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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교회와 그 교회의 적들 4) 바리새인의 의(義)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4-20





가톨릭교회와 그 교회의 적들


by  Fr Michael Mueller(1825-1899)

독일 출생. 성 구세주회 가입. 미국 이주(1851). 메릴랜드 주 Cumberland에서 신학 공부. 존 뉴만 주교로부터 사제서품(1853년 3월 26일)


4) 바리새인의 의(義)


바리사이파의 의로움은 천주님의 눈에서 봤을 때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며, 겉치레일 뿐이다. 그들은 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악의와 불순함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겉만 그럴 듯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천주님을 향한 사랑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 꾸민 아름다움 풍채 속에 크나큰 악덕을 감추고 있었다. 그들의 신심은 외적 행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자신들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에 따른 종교적 관습을 지키는데 엄격했지만, 정작 천주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의 공정함과 정직함이 주님께로부터 질책 받은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 공정하고 정직하다면, 그가 무엇을 믿어도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바리사이처럼 겉으로만 올곧다면 감옥에서 나오기에는 충분하지만, 지옥에서 나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기 이웃뿐만 아니라 천주님과 본인의 영혼과 양심에도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올곧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있어 올곧은 사람이란 것이 무슨 뜻인가? 올곧은 사람이라는 말은 다소 추상적이다. 예를 들자면, 부끄럽고 은밀한 죄를 짓고 무디고 흐리멍텅한 눈에 볼이 쏙 빠진 청년에게 가서 악랄하고 수치스러운 욕망에 따라 살면서 올곧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한 번 물어보아라.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올곧은 사람이 되는데 있어 자연적인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막지 못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가령 나는 다소 그러한 경향으로 기울곤 한다. 나는 자신의 올곧음을 확신하지 않는 있는 사람을 보고 싶다."


자기 물건을 비싸게 판매한 탐욕스러운 가게 주인에게 가보라. 보수를 받아도 제대로 일하지 않는 배달원에게, 석공에게, 벽돌공에게 또는 목수에게 가보라. 대중이나 정부를 상대로 속여서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가보라. 하인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을 속이는 고용주에게 가보라. 그들이 하는 행위가 자신이 올곧은 사람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차분하게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자신들이 하는 것은 단지 흥정이고 장사에는 빈틈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올곧은 사람이 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매일같이 술에 빠져 지내는 주정꾼에게 가보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술을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가보라. 그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죄가 그들이 올곧은 사람이 되는데 방해가 되었는지를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에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곧은 사람들입니다. 매우 올곧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지극히 신성한 자연법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남녀에게 가보라. 가련하고 힘없는 아기들이 복된 햇빛을 보기도 전에 죽이는 의사에게 가보라. 그들에게 그러한 큰 죄가 올곧은 사람이 되는데 방해가 되었는지를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에게 분명히 장담하건대 품위 있는 신사숙녀가 되는데 방해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과 겸손,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요구한다. 진정한 믿음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쳐지고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교만과 자기 의지와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것을 배척한다. 신앙은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무이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앙의 멍에에 복종하는 것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다스림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유가 있고 방종이 있다. 매우 질이 나쁜 욕심의 노예가 되어 언제나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분명 천주님은 자유로우시다. 하지만 천주님은 죄를 지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은 자유의 징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노예의 낙인이다. 죄의 권세는 죄와 악마의 노예가 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동물적 본성의 충동을 쫓는 이들은 눈이 멀어 잔인무도해지며, 영광스러운 자유를 포기하고 오히려 그것을 팔아 짐승 같은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천주께서 영원한 행복을 위해 지금 바라시는 것을 똑같이 바라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상과 같이 천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통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르치는 바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즐기면서 그것을 적절히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의지가 커질수록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어려움이 덜하며, 우리의 자유는 커진다. 이에 따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가톨릭 신자는 자유와 평화, 행복을 개신교인들이나 불신자들보다 더 많이 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진리의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 밖에 사는 이들은 종국에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오류의 어둠의 자녀들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으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의 구성원이 되면 구원받을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모든 이에게 전하는 상식이다.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 개신교인들은 절대 좋은 조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금전적 이익이나 생활에 별 이득이 되지 않는 한 개인 통역사나 개인 변호사, 개인 의사가 되지 않았다. 오늘날 저자들이 매우 분명하고 확실한 언어로 쓴 법률 서적과 의학 서적이 그들 앞에 놓여 있지만, 지극히 실용적인 관습을 갖고 있어서 그 책들에 대한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자, 가톨릭 신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가톨릭교회의 일원이 되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저주에 대해 궁금할 때,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나라로 가는 가장 분명한 길로 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하늘나라로 가는 좁은 길이다.


개신교는 그와는 반대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큰 길이다. 큰 길을 택함으로써 시류를 쫓는데 만족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나는 믿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신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앙의 선물을 얻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고, 어떤 수단을 사용하였는가? 왜 이단자들은 길을 잃었는가? 이단자들, 즉 세례를 받았음에도 교회의 교리 중에 자신의 기호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고 나머지는 배척하는 자들은 성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 때문에 길을 잃었다.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한 번 또 두 번 경고한 다음에 관계를 끊으십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그러한 자는 탈선하여 죄를 지으면서 자신을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티토 3,10-11)


만일 우리가 성 요한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알기를 바란다면, 다음 두 가지 일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 요한 축일 성무일도서의 독서에서 성 예로니모는 이렇게 말했다. "에페소에 있을 때 노구를 이끌고 겨우 성당에 들어간 그는 한 번에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자주 말을 멈추었지만 '나의 어린 자녀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매일 같은 말을 들어서 피곤해진 형제들은 그에게 '왜 당신은 항상 똑같은 말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요한의 대답은 가히 존경받을 만 하였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이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 이레네오는 성 폴리카르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요한 사도는 목욕탕에 들어가려다가 케린투스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나왔다. 이단자와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벗들에게 '진리의 적인 케린투스와 한 욕조에 있지 않도록 빨리 나갑시다.'라고 권고하였다."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고 이단을 미워하는 성 요한의 영이 더욱 가득하게 해달라고 천주님께 청하라. 신앙에서 벗어나 왜곡된 신앙을 미워하는 것은 항상 옳은 것이다. 이단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돌아가신 영혼을 죽인다. 이단은 어느 모로 보나 더럽고 역겨운 것이다. 로마 교회 밖에는 오직 무수한 형태의 이단이나 부정, 이교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동양과 서방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무류성을 부인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분파는 이단이다. 만일 그들이 천주님의 유일한 교회의 권위를 부인한다면 많든 적든 지간에 계시를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교회는 보편적이고 로마적이다. "누구든지 계명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계명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되니라." (2 야고 2,10) 지성적 질서든 윤리적 질서든지 간에 상관없이 온 영혼을 다해 대죄를 미워해야 한다. 이단자들을 혐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