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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종실기(18)-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②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1-08


가톨릭에 돌아오기까지의 분전(奮戰)에서 이어짐


류달영 선생의 권유로 한번은 이 동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옥스퍼드그룹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파에 대해서는 초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교회에 대해서 고집도 없을뿐더러 남의 교파를 나쁘다고 하지도 않았다. 무교회주의가 내 비위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류달영 선생과의 우의와 또 김교신 씨와 함석헌 씨의 인격에 접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이 동기집회에 참예하기로 하였다.
 

 이 집회에서 내가 옥스퍼드그룹운동의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 그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해서 한 시간 이 운동의 윤곽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의외로 모두들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옥스퍼드그룹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고 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가지고 옥스퍼드그룹에 관한 책인 「죄인만을 위하여」(For Sinners Only)를 번역해서 매월 성서조선에 연재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에 「성서조선」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간부들과 독자들을 잡아들이는 판에 잡지에 매월 투고를 했으니까, 나도 휩쓸리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경찰이 「성서조선」을 친 이유는 종교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민족운동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성서를 통하여 민족정신을 썩지 않게 하자는 것이니, 민족운동이야 무서운 민족운동이기도 하였다.
 

1942년 여름이었다. 중요한 간부와 독자들 전선(前線)적으로 검속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김교신 씨는 내가 있던 송도중학교에 있었는데 제1차로 검거되고 뒤이어 호수돈의 류달영 씨 등이 검거되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이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데리러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마 빼놓았나보다 하고 학생 4·5명을 데리고 동해안의 송전(松田)으로 캠프를 떠났다. 송전서 한 십 일간 해수욕을 하고나서, 고성 해금강을 보고, 온정리(溫井里)에 와서 외금강을 보고, 내일은 비로봉을 넘어 내금강으로 해서 집에로 가려고 영양관(嶺陽館)인가 하는 일본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형사 둘이 와서 「잠깐 무엇을 물어볼 것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미리 각오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짐을 다 가지고 따라갔더니, 그날 밤으로 자동차에 태워서 고성 본서(本署)로 데려갔다. 학생들도 같이 데리고 갔으나 학생들은 여관에 묵게 하고 나는 유치장에로 들어갔다. 강원도경찰부에서 경기도경찰부의 부탁을 받아가지고 잡아넣어두라는 지시가 와서 소위 보호검속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고성서(署)에서는 내가 무슨 죄인지 알지도 못하였다. 2·3일 후에 개성서(署)에서 형사 두 명이 데리러왔다. 여행 도중에 객지에서 잡혀 있다가 개성서(署)에서 왔다니, 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하여튼 반가웠다. 개성까지 오는 도중에는 환담도 하고 잘 왔으나 개성역(驛)에 점점 가까이 오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시간은 밤 열한시나 되었는데 이놈들은 내려서 자기 집에로 가겠지만, 나는 집이 있으면서도 집에서는 온지도 모르게 유치장에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답답하였다. 개성서(署)에 들어가 형사들은 당직주임에게 보고를 하고 자기 집에로 돌아갔다. 나가면서 날 보고 인사를 하는 말이 「마음 놓고 들어가 잘 있으라.」고 어색한 말을 하였는데, 유치장에 들어가 잘 있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치장에를 들어가 보니, 당시 송도중학교의 교감으로 있던 김종흡(金宗洽)씨도 들어와 있었고, 다른 아는 친구들도 여럿이 들어와 있었다. 장소는 반갑지 않은 데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개성서(署)에서 약 1개월 있는 동안에, 같은 지방인 관계도 있고 해서 무사히 해주려고 조서를 잘 만들었으나, 경기도경찰부에서는 다른 사람은 다 내보내고 나하고 김종흡 씨는 인텔리라고 해서, 자기들이 다시 조사해보겠다고 올려 보내라고 하므로, 둘은 다시 경기도경찰부로 옮기게 되었다. 경기도경찰부의 유치장에 와보니, 거기는 김교신 씨를 비롯해서 중요한 인사들이 다 모여 있었다. 경기도경찰부에서 1개월여 있었는데 이 동안에 나는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밤에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자리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본다.
 

내가 만일 여기서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순교를 한 것이 될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이런 데 들어올 리도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잡아온 것은 아니다. 「너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고 하면 순교자의 면류관을 쓸 수도 있겠지만, 놈들의 이유는 민족운동이라는 것이니 이것으로 죽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될까?


또 나는 생각해본다.
나는 과연 지금의 신앙으로 순교를 할 수가 있을까? 교회의 목사들은 대개가 시국에 아부하여 설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시국강연식의 내용이 많다. 그렇게 진리의 수호자이어야 할 교회가 시국만 따라가다가는 나중에는 순교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런 교회에 속해있는 내가 순교할 자신이 있는가? 이렇게 냉정히 반성해볼 때 나는 순교할 기회가 온다할지라도 순교할 힘이 있을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현대에도 순교를 할 수 있다고 하던 이근용 회장의 말이 생각이 났고, 대원군 박해 때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사실이 생각이 났다. 가톨릭 신자는 무엇 때문에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가? 거기에는 자기의 생명과 바꿀만한 무엇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같이 유치장이라고 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종교에 대해서 자기 신앙에 대해서 심각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순교까지 할 수 있게 될 만한 신앙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해 10월 하순에 나는 석방이 되었다. 나와서 나는 가톨릭에 대한 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특히 순교사(史)를 읽었다. 한국의 순교사를 읽어보고 일본의 기리시탄(キリシタン) 순교사도 읽어보았다. 모두 자기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가볍게 여기고 용감하게 치명(致命)을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순교라는 것은 인간의 이상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용감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인성을 초월한 초자연적 힘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가톨릭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루는 예배당에 가서 뒤의 자리에 앉아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에 지금 어떠한 천변으로 인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이 일시에 갑자기 다 죽는다면 이 중에서 몇 사람이나 천당에 갈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남녀반을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검토해보았다. 열심이 있다고 하는 노인들, 전도부인, 교회의 간부들을 한 사람씩 보면서 「이 사람은?」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 있게 이 사람이면 틀림없이 천당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강대상 위에 있는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는 어떨까? 그러나 목사는 더욱이나 틀렸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예배당에를 계속해 다녀야 하는가? 아직까지의 타성으로인가? 체면 때문인가? 그러나 체면으로 구령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생명이다.


11, 신부관 문을 두드리다

 

유치장을 다녀와서부터는 나는 종교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신앙이 좋다고 한다. 청년들은 목사보다도 나를 찾아와서 종교를 토의하고 성경을 연구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마음속은 불안하였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심중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하여튼 가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비교·연구해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개성에 있는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신부관의 문을 노크하였다. 신부님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가톨릭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려고 왔으니 잘 지도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대단히 반갑게 맞아들였다.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님이었다. 이제부터 방 신부님과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날부터 매일같이 신부 댁을 방문하였다. 밤에는 물론 낮에도 시간만 있으면 갔다. 저녁을 먹으면 의례히 신부 댁에로 갔고, 가면 의례히 자정 전에는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신부에게 종교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에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 또는 프로테스탄트 이론을 가진 사람이 단순히 이론투쟁을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진리를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신부들은 대개 상대를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고, 후자의 경우에는 모든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대해준다. 방 신부님은 내가 매일 밤 찾아가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여도 조금도 괴로워하거나 싫어하는 표시를 안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천주교의 신부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미사를 드린다는 사실과 매일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breviarium」(성무일과서)이라고 하는 경문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어떤 때는 밤새 한 시나 두 시까지 있다가 가는 수도 있었다. 그런 날은 반드시 영향이 있어 피곤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도무지 그런 기색이 없이 그날 밤이 되면 여전히 반갑게 대해 주시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밤이 늦어서 내가 먼저 가려고하면, 신부님이 오히려 붙잡고 조금 더 이야기하자고 만류하는 수도 있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니만큼, 피차에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신부님도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예배당에서도 지도자 측에 속하였고 옥스퍼드그룹의 지도자였고 또는 집에서도 청년들의 성경연구를 지도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신부님에게 못지않았다. 무슨 복음(혹은 무슨 서간)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이 있는데 하고 성경 구절을 끄집어내는 데는 신부님도 못 당하였다. 그러면 신부님은 의례히 커다란 라틴어성경책을 갖다가 책상위에 펴놓고 어학적으로 뜻을 해석하시면서 설명을 하시었다. 나는 영어선생인 고로 라틴어를 풀어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신부님에게는 편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신학생이 하나 와있었다. 그 신학생인즉 지금 윤병희(尹炳熙) 바오로 신부가 신학교 중등과 학생이었을 때인데, 방학이면 개성에 내려와서 신부님 옆에서 지도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어떤 날 낮에 신부님 방에 본당 회장과 이 신학생과 몇 사람이 모여서 트럼프인가 화투인가를 하고 있었다. 나하고 신부님하고는 옆에 앉아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결국에는 또 교리문제로 들어갔다. 신부님은 또 커다란 라틴어성경책을 가지고 오게 되었고 심각한 이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우리의 회화를 자기네의 흥을 깨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있더니 이 사람들도 어느새 트럼프 장을 다 놓고, 우리를 향해서 우리 두 사람의 이론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나중에 신학생의 말이 「오늘은 참 산 교리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리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매일같이 배우는 것이 그 이야기인데, 방학에 와서 오늘은 좀 재미있게 놀려고 했는데, 또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처음에는 좀 싫었으나, 차차 듣자니 신학교의 교리시간에는 도저히 듣지 못할 실천적 교리였습니다. 그야말로 산 교리시간이었습니다.」하고 오히려 좋아하였다.
 

라틴어성경책을 가운데 놓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은 자연히 라틴어의 단어 설명도 하게 되고 격의·변화도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바람에 라틴어의 지식도 다소나마 부산물로 얻게 되었다. 영어는 라틴어를 어원으로 한 것이 많기 때문에, 비슷한 말이 나올 때에는 나는 거기에 해당하는 영어를 가르쳐드리고 해서, 나는 라틴어를 배우고 신부님은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해서 「미영격멸」의 슬로건을 내세울 때니까 영어는 사실에 있어서 시세가 없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날 보고 「아니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이번 전쟁에는 일본이 꼭 집니다.」하시고 바람벽에 붙여 놓은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지금 일본이 여기까지 먹으려고 하는데 조그마한 배에 이게 다 들어가야 먹지? 이제 미국이 꼭 이깁니다. 그때 되면 조 선생이 일어설 때가 있소.」하고서 자신 있게 예언을 하시었다.


..「신부님 괜히 붙잡혀 가십니다.」하고 내가 웃으면, 「아니야, 조 선생 같은 사람이나 들어가지 내가 왜 들어가?」하시고 아무도 없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는 것이었다. 교리싸움을 하다가도 이따금 이런 이야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10월부터 신부님 댁을 다니기 시작해서 그해 겨우내 다니고 이듬해 부활까지 거의 매일 다녔다. 눈이 와도 갔고 추운 날도 갔다. 그러나 좀처럼 「이제는 다 알았다.」하는 자신이 나지를 않았다.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고 요리문답이나 배운다면 한 달 안으로 다 끝났을 것이다. 이미 한 가지 교파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에 무엇을 쥐고 있을 때 더 좋은 것을 주어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해서 못 받는 것과 같았다. 30여 년 동안 신교의 공기를 호흡하여온 머리를 바꾸어놓는 것은 힘이 들었다.
 

어떤 때는 밤중에 집에로 돌아오면서 나는 혼자서 「내가 무식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천국도리를 공부하는 데는 지식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성경을 다시 들쳐보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진리를 나타내주시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감추시느니라.」하신 말씀을 읽어보고 「아! 지혜로운 자여, 화 있을진저!」하고 속으로 외쳤다. 종교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저 믿는 데 오히려 신앙의 귀한 점이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고 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면 기독교를 전연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무엇이 모를 것이 많아서 근 1년이나 신부 댁에를 다니면서 연구를 하였나? 신교(新敎)의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 가톨릭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난관으로 되어있는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도 크고 중요한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일 것이다.

 

신부의 사죄권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만 사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사할 수가 있는가! 「이 사람이 누구인데 참람한 말을 하는고? 하나이신 하느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리요?」 이것은 바리새교인들이 예수께 대해서 한 말이다. 예수께서도 이런 말을 들으셨는데, 하물며 신부가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 하느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다. 여기에 따라서 고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느님께 나가 눈물을 흘리고 죄를 통회할 때에 하느님께서 사해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히 성부께 구하면 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네 성부께 기도하라. 은밀한 데서 보시는 성부께서 네게 갚으시리라.」

 

의식
종교는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의식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교황의 무류성
교황도 사람인데 틀리지 않을 수가 있는가?

 

성체
밀떡은 밀떡이지 그것이 왜 예수의 살이냐? 단지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면포(麵麭)와 포도주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성모 마리아 공경
우리는 온전히 예수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사람인 마리아를 공경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교회 밖에는 구령이 없다
 반드시 천주교를 통해서만 구령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성부의 뜻을 준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천주교에 있던 감리교에 있던 성부의 뜻을 준행하는 자만이 구령할 것이다.
  
고행이냐? 믿음이냐?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니.」 우리는 고행이나 선행의 대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무한하신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성모의 평생 동정설
요셉과 결혼생활을 하였으며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동정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 「마리아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아니하고」하였으니, 맏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한 것이 아니냐? 「예수의 모친과 그 형제들이 예수를 보러 와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능히 예수께 나가지 못하매 혹이 예수께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보고자 하나이다.」하였으니,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은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3편 「가톨릭의 교리」에서 상설(詳說)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교부들의 신앙」에 자세히 논증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는데, 최후에 가서 끝까지 만족할만한 해결은 얻지 못한 것이 이 성모의 평생 동정 문제이었다. 신부님도 「성모의 평생 동정이신 것은 성교회의 움직일 수 없는 교리요 확실한 사실이지만, 오늘은 조 선생이 만족하도록 증명할 수가 없으니 나도 좀 연구해가지고 다음 기회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겠노라.」고 하시고 좀 기다리기로 하였다. 방 신부님은 솔직한 분이었다. 나는 전에도 신부를 몇 사람 만난 일이 있었지만 이 방 신부님이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을 지도하는 데는 아주 적당한 분이었다. 방 신부님은 결코 이론으로 나를 지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떤 때는 천주교의 결점 또는 신부님들의 결점 심지어는 방 신부님 자신의 결점을 들어 공격을 하는 수도 있었다. 이런 때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예, 사실입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고쳐야 할 점입니다.」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데는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좀 변명을 해야지 공격할 맛이 있겠는데, 오히려 반응이 너무 약해서 공격하는 쪽의 힘이 푹 꺾이는 것 같았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역시 잉어를 낚는 기술도 아는 모양이었다. 잉어를 낚을 때는 잉어가 힘 있게 도망갈 때에는 줄을 늦추어주었다가 힘이 준 것 같으면 다시 잡아당기고, 또 야단을 치면 다시 늦추어주었다가 다시 당기어 점점 가까이해가지고 나중에는 산대를 밑에 넣어서 떠서 잡는다고 한다. 방 신부님은 확실히 이렇게 줄을 늦추어줄 줄을 아는 신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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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에 나는 원산에 갈 일이 있었다. 원산에 가면 덕원신학교에 훌륭한 독일인 교수들이 있기 때문에 채 해결하지 못한 점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하고 원산천주교회 신부관을 찾아가서 신학교의 교리신학 교수를 만날 길을 물어보았다. 마침 그날 덕원에서 교리신학 교수인 신학박사 안세명(安世明) 신부님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 우선 성모의 평생 동정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역시 박사는 박사이었다. 그리스어 원어의 뜻과 그 번역된 경위와 그때의 유태사람들의 풍속·습관 등을 즉석에서 설명하여 채 풀리지 못하였던 의문이 봄날에 눈 녹듯이 풀어져버렸다.
 

안세명 신부님은 그 후에 시국적 필요에 의하여 일본에로 일어(日語)를 연구하러 가시었다. 한 1년 후에 안세명 신부님이 일본에서 나오신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나도 이미 영세를 한 후라 내가 영세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반가워하시리라 생각하고 가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신부를 알아보았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려니 했더니, 신부님은 나를 보시더니 먼저 반가워하시면서 다짜고짜로 「이제는 의심이 다 풀렸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신부라는 사람들이 사람을 잘 기억하는 데는 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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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가까워왔다. 방 신부님은 이번 부활에는 영세를 하라고 재촉을 하시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공부를 해가지고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다른 사람들은 교리를 잘 배우지도 못하고 자꾸 영세를 하겠다고 해서 걱정인데, 그렇게 잘 알면서도 더 있다가 받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시면서 「조 선생은 이제는 더 배울게 없습니다. 신부나 마찬가집니다. 품(Ordination)을 안 받았으니 신부가 아니지, 말하자면 품 안 받은 신부입니다.」하고 추어주기도 하였다. 지금쯤 와서는 다소 칭찬을 해주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가족에게도 준비시켜서 가족이 같이 영세를 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래서 일방으로는 여(女)전교회장을 우리 집에로 파견을 해서 내 처에게도 영세준비를 시키게 되었고, 이리하여 영세의 시기는 차차 익어가고 있었다.


12, 영세를 향하여

 

 (가) 먼저 생활부터
신부 댁에를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나의 마음은 실상 천주교 신자가 되어있었다. 천주교의 내용을 알아보아서 좋으면 개종을 하고 나쁘면 포기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천주교가 좋은 것은 확실한데, 교리 상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점을 이해시켜서 이성적으로 신앙의 기초를 합리화시키려는 것뿐이었다. 1935년 여름 누님의 개종을 본 이후 1942년 신부 댁의 문을 두드리게 된 때까지, 약 8년간 지나오는 동안에 성모병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유치장에서 명상을 할 기회를 가졌고 유치장에서 나와서 천주교의 순교사를 읽고 나서는, 아무래도 천주교여야지만 되겠다는 마음의 태도는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은, 내가 깊이 연구를 하지 않아서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일 게다. 2천 년 동안 위대한 전통을 간직해 내려왔고 세계적으로 통일된 위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은 교리적으로도 완전한 체계가 이루어져있을 것이다. 수박을 겉으로만 핥지 말고 깨트려서 속을 먹어보리라. 신부관의 문을 두드릴 때에는 나는 적어도 이러한 마음의 태도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신부님은 이러한 나의 마음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세는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 천주교 신자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였다. 즉 주일이면 미사에 참례할 것과 보통날에도 성당에를 오면 신부 방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성당에 들어가서 제대 위 감실에 계신 오주예수께 조배할 것과 또 갈 때에도 성당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갈 것과 아침과 저녁에 신공(=기도)을 드릴 것 등을 가르쳐주시었다. 그렇게 생활부터 해나가면 천주께서 성우(聖佑)를 내려주셔서 이해하기 힘든 도리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 다음에 왔을 때는 먼저 성당에 들어가서 성수를 찍어가지고 무릎을 꿇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아멘.」하고 정성스럽게 생전 처음으로 성호를 그어보았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천주교 신자가 된 것같이 느껴졌다.
 

그다음 주일에는 처음으로 미사에 참례해보았다. 성당 문을 들어서보니 미사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신자들이 잔뜩 앉아있었다. 개성의 성당은 출입구가 옆으로 있기 때문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되어있다. 나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좀 어색하였다. 그래서 성호도 긋지 못하고 그냥 맨 뒤에 가서 앉아버렸다. 그러나 성호를 못 그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다음 주일에는 성당으로 오면서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오늘은 성당에 들어가서 꼭 성호를 그으리라.」하고,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하였다. 성당에 들어가서 성수그릇을 바라보고 찍을까 말까하고 망설이기 시작하면, 벌써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며 「저 사람이 누구야?」 혹은


「저 사람이 예배당에서 개종하는 사람이래!」하는 것 같아서, 또 성호를 못 긋고 그냥 맨 뒤에 가서 앉았다. 몇 주일 후에 나중에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실은 아무도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용감히 성호를 그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하였다.

 

(나) 가톨릭의 성가(聖歌)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동안에 서로 인간적으로도 이해가 깊어졌다.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합창 지휘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세는 안했지만 성가대를 지도하게 되었다. 나는 예배당에서도 찬양대를 지도해왔지만 가톨릭의 성가대에는 색다른 맛을 느끼었다. 그것은 대개가 라틴어로 되어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음악보다도 내용에 중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즉 미사순서에 따라서 각 부분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노래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톨릭의 성가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이다. 그리고 예배당의 찬양대는 좌석이 앞에 있는데 천주교의 성가대는 뒤에 있는 것도 좋았다.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 같은 성가를 음악보다 먼저 라틴어 가사를 신부님에게 배웠다. 그리고 그레고리안 성가 악보 보는 법도 배웠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음악의 세계가 일층 더 넓어졌다. 이전에는 「아베 마리아」라던가 「아뉴스 데이」 같은 노래를 음악으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 가톨릭의 생활을 알고 보니 이러한 노래도 일층 더 깊게 맛을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이나 미술도 가톨릭의 이해가 없이는 완전한 이해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는 밀레의 만종(晩鐘) 같은 것도 보통 사랑의 신성·노동의 신성·종교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들어왔는데, 가톨릭의 생활을 알고 보니 멀리 성당에서 삼종소리가 들려오니까 일하던 것을 정지하고 안젤루스(Angelus)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통쾌하였다.
 

이러한 가톨릭과 문화면에 관해서는 「나의 신앙적 자서전」의 제4편 「가톨릭의 생활」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다시 성가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미 가톨릭 신앙에 젖은 대원들은, 늘 하는 것이니까 아무 신선미(신선미)도 느끼지 않고 그냥 예사롭게 하지만, 나는 성가 하나하나가 모두 감명을 주었다. 연습을 시킬 때에도 눈을 감고 곡조를 들으며 가사의 뜻을 명상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사 때에 뒤에서 제대를 바라보고 성가를 부를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이따금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세를 안 했기 때문에, 완전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따라서 어딘지 모르게 손님 같은 기분이 있었다. 아! 이제는 하루속히 영세를 해야겠다.

 

(다) 영세의 길로 가까이
 
한번은 연안에서 어떤 교우의 결혼이 있어서 신부님이 출장을 가시게 되었다. 날더러 같이 가자고 그래서, 이왕이면 성가대에서 몇 명 추려가지고 가서 미사에 성가까지 해주면 더 좋겠다고 의논이 되어서, 성가대원 4·5명과 본당 회장과 같이 가기로 되었다. 성가대원으로서는 정예분자를 추리느라고 성당부속학교 교사 윤병현 데레사(훗날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원 원장), 당시 방학으로 와있던 신학생 윤병희 바오로(훗날 윤병희 신부), 그밖에 2·3명이었다. 해주(海州)가는 간편철도를 타고 가는데 차내는 좁고 손님은 많아서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좌석에 앉아있었으나 어떤 할머니가 바로 옆에서 고생을 하시기에 젊은 놈이 앉아서 가기가 민망스러워서 자리를 양보해드리고 그 대신 나는 끝까지 서서 가게 되었다. 
 

기차를 내려서 신학생 윤병희 바오로의 말이 「선생님, 오늘 공로를 많이 세우셨습니다.」한다. 나는 이 말이 불만하게 들리었다. 선행은 그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것이 공로가 된다거나 무슨 상을 바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주의가 아니냐? 그래서 이론(異論)이 또 벌어졌다. 결론은 같은 선행이라도 천주를 생각하고 하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성질이 착한 사람이 자기 본성에 의해서 하는 것과 본성은 그다지 착하지 못하지만 자기의 본성을 초월해서 천주를 위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 것과는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물었을 때 그곳까지 같이 가서 집을 가르쳐주는 것은 착한 일이다. 이런 때에 자기가 그곳까지 갈일이 있거나 산보를 하고 싶어서 가는 수도 있고 혹은 갈 일도 없거나 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 사람이 그냥은 길을 잘 못 찾을 것 같아서 일부러 같이 가주는 수도 있다. 그 길손은 어느 쪽이 더 고맙겠는가? 그러므로 자기의 본성으로 하기 싫은 것이라도 천주를 위해서 한다면 천주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시며 그것이 더 공로가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          ×         ×
 

그 이튿날 아침 혼배성사와 미사가 끝난 후에 윤 데레사에게 나는 물었다. 「성체를 받아먹을 때 꼭 그것이 예수의 성체인 줄 알고 받아먹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은 밀가루 떡이지만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예수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성체와 같은 생각으로 먹는 것보다는 성체로 믿고 먹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이론도 없는 단순한 말이지만 이야말로 신앙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것은 대개 해결이 되었지만 이따금 부스러기 문제도 이같이 정리가 되어 영세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닦아졌다.
  
 (라) 기도하는 소녀
 나는 낮에도 종종 성당에 오면 신부님 방에를 들어가기 전에 성당 안에 들어가 간단한 기도를 올린다. 대개는 나 하나밖에 없는 빈 성당인데 하루는 여자석(女子席)에 한 소녀가 하얀 미사수건을 머리에 쓰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두 손에는 로사리오(=묵주)가 드리워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 이 얼마나 순결하고 경건한 자태인가! 순결한 소녀의 이 엄숙하고도 경건한 프로필! 이것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밀레의 종교화(宗敎畵)보다도 산 그림이다. 종교는 참으로 예술이다.

 

(마) 영성체를 동경하는 마음
주일이면 미사에 참례해서 이층에 올라가 성가를 부른다. 앞을 향해서 신부님의 미사 드리는 동작을 바라본다. 신자들은 모두 제대로 향해서 앉아 있다가 신부님의 동작을 따라 무릎을 꿇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한다. 그중에도 부인네들은 모조리 머리에 흰 수건을 덮고 앉아있는 것이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성당 안의 광경으로서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자들의 태도의 경건·엄숙한 것이다. 미사 때에는 물론 미사가 시작하기 전에라도 일단 성당 안에 들어와서는 일체 사담이 없다. 아는 사람이라도 인사도 안 한다. 예배당에서는 예배 중에도 사담을 하는 수가 있고 더욱이나 예배 시작하기 전에는 장사얘기·정치얘기·김서방얘기·이서방얘기 별 잡담을 다 하다가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 「자! 이제는 조용하고 예배 시작합시다.」하고서 시작하는데, 성당에서는 들어가면서 성호를 놓고서는 제대를 향해서 앉으면 옆에 누가 와서 앉든지 상관도 안한다. 
 

그러나 매 주일 보아도 항상 큰 감명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성체하는 광경이다. 제대상의 제물인 예수를 천주께 제헌한 후에 그 제물인 예수의 성체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 성당 가운데 통로로 되어있는 데를 남녀가 두 줄로 합장을 하고 서서 천천히 앞에로 향해서 걸어 나간다. 성체를 배령한 사람은 좌우로 갈라져서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무죄한 영혼들이 성체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에 모시려고 예수를 맞으러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모양! 얼마나 성스러운 광경인가! 특히 흰 수건을 머리에서 어깨위로 내려드리우고 죽 서서 나가는 여자들의 뒷모양은 말할 수 없이 성스러웠다. 나도 이제 영세를 하면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가 있겠지. 내가 첫 번으로 성체를 영하게 될 때는 나의 심경은 어떠할까? 지금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제대지만 그때는 제대 앞으로 바짝 나가서 무릎을 꿇고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된다면 나는 그때는 꼭 울 것만 같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었다.

 

(바) 모든 프로테스탄트교도에게 
 나는 이제는 종교는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로 되었다. 현대의 지식인으로서 천당이니 지옥이니 말하는 것은 비과학적이요, 종교를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른다. 현대에 있어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는 정도의 하이칼라적인 크리스천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조만간에 죽을 것이요, 죽은 후에는 불사불멸의 영혼이 천당을 가거나 지옥을 가거나 또는 연옥을 가거나 해야지, 아무 데도 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뱃속에 든 아기가 기일이 차면 아기나 어머니의 의사에 상관없이 세상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제 가톨릭은 나에게 천당 가는 길을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가톨릭교회는 천당행(行)의 커다란 배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가 아니라 아무리 심한 풍랑이 있더라도 끄떡도 안하는 크고도 안전한 배이다. 이 배를 타고 선장의 지시대로만 따라가면 힘 안들이고 자연히 나중에는 목적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라도 천당에 못 가는 것은 아니다. 착한영혼이 이것만이 천주를 섬기는 똑바른 길인 줄 알고 천주를 열심히 사랑한다면 그 개인의 신앙의 힘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지 교회의 지도로서 가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니만큼 힘이 든다. 프로테스탄트로서 천당을 향해 가는 노력은 마치 일엽편주를 타고 가거나 혹은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가톨릭의 교리를 직접 연구해보기 전에는, 결함이 많이 있는 것 같고 공격할 점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안에 직접 뛰어 들어가서 연구해보면 전에 말로만 듣고 생각하던 것과는 내용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전에 가톨릭에 대해서 오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가톨릭에 대해서 똑같은 오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프로테스탄트교도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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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편견 없이 연구해보라」고.
  어떤 사람은 가톨릭이 좋은 줄은 알지만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교회와 맺어진 인연과 목사와 간부들에게 대한 체면을 못 끊어서 못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영혼문제를 생각해본다면 어찌 체면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체면을 붙잡고 정말 요긴한 것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마치 소는 잃고 고삐만 붙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확실한 구령 길을 알고 나니, 이제는 영세하는 것이 조급한 생각이 났다. 밤이 되어서 자리에 누울 때는 「이제 하루를 또 무사히 살았는데 만일 오늘밤에 자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영세도 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생각이 나서, 「주여! 나를 오늘날까지 보호해주신 것처럼 오늘밤도 보호해주시어 무사히 자고 내일의 새날을 보게 해 주소서. 그리고 영세의 은혜를 하루속히 내리어주소서!」

 

(사) 최후의 승리
 8월 15일은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는 성모의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큰 축일이다. 성모께서 원죄(原罪) 없이 모태에 배이신 것을 기념하는 무염시태(無染始胎)축일인 12월 8일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과 성모께서 승천하신 날에 일본이 항복을 하고 한국이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치라면 그만이지만 가톨릭 측에서는 성모께서 한국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 땅을 순교의 피로 물들인 약 1만 명의 치명자들의 영혼이 천당에서 끊임없이 한국을 위하여서 기도하여오신 결과인지도 모른다.
 

1943년 8월 15일.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축일. 이 날에 영세를 하도록 신부님과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신자가 되어가지고 이 축일을 지나게 하기 위해서는 영세는 대개 그 전일에 하게 된다. 그리고 영세를 하려면 찰고(=시험)를 해야 한다. 즉 영세할 자격이 있는지 교리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근 1년 동안이나 시험해보았으니 이에서 더 상세하고 엄격한 시험이 또 어디 있으랴? 뿐만 아니라, 1년 동안이나 신부님하고 마주앉아 교리싸움을 해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친밀한 친구가 되어버린 이때에 시험을 하는 것이나 시험을 받는 것이나 피차에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찰고를 절대로 받기로 하였다. 나는 예외의 취급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영세는 안했더라도 모든 생활을 천주교 신자와 꼭 같이하노라고 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꼭 같은 코스를 밟고 싶었다. 또 이것은 나의 겸덕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남들이 영세하기 전에 찰고를 한다면 나도 영세하기 전에 찰고를 해야 한다.
 

8월 13일 저녁을 먹고 우리 부처(夫妻)는 소위 영세찰고를 받기위해서 성당에로 갔다. 어린아이들까지 전(全)가족이 일제히 영세를 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큰아이들 둘은 원산 큰댁에 가있었고, 세 살 난 셋째 딸만 같이하게 되었다. 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시험관과 두 수험생은 종각 밑에 시원한 돌층대에 걸터앉아 모기를 날리며 찰고를 하였다. 찰고는 패스(Pass)되었다.
 

이제는 본명을 정하는 것과 대부(代父)·대모(代母)를 정하는 것이 남았다. 나는 전교를 좋아한다고 해서 일본까지 전교를 오셨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로 정해주시고, 내 처는 성모 마리아의 어렸을 적부터의 동무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그 얼굴에 땀과 먼지와 침과 피가 흘러 있음을 보고 용감하게도 병정들을 헤치고 들어가 예수의 얼굴을 수건으로 씻어드리던 「베로니카」로 정해주시고, 어린애는 대모인 윤 데레사의 청으로 데레사로 정해주셨다. 그리고 나의 대부는 본당 회장인 한상준(韓相俊) 씨, 내 처의 대모는 신부님의 누님이신 방순경(方順京) 선생님, 어린애의 대모는 윤 데레사 선생이 되어주셨다.
 

 이튿날 8월 14일 저녁에 수십 명의 영세자와 같이 감격의 영세를 받았다. 영세예절이 끝난 다음 모두들 와서 축하의 인사를 해주었다. 아! 이제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몸인 천주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오늘이야말로 오랫동안 싸워오다가 모든 장애와 교리의 난제(難題)와 모든 난관을 정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은 날이다. 1935년 여름에 누님의 개종을 보고 자극을 받은 때부터 만 8년 만에 획득한 승리이다.
 

나는 천당에서 기뻐해주실 영혼들을 생각해보았다. 나의 어머니 「안나」가 기뻐해주실 것이요, 나의 선처(先妻) 「루치아」가 기뻐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내가 영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기뻐해줄 사람은 누구보다도 원산에 있는 나의 누님이시다. (끝)


조성지(趙聖祉) 방지거


본 적 함경남도 원산시(元山市) 중청동(中淸洞)265
주 소 경기도 수원시(水原市) 서둔동(西屯洞)54


1932년 원산공립중학교(元山公立中學校) 졸업
1936년 일본 관서학원대학교(關西學院大學校) 영문과(英文科) 졸업
1936년 4월~1937년 3월 개성 호수돈고등여학교(好壽敦高等女學校) 교사
1937년 4월~1941년 3월 서울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 교사
1941년 4월~1943년 7월 개성 송도중학교(松都中學校) 교사
1943년 10월~1945년 8월 신고산(新高山) 해성중학교(海星中學校) 교장
1945년 9월~1945년 11월 원산중학교(元山中學校) 교감
1945년 12월~1948년 7월 덕원천주교신학교(德源天主敎神學校) 교수
1948년 9월~1949년 8월 강릉농업학교(江陵農業學校) 교감
1949년 9월~현재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