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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종실기(4) - 사도시대교회(使徒時代敎會)는 어디 있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28



개종실기(4) 사도시대교회(使徒時代敎會)는 어디 있나?


이석낙(李晳洛) 아오스딩


1, 【교파와 직책】 나는 8세(1902년) 때에 예수교장로파(長老派) 교회에 입교하고, 그 교회의 소학교, 대구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교회의 장로(長老)가 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1929년)에 목사에 임명되어 대구성경학교 교감과 경북노회 종교교육부 총무, 1930년에 장감연합교회주일학교연합회에 시무하고, 1931년에 전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있다가, 만주사변 전후에 중국 봉천성(奉天城) 조선기독교회에 여러 해 시무하고, 그 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사회사업(불량소년감화원과 양로원)을 경영 중에 성교회로 돌아왔다.


2, 【성교회를 적시(敵視)】 8세에 프로테스탄트의 신자가 되고, 11세에 대구에 온즉 첫눈에 보이는 큰 감상은 아직 헐리지 않은 남대문과 현재 있는 대구대 성당의 건물이다. 약 51년 전에 천주교회를 알게 되어 그 인상이 깊이 박힌 것이다. 그러나 열교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천진하게 그 교리만 배웠고, 거기서 전도사, 장로 직을 가졌었는데 선교사·목사·장로들이 천주교회를 몹시 욕설(辱說)하고, 더구나 사회에서는 서학(西學)쟁이란 천시(賤視)하는 말을 들어서 나의 천진성에 차츰 나쁜 인상을 갖게 되었다. 천주교인이라고는 아무도 상종이 없이 한편의 비난소리만 듣게 되어, 나의 인상에 천주교회는 우상을 섬기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거짓예수교회요, 신부는 양대인(洋大人)이란 비인간적 인물로 알았다. 이러고 보니 천주교회는 형식적인 단체로 알았은즉, 그 교회에 사죄구령할 도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중에도 열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교회의 비행(非行)을 선전한 것이다.


3, 【동요되는 신앙】어릴 때 받은 열교사상은 20세쯤 자리가 잡히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경주(慶州), 영천(永川)지방의 교회 일을 맡아 3·4년간 지낸즉, 평일에 이상(理想)하던 믿음과 교인들의 실생활과는 아주 딴판이라 의심나기 시작되었고, 다시 내 자신의 신덕도 화분(花盆)이 햇볕에 쪼인즉 시들어짐같이 신앙의 뿌리가 흔들려 세속에로 기울어졌다. 그 후 다시 결심하고 신학교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지내는 중 교회 목사, 장로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신덕생활을 보니, 역시 특수성이 없고 나의 신앙에서 나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중 교인들의 신앙은 점점 냉담(冷淡)해져 종교 부흥회(復興會)를 열기도하였다. 그 부흥회로 일어난 신앙상태는 지구성(持久性)이 없고, 그 교회의 이면(裏面)에는 분쟁, 분열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동시에 여러 교파 중에 어느 것이 참되고 완전한 교회인가 찾아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열교파 중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구세군, 침례교 등 교회를 찾아가 실제로 보기도하고 그런 교회 영도자들도 만나 협의했으나, 그들은 언필칭(言必稱) 초대교회(初代)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나는 여기서 참된 교회는 초대에서 출발된 것을 알고 그러면 초대부터 그 교리, 그 정신, 그 전통, 그 규율, 그 전례(典禮)를 엄숙히 지켜 내려온 교회는 어느 것인가? 출발의 요점을 취하게 되었다.


 열교회의 모체교회(母體)는 어느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악평(惡評)하는 천주교회이다. 신세계를 발견한 듯, 금광(金鑛)을 찾은 감으로 그 교회방면에 가면 거기는 오랜 옛적으로 내려온 교회라 거기에는 전통이 있을 것이고, 역사적 문헌이 보존될 것이고, 참되고, 거짓된 이단의 갈래를 보는 관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중, 장로회총회의 임명으로 13도 교회를 순행하는 기회에 심중에 품은 연구재료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천주교회는 (1) 성직자(聖職者)의 생활이 성스럽고 (2) 전통적 교권(敎權)으로 통솔되었고 (3) 인위(人爲)적 선전이나 계책이 없이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엄숙히 매일 영(領)함으로서 생명의 양식을 먹게 된 것 (4) 천주의 대리자 신부 앞에 즉 고해소(告解所)에서 과오를 고백하고 사죄를 입는 것 (5)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미사성제(聖祭)에 참예함 (6) 예수의 세우신 종도교회로부터 현재까지 그 정신과 그 교리를 엄숙히 지켜오는 교회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 신부, 수녀들의 동정(童貞)생활 (2) 찬송과 성경 없이 예배 집행하는 미사성제의 내용 (3) 평신도의 활동 없이 교회가 유지해가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고해성사와 영성체 도리는 특히 나의 마음을 끌고 있었다.


4, 【신앙상의 난제(信仰上之 難題)와 감응된 교리】 열교회에서 죄를 자복하고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우고 애통하나 이어 냉담해져 진실로 사죄(赦罪)의 방도가 막연하다. 왜냐? 부흥(復興) 후에 그들의 생활상태는 곧 반복이 되어 길거리나, 자갈밭, 가시덤불에 뿌린 종자처럼 되었다.


 천주께서 원래 교회를 그렇게 설립했을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평일에 반대하던 천주교 방면에로 가서 내용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위에 말한 것처럼 진실하고 규율이 정연하며 전통이 서있고, 한 머리로 통솔되어 상통천주(上通天主), 하달교회(下達敎會)로서 일관(一貫)됨을 감탄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원천(源泉)에는 천주가 계신 것이 판연하고 그 원천에서 용출(湧出)된 생명수(生命水)를 전해주는 수도관(水道管)이 완비될 것이고 그 시냇가에 생명수를 마시는 교우들의 표양이야말로 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감명(感銘)되었다.


5, 【귀정(歸正)결심과 곤란】그렇게 진실하고 완전해 보이는 교회이지만, 그 진리의 원천을 찾기는 곤란(困難)이었다. 왜냐? (1) 미사성제의 진행내용과 제대설치(祭臺設置)의 원리원칙이 내게는 막연하고 (2) 조용하고 엄숙하여 좋으나 성경을 해설하거나 찬송가를 합창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없어 무미건조(無味乾燥)한 것이며 (3) 교우들의 친절미가 없고,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도 없이 퍽 냉정해 보이는 것 (4) 신부들도 사제관(司祭舘)에만 늘 있고 교우 집을 심방치 않는 등이다. 처음에 그 성스럽고 완전한 교회로 보든 감이 차차 약해졌다. 왜냐? 열교회에서 32년 생활에는 (1) 주일에 가면 열렬하게 환영하고 인정스럽게 접촉이 된 것 (2) 그 교리를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예증(例證)적 이야기를 취미 있게 하는 것 (3) 교회에 들어가는 날부터 완전한 교인의 자격을 주어 자기역량(力量)대로 활동하는 것 (4) 주일날이면 친목회처럼 하루종일토록 교회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


6, 【고심극기(苦心克己)의 경로(經路)】천주교회에 첫 감상은 좋았으나,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 인간적 대우란 것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이로서 열교와 비교하매 나의 심경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인간적 심신(心身)은 흔들려도 나의 속사람은 굳세게 용기를 내었다. 천주교회의 많은 교우들이 매일 아침마다 모이고 주일날이나 특별날에도 무난(無難)히 모이는 것을 볼 때에는 그들이 무엇을 발견한 안목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조선의 초대교회에 처음으로 피를 흘리어 교회를 설립한 많은 치명자(致命者)가 난 것을 보자 열교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160년에 카르타고Carthago에서 출생)의 말씀 「순교자의 성혈(聖血)은 성회의 선종(善種)이라(The Blood of the Martyrs was the seed of the Church)」고 함같이 이런 순교자를 많이 낸 것이 참된 교회를 증거함이 아닌가? 오 주 예수의 친히 세우신 교회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비적(秘蹟)이 있겠는가? 여기에 있어서 나는 깊이 연구하고 그 성사(聖史)를 찾으려고 결심하였다. 영세하기 10년 전(1929년)부터 천주교회에 관심하고 동경(憧憬)하던 차에 나의 결심이 더욱 굳세어 그 교리와 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 열교회의 밟아온 길을 멈추고 (2) 천주교회의 교리책과 교회사와 그의 필요한 책들을 구해 읽었다. (3) 주교, 신부, 회장, 교우들에게 의문점을 질문하여 풀고 (4) 성사도리를 해득하였다.


7, 【인가성세(引家聖洗)】고해성사(告解聖事)를 확실히 깨달은 뒤에는 과거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모든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영세받기를 준비하였다. 왜? 두 번 세례를 받아야겠는가? 열교에서 받은 세례는 성총(聖寵)을 이루어주는 것이 결하였었다. (1) 상존성총(常存) (2) 성사성총(聖事) 이 두 가지의 비적을 달하기에 요긴한 도리가 없는 까닭이다. 나는 성세성사를 즐겁게 받을 준비를 하였다. 요리문답(要理問答) 책에서 먼저 12단 요리를 전부 외운 후에는 마음속에 새싹이 트기시작하자 곧 계속하여 320문답을 전부 외우고 그 후 반년 간이나 매일 320문답을 외워 새 힘을 얻어 아침마다 미사성제에 열심히 참배하였다. 1939년4월8일에 가족 5명(처, 아들 셋)이 같이 성세를 받고 5월 28일 성신강림주일에 문제만(文濟萬, 제르맹 무세) 주교에게 우리 부부는 다시 견진(堅振)성사를 받았다.


8, 【귀정(歸正) 후 감상(感想)】 대구시 계산(桂山)동 대성당(大聖堂)에서 영세하기 전, 대구시 고아(孤兒), 양로(養老)원을 경영할 때이다. 천주교회에서 영세 받음으로서 천주의 아들 된 것을 너무 감사하여 자선사업(고아, 양로원)을 열심히 경영하고 수녀원에서 두 수녀가 와서 협력하였다.


 영세 후에는 과거생활의 모든 죄악을 씻어 사죄함을 받아 다시 어린아기가 된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나는 재생(再生)한 것이었다.


 영세 후 (1) 열교에서 받은 복잡한 정신이 단순해지고 열교에서 얻은 허영심과 명예욕을 버리고 예수의 성심과 성모의 성심을 본받아 겸비(謙卑)한 자리에 처하였고 (2) 전일에 허공(虛空)을 차던 헛된 노력과 활동이 멈추어지고 조용한 골방생활에서 기구함으로써 영신의 새 힘을 쌓기로 하였다. (3) 이제부터는 내가 비록 이 교회에서 냉담할지언정 열교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이다. (4) 나의 소유욕이란 것이 완화해져서 나의 가진 것은 다 천주께 받은 것이란 감빈생활(堪貧生活)에 만족하고 있다. (5) 남을 지도하는 영도자의 자리를 사양하고 말석(末席)을 차지하여 협력하려한다.


9, 【열교의 친우(親友)들에게】나는 아직도 생각한즉 종교생활 53년에서 열교의 37년이고 천주성교회의 16년이다. 열교회의 생활이 반평생(半平生) 이상인즉 화초(花草)의 꽃봉오리같이 제제(濟濟)한 인생의 청춘기를 거진 거기서 보낸 것이다. 나는 거기서 최고의 지위를 가져 존경함에서 나의 신덕은 파선(破船)되었던 것이다. 오늘 열교에 계신 사랑하는 여러 친구들의 걷는 길은 나도 걸었었고, 여러분이 앉은자리는 나도 앉았었고, 여러분이 하는 설교는 나도 하여 대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나는 사회교육이나 종교교육에서나 논설(論說)로서도 남에게 지지 않게 자신만만하게 지낸 것은 예수교서회나 기타 출판사에서 발행된 문헌이 증거한다. 저술한 책자가 60여종, 정기간행물의 책임자로서 발행된 잡지도 10여종이며, 그 외 종교교육의 교과서 등도 상당히 편찬했던 것이다. 또한 성경학교, 고등성경학교, 주일학교연합회,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책임자 등으로 내게 교양 받은 문인으로서 현하 여러분의 목사와 전도사들이 교회교역자가 된 줄로 안다. 그들이 나를 볼 때마다 나를 애석하게 여기어 「돌아오세요, 모교회(母敎會)로 돌아오세요, 천주교회에 있어 선생님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신부가 되겠어요? 수사가 되겠어요? 이같이 간청하고 있었다. 옛날의 밟아오던 길을 밟아 우리들을 지도해주세요, 애원한다. 그럴 때 나는 인정상으로 동정적 회포가 없지 않다. 내가 이 세상만이라면 그들과 같은 보조를 따른다면 내게 행복이겠다. 왜냐? (1) 각 방면에 있어 내가 수십년간 쌓은 경험에서 대환영을 받을 것이고 (2) 교회의 후원으로 사회적 지반도 잡을 것이고 (3) 경제적 토대도 충실해질 것이고 (4) 자녀의 교육이나 출세에도 무난(無難)히 성공해지리라고 생각된다. 30· 40년간 사귄 친구는 거진 거기에 있다. 그들은 나를 애조할 것은 확실시된다. 


 그러나 내가 천주성교회로 개종한 것은 진주장수(眞珠商)가, 자기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값진 진주를 사는 것 같이 나는 열교회의 많은 친구, 정신, 고간(庫間)의 보패, 지위, 경제 등을 다 던져버리고 값진 보패를 구하려고 어려운 산길을 걸을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를 도와서 나의 생명을 구하였다. 그 여관에서 한숨 자고나니 나는 헐벗고 외로운 몸이나 거기에는 호수천신, 본명 주보성인,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위하여 붙들어주고, 오 주 예수의 걸으신 성로(聖路)를 밟아가게 되었으매,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고심극기하고 있었다.


10,【개종 후 애조해주신 성교회 교우 여러분들에게】성교회로 개종한지가 지금까지 16년이고 동기로 된지가 26년이나 된다. 내가 성교회에 와서 영세하고 있으나 교우 중 일부에서는 오해(誤解)하는 친구도 있었다. (1) 열교회에서 어떤 과오를 범하고 왔나 (2) 성교회에 와서 어떤 야망으로 지위를 얻으려고 왔나? (3) 성교회 교우로 가장(假裝)하여 내적(內的)조사를 하여 제 2의 루터가 되려나하는 평도 내 귀에 전달되었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어도 나는 내 귀를 막고 오주(吾主)대전에 조배하고 과거를 통회한다. 오주(吾主)와 성모(聖母)님이 나의 속 심경을 아시니 나는 만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교회 교우들이 나를 접촉하는 감이 부드럽지 않고, 나도 또한 자유롭지 않아 고독해져서 16년간 침묵에서 산원(山園)생활이었다. 오늘에는 첫째로 주교와 신부님들이 나를 이해하시고, 성 교회의 학자들이 나를 알아주시고, 회장님들이 손을 잡아주시어 나도 맘껏 기뻐 활기를 띠고 있다. 6·25사변 전에 서울 명동 계성여자중학교에서 교편 잡고 겸하여 국립박물관에서 인류학회 일을 하고 있다가 동란 해 12월에 고향 대구로 와서 경북고등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의 인류학 강사로 겸임하다가 지난해 성탄절에 대구 계산동 대성당의 서봉길 주임신부(徐鳳吉 主任神父)님의 명령으로 올해 4월부터 대성당 전교사(傳敎士)로 복명(復命)하면서 전교의 관련으로 학교는 강사로 있게 되었다. 


 26년 전후 즉, 성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은 오 주 예수의 비적(丕績)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나를 성 교회로 인도해주신 은인(恩人)들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일본·중국·영국·미국의 성 교회의 서간물, 대구성당의 권 신부, 김현배 바르톨로메오(현 전주교구장) 신부님, 미카엘 수녀, 한윤화 야고버, 대구 문 주교, 정 부주교님, 서울교구 노 주교님, 서울 장면 요안 선생, 강영조 바오로 전교회장, 그 외 여러 회장들과 교우 여러분들이다.


 내가 열교회에서 돌아온 후에 느낀 것과 또는 오늘이라도 교우들에게 더욱 성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몇 마디 말씀을 어리석게 올리고자 한다. (1) 교리연구에 충실하자. 영세 때 배운 것만으로 만족치 말고 더욱 깊이 들어가자. 오주께서 그물을 깊은 곳에로 던지라하셨다. 우리가 구원 길로 나가는 지식이 부족하다. 영세할 때 배운 지식은 극히 적은 것이다. 그래서 냉담해질 염려가 많다. (2) 전교에 열중하자. 우리의 신조는 천만년이라도 불변하겠지만 전교방침은 바오로 종도 말씀같이 그 지역과 시대를 따라 적절한 방침을 취해야한다. (3) 겸비(謙卑)한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남을 인도하자 ─ 종종 듣는 바 오랜 교우들은 독선(獨善)적이라고 평한다. 남을 구원키 위하여 나란 것을 버리고 남에게 친절하고 속에서 끓는 애덕상의 열정을 표양(表揚)하자. 내가 성 교회로 와서 이상한 감(感)은 그 점이다. 왜냐? 교우들이 담담하고 접촉이 없고 또한 거만해보이었다. 오늘도 예비교우들이 그러한 말을 종종 하고 있다. 교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친절히 영접하고 지도하고 가르쳐주자. (4) 협동하자─우리나라의 전교가 150년 이전이지만, 아직 우리는 전교를 위한 교단운동이 없다. 경향잡지가 1037호가 나왔지만 옛날모습이고 교우 모든 가정에서 받아 읽으라는 한국주교회의의 결정이 있지만 그 실현은 막연한듯하고, 신학교, 수사원 등도 아직 우리교우들의 힘으로 협력함이 크게 부족하고, 각 성당에는 신부님을 도와드리는 전교회장이 별로 없다. 언제나 한국외국전교회가 설립되겠는가. (5) 교회사업의 헌금열(熱)이 없다 ─ 교무금이나 주일헌금은 매우 무성의하다. 내가 열교회에서 보던 것으로 비교하면 10분의1에 불과하다. 우리의 주교와 신부님들은 교우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교당 내에서는 헌금의 말씀이 일절 없고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각성함도 없기에 매우 부진(不振)하다. 고교의 법규를 본다면 빈손으로는 성당에 못가고 정성껏 예물을 가지고 천주대전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우리교우들의 생활이 빈곤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천주께 성의를 드리지 못한 탓이다. 말라키 선지자께서는 「마땅히 드릴 십일조(條)와 제물이니 너희 전국백성이 천주의 물건을 도적하였으니 너희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주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마땅히 드릴 십일조를 천주의 창고에 드리어 나의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고······나를 시험해보아라. 내가 과연 너희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아둘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붓나 아니 붓나 보라」(말라키 3·10). (6) 주일과 파공일을 충실히 지키자. 이는 천주십계 중에 천륜에 대한 중한 계명이다. 고교에서는 안식일을 범하면 죽였다. 오늘은 경제상태가 핍박한 것이 한 원인이고, 둘째로 우리나라 교회의 선대(先代) 어른들보다 신덕이 약해진 듯하다. 주일에는 미사성제에만 참예하면 주일을 다 지킨 줄로 안다. 그것은 오해이다. 하루 종일 지내야 한다. 첫째로 미사성제, 교리반에 출석, 전교, 병자방문, 교리책들을 구하여 심령수양을 해야 한다. 신부님께 부득이한 사정으로 관면인데, 조그마한 구실로서 관면 받음은 이 계명의 범칙이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제 7일에 안식하신 천주를 모범할 뿐 아니라 이날은 천주의 성일(聖日)이다. 이날에는 천주의 성업 곧 성 교회에 영신의 선업(善業)에 참가하는 용사가 되자. 우리생활이 윤택치 못한 한 원인도 여기서 생긴다. (7) 미사성제의 경문과 성가를 합창하자 ─ 비오 10세 교황께서 전(全)세계교회에 모든 교우에게 권유하시기를 미사성가를 합창하라고 하였다. 성가대미사를 제외한 이외에는 충분히 교양하여 미사경문과 성가를 함께 부르게 하자. 제대 가까운 앞자리에 매일 몇 교우가 높은 소리로 미사경을 읽는 것보다 여러 교우들을 가르쳐주어 함께 기쁘게 부르자. 성교회에 개종한 후 오늘까지 미사성제 때에 그 방식이 협동되지 못하여 여러 교우들에게 함께 즐겁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하루속히 방식을 변해주기를 바란다. 어떤 교우들은 미사성제 내용을 몰라서 그 시간이 지루하여 오기는 늦게 오고 필(畢)하기 전에 일찍 가는 이가 종종 있다. 미사성제에서 신덕의 열성과 전교의 애덕이 발해져야할 것이다. 천주께서는 모든 교우들의 합심으로 성영과 성가나 경문을 창하는 것을 더욱 즐겨들으신다. 이것이 바오로 종도의 서간경 교훈이다.(골로새 3·16, 에페소 5·19)


이석낙(李晳洛) 아오스딩 본적: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 61번지,  주소: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 8번지 3호(號), 천주강생 1895년 5월 2일생, 학력(學歷):1908년 03월 15일 경북 영천 기독교진도(進道)소학교 졸업,1909년 06월 15일 경북 경산 측량학교 졸업,1918년 03월 20일 대구 예수교장로회선교회 설립, /계성(啓聖)중학교 졸업(제5학년),1928년 03월 12일 조선예수교장로회연합선교회 설립,1928년 03월 12알 평양신학교에서 신학본과·희랍어과·종교교육과 3년 졸업,1935년 03월 20일 중국 봉천실업전문학교 중국어과·영어과 졸업,1933년 03월 25일 중국 남만주의과대학교연구실 인류학 연구,1935년 09월 20일 중국 남만주의과대학교 이학박사, 1935년 09월 20일 중국 남만주의과대학교 학위논문 「조선민족의 유래와 형성 /The Formation of the Korean People,」1946년 10월 01일 서울 국립박물관연구실 취직·연구,1949년 09월 30일 서울 국립박물관연구실 고고학 연구, 경력(經歷)1909년 7월 1일 ~ 1910년 8월 20일구한국(舊韓國) 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大臣) 토지측량(土地測量) 기수(技手),1918년 4월 1일 ~ 1922년 3월 21일 경북(慶北) 영천(永川) 진도학교(進道學校) 교감(校監) , 1922년 3월 4일 경북(慶北) 장관(長官) 교원면허(敎員免許), 922년 4월 1일 ~ 1924년 3월 31일 대구(大邱)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교원(敎員)
1929년 3월 23일, 조선예수교장로회(朝鮮耶蘇敎長老會) 목사(牧師) 피임(被任), 1929년 3월 23일 ~ 1932년 11월 24일 조선예수교장로회(朝鮮耶蘇敎長老會)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 총무(總務),1932년 11월 25일 ~ 1935년 11월 20일 중국(中國) 봉천성(奉天城) 조선기독교회(朝鮮基督敎會) 목사(牧師) 피임(被任),1933년 3월 1일 ~ 1935년 11월 20일 중국(中國) 봉천성(奉天城) 월간「영광(靈光)」 사장(社長),1932년 11월 28일 ~ 1935년 11월 20일 중국(中國) 봉천성(奉天城) 봉천보육전문학교(奉天保育專門學校) 교장,1933년 3월 20일 ~ 1935년 11월 20일중국(中國) 봉천성(奉天城) 봉천성경전문학교(奉天聖經專門學校) 교장,1935년 11월 28일 ~ 1944년 12월 21일 대구 애린회(愛隣會) 전무이사(專務理事),
1945년 9월 10일대한인류학회(大韓人類學會) 위원장(委員長),1948년 9월 24일 ~ 1950년 10월 31일계성여자중학교(啓星女子中學校) 교사(敎師), 1951년 2월 15일 ~ 1953년 3월 21일 경북고등학교(慶北高等學校) 교사(敎師),1953년 4월 1일대구공업고등학교(大邱工業高等學校) 교사(敎師,)1953년 4월 1일경북대학교(慶北大學校) 법정대학(法政大學) 강사(講師),1954년 3월 1일 대구시(大邱市) 계산동대성당(桂山洞大聖堂) 전교교사(傳敎敎師) 피임(被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