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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François Laisney



제목 현성용(顯聖容), 기도 그리고 보속 - 봉재 후 제2주일 (2017-03-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3-13




현성용(顯聖容), 기도 그리고 보속 - 봉재 후 제 2주일(2017-3-12)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현성용은(顯聖容) 베드로 성인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종도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의 원인입니다:”주여, 우리 등이 여기 있기가 좋으니, 만일 원하시면, 여기 세 장막을 지어, 주께 하나, 모이세에게 하나, 엘리아에게 하나씩 하사이다.“(마테오17:4) 베드로는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거기서 영원히 남아있고 싶어했습니다! 왜 거룩한 모친이신 교회가 사순절인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성용을 묵상하도록 하는 것인가요? 첫째, 이는 기도의 모범이고, 둘째로는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언이 있은 후에 이 현성용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예수 마땅히 예루살렘에 가서 두민(頭民)들과 학자들과 제관장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죽고, 제 삼 일에 부활할 줄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이시니.“(마테오16:21)


저 선언은 종도들이 받아들이기 무척 어려운 것이어서 수위권(首位權)의 약속을 받아드린 직후 우리 주님께 반박하길,:”주여, 마옵소서. 당신께 이런 일이 당하지 아니하리이다.“(마테오16;22) 주님은 돌이키사, 뒤로 물러가게 하신 후 말씀하시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네가 천주의 뜻을 맛들이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의 뜻을 맛들이니, 너 나를 조당하는도다.“(마테오16:23)


그리고 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누 만일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 대개 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그 생명(生命)을 잃어버릴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생명을 버리는 자는 그 생명을 얻으리라. 사람이 만일 보천하(普天下)를 다 얻을지라도 제 영혼에 해(害)를 받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영혼을 다시 물러내겠느냐?“(마테오16:24-26) 우리 주님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영혼 구령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인자 자기 성부의 영광과 천신 중에 옹위하여 와서 이에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리라.“(마테오16:27)


자, 이것이 모두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원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유데아인에게는 걸러 넘어짐이 되고, 외교인(外敎人)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는 도다.“(코린토 전 1:23) 그리고 심지어는 때때로 매우 충직한 신자들에게,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그와 같은 요구는 절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결론을 내립니다:”나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여기 섰던 자 중에 몇은 죽지 아니하여서 인자(人子) 자기 나라에 임함을 보리라.“(마테오16:24-28) 그리고 6일이 지나서, 3명의 선택된 종도들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현성용이 된 주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과 함께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고 가라고 요구하실 자격을 아주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보상,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성 성삼위를 영원히 직접 뵙는 지복직관이라는 가치(보상)를 주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주여, 우리 등이 여기 있기가 좋으니…“(마테오17:4) 그리고 우리는 장막 아래에서가 아닌 그곳 천국에서, 우리 성부의 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세상 이후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보상은 무한한 가치가 있고, 또한 이 세상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기도 안에서, 묵상 속에서 우리 영신을 기쁘게 합니다.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인들 생활의 아름다움입니다. 천주님과의 매우 깊은 친교인 것입니다. – “너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모든 힘과, 모든 뜻으로 상주 네 천주를 사랑하고,“(루까10:27) – 그리고 저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흐릅니다. 천주님에 대한 사랑은 특히 모든 묵상과 기도 안에서 실천됩니다.


현성용은 기도와 묵상의 큰 모범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천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께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주님을 사모합니다:”그이는 당신 땅에 있는 성인들께 대한 나의 모든 애정을 얼마나 놀랍게 하셨는고!“(성영15:8) 우리 마음속에서 천주께 대한 불타는 갈망을 주는 저 자비는 아침에 먼저 하는 일이 기도하는 것입니다:”천주시여, 당신은 나의 천주시니, 나는 당신을 열심히 찾나이다.“(성영62:2) “내 영혼은 천주를, 생활한 천주를 갈망하나이다. 나는 언제나 가서 천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으리요?“(성영41:3)


기도는 천주님을 향하여, 마치 현성용의 모습을 보인 타보산을 올라가는 것처럼 천주님을 향해서 가는, 우리의 영혼이 상승하는 그 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상승과정은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저급한 것으로부터, 피조물로부터 우리 영혼을 떼어내어 천주께서 거주하시는 창조되지 않은 빛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진정으로 천주님은 “저는 홀로 불멸성을 가지시며 접근치 못할 빛에 사시느니, 아무도 저를 보지 못하였으며, 뵈올 수도 없느니라.“(티모디 전 6:16) 천주께서 천국에서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천주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약속을 받고 난 후, 저 장면을 갈망합니다;”이는 당신에게는 생명의 샘이 있고, 또 당신의 빛에서 우리가 빛을 보기 때문이로소이다.“(성영35:10) 이곳에서 우리가 (천주님의 모습을) 완전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천주님의 빛으로 인하여 비춤을 받을 수 있습니다:”너희가 기쁨에 넘치려거든, 또 너희 낯이 부끄러워하지 않거려든, 너희는 그이를 우러러 뵈올찌어다.“(성영33:6)


천주 성부를 찾는 방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성부께로 올 자 없느니라.(요왕14:6)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기에 이교도(異敎徒)들은 천주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천주님이 충만한 것이 아닌, 무(無), 니르바나(nirvana 空)를 찾습니다. 그러나 주님 생활의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면서 우리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받습니다:”가리우지 않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은 다 이 우러러봄으로써 항상 더욱 영화롭게 (주와) 동일한 모상으로 화(化)할 것이니 이는 주의 성신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라.“(코린토 후 3:18)


기도는 어떤 준비가 요구됩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 준비가 있으니, 오랜 기간의 준비와 즉각 준비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랜 기간의 준비는 복음을 읽거나 교리문답이나 성인들 및 거룩한 작가들의 저작을 읽는, 거룩한 독서를 통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의(敎義)를 연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읽어야 할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독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간이 많이 있지 않으니, 쓸모없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물론, 악한 독서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심지어 좋은 책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가치가 있는 책, 성인들의 저작을 읽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성인들의 저작에는 매우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글을 읽는 거룩한 남성과 여성들은 천주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고,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천주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호흡합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작품에는 여러분이 다른 작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영적인 맛과 매우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오랜 기간의 준비이니, 왜냐하면 선하고 거룩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워주며, 그리하여 쉽사리 기도 시간으로 마음을 이끕니다. 그와는 반대로, (악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TV를 시청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악한 모습과) 쓸모없는 모습에 빠지게 되고 ... 그리하여 기도시간을 내기 어렵게 하고 ..... 기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듭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준비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는 데에 있습니다: 산 아래(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걱정거리를 뒤로 미루고, 거기에서 벗어나서 천주께 대한 ‘한 가지 필요한 것’에 다시 집중해야 합니다. 저런 준비는 잠시 후 제가 설명하듯이 우리 도덕의 어떠한 정화(淨化)를 요구합니다. 그러면 이 준비는 여러분이 묵상하고자 하는 복음의 말씀이나 장면을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빛을 청하려는 기도, 우리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 요셉,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특히 성모님 등…묵상을 훌륭하게 한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 준비가 끝난 후, 기도의 핵심은 신앙의 눈으로 신비를 찾으면서 신앙 행위로 인한 지성의 실천이니, 바오로 성인은 이에 대해 말씀하시길, “너희 마음의 눈을 비추어 주시기를 위함이니라. 이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는 어떠한 희망에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성도들에게 (끼쳐주실) 유업의 영광과 풍부함이 어떠한가를 인식하게 하기를 위함이니,“(에페소1:18) 신앙의 이러한 행동, 지성의 이 행동은 규칙적인 독서의 습관으로 인하여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먹이지 않는다면, 기도시간에 여러분이 어떻게 이에 대해 묵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우리 주님의 교리에 익숙하다면, 만약 교리문답과 미사경본, 복음을 잘 알고 있다면, 그러면 기도는 쉬워지고 모든 이러한 거룩한 진리가 여러분 마음에 쉽사리 다가갑니다.


이러한 신앙 행위는 자비의 행위로 이끌려야 합니다. 천주님에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성모님과 성인들에 대해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주로 이런 위치를 취하는 천주께 대한 자비의 중요한 행위가 있습니다. 천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영의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을 느낄지어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청하는 바를 너에게 주시리라.“(성영36:4) 이사야는 말합니다: “네가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祖上)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니라.“(이사야58:14) 만약 가장 친한 친구가 행복해한다면, 우리는 그의 행복을 함께 누립니다. 천주님은 우리의 최고 좋은 친구입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행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천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저 자비는 효과적이어야 되고 우리 생활의 진정한 향상을 일으켜야 합니다. 훌륭한 기도는 그래서 좋은 행동으로 이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호흡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여러분 생활에서 청소하여 털어내야 하고, 모든 덕행을 향상시켜서, 우리 주님을 모방함으로써,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행동 안에서 진정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몇 가지 훌륭한 실용적이고도 구체적인 결심을 끌어내고, 그러한 은총을 요청하여서 이 훌륭한 결심을 온 종일 충직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계신 것을 묵상할 적에 기도와 보속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40일간 금식을 하셨는데, 이 모습은 주님의 공적 생활에 있어서 준비라는 거룩한 시간의 소극적인 면입니다. 특히 주님은 40일간 기도를 하셨는데, 이 모습은 이 거룩한 시간이 갖는 적극적인 면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보속으로 강화되고 나서 악마의 모든 유혹을 극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모방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인해 받은 주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서 유혹을 저항하는 데에 강해지며 죄를 이기는 승리를 얻게 됩니다. 진정, 기도 없이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유혹을 극복하는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리구오리의 성 알폰수스는 이르시길, 기도란 영혼구령에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보속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기도의 매우 특별한 힘과 권능을 주목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보속없이 기도만 하려 하는 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가르쳤습니다:”이런 종류는 기도와 재소 곧 아니면 능히 쫓아낼 수 없느니라.“(말구9:28) 루르드의 성모님은 ‘기도하라. 보속을 행하라.”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해야 하는 의무를 주장하십니다:”항상 기구(祈求)하고 그치지 말라.“(루까18:1) 우리에게 명령도 하십니다:”구하라, 너희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너희게 열어 주리니“(마테오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세 번씩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세 번이나 다시 기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받을 것이다, 찾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주님은 그분이 하신 약속을 확인합니다:”무릇 구하는 자는 받고, 찾는 자 얻고, 두드리는 자 열어 줌이니라. “(마테오7:8) 그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모든 기도의 모범은 천주경입니다. 우리가 요청하는 것을 아름답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특히 영적인 것을 요청합니다. 천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분의 이름이 모든 이들에게 영광 받고 거룩한 가운데 가장 거룩하게 인정되길 원합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천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는 은총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천주님의 완벽한 왕국입니다. 이 왕국이 이 지상에서 확장되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의 모든 것이 천주님의 뜻을 실행하도록 하길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초월적인 실제적인 빵’(마테오6:11)을 청하는.. 즉, 이는 성체로서 우리 영혼의 최고의 음식이요, 바로 천주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빵입니다:”사람이 음식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오직 천주의 입에서 발하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테오4:4) 그리고서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죄는 무슨 비용을 치룰지라도 피해야 할 악입니다. 유혹을 이길 승리를 요청하고 모든 다른 흉악으로부터 구해지도록 요청합니다.


타보 산은 우리를 갈보리 산으로 이끕니다. 온 사순절은 성 금요일과 부활절로 향합니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계시는 타보산 위에서가 아니라 갈보라 산 위입니다. 세례자 성 요한의 진정한 말씀이 그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보라, 천주의 고양(羔羊)이시로다. 보라, 세상의 죄를 면하여 주시는 자시로다.“(요왕1;29) 그곳에서 우리는 성부의 영광을 발견하니, 성부의 영광이 주님의 완벽한 희생제사로 인하여 회복됩니다: 죄의 악함을 이해합니다. 죄는 천주성자의 피로 인하여 속량(贖良)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죄를 배상하면서, 세상의 죄를 배상하면서 희생 안에서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사순절 동안에,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금식과 보속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저 수난에 동참하고 부활절 날 영광스러워진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성신이 친히 우리가 천주의 의자(義者)임을 우리 정신과 한가지로 증언하시는 도다. 의자면 또한 상속자라. 곧 천주의 상속자요,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 다만 우리는 저와 함께 고난을 당할지니, 이에 우리는 저와 더불어 또한 영화롭게 되리로다.“(로마8:16-17)


주님의 수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러한 일치는 바로 미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에 우리는 미사에 더 자주 참여해야 합니다. 이곳에 사제가 항상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힘들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러나 집에서 글을 읽을 수 있고, 독서에 대해 묵상할 수 있으며, 이 미사에 대해 기도할 수 있으니 미사는 교회의 모든 정신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보속, 착한 일을 실천하는 것, 기도, 우리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 등입니다.


기도 및 우리 주님의 수난에 들어가는 최고의 방법은 성모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모든 생애는 기도의 생활, 참으로 기도로 이루어진 생활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의 기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마니피캇(Magnificat)은 바로 최고의 기도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의 성모님의 생각은 무엇이었나요? 이미 나사렛에서의 모든 생활은 기도의 생활이었고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거룩한 여인들을 이끄시는 우리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성모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성모님은 십자가 바로 그 아래에서 거룩한 여인들을 이끌었습니다. 다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제헌하시고, 성모님은 ‘그를 돕는 조력자’(창세기2;18)처럼 새 아담에게 드리는 새 이브로서 주님과 함께 자신을 드렸습니다. 오, 마리아여… 어떻게 기도하는지 우리를 가르쳐주소서! 아멘.


Father François Lais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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