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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종실기(9) -「믿음으로만」은 캠플주사(注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0-04



개종실기(9) -「믿음으로만」은 캠플주사(注射)


서창제(徐昌濟)

전(前) 기독교조선복음교회 목사

 


개종의 동기 몇 가지
 

1,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이단적 교설(異端的 敎說)에 속하여 헛된 평안을 누리던 나는 자칫하면 지옥의 자식이 될 뻔했다. 이 헛된 평안이 무너지는 그날, 나는 진리의 기둥인 성교회에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죽은 믿음』의 헛된 평안 수십 년! 나는 정말 기막힌 어두운 자였다.


 부산 피란 3년 동안에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나였지만은 소위 예배당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암만해도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천주께 드리는 예배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성서고전(古典) 강연회밖에 될 수 없는 무엇이요, 가끔 특별집회(소위 부흥회)를 연다 해봤자, 그것은 한 종교적 말초신경흥분(末梢神經興奮) 수단에 지나지 못하는 무엇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제헌(祭獻)이 아니다. 제헌이 아니니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은총의 능력이 실현될 리 만무하다. 하니까 그들은 항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헛된 위안의 캠퍼주사로 그 연명책을 삼을 뿐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유독(流毒)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 어찌 더 오래 거기에 머물 수 있을쏘냐. 드디어 나는 주일마다 좌수영(左水營) 20리(里)를 걸어 부산진 천주교회의 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성당참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사구경이지, 미사참예는 아니었다. 바로 그때 성당에서 「교부들의 신앙」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얼른 보기에 진리의 글인 듯하여, 버스도 타지 못하는 나의 홀쭉한 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것을 읽기도 하며 미사구경을 하기도 하노라니까 차차 성교회의 진리가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 8월15일이라, 이날 오주예수께서는 이 죄인 괴수인 나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드디어 장병용 요한 신부(부산 중앙성당 주임신부님)의 손으로 나의 원죄, 본죄를 다 씻어주셨다. 아! 이날이 바로 나의 천국입적(入籍)의 날이다! 회령(會寧)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신부를 만나 뵌 뒤 흘러흘러 20여년, 비로소 나의 정신사상(精神史上)에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2, 성경의 주관적 해석이 프로테스탄트 세계를 소란케 한다. 따라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그 세계에는 권위(權威)의 단언명령(斷言命令)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엔 일인일교파(一人一敎派) 상태에까지 이르고야 말 것 같다. 항상 너도 나도 다 『하느님』의 직접계시를 받았노라 날뛰니, 대체 어느 것이 진짜 계시인지 알 수 있어야지? 알고 보면 그 소위 직접계시란 거의 전부가 도깨비계시일 것이다. 이 많은 직접계시(?)를 받은 자들의 날뛰는 판국에서 나는 『양의 우리』 밖의 양들과 함께 하염없이 헤맬 뿐이었다. 어떤 이처럼 직접계시(?)도 받지 못한 나는 정말 불쌍한 존재였다. 바다에 떠다니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다. 가끔 성경을 읽을 때의 감명 또는 감흥(感興)을 나에게의 직접계시로 삼고 거기에 내 영혼을 맡겨보려 했으나 그야말로 위험천만의 일이고, 또 소속교파의 감독을 영계(靈界)의 권위로 떠받들어보려고 마음을 도사려보았으나 양심이 허락지 않음을 어쩔 수 없었다.


신기루(蜃氣樓)가 얼마든지 나타나있는 영계의 망망대해(茫茫大海) 위에 조각배를 저어가는 나! 어느 길로 저어가야 할까를 몰라 망설이는 나에게 있어서는 『보냄을 받은 이』의 『나를 따르라』는 권위의 한마디 소리만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그것이다. 그 소리를 나는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 소리를 나는 목마르게 기다렸다. 천주교회의 소리를 그 소리로 믿을까 어쩔까······. 『슐라이어마허류(流)의 신(新)프로테스탄티즘이냐? 가톨릭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절박한 대목에 이른다면 나는 가톨릭을 택하겠다.』는 프로테스탄트 대(大)신학자 칼 바르트의 술회(述懷)의 말이 이 경우의 나로 하여금 천주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 바도 있었다. 권위에의 복종행위 없이는 영계(靈界), 물질계(物質界)의 혼란은 정리되지 못할 것이다. 실상 나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그 데모크라시적 꼬락서니에 대한 염증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었던 자이다. 천주의 전권(全權)을 신인(信認)한다면야 교회의 데모크라시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때다! 교황에게의 절대반대자였던 나는 교황성하에게의 절대복종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교황성하만이 땅위에 선 천주의 대리이시요, 베드루의 반석이기 때문이다. 베드루 이래 2천년 줄곧 한 교회로 걸어온 참교회인 천주교회 계시진리의 권위에 영혼을 철저히 맡겨놓은 나는 비로소 하늘평안을 맛보게 되었다.


3, 『하느님이 내 죄를 사(赦)했을 것이다.』하는 주관적 위안은 암만해도 한심한 것이다. 이런 거품 같은 소위 『믿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십수 년 전 프로테스탄트 교직의 몇 어른과 함께 덕원수도원을 구경한 나는 천주교회의 고해성사를 훌륭한 제도라고 찬양한 바 있다. 그때 일행 중 한 분은 나의 이 말을 못내 비웃었다. 나는 다만 낮은 소리로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마는, 당장 내 앞에 앉은 하느님의 대리자에게 나아가 죄를 고해버려야 시원할 것 같소. 하느님에게 직접 고죄하지 않고 사람에게 한다 하여 비웃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래도 이는 내 영혼의 솔직한 경험이요.』하는 의미(意味)의 말을 그에게 했다. 그러나 결단성이 부족한 나는 명랑치 못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얼른 발을 돌려 고해성사의 천주교회에 돌아오지는 못했다. 객관적 권위의 사죄선언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내 영혼이 명랑해질 수 있었겠는가? 구름 덮인 골짜기를 수십 년 무거운 영혼으로 허덕이던 나는 고해성사를 베푸는 천주교회의 품안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세 후 하루는 (부산 천주교회 도서관의) 윤 신부의 앞에 고죄한 다음, 그의 사죄선언과 함께 그의 『평안히 가오.』하시는 말씀을 들은 나는 『하늘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4, 연옥교리에서 크나큰 위안을 찾게 된 나는, 연령(煉靈)을 위하여 뜨겁게 기구하는 성교회에 귀정(歸正)치 않고 어디 갈 것이냐!


내가 당장 죽는다면 천국 가기엔 암만해도 자신이 없고 그렇지만 천주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는 써온 나를 설마 지옥에야 보내시랴. 그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라면 갈 데는 지옥 밖에 없잖은가. 이거 정말 야단났다!! 이를 어쩌나!? 가끔 지옥의 악령(惡靈)이 큰 입을 벌리고 덤벼든다!! 보라! 이런 영혼상태의 나에게 있어서 연옥교리가 그 얼마나 고마웠는가? 이 연옥교리에 대한 성경의 근거도 뚜렷이 있으니 더욱 마음 든든한 바 있다.


5, 프로테스탄트의 공산주의관(觀)은 퍽 모호하다. 심지어 어떤 프로테스탄트는 공산주의와 타협하기조차 하는 꼬락서니이다. 어두운 그들은 공산주의와 공산적 경제체제(共産的 經濟體制)와를 혼동하는 듯하다. 그 후자(後者)는 혹시 용인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전자(前者)는 바로 20세기형(型) 악령이 아닌가? 그이들의 이 태도에 분개한 나는, 또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있어서 일체단결을 이뤄낼 수 없는 그들의 분열태(分裂態)를 본 나는 비오 12세 성하의 십자군동원령(十字軍動員令)에 귀가 솔깃하여 근래 성하의 산하(傘下)에 서기로 되었다.


 6, 성교회의 품안에 돌아와 보니, 성교회 경영의 모든 문화면(文化面) 사업이 모두 없어진다 해도, 다만 미사성제와 성체성사만 있으면 성교회는 비록 수소폭탄의 폭풍이 불어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줄 굳게 믿는다. 저 슐라이어마허류(流)의 계시관(啓示觀) 위에 세운 소위(所謂) 기독교회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어서 때가 이르면 죄다 몰락될 것이다. 지금 8, 9백 교파로 분열되어 매일 옥신각신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박테리아처럼 그침 없이 분열되는 프로테스탄트를 어찌 구령의 기관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보라! 사태가 이러니까 해마다 백여만 명의 프로테스탄트가 천주교회로 개종하지 않는가!?



서창제(徐昌濟)1899년 7월 6일생


본적: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상우남면(上雩南面) 상장동(上場洞)20번지  주 소: 서울특별시 성동구(城東區) 신당동(신당동)251번지 8호


1906~1910년 함경남도 단천(端川) 육영학교(育英學校) 졸업

1910~1916년 관북대유(關北大儒) 죽계(竹溪) 이선생(李先生) 문하 한학수업
1916~1920년 가내타북장로교회(加奈陀北長老敎會) 설립,
1916~1920년 함흥(咸興)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 졸업
1920~1926년 한문학(漢文學)·국어학(國語學) 연구
1926~1930년 고등영어(高等英語) 독학
1920~1921년 함경북도 성진(城津) 보신학교(普信學校) 교사
1921~1924년 함경북도 단천(端川) 동흥학교(東興學校) 교무주임(敎務主任)
1924~1925년 함경남도 원산(元山) 배성학교(培誠學校) 고등과(高等科) 교사
1930~1931년 성진상업중학교(城津商業中學校) 강사
1932~1949년 기독교조선복음교회(基督敎朝鮮福音敎會) 목사
1945~1946년 함경북도 청진(淸津) 관북대학교(關北大學校) 교수
1947~1949년 조선신학대학교(朝鮮神學大學校) 강사
1947~今日ddii한양공과대학교(漢陽工科大學校) 부(副)교수
1951~今日ddii서울대학교 공과대학(工科大學)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