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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쟐신부에 대한 레네 신부님의 반박(2013-04-19)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8-01




사쟐 신부에 대한 레네 신부님의 반박


          친애하는 샤잘 신부님,


신부님은 언제부터 비난 받는 자에게 해명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오히려 비난하는 쪽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부님쪽의 사람들이 펠레 주교님을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쪽에서 그것(자유주의)을 증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부님이 다음과 같이 쓰신 것은 오류를 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말했죠, 우리가 펠레 주교님의 잘못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고……. 좋아요! 그렇다면 그것을 입증해보세요.”


그리고 신부님은 단지 펠레 주교님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계속 말합니다만, 여기엔 또 다른 커다란 문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그 인용문의 배경과 문맥을 무시한 채, 가능한 최악으로 그 인용문을 해석하여서, 불완전하고 결점투성인 채로 주교님의 말을 인용했으니 말입니다. 신부님은 신학대전에 있는 성 토마스의 글을 읽은 적이 있으신가요?


의심이 갈 때는 그 의심들을 최상으로 좋게 해석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리자면, “선한 사람을 악하다고 가끔 잘못 생각하는 것 보다는 악한 사람을 선하다고 자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악하다고 착각하면 상처를 입히게 되지만, 악한사람을 선하다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IIa IIae qu. 60 a.4 ad 1m) 그러므로 타인의 말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는 습관은 커다란 죄입니다.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상대방에게 악의를 품고 있거나, 미워하거나, 증오 하거나, 화가 나거나, 질투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악한 자라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기 때문이다.” (ibid. a.3)
 ‘

성비오10세회 당국’에 대해, 이와 같은 나쁜 성향이 신부님과 신부님 동료들(저항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글에 스며들고 있다는 게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성향은 덕행이라 볼 수 없습니다. 신부님이 펠레 주교님의 말씀을 얼마나 악의적이며, 가식적으로 인용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신부님의 편지에 들어있는 인용문 하나를 확인하겠습니다.
 

다음은 신부님이 쓰신 문장입니다. “멘징겐에서 행한 이중적 발언은 현재 진행 중이고 잘 문서화되고 있는 과정이다. 이는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 미사의 유연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우리는 새미사가 이러한 사상을 비난하는 것을 요구할 수 없다.》》》(2월 15일자 인터뷰. 노우빌레에서)


이 인용문은 열린 따옴표가 없기 때문에 표준적인 끝맺음이라곤 할 수 없지만, 겉으로 보기엔 분명히 인용문의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 미사가 유연하다는 생각’ 이란 말이 정말로 인터뷰 내용 안에 있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그 내용 안에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활한 방법은 그 자체가 이미 악의적인 것입니다. 더욱이,펠레 주교님이 “우리는 새미사가 이러한 사상을 비난하는 것을 요구할 수 없다.” 라고 발언했다고 그럴듯하게 말한 그 부분의 인터뷰 원본을 살펴보니 펠레이 주교님은 “우리는 로마가 조만간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비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단어가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예, 우리는 로마당국이 2차 바티칸 공의회 및 새미사의 오류를 견책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바이나, 현실적으로는 조만간 이루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마지막 말을 잘라내어 펠레 주교님이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미사가 ‘교정될 수 있는 것’으로 신부님의 말로 바꾸신 것이고,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주교님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모더니스트(현대주의자)들이 교부들의 말씀을 인용할 때는, 저들을 신뢰하지 마시오, 바로 그 인용문을 확인해보시오."이젠 추가할 것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샤잘 신부님과 그의 동료들이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에, 특히 성비오10세의 말을 인용할 때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의 인용문을 꼭 확인해보세요." 타인의 중요한 말을 잘라내며 말을 왜곡하는 신부님의 기만적인 방식은 신부님의 지적인 정직성에 관한 모든 신뢰감을 잃게 만듭니다.


또 다른 악의적인 인용사례를 보겠습니다. “신부님이 나중에 매우 천재적으로 인용했듯이, 새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분명히 교회 자체’임을 드러냈다.” 라고 썼는데, 제 답변은 "어디에 그런 인용문이 있나요?"입니다. 제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인용문은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1974년 11월 24일 선언하신 그 내용을 제가 인용한 것뿐 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2차 공의회 기간 및 그 이후 공의회 결과의 모든 개혁조치와 같은 네오 모더니스트(신 현대주의자) 및 신개신교 경향의 로마 당국을 따르는 것을 항상 거절해왔고 현재도 거절하는 바이다.”  


다시 말하건대, 신부님이 악의적으로 그 인용문을 왜곡하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네오 모더니스트 및 신개신교 경향’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지, ‘새 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왜곡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교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씀을 했다고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신부님이 쓰는 악의적인 방식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계속해서 “(교회법적) 규계화(規戒化, 법제화)는.… 중요하지 않다.” 라고 하시는데, 아닙니다. 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직의) 질서란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니까요. 특히 성교회 내에서는 그렇습니다.


규계화(법제화)는 새미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교리적 질서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상당히 다릅니다. 성교회 내 위계질서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혁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질서입니다. 이와 같은 질서의 관습은 종도시대로부터 온 것이며, 성교회 고대 법령으로 명문화 된 것입니다. 죄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질서의 선함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규계화(법제화)는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함으로써, 신부님은 이 같은 선한 교회법적 질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부님은 우리의 생존권인, 즉 샤리에르 주교에 의해 설립인가 받은 성비오10세회의 중요성을 주장하셨던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승인한 진실한 ‘교회의 일꾼’입니다. 대주교께서는 아주 당당히 그러한 사실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교회법이 바로 이러한 목적에 반하여 사용 되었을 때,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의지와는 전혀 달리, 로마에서는 대주교님이 행할 수 있는 교회법을 부정하였습니다. (1975년 초기 인가는 이러한 교회법에 반하는 것이었고, 그 후 사제직에 임용되는 후보자들에 대한 선함을 확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임(傳任) 허가 편지에 관한 1976년 교회법은 전통 미사를 드리는 대주교께서 좋은 신학생들에게 서품을 주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이것은 성비오10세회의 비 교리적 상황에 처한 현실의 시작이었소).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교회법적인 질서의 좋은 점을 매우 확신하셨기에, 전통 미사를 복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88년에 미비한 협약 안에 서명하고자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순명이란 명목 하에 악에 굴복하는 것은 죄다.” 라고 말하며 당신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자체로서 좋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권위를 소유하는 것과 그 권위가 오용(남용)되며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법적인 규계화(법제화)는 그 자체가 이를 소유하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의 복종인 것입니다. 이것은 남용된 명령을 따라야 한다든지 남용된 실천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교회법적 규계화는 ‘악에 굴복’ 하는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초기에 많은 선한 전통 사제들이 그들의 장상들에게 적절히 순명하면서도 그들 장상들이 범한 남용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남용된 명령에 대항하는 것을 권위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며, 성인들의 표양과는 멀리 동떨어진 것입니다.

 

신부님은 또 FSSP, ICKSP, IBP [Institut du Bon Pasteur] 그리고 캄포스를 언급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체 속의 나쁘지 않은 점을 견책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저들의 오류가 실제 있다는 것을 견책해야 합니다. FSSP(성베드로회)의 가장 커다란 실책은 적절한 교회법적인 질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교가 없더라도 현대주의자 주교들의 압력에 저들이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품 순간에, 만약 현대주의 주교들이 ‘자네들의 신학교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만약 가르치지 않는다면 사제서품을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저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저들은 신학교에서 현대주의 오류를 가르치는 쪽으로 빠지게 됩니다 (특히, 바실리에 신부님의 논지에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통신앙을 지키기 위한) 주교를 갖는 것 보다는 교회법상의 질서만을 더 선호했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오류입니다. 우리를 떠난 그들은 주교와 로마 위원회의 대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손발이 묶여서 자신들을 진보주의자들 손에 넘겼습니다. 이 반대의 입장이 입증되기까지는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안에서는 저들은 결코 전통을 유지하며 관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주교성성 후 일 년)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신앙, 전례와 윤리도덕에 대한 충성심이 네 분의 주교님들에게도 요구된다고 올바로 판단하였습니다. 이 점이 그 이후 성비오10세회의 강점이 되었습니다. 캄포스의 더 큰 오류는 자기들이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사실 연합해야 힘이 있게 되지요. 펠레 주교께서는 2000년에 있었던 호요스 추기경님의 제안과 같은 중요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렝겔 주교님을 신뢰를 갖고 초청했으나 (저는 2001년 1월 13일 모임에 참석했으며 렝겔 주교님은 리판 신부님을 보냈음) 리판 신부님은 펠레 주교님과 만나기 전에 주교님과 협의도 없이 (로마와) 거래를 했습니다. 로마가 실제적으로 리판 신부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갈라서게끔 한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 홀로 로마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속력이 약하고 느슨한 단체에 소위 ‘저항’이라 말로 교황공석주의자나 휘니주의자 같은 것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적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확실히 재앙을 부르는 길입니다. 성 교회와 분리될 때 그 어느 누구도 신앙을 오래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도나투스파(派)(주: 311년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분파로서, 이 파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교회이므로 정통파의 교직(敎職)에 의해 이루어진 세례식이나 안수식은 무효라고 주장한다)의 역사가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저들은 최초의 교회분열주의자들이고 이단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부님이 도나투스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행히도 자신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는 단지 성사의 유효성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 이전에 조차 ‘사악한 세력과 교섭’ 이라는 문제를 놓고 그들은 교회와의 화합을 거부하였고, (그들에 의하면) 사악한 시칠리아 카타르 주교와 친교 한다는 말 꼬뚜리를 잡아 나머지 교회들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성 어거스틴께서는 “성 교회 내에서 사악한 자들과 친교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저들의 사악한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 한, 선한 사람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가톨릭의 원리를 말씀하시면서 저들을 강하게 견책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실제적으로 가톨릭의 이러한 원리를 거부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절제 없는 언어로 교황님(베네딕토 16세)을 이단자로 판단합니다.


티시에르 주교님은 베네딕토16세 교황에 대한 당신의 연구서에서 교황님의 악한 업적과 가르침을 지적했지만, 이것과 어떤 사람을(특히 교황님을) 판단하면서 알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 말씀하시길 “사물을 판단하는 것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별개이다.” 사물을 판단할 때에는 있는 그대로 각 사물을 해석해야 하며,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현재, 악한 점과 현대의 오류에 대해 DICI 및 sspx.org 사이트에서 알려주고 있고, 또한 좋은 점도 알려주고 있으나, 신부님의 글 속에는, 오직 악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좋은 점조차도 악한 의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Summorum Pontificum 및 로사리오 크루세이드의 신부님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격렬한 질투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러한 점을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비난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그리 속단하는지?,... 판단을 보류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조차도 신부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부님은 벌써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판단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끝날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옳은 판단을 했는가를 요구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 했는가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의무는 성비오10세회 안에서 신부님의 그릇된 것을 위압하지 않는 장상에게 순명하고, 임명된 수도회에 가서 사제의 도움이 필요한 신자들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실패했습니다.


신부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밀과 쭉정이가 서로 얽힌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밭에 가야 되는가? 안되지!” 정말 신부님은 성 어거스틴이나 성 치프리아노의 글도 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인들께서는 아주 단순하게 ‘당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밭에 있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리 주님의 곳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요!’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신부님은 강력하게 “(밭에 가면) 안되지!” 하며 외친다는 것은 종교분열의 명백한 단서라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 교회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밭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부님이 두 개의 비유를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밭에서는 밀과 가라지(마테오 13:24-30) 비유가 있고, 타작하는 마당에서는 좋은 알곡과 쭉정이를 다루고 있습니다.(마테오 3:12)


성 치프리아노와 그 분 뒤를 이은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께서는 “만약 쭉정이 무리와 함께 있지 않으려고 타작하는 마당을 떠나면, 당신은 자신이 쭉정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라고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쭉정이만이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이지요! 성 어거스틴의 글을 읽으십시오. 신부님은 제 말보다는 그분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는 와중에 신부님은 “가능한 한 가견적(可見的) 성 교회에 그 동안 갖고 있던 애착을 보관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주교님과 교황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가식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이것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뿐이고, 동시에 신부님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에 대해 거센 비판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 분들의 모든 업적을 가능한 한 최악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적절한 교회법상의 규계화(법제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결실의 열매들이 맺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몇몇 신자들은 신부님의 행위를 따르기 때문에 이미 떨어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부님이 아주 잘 아는, 신부님이 시작했던 그곳 말레이시아의 한 가족이 지금은 극단적인 교황공석주의자임을 선포했고, 신부님의 사제직의 유효성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또 다른 신자가 우리 제의실에서 교구 주교님의 이름을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 있기를 원한다는 뜻인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2000년 이래, 펠레이 주교님은 이런 점에서 분별력을 실천했고, 현재도 전통신앙을 수호하는데 있어 상당이 예민한 통찰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근 12년 이상 분별력을 갖고 일하신 필레이 주교님을 그 어느 누구도 분별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취될 수 있는 교회법적 규계화를 추구하는 것’ 과 ‘교회법적 규계화를 조직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교회법상의 규계화를 마치 단순한 서류정리 정도로 취급하여 ‘서류정리하고 있음’에 비교를 하는 것은, 성 로버트 벨라민의 말씀같이 “교회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하는 교회 일치에 있어 세 번째 요소인 ‘교회 공동체’라는 가장 본질적인 영적인 요소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서류 작업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비 규계적인 상황들이 우리 행위나 실수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이상, 이것이 구원의 장애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치 단순하게 규계화가 나쁘고 위험하고 또 불필요한 형식이라고 규계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 거부는 구원에 있어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디 노이아 대주교님(에클레시아 위원회 부위원장)의 어떤 거짓 추측’도 따르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디 노이아 대주교께 쓴 공개편지를 램난지(전통 로마 소식지)에서 읽어보셨나요?http://www.remnantnewspaper.com/Archives/2012-1015-laisney-di-noia.htm


제가 신부님의 인용문들을 조사해보았더니 불행히도 참고 문헌이 잘못된 것이거나, 최소한 부정확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1976년 6월 선언문’에 있는 강론에서 인용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 내용은 1976년 6월 29일자 강론에는 결코 없었고, 제가 알기로는 대주교님의 그 달에 오직 유일하게 있었던 6월 선언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양한 교회?’에 관한 저의 기사를 살펴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공의회 교회’에 관한 신부님의 생각을 각성하십시오. 신부님이 만약 이것이 가톨릭 성교회로부터 하나의 분리된 구조라고 생각한다면 실수하는 것이요, 이는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생각도 아니므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모호한 것을 싫어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부님의 4월 14일자 발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철회한 모호한 진술과 완전히 신념을 저버린 배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1988년 5월5일 협약 안에 모호함이 있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르페브르 대주교께서는 서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님이 그 다음날 이를 거부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5월 6일자 편지 내용을 읽어보십시오. 신부님의 단언을 반박하는 최고의 서신입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그 문서에 서명한 것을 감사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
http://sspxasia.com/Documents/Archbishop-Lefebvre/Archbishop_Lefebvre_and_the_Vatican/Part_I/1988-05-06.htm)


사실을 말하자면, 대주교께서 5월 6일 질문하신 것은 가까운 장래에 그 협약을 실현할 날짜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협약 안을 거부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오히려 협약 실행의 시급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대주교께서는 로마의 늦추기 책략 앞에서 로마가 허락한 협약조항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위험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그 결정은 5월 말에 받아 드려졌습니다.


제가 쓴 르페브르 대주교와 바티칸 책에 모든 중요한 문서가 기록되어 있으니 그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아래서 ‘로마가 전통을 향해 나아갈지’ 안 나아갈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제가 아는 사실은, 성 교회의 수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을 신뢰합니다. 주님이 질서 속에서 세우신 성 교회를 믿으며, 오류 속에서는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 한 가지 제가 아는 사실은 주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의무가 아무리 진부하고 따분하게 느껴질지라도 날마다 제 의무를 시행하고자 노력합니다.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공의회, 새 미사, 그리고 아씨시에 저항했던 이유들과 신부님이 펠레 주교님을 반대하는 이유들을 비교해볼 때 신부님이 펠레 주교님을 반대하는 이유들은 비교가 안될 만큼 적다고 한 저의 논쟁에서 신부님은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대주교님은 신부님과 같이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분별력 있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같은 반란은 결코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대주교님은 반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입장은 혁신자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성심을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그분은 조급하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교성성을 일찍 하길 원했지만 그분은 1988년까지 기다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해 6월 30일이 그 분이 정한 (연장한) 네 번째 날짜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분은 적절한 교회의 정상화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가운데 최소한 세 번이나 연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교황님과 필레 주교님 두 분을 무모하고 조급하게 비난하는 것하고는 너무도 대조가 됩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순명을 천주님께 불순명하기 위해 쓰기는 내 생애 두 번째이다.” ... 이는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부님과 신부님 동료들은 어떤 ‘천주님께 불순명’을 요구당했나요? 이 질문을 지난 8월 성 마리 학교에서 조셉 파이퍼 신부님에게 했는데, 그 분은 답변을 못했습니다. 어떤 죄를 신부님에게 요구했나요? 어쩌면 신부님의 의지에 의한 행위들을 좀 절제 하라는 요구는 받으셨을지는 몰라도 천주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떤 일을 하라는 요구는 분명히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를 행하는 것을 천주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관론은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우리는 이런 것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만약 순명이 세 개의 성서복음상의 고려 대상 중의 하나라면, 그것은 정확히 말해, 참된 영적 생활에 해가 되는, 흔히 범하는 오류들을 고칠 수 있는 치료제가 바로 순명이기 때문입니다. “누 만일 나를 따르고저 하거든 자기를 끊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루까 9:22).


신부님은 공개선언을 절제하라는 요청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어느 누가 이러한 요청의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아주 타당한 이유는 신부님의 무절제한 선언에 있습니다. 신부님은 확실히 데 카크레 신부님(프랑스 관구장)에게는 자유주의라고 비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펠레 주교님이 신부님을 데 카크레 신부님 밑으로 가시라고 하니, 신부님은 인사발령을 거부했습니다. 이 펠레 주교님의 명령이 '천주님께 대한 불순명'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신부님은 왜 불순명 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이 사건은 신부님이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같군요.


지금 신부님은 ‘군단(군대)’ 세우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부님은 신부님의 ‘장군(장상)’에 의해 주어진 직위를 포기하며, 위험하고 무절제한 행동으로 한 군단을 조직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십니다. 첫 번째 약속을 깨뜨린 후에 어느 누가 신부님의 두 번째 약속을 믿겠습니까? 이것이 왜 이혼과 재혼이 나쁜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제의 첫 번째 의무를 저버린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부님이 하실 일은 회개하고 신부님이 가셨어야 했던 곳, 즉, 드 카크레 신부님 밑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부님이 서약한, 장상을 통한 천주께 순명을 약속한 그 ‘약속을 실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특히, 크나큰 덕행으로써 의심 없이 순명(과 분별력을 지니신, 그 분은 결코 비난하지 않았소, - 마테오 1:19-20)하신 성모님과 성 요셉께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April 19, 2013
Singapore
by Fr Françcois Lais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