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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종실기(18)-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1-08


개종실기 (18)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①


조성지(趙聖祉)

전(前) M·R·A운동 지도자



머리말
1, 가톨릭 이전의 나
2, 누님의 개종
3, 아내의 불치의 병
4, 영혼의 공략전(攻略戰)
5, 성모병원의 인상
6, 죽은 이를 위한 기도(祈禱)
7, 누를 수 없는 신앙의 불길
8, 어머니의 영세(領洗)
9, 용과 호랑이
10, 영어(囹圄)
11, 신부관 문을 두드리다
12, 영세를 향하여



머 리 말


1943년 여름에 나는 천주교의 영세(領洗)를 하였다. 그 후에 여러 신부님들에게서 개종기(改宗記)를 쓰라는 권면을 여러 번 들었다. 나도 써야겠다는 의무감은 느꼈으나 성격의 태만으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방학 때마다 쓰려다가 못쓰고, 6·25 피난 때에는 경남 욕지도(欲知島)에 가있을 때 대개 구상만을 만들어놓았다. 제목을 「전(全)프로테스탄트교도에게 고함」이라고 하고 부제(副題)로 「나의 신앙적 자서전」이라고 붙이고 싶었다. 내정(內定)으로는 제1부 프로테스탄트의 시대, 제2부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 제3부 가톨릭의 교리, 제4부 가톨릭의 생활의 네 부로 갈라서 써보려고 하였다.
 

 이번에 수원본당의 이복영(李福永) 신부님에게서 윤형중(尹亨重) 신부님이 개종수기(改宗手記)를 모아서 단행본을 만들려고 하시는데 나더러 개종기(改宗記)를 꼭 하나 써내달라고 그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쓴다고 승낙은 하였으나 또 그대로 며칠 지나갔다. 그러자 이번에 갑자기 도미(渡美)할 사유가 생겨서 속히 떠날 것 같기에 떠나기 전에 이것만은 써드리고 가겠다고 특별결심을 하고 밤에 자기 전의 시간과 아침에 밥 먹기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부랴부랴 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전기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2부이다. 
 

벌써 영세한지도 10년 이상이 지나고 보니 감격도 기억도 희미해진 것을 파내고 더듬어 쓰노라고 하였다. 독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고유명사나 용어 같은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쓰는 것을 사용한 것이 많다.


1, 가톨릭 이전의 나

 

「나는 나면서부터 유태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의 말이거니와, 나는 나면서부터 감리교 신자였다. 감리교 신자의 가정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에는 주일학교를 충실하게 잘 다녔고, 또 자라서는 주일학교의 선생을 하였고 교회 안에서는 소위 모범청년이란 말을 들었고 청년회와 찬양대에서 활약을 했고, 또 학교도 소학교를 교회학교로 마치고 중학교만은 일본인의 공립학교를 나왔으나 대학도 일본에서 감리교의 미션(mission) 계통을 나왔다. 그리고 보니 어느 모로 보든지 나는 완전한 전형적인 감리교 신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있을 동안에는 옥스퍼드그룹운동(현재는 M·R·A운동이라고 함)에 관계해가지고 귀국 후에도 동(同) 운동에 지도자로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학생들과 교회내외의 청년들이 이 운동을 통하여 생활개변(生活改變)을 하였고 따라서 종교계에서 나의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에는 의례히 각 교회로 초청을 받아서 설교행각(說敎行脚)을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도 청년들을 모아서 성서연구를 하였고 청년들은 목사의 설교보다 오히려 내가 지도하는 성경연구에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노라고 증언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개변을 일으켜 정직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실천하게 되었다.


 한번은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에서 한 사람이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사도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할 수 있습니까?」 목사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정신을 배우고 거기에 따라가도록 힘쓰는 것뿐이라.」고 적당하고도 무난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시 말하기를 「아니요, 성경말씀대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보았습니다. 현재 ○○학교에 있는 조(趙) 선생님은 성경말씀대로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생활을 하는 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옥스퍼드그룹운동의 4절대(絶對正直, 絶對純潔, 絶對無私, 絶對사랑)의 생활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리하여 목사들 중에서는 질투가 생기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목사는 교단에서 조 아무개는 이단이라고 공격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너희가 바리새교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 목사의 그것을 초월하며 더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앞으로 정진하였다.


이같이 신앙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고도의 신앙을 가졌고 목사 이상의 감화력이 있다고 하던 내가, 어째서 또 어떻게 가톨릭에로 전향하였는가?


 다음 기록으로서 독자에게 만족할만한 해결을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완전히 영세하기까지 8년 동안의 발자취를 기록한 속임 없는 고백이다.



2, 누님의 개종

 

1935년 여름이었다. 나는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취직운동을 하려고 일본에서 귀성을 하였다. 하루는 출가하여 따로 사는 누님네 집을 방문하였다. 방에 들어가니 우선 실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달라져 있었다.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있었고 천주교의 그림이 달려있는 것이 천주교의 냄새를 여지없이 풍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정(午正)이 되니까 나를 보고는 구경이나 하라고 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한편으로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감탄하였다. 나는 혹시 음식점 같은데 들어갔다가 사람들이 있는데서 식사기도를 하는 것도 주저하는데, 이 누님은 이교도인 나를 옆에 놓고 또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등 기색도 없이 자기의 하고 싶은 것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저「야! 강하구나!」하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사이에 천주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누님은 원래 소학교의 경력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소위 성경학원을 졸업한 말하자면 전도부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자격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열의가 대단해서 항상 독수리와 같이 보다 더 높은 데를 지향하고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하였고 좀 더 높이 올라가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나 교회 자체가 주는 지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 있는 천주교 신자인 한 부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 생활의 경건한 것이 이상하게도 주의를 끌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으로서 쳐다볼 사람은 목사와 전도부인이었는데, 목사나 전도부인은 말로만 거룩한 체하는 것이 이따금 비위가 거슬렸었는데, 이 부인은 말은 그다지 잘 못하나 생활 그 자체가 진실하고 경건하였다. 그리하여 이 부인에게서 천주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이 부인을 따라서 천주교회를 구경하러 몇 번 나가보았다. 몇 번 다녀보니, 지금까지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교요 우상을 섬기는 교라고만 알았던 것이, 천주교에서도 하느님과 예수를 믿는 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리를 차차 연구해보니까 지금까지 알지 못하였던 사실이 많이 들어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감리교의 신앙이 가장 정통적이요, 이것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예배당의 신앙은 단지 믿으면 된다는 막연한 신앙이었었고,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와 규정은 구체적으로 되어있고, 천주교의 신앙이란 어떻게 영혼과 육신이 그리스도와 합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며, 이렇게만 한다면 반드시 구령하지 못할 리가 없겠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체면문제를 불고(不顧)하고 천주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남편도 차차 천주교의 영세를 새로 하고 완전한 천주교의 신(新)가정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일대변화의 역사를 듣고 비판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자기의 신앙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족을 얻지 못할 데를 떠나서 만족할만한 데를 찾아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또 신자가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로 전향하는 것은 그 본인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같이 우리 안에 들어있던 양을 놓아버리는 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했다.」고 찬의(贊意)를 표해주었다. 나는 본래 자기의 교파를 고집하는 사상을 갖지 않은데다가 일본서 옥스퍼드그룹운동에 관계하게 되자 더욱이나 초(超)교파적 사상을 갖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사이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도 차이를 두지 않으리만큼 관대한 태도를 가지게 되어있었다.


이 날 누님은 나에게도 천주교로 돌아오라고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심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체 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지 않고 자기의 개종담(改宗譚)을 이야기할 뿐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권유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3, 아내의 불치의 병


 1937년, 내가 서울 배재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 해 12월에 내 아내는 서울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해 8월에 아기를 조산(早産)하고 출혈이 심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거기에 다른 병이 병발(倂發)하여 4개월 만에 죽었다. 처음에는 병명도 몰라서 서울에 있는 유명한 의학박사는 다 불러다 뵈었다. 그래도 그저 특별한 병은 없고 감기라고만 하나, 매일 정기적으로 열은 오르고 몸은 하루하루 기울어져 갔다. 나중에는 세브란스에 있는 이중철(李重澈) 박사가 치료보다도 병명을 찾기 위하여 입원을 시키라고 충고를 하였다.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며칠을 두고 자세히 진찰과 검사를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브란스에 입원을 시켰다. 입원한지 사흘째 되는 날 학교로 전화가 왔다. 나는 곧 세브란스로 달려가서 이 박사를 만났다. 이 박사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를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대단히 신중한 어조로 병의 정체는 알았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놀라지 않겠는가 하는 것부터 따졌다. 나는 아직까지 무슨 병인지는 몰랐지만 죽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좋다고 대답을 하였다. 병명은 속립결핵(粟粒結核)이라는 것인데, 이 병은 현대의 의학으로는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대개 3개월 내지 6개월이면 죽는 것이니까, 이제는 집에 데려다놓고 먹고 싶다는 것이나 먹이고 죽는 날이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침착을 유지하였다.


 의사는 환자에게는 자기가 말 할 테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병실로 갔다. 환자는 의사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리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무슨 언도(言渡)가 내리는가 하고 초조한 얼굴로 의사의 말을 기다리었다. 의사는 환자 앞에 가서 「역시 별로 특별한 병은 없습니다. 안심하시고 댁에 가셔서 잘 안정하시고 치료하십시오. 뭐 중한 병은 없는데 병원에 입원할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연극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내 아내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게 좋아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꼴을 옆에서 보고 서있는 내 마음은 더한층 아팠다. 가슴에서 무엇이 뭉클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마음대로 표정에 나타낼 수도 없었다. 병원 식당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접시 사 먹여가지고, 차를 불러서 태워서 집에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방에 들여다 눕혀놓고, 옆에 앉아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억제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는 내 손을 잡아당기어 꽉 쥐고 「울지 마세요. 나는 아까 의사가 말할 때 대강 눈치는 채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아내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말하는 어조는 침착하였다. 주검을 앞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손을 꽉 쥔 채 기도를 올리었다.


 「하느님 아버지시여! 여기에 누워있는 당신의 여종의 생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내신 것도 당신이요, 인간에게 병을 있게 한 것도 당신이요, 의학을 내신 것도 당신입니다. 현대의 의학으로는 불치의 병이라고 하나, 인간의 지혜가 끊어져 모자랄 때 당신의 지혜가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을, 당신의 권능으로는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거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옵소서!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뜻대로 하실 게 아니라, 이 영혼을 꼭 데려가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아무 불평도 없이 바치겠나이다. 사람이 세상에 오고가는 것이 다 당신의 뜻이거늘 이 생명이 죽든지 살든지 완전히 당신에게 맡기겠나이다. 그러나!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뜻이라면! 이 생명을 당신의 권능으로 살려주시옵소서!」


 나는 나의 일생에서 이보다 더 진정한 기도를 전에도 후에도 올려본 적이 없다. 슬퍼해보았댔자, 허둥지둥해보았댔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때에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맡기고 사람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가벼웠고 아내도 안심하는 얼굴로 자기의 운명을 대하였다.


 나는 이 사실을 고향인 원산(元山)에다 편지로 알렸다. 며칠 있다가 누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은 「덕원에 있는 천주교수도원에 병원이 있는데, 거기 있는 독일 의사가 대단히 용해서, 폐병을 많이 고쳤을 뿐만 아니라, 이 수도원병원에만 데려다놓으면 만일에 죽는다하더라도, 그 영혼만은 꼭 구하게 될 것이니 하루 속히 데리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님에게서도 「객지에서 혼자 고생하지 말고 환자를 데리고 내려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하루하루 악화의 일로를 걷고 있는 병세라, 이때는 벌써 몸이 너무 약해져서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편지를 했더니, 며칠 있다가 누님이 서울로 달려올라왔다. 객지에서 혼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데, 누님이 올라와준 것은 대단히 반가웠다. 그러나 현대의 의학으로는 고칠 도리가 없어, 의학박사가 백 명이 있대도 할 수가 없는데, 제가 올라오면 어쩌려고 올라왔는가? 그러나 누님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때부터 나에게 대한 가톨릭의 공세(攻勢)는 시작된 것이라 할 수가 있다.


4, 영혼의 공략전(攻略戰)

 

그날 밤 나는 누님을 별실에 데리고 가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대략 말하였다. 누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그 이튿날 아침에 아무 말도 없이 시내에 좀 나갔다온다고 하고는 나가버렸다.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궁금하였다. 촌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구경하며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아는 사람을 보러온 사람이 병자의 간호는 조금도 해주지 않고, 자기의 볼일만 보며 돌아다니는 것이 괘씸한 생각까지 났다. 저녁에 해가 다 져서야 들어왔다.


 어디를 종일 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앓는 이를 두고 종일 나가있어서 미안하오. 그러나 동생! 사람의 영혼이 육신보다 더 중하지 않소? 이번 일만은 내 말을 들어줘. 원혜 엄마의 영혼 문제는 내게 맡겨줘. 나는 오늘 천주교회에 가서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보고 인사를 드리고 원혜 이야기를 하고 그 영혼 구할 방법을 의논하고 왔소. 동생의 신앙이 좋고 원혜 엄마의 신앙이 좋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 죽기 전에 천주교의 세례를 받을 것을 허락하겠소? 죽을 사람이라도 세례를 받고 살아나는 수도 있소. 그러나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보다 육신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바이니 그 영혼이라도 안전히 구하자는 것이요.」하고 변명 겸 설명을 하였다. 즉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신부와 수녀를 만나서 앓는 이의 영혼문제를 의논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촌에서 서울에 처음 온 사람이 더욱이나 여자의 몸으로 북아현동에 있는 우리 집을 나와서 사람에게 묻고 물어서 명동에 있는 뾰족당을 찾아갔던 것이라니!


 나는 내 자신은 천주교를 믿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나, 본래 교파를 구별하거나 자기 교파를 특히 고집하지도 않는 생각이었고, 또 죽어서 영혼 구한다는 데야 반대할 필요가 있는가? 병에도 이롭다면 양약도 쓰고 한약도 쓰듯이, 영혼문제에 있어서도 좋다는 방법이면 다하는 것이 좋지, 특별히 반대할 필요도 없었다.


「본인에게 이야기해서 본인이 원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둘이서 병실에 들어가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하였더니, 아내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을 하였다. 그랬더니 그 이튿날 누님은 다시 나가서 수녀님을 모시고 왔다. 이날부터 수녀님은 거의 매일같이 와서 영혼의 준비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그것까지는 좋았으나 내 아내의 영혼을 점령한 누님은 이제는 공격의 총부리를 나에게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밤마다 저녁을 먹으면 천주교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론을 따지기로 한다면 내가 질 리가 없었다. 누님이 「오주예수께서 교회를 단 하나만 세우셨으니까 어느 것이 참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인지 알아가지고 그 안에로 들어와야지 구령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당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성부의 뜻을 준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어디에 천주교에 들어가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까? 천주교에 다니든지, 감리교에 다니든지, 주님의 뜻을 준행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될 것입니다. 누님!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는 제 방법으로 나가도 천당에 갈 길이 확실히 보이니 누님은 천주교회로 해서 가고 나는 내 길로 가서 우리 천당에 가서 만납시다.」하고 주워대었다. 이러한 토론을 며칠 동안 저녁만 먹으면 둘이서 하는 것이었다. 누님은 몹시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싸워도 도저히 나를 설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이상 이론싸움을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인 줄 알고는 단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권할 만큼 권했으니, 내가 할 본분은 다했소. 이제 동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천주께서 하실 일이니까 나는 이 이상 말을 안 하겠소.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동생을 위하여 신공(=기도)을 하겠소. 동생은 마음이 착하고 또 신앙이 좋으니까 천주께서 절대로 버리시지 않을 것이요. 언제든지 천주교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믿소.」


며칠 동안 동생을 천주교회로 전향시키려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경한 첫째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밑질 것은 없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내 아내의 영혼을 구하려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으므로,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 자기의 상경한 목적은 달성했다. 그러나 일이라는 것은 다 잘되었다가도 조그마한 차이로 마지막에 가서 틀려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부탁을 하였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니 꼭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병세가 위험해서 임종하게 될 것 같으면 성모병원에 입원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것쯤이야 중요할 것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기 때문에 즉석에서 선뜻 승낙하였다. 이왕에 죽는 사람인데 아무 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나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었다. 그러나 누님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슨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았다.


5. 성모병원의 인상


아내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하였다. 하루는 고통이 심해지고 금세 운명을 할 것만 같이 보였다. 마침내 올 때가 온 모양이었다. 자동차를 불러서 태워가지고, 아니 태운다기보다는 실어가지고 누님이 부탁한대로 성모병원에로 데리고 갔다. 성모병원에 도착하니 다 죽어가는 병자임에도 불구하고 반가이 받아들였다. 보통 다른 병원 같으면 살아날 희망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안 받는 것이 예사이지만, 이 성모병원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정성껏 받아들여주었다. 아니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더 반가이 받아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조용한 입원실을 하나 마련해주었고, 원장 박병래(朴秉來) 씨가 조수 의사 한 분을 데리고 들어와서 극히 세밀한 진찰을 다시 한 번 하였다. 며칠 못 가는 것은 확실하였으나 아직 의식은 똑똑하였다. 수녀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더니 신부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성세를 줄 준비를 하였다. 그동안에 수녀가 여러 번 집에 내왕하면서 마음의 준비는 다 시켜놓았던 차라, 아무 때나 영세만 하면 되게 되어있었던 모양이다. 천주교에서 세례 주는 예절을 나는 처음 보았다. 촛불을 켜놓고 기름도 바르고 물로 씻고 하는 복잡한 예절이 아마 1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루치아라는 이름을 하나 새로 받았다. 그리고는 날보고 모두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축하를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여튼 이제와 보니 이것이 다 누님이 다니면서 수녀님과 신부님에게 사전에 연락을 해놓았던 것이 분명하였고 성모병원에 입원시키라던 이유도 알았다. 하여튼 이제는 내 아내는 완전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입원한지 이튿날 환자는 뇌막염이 생겨서 의식이 없어졌다. 죽는 것은 이미 시간문제요, 의식이 없으니 고통도 느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주었다. 시간 시간이 척추에서 척수액을 뽑아내었다. 옆에서 보다가 오히려 미안해서 「이제는 형세는 다 기울어졌고 죽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무엇하러 그렇게 치료를 해 주십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죽을 시간이나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렸다. 그러나 의사는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주께서 다스리십니다. 이제라도 천주께서 생명을 구해주실지 누가 압니까? 우리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하고 역시 척수액을 뽑았다. 이런 의사의 태도는 성모병원에서만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고,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연히 마음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간호원과 수녀들도 자주 번갈아 들어와 돌보아주었다. 침대를 다시 보아주고, 까는 것을 갈아주고, 오래 누워서 엉덩이피부가 벗겨진 것을 보고는 「아이 가엾어라! 얼마나 아플까!」하고 고무에다 바람을 넣은 둥그런 방석 같은 것을 가져다 받쳐주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의식이 없는 게 무슨 아픈 줄이나 압니까?」하고 나는 만류하였으나, 「말은 못하지만 얼마나 아프겠어요?」하고 자기의 몸이나 아픈 듯 표정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침대의 이불을 들쳐보면 더러운 것이 나와 있곤 하였다. 이것을 간호원이 보면 간호원이 꾸려가지고 나가고, 수녀님이 보면 수녀님이 꾸려가지고 나가고는 하였다. 자기의 친어머니라도 하기 어려운 일을,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하는 그 모양은 참으로 성스러웠다.


드디어 임종의 날은 왔다. 입원한지 나흘째가 되는 날 저녁이었다. 당직의사의 말이 암만해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 임종을 하게 될 때에는 신부님이 들어오시고 병원 안에 있는 직원으로서 손이 비어있는 사람은 다 들어왔다. 당직의사 두 분이 다 들어와서 침대 양쪽에 앉아서 양쪽 손목을 하나씩 쥐고 맥을 짚고 있었고, 수녀들과 간호원들도 많이 들어와서 앉을 데 있는 이는 앉고 없는 이는 서있었다. 신부님은 임종하는 이 머리맡에 앉아서 떠나가는 영혼에게 주의를 시켜주시었다.

 
「루치아, 지금 당신의 영혼은 이 괴로움 많은 세상을 떠나서 오주예수의 품에로 돌아갑니다. 마귀는 지금 최후로 당신의 영혼을 빼앗아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예수 마리아를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자아, 나하는 대로 받아 하시오. 『예수 마리아여! 내 영혼을 구하소서!』」


루치아는 의식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이 말을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예수 마리아여! 내 영혼을 구하소서!」하고 몇 번 받아 외웠다. 몇 번 받아 외우고는 혀가 안 돌아가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잠잠하였다. 신부님은 다시 귀에다 입을 대고 「이제 입으로 외우지 못하겠으면 내가 대신으로 외우겠으니 생각을 예수 마리아에게서 떼지 말고 꼭 예수 마리아만 의지해야 합니다.」하고,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외우고 있었다. 두 의사는 여전히 양쪽 손의 맥을 짚고 있었다. 방안에 있는 이들은 이야기 한마디 없이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얼마 후에 의사는 맥이 끊어진 것을 보고하였다. 아직도 가래는 끓고 가쁜 숨은 계속되었다. 신부님은 여전히 예수 마리아를 외우고 있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남편은 거의 무감각 상태로서 아무 비판이나 감탄이나 할 여유도 없었다. 단지 아직 영혼이 떠나지 않았으니 내 아내는 아직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마침내 가쁘게 쉬던 숨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영혼은 떠났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성당을 향해서 돌아서 무릎을 꿇었다. 방안에 있던 이들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향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내어 다 같이 기도를 올리었다. 일제히 외우는 기도문의 내용은, 이제 루치아의 영혼이 육신을 막 떠났으니 도중에서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게 천신들을 보내서 잘 호위하여 천주님 앞에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문을 모르니 옆에 서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도문의 말을 따라서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마음만은 간절히 그들의 의향과 합하노라고 하였다. 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은 엄숙·경건·진실 그것이었다. 천주를 눈앞에 대면하고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아! 아내는 죽었구나! 이제는 이 세상에는 없구나! 조금 전까지 숨이 붙어있을 때에는 그래도 이 방안에 있겠거니 하였으나 이제는 정말로 죽었구나! 


아내는 죽었다. 이것은 눈앞에 나타난 뚜렷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같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가슴이 갑갑하고 앞이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았으나, 이 실내의 장면이 너무나 엄숙하였기 때문에 슬픔이 침범할 여유가 없었다. 이같이 아내 루치아의 영혼은 성대한 환송 하에 천당을 향해서 훨훨 날아올라갔을 것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행복스러운 환경 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영혼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병실을 나갈 때 황 베네딕타 수녀님은 내 앞에 오셔서 내가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탄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부인께서는 이제는 천당에 가셨습니다. 선생님도 부인의 뒤를 따르셔야지요.」하였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고 또 아직은 내가 꼭 가톨릭에로 개종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저「예」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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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도 성모병원을 생각하면 그때에 지성(至誠)껏 수고해주신 몇몇 분에게 대해서 감사의 염을 금할 수가 없다. 이미 죽을 사람인줄 알면서도 받아들여서 자세히 진찰을 다시 하고 끝까지 치료해주던 원장 박병래 씨,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성세성사와 종부성사를 주고 임종을 시켜주신 키가 자그마한 노인 이 신부님, 당직의사로 수고하시고 임종 때는 침대 양쪽에 앉아서 맥이 끊어질 때까지 손목을 짚고 있던 최상선 씨와 또 한 분 의사(이분은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돌보아주시던 황 베네딕타 수녀님, 장례에 모든 일을 주선해주시고 광나루 장지까지 같이 가셔서 희생적으로 일을 보아주신 이근용 회장님, 이 회장님은 장지에서 장례가 끝난 다음에 점심을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몇 사람의 교우하고 그냥 도망가듯이 돌아가 버렸다. 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면 천주께 받을 상급이 줄어들까봐 그러셨는지 천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목적인 듯싶었다.


「너희가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너희는 상급을 이미 받았느니라.」, 「은밀한 데서 보시는 너희 성부께서 갚으시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궁행(實踐躬行)하시는 분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간호원들과 수녀님들, 이러한 분들은 나의 일생동안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성모병원에 며칠 있는 동안에 가톨릭은 모든 사업의 근본목적이 인간구령이라는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교회자체나 부수(附隨)사회사업도 한 사람의 영혼을 안타깝게 구하겠다는 것보다는 사회적인 성과 내지는 통계적 숫자에 치중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가톨릭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전력을 기울인다는 데에 그 차이를 발견하였고, 따라서 성모병원에서도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지만, 희망이 없어 보일 때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영혼을 구하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환자가 권유를 듣고 세를 받고 죽는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이야말로 한 마리의 잃었던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일 것이다. 이 같은 성모병원에서 받은 가톨릭에 대한 강력한 인상은 가톨릭에 대한 나의 관심을 증가시켰고 그 후에 내가 가톨릭에로 개종하게 되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다.


6, 죽은 이를 위한 기도(祈禱)

 

 (가) 연미사(레퀴엠)
누님은 죽은 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니만큼 장례식도 천주교 예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른 방안도 별로 없었고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누님에게 일임해버렸다. 
 

천주교의 장례식은 미사가 주요부분이요, 미사는 새벽에 드리는 것이라 하여 고별식은 새벽 여섯시로 정하여졌다. 12월의 여섯시면 물론 캄캄하였다. 그대로 부고는 보냈지만 이 같은 새벽에 손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배재(培材)의 직원들과 담임반 학생들이 학기 시험 중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와주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남자학교에서는 이런 일에 학생이 오는 일이 없다. 있다고 해도 반의 대표가 한두 사람 오는 법인데 더욱이나 겨울 새벽에 이렇게 다수의 학생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라고 하며 나의 친구들은 감탄하였다. 
 

나는 천주교의 미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성당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바깥은 고요한 암흑에 싸였고, 성당 안은 넓고 높아서 나의 존재를 더 조그맣게 만들어주었다. 성당 전면에는 검정막을 둘러쳤고, 그 막에는 눈물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 중앙 바닥에는 관을 들여놓고, 그 관위에는 흰 십자가를 크게 그린 검은 포장을 덮어놓았고, 그 주위에는 촛대가 죽 서있었다. 미사는 일 분도 에누리 없이 정각 여섯시에 시작되었다. 제대에 촛불이 켜지고 신부가 검은 제의를 입고 제대 앞에 나와 서자 뒤의 이층 성가대석에서 소위 「레퀴엠」이 울려나왔다. 때는 캄캄한 새벽이요, 장엄한 성당 안에 눈물을 그린 검정막을 벽에 둘러치고 관을 성당 중앙에다 들여놓았으니, 그 분위기만 해도 사람의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다가 「레퀴엠」의 단조로우면서도 애상적(哀傷的)인 멜로디가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듯이 이층에서 울려나와, 그러지 않아도 비애에 잠겨있는 사람의 마음을 울려주었다. 가톨릭에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하는 특수한 음악이 있다는 것은 들어왔으나 실제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키리에 엘레이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데는 마치 천주께 매달려 애원하는 듯하였다.
 

연미사는 죽은 이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죽은 이의 영혼은 대개 연옥에 가기 때문에 그 연옥에 간 영혼을 속히 천당에 올려달라고 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에 그 영혼이 연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경우에는 미사는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효는 연옥에 있는 다른 불쌍한 영혼이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일반 사회의 장례식에서는 고별식이라는 의례히 죽은 이의 생전의 공적을 찬양한다던가, 마음이 착했으니 천당에 갔다고 하여 살아있는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한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순전히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라는 것은 하지를 않는다.

 

(나) 연도(煉禱)
연미사가 끝나니까 날은 밝기 시작하였다. 장지는 광나루에 있는 천주교의 묘지로 정하고 조반(朝飯) 후에 이근용(李根用) 회장님의 지휘 하에 교우들이 상여를 메고 그리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는 따로 가기로 하고 부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동대문에서 기동차(汽動車)를 타고 묘지로 향하였다.
 

묘지에서도 여러 가지 경문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도라는 것을 하였는데, 나는 이 연도가 참 좋은 기도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천주의 성삼위를 차례로 부르며 망자를 긍련(矜憐)히 여겨달라고 기구를 하고 다음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록해서 수많은 성인성녀의 이름을 모조리 불러가면서 망자를 위해서 천주께 전구(轉求)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이 이상 더 간절히 더 추도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만큼만 하면, 웬만큼 죄가 있더라도 천주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연옥에 들어간 영혼을 천당에로 끌어올려주실 것만 같았다.

 

(다) 추사이망(追思已亡)
 천주교에서는 달마다 특별히 심신을 바치는 목표가 정해져있는데, 11월은 연령성월(煉靈聖月)이라고 해서 연옥에 가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구하는 달이다. 11월 1일은 제성첨례(諸聖瞻禮, All Saints Day)이고 11월 2일은 특히 추사이망(追思已亡)이라고 해서 묘지에 신부님까지 동원하여 예절을 행하고 모든 죽은 이를 위하여 공동으로 기구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물론 이런 것을 알았을 리가 없지만, 이때가 가까워오면 매년 성모병원 원장 박병래 씨한테서 편지가 왔다. 이런 사유를 설명하고 교우들과 같이 참묘(參墓)하도록 권유하는 편지였다. 
 

나는 따라가 보았다. 신자들이 많이 모였었다. 적어도 묘지에 가족이 묻힌 사람은 다 모이는 모양이었다. 공동으로 신부님의 주례 하에 예절을 행하고 나면, 개인별로 헤어져서 자기의 관련 있는 무덤 앞에 가서 연도를 올리었다. 자기의 기도를 다 올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무덤에 가서 같이 기도를 해주었다. 모두가 아름다운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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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생긴 이야기 한 토막.
나는 몇 사람의 신자들과 대원군 시대의 순교이야기를 하다가 이 회장님 보고 「지금도 천주교 신자들은 순교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할 수가 있을까요?」하고 물어보았다. 이 회장은 서슴지 않고 「그럼, 하고말고요. 오주예수를 위해서 치명(致命)하면 바로 천당으로 직행인데 그걸 안 해요?」하고 마치 천당이 눈앞에 보이는 듯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천주교의 교리에 의하면 천주교를 사랑하는데,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순교(爲主致命)하면 연옥에도 안 들르고 직접 천당에 간다고 한다. 아! 얼마나 강한 신앙이며, 또 얼마나 구체적인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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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는 동안에 가톨릭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최대 유일한 목적이고, 또 사람은 가톨릭을 통하면 의심 없이 구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박히기 시작했고,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을 볼 때에 그 생활이 부러웠다. 그리고 학교 직원실에서 이따금 누가 가톨릭에 대한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가톨릭의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요.」하고, 가톨릭의 내용을 아는 대로 설명하고 가톨릭을 변호하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실에서는 내가 가톨릭 신자로 아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의 생활은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교리 상으로는 내 이성(理性)이 긍정(肯定)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이 되면 여전히 예배당에로 가서 예배를 보았다.


7, 누를 수 없는 신앙의 불길


나를 가톨릭으로 전향시키려다가 실패한 누님은 마지막으로 「나는 권할 만큼 권했으니까 이제는 내 힘으로는 이 이상 할 수가 없소. 나는 이제는 천주께만 기구를 하겠소.」하고 단념할 적에, 누님의 얼굴에서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는 읽을 수가 있었다. 
 

누님의 태도는 단순히 종파를 위한 이론투쟁을 즐겨서가 아니라, 충심으로 나의 구령문제를 생각해서 진심으로 설명하느라고 한 것은 나도 이해하였다. 자기는 진정한 종교를 바로 찾았고 안전한 구령 길을 바로 들어섰는데, 이러고 보니 아직도 이 길을 모르고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안타까웠다. 그중에도 이미 환갑을 넘고 벌써 여러 해째 신병(身病)으로 자리에 누워계신 어머니, 이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히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큰 오빠는 예배당에서도 중요한 간부요, 게다가 성격이 매우 엄해서 좀처럼 말붙이기가 어려웠다. 보통 다른 가정에서는 형제가 동무처럼 지내는 가정도 있고, 더욱이나 오빠와 누이동생 사이는 특히 다정한 집도 많지만, 우리네 집안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형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우리 동생들에게는 아버지보다도 더 어렵고 무서웠다.
 

누님은 어떻게 하면 이 집안을 정복하여 바른 구령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거룩한 야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공격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오라버니가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니와 오라버님 댁하고는 틈틈이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찬성은 하였으나 「우리 집 저 호랑이 때문에 좀 어렵다.」는 것이었다. 「큰 오라버니만 돌아서면 온 집안이 한꺼번에 다 들어올 수가 있겠는데!」하고 누님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정면공격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부인을 시켜서 측면공격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상하였던 바와 같았다. 오라버니는 노발대발하여가지고 「천주교라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교요 늙은이나 무식한 부녀자나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 뿐만 아니라 누님 보고는 「너는 천주교가 좋아서 갔으면 너나 다녔지 왜 난데없이 다니며 남의 종교에까지 방해를 하느냐? 그러려면 아예 다시는 우리 집에 다니지도 말아라.」하면서 야단을 하여서, 결국은 누님은 친정집에도 못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누님은 친정집에 정문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뒷문으로나 가만가만 출입을 하였다. 누님은 이럴수록 용기가 더 생겨서 일종의 순교정신을 느껴가면서 더 열심히 다녔다. 그래서 어머니와 오라버님 댁 이 두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고야 말았다. 틈틈이 가만가만히 다니며 교리를 설명하고 성인성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공과(功課) 책과 요리문답(要理問答) 책을 갖다 주어 비밀리에 교리공부와 신공을 바치게 하고, 때로는 뒷문으로 수녀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이 눈치를 안 오라버니는 또 공과 책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몰수하여 찢어서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오라버니의 태도는 단순히 마음이 완악해서 종교를 박해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체면문제가 더 컸었다. 그렇지 않아도 누이동생이 전향하였을 때 예배당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이 천주교로 넘어갔다고 해서, 목사와 전도부인 그밖에 특히 여자간부들이 비난을 하던 차요, 그때만 해도 누이는 출가외인이라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변명이 다소 서는 것 같았으나, 이번에는 자기의 아내와 어머니까지 천주교로 또 넘어간다면 가장으로서의 위신이 없어진다는 심리가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기실은 누님이 천주교로 전향하자 그 예배당에서는 큰 파문이 일어났다. 자기네들에게 아무 이해관계도 없건만 또 공격할만한 교리상의 논거도 없이 공연히 비난을 하였다. 변덕이 많다는 둥 교를 믿으면 한 가지를 꾸준히 믿어야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 못쓴다는 둥 마귀 유혹에 빠졌다는 둥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이 병균이 감염 못하도록 극력방비를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강력히 탄압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 압력으로는 마음속의 자유를 꺾을 수가 없었다. 이래도 안 듣고 저래도 안 들으니 오라버니는 화가 날대로 났다. 그래서 나중에는 남편의 말을 안 들으면 이혼을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즉 하루는 예배당의 목사와 전도부인을 집에 불러다놓고 이혼재판을 열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자들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니, 오늘은 목사님을 모셔다놓고 우리 집 가정에 신앙문제를 해결하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제 누이동생이 천주교로 넘어가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자꾸 선전을 해서 저의 처도 천주교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사코 말려도 도무지 듣지를 않으니 한 집에 신앙이 두 가지가 있어가지고는 어려우니 이혼을 하려고 합니다.」
 

어째서 오라고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왔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니 목사도 입장이 곤란하였다. 이혼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로 넘어가게 내버려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요, 그저 「너무 흥분하실 것 없이 서로 잘 생각하셔서 적당히 해결을 하시지요.」하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이 꼴을 당하고 보니 집안일이 창피하기도 하고 남편의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정에 있어서 신앙문제 이외의 일에 있어서는 남편에게 대해서 극히 공손히 순종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억압을 하였으나 마음속에 신앙은 누를 수가 없었다. 누를 때는 눌리는 것 같지만 놓으면 고무공과 마찬가지로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참신앙의 불길은 끌려고 하면할수록 더욱 힘 있게 타오르는 것이다.


8, 어머니의 영세(領洗)

 

나는 그 후에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전근을 하였다. 어느 날 아침에 고향에서 전보가 왔는데 펼쳐보니 「모친별세」라는 내용이었다. 아무 때고 이때가 오리라고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전문을 받아드니 앞이 아득하여졌다. 나는 전보를 아내에게 주며 학교에 잠깐 다녀오겠으니 고향에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급히 고향인 원산에로 내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실컷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얼굴도 모른다. 부모라고는 어머니밖에 모른다. 더욱이나 나는 끝의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해주시던 어머니였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의 속도 태웠지만, 자라서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 일본서 대학을 마치고 나와서는 취직하여 객지로만 나가다니느라고 어머니를 따뜻이 모시지도 못하였다.
 

아!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하여도 바람이 멎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하여도 부모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는구나!
 

내가 실컷 울고 난 다음에 누님은 나에게 어머니가 세상 떠나신 경과를 이야기해주었다.
..

「천주님의 은혜와 성모 어머님의 은혜로 어머니께서는 영세, 견진, 종부를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우선 첫 보고였다. 그리고는 아주 좋아하였다. 슬픈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기뻐한다는 것은 천주교의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그 경과는 대략 이러하였다.
 

오라버니 모르게 뒷문으로 가만가만히 자주 드나들면서, 어머니에게 중요한 교리를 다 가르쳐드렸다. 이제는 영세를 하시도록 해야겠는데 그 기회를 얻는 것이 문제였다. 교리라고 해야 어머니는 원래 신심이 좋은데다가 수족을 못 쓰시고 누워계시니까 항상 성경을 읽으셨기 때문에, 기독교의 근본교리는 아시는 것이니까 천주교의 차이점만 이해시켜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영세를 하시려면 신부님을 만나야 할 텐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신부한테 갈수는 없고 신부님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될 판인데, 오라버니 모르게 신부님을 집에로 모셔온다는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어디 여행이라도 갔으면 하고 기다려보아도 요새 따라 여행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이제는 어머니를 오라버님 댁에서 끌어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 결과 어머니를 다만 며칠 동안이라도 자기 집에로 와계시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어머니가 오라버니더러 「요새는 어째 신경이 좀 약해졌는지 잠도 안 오고 낮에는 아이들이 어찌 떠드는지 도무지 눈도 붙일 수가 없다. 며칠 동안 딸네 집에 가서 약도 좀 다려먹고 쉬다가왔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였다. 오라버니는 배후의 비밀계획은 전연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라고 쉽게 승낙을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리어카에다가 어머니를 모시고서 자기 집 아랫목에다 모셔놓으니 오랫동안의 숙망(宿望)을 달성했던 차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때를 옮기지 않고 그날로 신부님을 모셔왔다. 신부님(元山本堂 卓 神父)도 어머님에게 대해서는 누님에게서 처음부터 일일이 보고를 듣고 또 간접으로 지도해왔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영세할 기회가 온 것을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영세예절을 행할 때에는 안전지대에 온지라 마음 놓고 소리를 내서 경문을 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덕원에서 주교님이 나오셔서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시게 되어서, 리어카를 타고 가서 견진성사까지 받게 되었다한다. 참으로 천주의 특별한 섭리인 모양이었다. 이래놓고 보니 이제는 완전한 천주교회의 지체가 되었다. 이제는 그렇게 바라던 성체도 영할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미사에는 몸이 부자유하기 때문에 참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님은 또다시 신부에게 가서 간청을 해가지고 성체를 모시고 와서 영해주시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누님 집에 계시는 동안은 매일 신부님이 성체를 모시고 와서 영해주시었다.
 

어머님 자신도 대단히 기쁘셨다. 60여년 한 평생을 신앙생활을 해오느라고 했으나, 이제까지의 생활은 참교회의 문턱을 채 넘지 못한 감이 있었고, 이제 진정한 교회인 천주교회 즉 예수께서 창설하시고 베드루 이하 종도(사도)로조차 전하여 내려오고 거룩하고 공번된 유일한 교회로 올바로 찾아들어와 놓고 보니, 이제는 천당행의 크고도 안전한 방주에 몸을 실은 것 같은 감이 났다. 예배당에 있을 때는 알지도 못하던 보화를 많이 발견하였다. 견진성사라는 것은 예배당에서는 알지도 못하였다.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이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지라.」(행 8·14-16) 한 말씀이 있는데 이 성사를 천주교회에서는 여전히 전승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성사도 예배당에는 없다. 예배당에서는 소위 성만찬이라고 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면포(麵麭)와 포도주를 먹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지 예수의 성체는 아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체성사는 단순히 기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떡과 포도주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성하신 후에 「너희는 받아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하셨을 때 참말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 것처럼, 미사성제 중 예수의 성체로 변한 것을 받아먹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의 성체를 참말로 먹는 것이니 내 몸은 예수의 몸과 일체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이같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양의 올바른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예수의 한 지체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때 죽어도 걱정이 없고 천당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고, 예수님 앞에 나가서 누릴 영광이 이미 몸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후에도 누님네 집에 계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마음대로 신공(=기도)을 드릴 수가 있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어느 날 아침에는 깨어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지난밤에는 참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구름 사이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셔서 나를 반겨주시는 꿈을 꾸었는데, 암만해도 이 세상을 떠날 꿈인 것 같으니 오늘은 물을 데워서 몸을 깨끗이 씻고 종부성사를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반(朝飯)을 잡수신 후에 대야에다 더운물을 떠다드리고 일으켜드렸더니, 앉아서 세수를 하시려고 의치(義齒)를 뽑아서 씻으시더니

「얘, 어지럽다. 나를 좀 도로 눕혀다우.」하시면서 쓰러지려고 하시기에, 받아 눕혀드리고 나서 암만해도 이상해서 사람을 시켜서 신부님을 모셔왔다. 신부님이 오셔서 종부성사를 주신 후에, 곧 오라버님 댁에 아이들을 시켜서 어머니가 위급하시다고 했더니, 오라버님이 달려와서 어머니를 업고서 집에로 모시고 갔다. 집에 가서 얼마 있다가 그날로 임종을 하셨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순조롭고 행복스러운 임종이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당에서는 목사·전도부인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천주교의 영세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고 종부성사까지 받고 돌아가셨으니, 이에서 더 완전한 천주교회의 신자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오라버니는 이러한 사실을 전연 알 리가 없고 또 알았다가는 큰일 날 일이니, 섣불리 장례식을 천주교의 예식으로 하겠다는 말을 누님은 할 수가 없었고 또 할 필요도 없었다. 시체의 장례식이야 아무 식으로 하든지 이미 그 육신을 떠난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이 아니랴?
 

그렇게 걱정하던 어머니! 자기가 모시고 있지 못하고 오라버님 댁에 따로 떨어져 계시니, 갑자기 돌아가셔서 영세도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항상 걱정하던 어머니가 영세만이 아니라 필요한 성사를 다 받고 돌아가셨으니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시체는 예배당에 맡기고 누님은 집에 돌아와서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드리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성당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니 안나의 영혼을 위하여 연미사를 드리었다.
 

이상이 대략 어머니의 영세와 임종에 대해서 누님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10, 영오(囹圄)


1942년에 소위 「성서조선(聖書朝鮮)」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교훈을 받드는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발간하는 기관지인데, 당시 양정중학교의 교사 김교신(金敎臣)씨가 주필이었고 평북 오산중학교의 함석헌(咸錫憲)씨 등이 주요한 지도자였다. 잡지의 사명은 그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일정하여, 죽어가는 민족성을 성서의 힘으로밖에 다시 살릴 길이 없다고 하는 신앙운동인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다.
 

이 사람들은 본래부터 경찰당국의 주목은 받아오던 것이지만, 특히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운동 혐의로 모조리 검속을 당하게 되었다. 나는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한 연유로 이 잡지에 얼마동안 투고를 한 일이 있어 동(同) 잡지의 간부처럼 되어서 휩쓸려 잡혀 들어갔었다. 


나와 무교회주의자의 관계는 전기(前記)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1편인 「프로테스탄트 시대(時代)」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어떻게 「성서조선(聖書朝鮮)」사건에 관련되었는지 그 경위만 간단히 말해두고자 한다.
 

1936년에 개성 호수돈고등여학교(好壽敦高等女學校)에 가 있을 때 동료로서 류달영(柳達永)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 분은 이 잡지 주필인 김교신 씨의 고등보통학교 시절 수제자로서, 고등보통학교 시절의 담임선생인 김교신 씨의 감화로 종교(=무교회주의)를 알게 되었고 열렬한 무교회주의 신봉자였다.

 

이 류달영 선생에게서 나는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구경하게 되었고, 매년 겨울에는 그네들의 소위 동기집회 혹은 성서집회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동기집회(冬期集會)라는 것은 전선(前線)에 있는 무교회주의자들이 1년 동안 각지에서 기관지인 성서조선으로만 연락을 하고 있다가, 동기방학을 이용하여 한곳에 모여 합숙하며 성서를 연구하며 무교회적인 훈련을 하는 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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