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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옥은 영원하다 - 성신강림 후 제 21주일(2018-10-1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0-15






지옥은 영원하다 - 성신강림 후 제 21주일(2018-10-14)

"그리고 그의 주인은 진노하여, 모든 빚을 탕감(탕척)할 때까지 그 종을 옥졸에게 넘겨 고문 받게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기 주인의 일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일만 달란트를 빚을 지고 있는 종을 보게 됩니다. 주인은 그 금액을 요구했고, 종은 주인에게 자비를 호소하고 말했습니다: "참아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두 갚을 것입니다". 주인은 연민과 자비를 가지고 관대한 행동으로써 모든 부채(빚)를 탕감했습니다. (그런데) 동료 하인 중 한 명은 이전에 주인으로부터 전액 탕감 받은 하인으로부터 (훨씬 적은 금액인) 100 펜스 빚이 있었고, 그래서 종에게 모든 것을 갚을 것이기 때문에 참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전액 탕감 받은 사악한 종은 다른 빚진 종을 (탕감해주지 않고) 감옥에 던졌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있는 다른 종들은 (민망하여) 이 사실을 선한 주인에게 말했고, 주인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너의 큰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왜 너는 아주 적은 금액을 동료하인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냐고 했습니다. 그리고서 그 주인은 그 사악한 종을 고문하는 이에게 넘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영혼에 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죄에 대해 천주님께 빚진 자로 죽은 죄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 부채를 갚을 수 없는 죄인들이니, 그래서 지옥에서 정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합니다.

영원에 관해서, 그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에 따른 위대한 생각입니다. 성인은 쓰기를, "우리는 오는 세상을 항상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점점 (삶의) 끝이 가까워지고 가까워진다는 생각은 많은 강력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을 이 세상을 떠나 수녀원이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가난과 희생 및 보속을 해가며 살기로 결심을 이끌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은 많은 순교자들을 그들이 겪은 고통으로 이끌었으니, 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하여서입니다. 성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영원한 도시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영원한 도시를 찾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기쁨(천국)이나 고통(지옥)의 집에 떨어질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 땅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우리는 단순히 이 땅을 지나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영혼이 가는 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전도서에 쓰여 있기를, "나무가 남쪽이든 북쪽으로 쓰러지던지, 그 쓰러진 그 장소에서 누워 있을 것이다.“ 성 힐러리(St. Hilary)가 쓰기를, 여기가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곳이 시작입니다.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천 년이 지나가나 이는 영원의 시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영원히 잊혀진 영혼들에게는 영원한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맞바꾸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그만 둘 것입니다.” 예레미아의 애가(哀歌)에는 "내 끝은 멸망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옥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러면 그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 세상의) 시간은 지나면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고 짧은 것이다"라고 씁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 하나는, 우리가 연옥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연옥에 들어가는 영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될지언정 언젠가는 연옥의 고통을 끝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겪는 육체적인 고난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고통이란 상대적으로 빨리 끝납니다. 고통이 무엇이든, 치통, 두통, 암... 이 모든 것들은 한동안 견딜 수 있습니다. 성 알폰소(Alphonsus)는 지옥에서의 고통의 단조로움을 고려함에 대해서 글을 씁니다. 이 지구상에서 누군가가 쉴 틈 없이 듣거나 심지어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악한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Deuteronomy)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악을 쌓을 것이고, 이 악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결코 줄어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영원에서는 그 법령의 포고문이 변경될 수 없으므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영원토록 고통을 겪어야한다는 것을 미리 느끼게 함으로써 그 고통을 확실하게 증가시킵니다. 영원이라는 생각은 그들이 영원히 고통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잃어버린 각각 영혼들을 고문을 합니다.

천주님께서는 오직 잠시 동안 지속하는 죄에 대해 어떻게 영원한 형벌을 정당하게 처벌할 수 있습니까? 시간의 지속은 시간과는 거의 관련이 없고, 단지 악의 광대함에 있습니다. 성 토마스(St. Thomas)는 한 개의 대죄의 악은 무한하다고 기록합니다. 인간은 제한적이면서 무한하기 때문이나, 그가 무한한 방법으로 고난을 겪을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그 지속 시간을 영원히 가져야합니다.


지옥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은 인생에서 너무나 끔찍한 죽음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에 사람들은 죽음을 구할 것이나,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죽기를 원하나 죽음이 그들에게서 달아날 것이니라."라고 묵시록은 말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은 석방될 기회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죄와 영원한 저주의 판결을 영원히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네 얼굴 앞에서 놓을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우리의 모든 염려의 유일한 대상이 되게 합시다. 성 유케리우스(Eucherius)는 "우리가 분투해야하는 일은 영원이다"라고 씁니다. 우리의 영원이 영원히 행복이거나 영원히 비참하게 될지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성 토머스 모어(John Thomas More)는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왕에게 죽음을 선고 받았을 때, 그의 아내는 그에게 가까이 와서 (왕의) 음란한 불륜(adulterous union)을 받아들이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 토마스 모어(St. Thomas More)는 아내에게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한 20년? 그는 지구상에서 20년 동안의 살기 위해 영원한 위험한 모험을 할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내를 쫒아냈습니다.

만약에 영원이 의심스러운 일이라면, 영원한 고통의 모든 가능성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테레사 성녀(St. Teresa)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잃는 것은 신앙의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신경(Creed)의 말씀, "Vitam aeternam", 영원한 생명을 자주 듣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을 부흥시켜야하고, 또 다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피터 포르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