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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티마 성모 - 마리아의 하자 없으신 성심(2017-05-13, 파티마 100주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5-15


파티마 성모- 마리아의 하자 없으신 성심(2017-05-13)


파티마 성모님의 발현은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의 위대한 발현이었습니다. 일찍이 성 요한 으드(St John Eudes, 역자 주: 프랑스 성인, 노르망디 출신으로 레네 신부님과 같은 지역임)는 ‘마리아의 지극히 깨끗하신 성심’께 신심을 드렸고, 마리아의 성심은 그 이전의 다른 성인들에 의해 경배되었지만, 파티마에서의 발현이 저 성모 신심에 대한 지극히 탁월한 증가를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리아 신심에 대한 여러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을 고려해보고,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시대의 악을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알아봅시다.

‘마음’은  성 바오로께서 ‘내적 인간’ 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저의 영광의 부(富)를 따라 저의 성신으로 말미암아 내적 인간에 있어서 비상이 견고하게 되어,“(에페소3:16) 마음은 사랑의 성신이 거하는 내적인 지성소입니다;  그것은 모든 덕행의 자리, 특히 최고의 덕행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내적인 생활을 등한시하고, 심지어 완전히 무시하고 멸시까지 합니다. 현대인들은  피상적인 것, 외적인 즐거움과 재미, 기분전환에 애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대한 우리의 신심을 요청함으로써, 성모님은 우리에게 이 내적인 생활의 중요성과 그 우월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내적인 생활은  이미 이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수준에서 이미, 인간의 위대함을 만드는 것이란 바로 인간의 이성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은 쉽습니다. 만약 우리의 신체와 동물의 신체를 비교해보면, 동물이 모든 면에서 인간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동물들은 인간보다 더 멀리 보고, 어떤 것은 더 잘 들으며,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냄새를 잘 맡습니다. (개들은 냄새로 여러분을 인식합니다) 어떤 동물들은 더 빠르고, 어떤 동물들은 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으로 어느 동물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고, 동물이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 사물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만들며, 동물들이 들을 수 없는 많은 파장(주파수)을 들을 수 있는 레이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써 열차, 비행기, 심지어 달에 가는 제트 엔진도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볼 수 없지만, 이성이 외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성은 내적 인간의 일부입니다.

만약 가장 높고 지극히 중요한 인간의 기능(능력)이 눈에 볼 수 없는 것이고 내적 인간의 일부라면, 이 내적 인간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돈, 명성, 권력과 같은 외부적인 물건(사물)에서 행복을 찾으며, 또는 피상적인 물건이나 쾌락과 위안과 같은 감각적인 사물 안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저들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내적 생활을 무시합니다. 저들은 영적인 물건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데, 특히 천주님을 무시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커다란 악입니다. 마리아의 하자 없는 성심께 드리는 신심은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 안에서 지극히 아름답게 빛나는 내적 생활의 우월성, 천주와 함께하는 생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활, 이 영적 생활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신심의 명백한 두 번째 부분은 마리아의 성심이 티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으셨고, 아주 작은 죄조차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넘치는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의 표시를 보면 저들은 항상 세상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고,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성모님의 요청을 비틀어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모님은 악마와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연코! 그래서 성모님이 하자 없는, 즉, 깨끗하시다는 것입니다. 죄는 성모님을 이길 가장 작은 힘도 갖지 못했습니다. 성모님에게서는 죄에 대한 변명을 못 찾습니다. 성모님은 완전히 무결하십니다.

이것은 특히 정결의 영역에서 참입니다. 성모님은 가장 순수한 동정이시며, 절대적으로 동정입니다. 우리 시대에 완벽한 정결의 이러한 사례는 몹시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방법이 제대로 된 방법입니다. 불순함과는 결코 타협이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정결의 덕행을 오염시킬 수 있는 어느 것도 피합시다. 눈의 호기심을 피하고, 특히 인터넷에서 나오는 정결을 거스르는 것을 피합시다. 불이 커졌을 때보다는 작을 때 끄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유혹이 작을 때, 시작 초기에 정결을 거스르는 유혹을 저항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유혹에 타협하는 것은 승리는 점점 더 어렵게, 승리할 수 없게끔 기회를 부여할 뿐입니다. 하자 없으신 성모님은 죄에 대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정결치 못한 것과는 타협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어떠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멀리하도록 성모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모성심은 티 없으시고, 성모님의 사랑은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마리아의 성심은 죄에서 떨어져있으니, 이는 천주님과 애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님과의 저 결합은 특히 이곳 세상에서 신앙(信仰)으로 인한 것이데, 마치 바오로 성인께서 “마음으로 믿어 의화(義化)될 것이요“(로마10:10)과 같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성인은 신앙이란 (개신교인들의 특징인) 어떤 감정적인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마음’으로 믿는 것, 내적인 인간, 내적인 능력(기능)을 의미합니다. 토마스 성인은 가르치길, 신앙이란 우리 지성(知性)안에 있는 덕행이라 합니다. 성모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특히 성모님의 신앙으로 인해 찬미를 받았습니다: “주 네게 말씀하신 바는 다 이룰 줄로 믿으셨기에 너 복되도소이다.“(루까1:45) 티 없으신 성심은 주저 없이 성모님 안이 깨끗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류도 조금도 섞이지 않고 성모님 신앙에는 오류와 타협함이 없는 것입니다. 의심이나 주저함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천주님으로부터 드러난 진리에 완전히 애착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최고의 진리이신 천주님께 완전히 밀착(密着)하였습니다. 천주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으로 우리 천주께 다가갈 수 있다고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십니다. (에페소 3:12절을 보십시오)

성모님이 파티마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 첫 번째는 “나는 천국에서 왔단다.”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이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천국에 갈수 있을 까요?” 망덕의 덕행에서 찾을 수 있는 천국에 대한 이 위대한 소망은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대한 신심의 특징입니다. 그 누구도 천주께 대한 이러한 갈망을 이 세상에서 성모님만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주시여, 당신을 그렇게 내 영혼이 그리워하나이다.“(성영(41;2-3) 소망은 천국에 대한 이 커다란 소망을 포함하기도 하고,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 안에서 실제적인 신뢰감을 포함하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도달하려는 신뢰감을 가지는 것이고, 또한 이는 크고도 깊은 기쁨의 원인입니다:”희망에 있어 기뻐하고“(로마12;12)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과 세속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중요하고도 큰 차이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만, 세속적인 사람들은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저들의 시각은 가로막힌 벽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저들은 죽음 이후에 있는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저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즉각적인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외부적이고도 표면에 나타나는 쾌락을 추구하는 반면에, 저들의 내적인 영혼 깊은 자아는 절망과 깊은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저들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니라.”(데살로니카 전4;13) 저 깊은 슬픔이 깊은 내적인 슬픔을 잊기 위해서 외부적인 눈 돌림을 추구하고, 외부적인 재미와 끊임없는 소란을 찾는 현대 세상의 표시입니다. ”저들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니라!” 외부적인 곳에 대한 생각의 분산, 소란과 오락에 달려드는 것은 이 내적인 슬픔으로부터, 저들 영혼의 내적 공허함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이 많은 이에게는 고통이니, 저들은 내적인 친구요, 우리 영혼의 손님이신 천주님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의 지성소’이신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준행할 것이니, 성부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또 우리 등이 저에게로 와 한가지로 거처하리니“(요왕14;23) 마리아보다 예수를 더 사랑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래서 성부께서는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성자와 더불어 성모님께 오시고,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 안에서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너희가 천주의 성전(聖殿)이요, 천주 성신이 너희 안에 거처하심을 알지 못하느냐?“(코린토 전3:16) 성모님 안에서의 내적인 대화는 자신뿐만 아니라, 마치 성모님 영혼의 놀라운 손님으로서 함께 하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들 안에서도 그러하였고, 우리 안에서도 역시 틀림없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은 천주님을 비운 상태이고, 세속적인 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성심은 피조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부터 멀어져 깨끗하고, 창조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아의 하자(瑕疵) 없는 성심의 세 번째 커다란 덕행인 거대한 자비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십니다:”우리의 천주께서는 태워 없이 하시는 불인 연고니라.“(헤브레야12:29) 자비를 불 태워 소모하는 불,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르시길, “나 세상에 불을 놓으러 왔으니, 불붙는 것 외에 나 원할 것이 무엇이 있으리요?“(루까12:49)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성심에 먼저 저 불을 던졌습니다. 이 불은 천주 사랑이라는 자비로 타오릅니다.

저 자비는 성모님께 영혼 구령과 죄인들의 회두에 대한 큰 열정을 줍는다. 참으로 이것은 천주성자께서 천국에서 내려오셔서 성모님의 지극히 깨끗하신 태중 안으로 오신 것이 바로 그 목적인 것입니다: ”저들의 죄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령하기 위하여”(마테오1:21) 그래서 성모님은 영혼을 구령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이러한 생활의 목적과 완전히 소통(疏通)합니다. 우리는 파티마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모님은 아이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저희 자신을 천주께 드리고, 주께서 능욕 당하신 저런 죄에 대한 배상행위로서, 그리고 죄인들의 회두를 위한 탄원의 배상으로서 주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시는 모든 고통을 견디겠느냐?”성모님은 영혼의 구령과 죄인들의 회두를 위해서 아이들이 희생을 더 열심히 바치도록 지옥을 자세히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은 가엾은 죄인들의 영혼들이 가는 지옥을 보았다. 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천주님은 나의 하자 없는 성심께 신심을 바치도록 이 세상에서 세우시길 원하신다. 나의 하자 없는 성심께 러시아를 봉헌할 것과, 첫 토요일에 배상의 영성체를 요청한단다.”

성모님의 이러한 말씀은 또한 우리 각자 모두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천주께 드리고자 하며, 주께서 능욕 당하신 저 죄에 대한 배상행위로서, 그리고 죄인들의 회두를 위한 탄원의 배상으로서 여러분은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모든 고통을 견디려 하는지요? 천주님을 거스르는 저 능욕에 대한 배상을 통하여, 천주께 대한 명예와 죄인들의 회두에 대해서 여러분은 열심히 노력하시는지요? 이 목적을 위해 특히 봉헌된 생활 안에서 자신의 모든 생활을 드릴 수 있는가요? 최소한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것을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이런 목적에 대해서 자신의 온 영신을 드려야 합니다.

100년이 지났어도 성모님의 요청이 많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요청에 대한 실현이 훨씬 나아지도록 우리의 열정을 불태우고, 성모님을 위로하며, 성모님으로부터 은총을 얻도록, 많은 이가 성모님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하여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이 통치하시도록, 또한 예수 성심께서 성모님을 통하여서 통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소(聖召)와 선하고 거룩한 가톨릭 가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특히, 우리가 주님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생활을 고치고 그 고친 생활이 천주님을 기쁘게 만듭시다.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재촉하시느니라.“(코린토 후5:14) 아마도 가톨릭교의 특성은, 가톨릭교회의 핵심은 천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천주님의 자비는 진정으로 예수성심과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모성심을 활력 있게 하는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을 보살피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주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와 마리아 성심 안에서 통치하는 같은 자비로 인해 활력 있게 살아간다면,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천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죄와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사는 가엾은 영혼들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저 불행한 영혼들에게 예수성심 안에서 발견되는 천주님의 보물을 주도록 우리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저 가엾은 영혼들을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 데려가야 합니다. 성모님은 어머니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성모님께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신자들의 성화(聖化)와 죄인들의 회두를 사랑하십니다. 성모성심은 인류의 크기만큼 큽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100주년 기념일인 오늘, 티 없으신 성모님을 닮는 은총을 요청합시다. 내적 생활을 사랑하고 이를 고맙게 여기며,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고 죄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거부함으로써 우리 마음을 성모님께 순응하고, 성모님의 덕행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며, 신덕, 망덕 특히 애덕으로 채우고, 천주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가지며, 세상의 죄에 대한 배상을 하고, 또한 죄인들의 회두를 위해 우리 자신을 바쳐서, 그리하여 우리와 많은 이들이 천국으로 가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