의 기구는 병자를 가볍게 할 것이며, 주께서는 그를 위안하실 것이며, 저 만일 죄 중에 있으면 용서하심을 받으리라.”(야고보5:14-15) 이와 같이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구령하는 능력 있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며, 그래서 이는 성사인 것입니다. 성 야고보가 ‘병자’라 했을 때, 이는 가벼운 질병, 경증(輕症)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중병을 뜻합니다. 그래서 비록 마지막 순간에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그 성사를 종부성사라 부릅니다.


이 성사를 제정으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우리 영원을 봉인하고 결정짓는 죽음의 순간에 기회를 주십니다. 모든 우리의 생명은 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대비한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생활은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고, 죄로 가득 찬 생활은 죄 가운데 소름 끼치는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와 같은 죽음을 생각할진대, 악마는 이 마지막 순간에 영혼을 낚아채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은 놀란 만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순간을 위해 아주 중요한 도움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부성사는 이 중요한 순간, 우리 생명의 끝을 대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도움입니다.


이 성사의 핵심은 환자를 성 목요일 성유(聖油) 미사 기간에 주교가 축성한 기름으로 도유(塗油)하는 것입니다. 이 도유는 영혼을 강건하게 하고 치유하는 성신의 은총을 분명히 암시합니다. 오감 위에 바르게 됩니다. 사제가 눈, 귀, 코, 입, 손에, 그리고 덧붙여서 발에도 ‘십자성호’를 마지막 표시하며 도유하게 됩니다. 십자(crossing) 표시는 광야에서 40년간 있은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순간에 요단강을 가로질러(crossing)가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40년을 머문 다는 것은 이 세상의 영적인 사막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성체로 양육되고 나서 아버지의 나라인 천국으로 가는 길 위의 우리 생활을 암시합니다.


이 성사의 형식은 사제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성유와 주님의 지극히 경건한 자비로 인하여 주께서 너에게 네가 눈으로, 귀로, 후각과 맛과 대화와 만짐으로써 범한 모든 죄로 용서하노라.”성 야고보가 말씀하신 것 같이 이는 ‘신앙의 기도’입니다. 오감은 영혼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어느 하나 혹은 다른 감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부성사는 생활(생명)의 성사이니, 이 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성사는 실천은 사제가 먼저 환자의 고백을 듣고, 그리고 나서 종부성사(마지막 도유)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죄를 고백할 수 없는 상태라면, 예를 들어, 혼수상태에 있다면, 그러면 만약 그가 이와 같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적절한 통회와 그 죄에 대해 충분한 슬픔을 가졌다면 그 종부성사는 대죄까지도 용서할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성사의 은총은 성 야고보의 말씀에서 가르칩니다.“신앙의 기구는 병자를 가볍게 할 것이며, 주께서는 그를 위안하실 것이며, 만일 저 죄 중에 있으면 용서하심을 받으리라.”(야고보5:15) 이 성사는 소죄를 용서하며, 그리고 필요하다면 (고해할 수 없는 경우라면) 대죄까지도 용서합니다. 죄로 인한 보속의 벌을 면해주고 영혼을 치료합니다. 천주님 자비 속에서 환자를 평안하게 그리고 강하게 해주고 강한 신뢰를 갖게 해줍니다. 생명 끝에 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일치시키고, 주님을 통하여 악마를 이기는 최종 승리를 얻게 됩니다. 때때로 이것이 영혼에 유용하다면 천주님은 몸을 치료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십니다. 


만약 병자가 회복되고 나서 다시 병에 걸리면 이 종부성사를 다시 받아도 됩니다. 설령 회복이 부분적일지라도 그리고 후에 병자가 질병에 재발이 되면, 죽음이라는 새로운 위험으로 간주되어 다시 이 성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번 병환 중에 있으면, 성사의 은총이 종부성사를 통하여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병자가 생명의 위험에 빠지자마자 바로 이 성사로부터 혜택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성사의 주관자는 합당하게 서품 받은 사제(또는 주교)인데, 야고보 성인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그리스어인 “프레즈버터(presbyter)”를 장로라는 “엘더(elder)”로 잘못 번역하여서 분명히 종도들이라는 뜻에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장로라는 말은 세속적인 번역이지, 종교적 용어의 번역은 아닙니다. “프레즈버터(presbyter)”라는 그리스어는 라틴어로 들어왔고, 그리고 나서 오늘날 교회에 의해 유럽어로 들어왔는데, 왜냐하면 종도들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 저 단어 프레즈버터(presbyter)를 담아냈던 것이라서 초대교회가 세속적인 단어인 “엘더”(elder, 장로 .연장자)보다 훨씬 더 많은 표현을 갖는 그 단어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역자 주: presbyter는 bishop(주교)과 deacon(부제) 사이의 계급이라는, 즉 사제의 뜻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긴 언어가 라틴어로 들어오고 나서 현대 유럽어로 된 꽤 많은 그리스어가 있는데, 세속적인 본래 의미로 되돌리려 한다면 이 단어로부터 종교적 의미가 담긴 것을 벗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교(bishop)라는 뜻의 에퍼스코퍼스(episcopos) 라는 단어가 그런 사례인데, p와 b는 같은 순음(입술소리) 입니다. 그래서 건너 건너서 바뀐 것입니다. 한국어로는 ‘ㅂ’과 같습니다. 주교를 ‘감독(’overseer‘)으로 번역해선 안 됩니다. (역자 주: 개신교에서는 주교급 목사를 감독이라 부릅니다) 저런 단어는 종도들이 전한 종교적인 뜻을 없게 합니다.


그러면 왜 종도들이 종교적 의미와 동떨어진 세속적인 의미의 이러한 단어를 선택하였나요? 왜냐하면 종도들은 구약시대의 숭배와 이교도의 숭배 양자로부터 분명하게 단절하여서 드러내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도들은 사제라는 뜻인 ‘히에러스(hieros)’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주교와 사제를 분명하게 가르키는 단어를 선택했는데 이교도 종교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종부성사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요청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병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종부성사라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이는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다른 방법 없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체하는 것이 병자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가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오, 주여, 갑작스럽고도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를 하게 합니다. 이 위대한 종부성사를 무시할 때, 죽음은 갑작스럽게 다가옵니다. 사제를 오라고 해서 병환 중인 친구나 친척을 방문하게 하여 그 병자가 죽음의 목전에 있다 한다면 성유를 발라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병자에 대한 자비의 위대한 행위입니다.


병자를 방문하고 시중드는 것은 놀라운 보상이 주어지는 자비의 위대한 행위입니다:“내 성부의 강복하신 자들아, 세상 배포할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에 와서 차지하라....나 병들었을 때 문병하고...”(마테오25:34,36) 병자에게 오직 물질적인 도움이나 신체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만을 해주어서는 안 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방법으로 저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항상 병자들과 기도하시며, 이 죽음의 순간에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모든 어머니들 중 최고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자녀들에게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계셨고, 그분의 수난 속에서 가까이 다가가셨고, 그리고 현재 성모님은 병자들의 침대 아래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시며, 그를 도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게끔 하십니다. 고통은 큰 신비이고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받아드리고 데에 있어서 성모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님과 함께 고통을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금식과 보속을 해야 하는 이 사순절 시기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병자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천주님의 영광과 영혼구령을 위해서 병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성 삼위께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비를 배가하여 베푸는 시기입니다. 아멘.


Father François Lais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