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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시대에 널리 퍼진 자유주의(2017-04-0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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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널리 퍼진 자유주의(2017-04-08) - 고난 제1주 토요일


저는 지금 체스테튼(Chesterton)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약 90년 전에 글을 쓴 것이지만 제가 오늘 이 책으로부터 나오는 몇 가지 보석 같은 교훈을 전하고자 하니,  이 책은 오늘날의 문제점을 참으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체스테튼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데 우리 시대에는 그 자유주의가 더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생각하길, 자유주의란 단지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숭배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천주님으로부터, 진리로부터, 모든 계명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될 정도로 절대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존재, 즉 신으로서 우상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현대 세상에서의 거짓 신입니다. 이 우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모든 복종에 대해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악마가 외치는 바로 그 반란입니다. “나는 섬기지 않겠다.”(예레미야 2:20)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해 체스테튼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현대 문화’에 완벽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이것은 인간성, 증오... 등의 특히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대부분 억제되어야 할 ...인내심이 없는 오만한 욕정의 결과였다.”(The Thing, p. 130.)

타임지의 최신호 제목은 “진리는 죽었는가?”입니다. 검은 뒤 배경에다가 붉은 글씨로 쓰인 것인데, 이 제목은 같은 잡지(타임지)에서 50년 전에 다룬 똑같은 검은 뒤 배경에다가 같은 붉은 제목인 “신은 죽었는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두 가지 제목은 인간에 대한 같은 우상을, 그리고 신을 거부하는 표시입니다. 신을 거부한다함은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천주님으로부터 옵니다.(로마13:1)


현대인들은 모든 권위를 거부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믿고자하질 않습니다. 진리는 천주님로 부터 오는데, 천주님은 진리의 첫째요 으뜸이자 최고의 원인이지만 현대인은 모든 권위를 거부합니다. 혼인은 천주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현대인은 이혼을 장려하고, 모든 ‘자유로운 결합’, 죄가 되는 생활, 심지어 자연을 거스르는 결합을 주장함으로써 (신성한) 혼인을 거부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런 차이가 있는 우리의 바로 그 인간본질은 천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각자는 자기 고유의 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지극히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현대인이 거부하는 목록은 계속 이어서 진행됩니다. 참된 예술을 거부하면서 추한 것들이 음악, 미술, 조각 등 여러 곳으로 침투합니다. 자녀들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는 가족을 거부(이혼)함이 있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거부하고, 주님의 교회인 가톨릭교회를 거부하기도 하고,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척하면서... 심지어는 사탄을 섬기는 종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인은 자아(自我)를 파괴합니다. 이는 현대의 두 개 악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것들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자살이라는 여러 중첩이 어우러지는 낙태와 안락사입니다. 진정으로 ‘죄의 삯은 사망’(로마;23)입니다. 죄는 영혼 안에서의 죽음이고 육체 안에서 죽음으로 이끕니다. 낙태와 안락사의 그리 나쁜 것이 아닌 사실인 것처럼, 현대인들은 참으로 혐오스런 죄, 천주님을 거부하는 권리를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천주님을 거부할 권리는 없습니다. 천주님은 모든 선의 최고의 규범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진 않더라도 현대인의 이러한 현대의 오류들은 아주 중요한 인간의 능력을 파괴하는 쪽으로 이끕니다. 실제로 모든 다른 동물들을 능가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만든 것은 영성, 지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천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능력을 받고 타고 납니다. 지성의 목표는 진리를 지향합니다. 만약 진리가 없다면 지성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더 이상 지성에 의해,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열에 의해 통제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흔히 보듯이 인간은 맹목적인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지성의 파괴는 회의론이 많이 있는 곳에서 보게 되니, 그들은 인간의 지성이란 –원리에 의해서 - 천주님에 관해서, 또한 인간에 관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저 회의론은 마음의 심각한 질병이요 지성의 절망인데, 이는 결국 천주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다 좋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각 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기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이는 함축적(암시적)으로 천주님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어떠한 능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회의적이고 오늘날 흔히 보편화된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한 가지 특징은 몸, 안락, 레저 그리고 쾌락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현대기술의 발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을 육신을 섬기는 데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서 있어야할 적절한 질서를 뒤집어 놓는 완전한 전복(顚覆)입니다. 우리의 몸은 정신을 섬기는 데에 두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몸을 이겨서 다스려야 합니다. 영혼은 측정된 방법으로, 이성적인 계산으로 육신의 욕구를 (적당히)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영혼의 목적을 이용함은 옳지도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현대의 자유주의는 도덕적인 영역에서 대부분 볼 수 있습니다.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도덕규범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로서 사람이 원하는 것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장합니다. 타인에 대한 어떤 희미한 존중보다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합니다. 제가 ‘희미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저들은 예를 들어 낙태와 같이 자기들에게 방해되고 걸림돌이 되는 아기들을 죽이기까지 하는데 있어서 거리낌 없이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 없는 아기를 죽일 정도라면, 그가 하고자 하는 범죄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수난시기에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가 우리 주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희생하심을 분명히 봅니다. 주님은 우리 현대의 악에 대해 더 이상 분명하게 치료책이 될 수 없습니다. 천주께 대한 복종을 우리가 거부함을 보상하기 위하여 주님은 완전히 자신을 낮추시고,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시는 바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필립피2:7)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되,“당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순명하셨으며, 더구나 십자가상에 죽기까지 순명하셨음이라. ”(필립피2:8) 이것이 현대의 죄에 반대되는 것이고, 우리 현대인에 대한 치료책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고통 받는 것이 필요한가? 특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기까지 하는 것이 필요한가? 확실한 방법에 있어서 고통 없이 천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진실입니다. 이는 모든 거룩한 천신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천신들은 죄를 짓지 않고 고통당하지도 않습니다. 천신들은 창조된 바로 그 시작부터 천주님께 온 정성을 다하여 자신을 드립니다. 바오로 성인 말씀하시듯, 천주께서 천신들에게 천주성자의 아들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렸을 때, 천주님은 모든 천신들에게 그분을 경배하라 명령하셨을 때(헤브레야1) 모든 천신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놀라운 신심과 신속함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있어서 자신들을 드렸고, 그와 같은 놀라운 신심으로 천신들은 즉각 보상을 받았으며,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반면에 악한 천신들은 너무나 완전한 나약함과 고집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저들은 즉각 지옥의 불로 영원히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었으니, 인류의 시작부터 천주께 대한 인류의 반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 때문에 배상과 희생의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죄 없는 유일한 사람만이 그가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죄 없는 한 분이 계시니,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죄에 대한 배상을 위해 분명히 오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모친은 무염시잉모태라는 특권을 받으셨고, 그리고 천주님의 성총에 의하여 성모님은 초기의 저 은총에 완벽하게 협력하셨고 그래서 또한 성모님은 죄가 없습니다. 새로운 이브로서 성모님이 새 아담의 조력자(창세기 2:8)가 되어야 함을 완벽하게 이해하셨고 구속의 바로 그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통을) 공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히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해 배상하기 위하여 우리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게다가,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죽으셨다면 어찌 우리가 너무나 무정할 수 있겠으며,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을 해야 합니다:“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의 죄를 위한 것이니까요. 주님 대신에 제가 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만일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자기를 끊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루까 9:22) 이것이 십자가의 황금의 길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의자(義子)면 상속자라, 곧 천주의 상속자요,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라. 다만 우리는 저와 함께 고난을 당할지니, 이에 우리는 저와 더불어 또한 영화롭게 되리라.”(로마8;17)

수난(고통)은 현대 질병에 대한 친정한 치료책입니다. 현대인은 자유를 원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자 합니다:“너희가 순명하기 위하여 어떤 이에게 너희 자신을 노예로 바치면 너희는 그의 노예가 되어 순명하게 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혹시 (너희 자신을) 죄의 (노예로서 바쳤으면) 죽음에 이를 것이요, 혹 순명의 노예로 (바쳤으면) 의화(義化)에 이르리라.”(로마6:16) 그와 반대로, 천주께 대한 순명으로 인하여, 주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으로 인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고, 죄로부터 자유로우며 선한 일을 하기에도 자유롭고, 천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악을 행함에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간단한 비교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행기를 보세요. 조종사가 원하는 곳 어느 곳에나 비행기가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으니, 왜냐하면 비행기는 항공역학의 법칙을 준수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행기가 항공역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비행기들은 그저 추락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행기에게 저 자유를 주는 법칙에, 천주께서 자연에 설정하신 법칙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가 어리석으면 안 된다. 천주님의 계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명이 명령하는 것을 행하면 천주님 계명의 일치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계명이 명령하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천주님의 계명의 일치에 따라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달아날 수 없다. 천주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하찮은 피조물이기에 달아날 수 없다. 천주께서는 선하시고 악을 허용하지 않으며 최종권한을 가지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달아날 수 없다.

우리가 천주께 순명하는 것이 좋다는 점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님의 그분의 지위강화를 위해 뭔가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천주님은 이미 최고이시기에,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천주님 안에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아름답게 표현합니다:“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조성하셨다. 오, 주여! 우리의 마음은 당신 품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불안하나이다.” 천주님은 최고의 진리요, 우리의 지성을 가득 찬 기쁨으로 채우는 묵상이며, 최고의 사랑이시며, 우리의 의지를 가득 찬 기쁨으로 채우는 불이다.“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우리의 천주께서는 태워 없이하시는 불이신 연고니라.“(헤브레야12;29, 신명기4;2) 그래서 우리가 천주께 순명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고, 우리가 천주님으로부터 덜어져나가는 것은 – 진정한 악으로서 - 드라마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천주께로 돌아갑니다.


“비롯됨에 말씀이 계시고, 저 말씀에게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이 곧 사람의 빛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운 데 행치 않을 것이요, 오직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니라.“(요왕1:1,4, 8:12)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설명하시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빛입니다. 즉, 우리의 지성을 비추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 분의 빛 안에서 우리가 그 빛을 뵈리라,“(성영35:10) 우리의 마음은 천주님의 빛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고 성 요한께서 말씀하시듯이 우리가 직접 천주님을 뵐 것입니다.(요한 1서 3:2)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회의론에 대한 치료입니다. 주님은 성부이신 천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내 성부 내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으니, 성부 외에는 아무도 성자를 알지 못하고, 또 성자와 성자 즐겨 지시하여 주는 자 외에는 아무도 성부를 아는 자 없느니라.“(마테오11;27)

이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촛대 위에 놓인 빛입니다. “아무라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혹 평상 밑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촛대 이에 두어 들어오는 자로 하여금 빛을 보게 하노니, ”(루까8:16) 십자가 그곳에서 우리는 죄의 악함을 보니, 이 죄는 천주성자께 너무나 많은 비용을 치루게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천주님의 거룩함을 보게 되니, 천주님은 참으로 커다란 배상이 필요한 죄로 인해서 너무나 큰 상처를 받으신 분이요, 그곳에서 우리는 천주님의 자비를 보게 되니, 그의 아들을 데려 오사 죄의 노예인 우리를 구원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되니, 주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쾌락, 부, 그리고 자기 의지를 사랑한 것에 대해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죄의 노예로 부터 자유를 얻고 천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진정으로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 바오로 성인 이르시길:“유데아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레시아(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전하노니, 이는 유데아인에게는 걸러 넘어짐이 되고, 외교인(外敎人)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는 도다. 그러나 유데아인이나 외교인을 막론하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천주의 대능(大能)과 천주의 상지(上智)로 선전하느니라. 대저 천주의 편(便)의 어리석은 것은 사람의 것보다 지혜롭고, 천주의 편의 약한 것은 사람의 것보다 굳세니라.”(코린토 전 1:22-25)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거룩한 성 주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청하여 주님이 진정으로 우리 마음의 빛, 우리 온 생애의 빛이 되게 간청하사, 우리가 그분의 길, 천국으로 가는 황금의 길인 십자가의 길 안에서 걷도록, 그리하여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하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Father François Lais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