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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서하라 - 성신강림 후 제 5주일 (2017-07-09)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7-09






용서하라 - 성신강림 후 제 5주일(2017-07-0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의 거룩한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인 불쾌함에 대한 용서, 형제간의 화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요점을 가르칩니다. “네 예물을 제대 앞에서 드리려할 때에, 만일 네 형제가 너를 거슬러 무슨 혐의가 있는 줄을 거기서 생각하거든, 거기서 네 예물을 제대 앞에 머물러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목하고 이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테오5:23-24)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시길, 천주께서는 모든 사물을 소유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물을 원하시지 아니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성신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이웃에 대한 반드시 필요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 우리 마음, 천주께 진정으로 속하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고 합니다.


이행해야 하고 화해해야 할 이 의무는 특히 자기 형제와 다툰, 이웃과 싸운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불쾌함을 당한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타인을 불쾌하게 한 사람은 그 불쾌한 행위, 무례한 행위에 대해 나아가서 용서를 청할 의무가 있고, 사과하고 이를 배상해야 합니다. 무례함을 당한 사람은 이를 환영하고 그 불쾌함에 대해 쉽게 용서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용서해야 할 이 의무에 대해 여러 차례 상기시킵니다:“너희가 기구하려 설 때에, 만일 누가 무슨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곧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 또한 너희 죄를 용서하시리니..”(말구11;25) “너희가 만일 사람에게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면, 천상의 너희 성부 또한 너희 죄를 용서하실 것이요”(마테오6;14) “대저 너희가 만일 용서치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도 너희 죄를 용서치 않으시리라.“(마테오11;26)


용서는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이기는 선의 승리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말씀하십니다:”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이며, (천주 대전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만민들 앞에서 선을 힘쓸지니라.“(로마12;17)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악으로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12:21) 그렇지 않고 만일 첫 번째 악에 대해 두 번째 악으로 갚으면, 악순환이 됩니다. 상대방도 똑같이 이 악을 행하여 세 번째 악을 줍니다. 그리고 네 번째 악으로.... 영원이 반복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이러한 악순환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바오로 성인께서 위에서 말씀하셨듯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방법이요, 이는 진정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 이웃을 용서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탓하고 비난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려움의 원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완벽히 주는 것입니다. 물건을 주는 것이고 우리 마음을 주는 것이요, 천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권리를 낮추는 것이고 우리 이웃과의 친교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위대한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나이다.”(말구23:34) 이웃을 용서하는 바로 이러한 행위 안에서 우리는 작은 거울 안에서 용서에 대한 아름다움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의 깊이를 배웁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고자 하지만,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족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높은 완벽함을 요구하시고, 천주섭리 안에서 주님은 때때로 우리가 불쾌함을 받게 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의 사례를 갖게 함입니다. 저러한 사례를 즐겁게 받아드리세요!


흔한 불쾌함의 사례는 언어입니다. 뒷말, 모든 종류의 비난, 부당한 비난, 의심, 마땅히 받을 것 이상으로 행해지는 타인에 대한 험담 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말들은 우리 이웃에게 심히 상처를 주는 것이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악한 말들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런 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작조차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쑥덕공론이 첫 단계입니다. 사실로 들어나고 공개적인 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신문에 완전하게 도배된 공적인 어떤 사람의 악이나, 또는 친구 관계 내에서 잘 알려진 악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쑥덕공론이란 뒷말은 악 안에서 즐기는 것이기에 나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런 일에 대해 말함으로써 즐거움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주제가 올라오게 되면, 저런 악을 교정하는 데에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물어봐야 합니다. 최소한 악을 행한 자의 교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써 이와 같은 뒷말에 말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구 등등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험담입니다. 이는 타인의 숨겨진 악을 드러낼 때 나옵니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어떤 사람에 의해 불쾌함을 받았지만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첫 번째 불쾌감을 불평할 때 생깁니다. (불평을 듣는) 그들은 그 상황을 교정할 도움이 안 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가 나쁜 것이니, 먼저, 타인의 악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요, 첫 번째 사람의 좋은 명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또한 나쁜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상처를 받았을 때, 그는 대개 그 무례함을 확대시킬 경향을 가져서 일을 더 악하게 만들고, 우리를 공격했던 그 사람 안에서 악한 의도를 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쉽사리 악한 말의 세 번째 단계로 이끄니, 그것은 바로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은 참으로 나쁜 것인데 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상대방이 악한 일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명하길, 중상모략을 지어내는 자는 그 자신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도 역시 자기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중상모략이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덕행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공개된 죄를 비난할 수 없는 타인의 숨겨진 죄를 고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악한 의도를 찾습니다. 토마스 성인은 설명하길, 이런 중상비방은 또한 중상비방을 만드는 자가 타인에 대해 악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합니다. 만약에 타인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면, 그는 과장을 섞어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타인에 대해 어떤 증오를 품으면 그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시간 대부분을 거짓으로 악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중상비방은 대죄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그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통탄할 죄로 비난하면 우리는 중상비방이라는 통탄할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소죄로 비난하면, 그러면 그 중상비방은 소죄가 됩니다 만약 아무런 이유 없이 숨겨진 통탄할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하면, 또한 그 험담도 대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들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토마스 성인은 설명하는데, 왜냐하면 저들은 이웃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저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타인들에게 중상비방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들은 자비에도 어긋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자비란 이웃에 대해 악한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당한 욕을 기억하지 아니”(코린토 전13:5)합니다. 이러한 죄의 뿌리는 흔히 교만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판단합니다. 마치 유일하게 옳은 방법인 것처럼 상대방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원합니다. 교회가 규범을 만들어 놓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규범을 첨가합니다. 자비의 뿌리에는 겸손이 있으니,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거만한 자를 배척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성총을 주시느니라.”(야고보4:6) 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타인과 동행하기 위하여 쉽사리 자신의 길을 낮춥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천보 행하기로 너를 강박하거든, 저와 한가지로 또 이천보를 행하며”(마테오5;41)


다른 종류의 악한 말도 있습니다. 분노의 말, 공격적인 언사,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이웃에 상처를 주고, 우리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매,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니”(마테오15;18) 이런 말들을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만약에 우리가 이런 거친 말에, 중상비방에 대하여 희생이 되더라도, 악을 악으로써 갚아도 안 되고, 분노를 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천주께 고마워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구세주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나 때문에 너희게 악담을 하고 너희를 핍박하고 모든 악한 것으로 너희를 거슬러 망증하면 너희가 진복자되리니, 즐거워하고 용약하라. 너희가 풍성한 상급을 하늘에서 받을 것이니, 대개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테오5:11-12)


여기까지 저는 악한 말에 대해서 전해드렸는데, 말들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악한 말을 해선 안 됩니다. 이웃에 대해 악한 생각조차도 해선 안 됩니다. 이런 말들을 토마스 성인은 ‘경솔한 판단’이라 부릅니다: 충분하지 않은 증거를 가지고 타인을 비난하는 것, 악이 아닌 것을 악하게 해석하는 것,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해 악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 우리 마음 속에서 타인의 잘못을 확대하여 과장하는 것,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우리 이웃에게 악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이와 같은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절대 그것을 마음속에 품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마음에 품는 것은 이미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악한 생각에 맞서 싸우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과 맞서 싸우는 최고의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자주 주님과 함께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나이다.”(말구23:34) “우리 마음을 네 마음과 같게 하소서”하면서 성심께 청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청하건대, 우리 모두 사이에서는 저런 말이나, 저런 생각조차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통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비의 모친이시오,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도와달라고 간청하여 우리에게 티 없으신 성모성심 안에 있었던 성모님의 생각을 달라고,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했던 것 같이 우리가 천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해달라고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

성비오10세회 아시아관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