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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적의 메달에 관한 여러 가지 일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30



기적의 메달에 관한 여러 가지 일 2


죄인 제임스 휴의 회두 (1944)


1944년 5월 19일, 클로드의 사형집행 3달 후에, 제임스 휴스란 이름의 백인이 ― 클로드가 그를 위해 희생을 바쳤습니다 ― 사형될 예정이었습니다. 오리어리 신부는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만난 중에 가장 더럽고 가장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주님과 모든 영적인 것에 대한 그의 증오는 묘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옥에 어떠한 사제나 성직자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형 직전에 자치주 전담 의사가 주 장관이 오기 전에 그에게 적어도 무릎을 꿇고 “주님의 기도문(천주경)”을 외우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죄수는 의사의 면전에서 침을 뱉었습니다.


그가 전기의자에 묶였을 때, 주 장관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말할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사형선고를 받은 남자는 신성모독적인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었고, 그의 눈은 방의 한 구석에 고정되었으며, 그의 얼굴은 완전한 공포를 띤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갑자기 그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준 끔찍한 비명이었습니다.


주 장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장관님, 사제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때 당시의 미시시피 주 법은 사형집행 시 성직자가 참석하기를 의무로 했기 때문에 오리어리 신부가 그 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제는 그 사형수가 성직자를 보게 되면 천주님을 저주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기자들 뒤에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사제를 부르는 소리에 오리어리 신부는 즉시 그 사형수에게 갔습니다. 그 방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 있는 상태로, 사제는 그 남자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18살 때 그의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신앙을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를 깊은 통회와 강렬한 열정으로 고백했습니다. 모두가 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주 장관은 사제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오리어리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그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주 장관은 말했다. “난 그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오늘밤 잠을 잘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사형수에게로 가서 물었다. “젊은이, 무엇이 자네의 마음을 바꿨나?”


그 죄수는 대답했다. “클로드라는 흑인을 기억하십니까? ― 제가 너무나 증오했던 사람 말입니다. 글쎄 그가 거기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리켰다] 저쪽 구석에요. 그리고 그의 뒤에서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계신 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리고 클로드는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위해 내 죽음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바쳤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지옥에 있을 당신의 자리를 보게 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나는 지옥에서의 내 자리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 비명을 지르게 된 겁니다.”


제임스 휴스는 계획된 대로 사형되었지만, 클로드 뉴먼과 함께 거룩히 나타나신 우리의 어머니와 그 다음에 이어진 지옥에 관한 비전은 즉시 그 삶의 최후의 순간에 그의 영혼을 개종시켰습니다. 성모님의 도움으로, 오리어리 신부는 클로드에게 자기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것처럼, 그의 고통을 예수님께 바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과 그 자신을 결합시키도록 가르쳤고, 클로드의 고통은 제임스가 놀라운 최후 순간에 회두하고 통회하도록 값을 치르게 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합한 우리의 고난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천국에 계신 우리의 어머니의 힘과 자애로운 중재 또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죄수 클로드 뉴먼의 회두


클로드 뉴먼은 1923년 12월 1일에 아칸소 주 스투트가르트에서 윌리와 플로레타 영 뉴먼 사이에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클로드의 아버지 윌리는 클로드와 그의 형을 데리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아내를 떠났고, 아들들을 데리고 미시시피 주 워런 카운티의 보비나에 있는 아이들의 할머니 엘렌 뉴먼에게 갔습니다.


1939년에 클로드가 사랑하는 할머니인 엘렌 뉴먼은 시드 쿡이란 이름의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시드는 곧 엘렌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클로드를 매우 화나게 했습니다. 1940년에 클로드는 미시시피 주의 보비나에 있는 세레스 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 농장은 U.G. 플라워스란 이름의 부유한 지주가 소유했고, 시드 쿡은 이 농장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클로드 또한 17살의 나이에 동갑인 젊은 여성과 1940년에 결혼합니다.


1942년 12월 19일, 클로드는 그의 할머니 엘렌에 대한 시드의 폭력적인 대우에 여전히 매우 화가 났고, 엘버트 해리스라는 지배적인 친구의 부추김을 받아, 클로드는 시드 쿡의 집에서 누워 기다립니다. (시드 쿡과 엘렌 뉴먼은 별거해 살고 있었습니다) 클로드는 시드가 들어올 때 그를 쏘아 죽이고, 그의 돈을 가져가고, 아칸소에 있는 그의 어머니의 집으로 도망쳐서 12월 20일에 거기 도착합니다.

  

클로드가 체포되어 사형수로 감옥에 보내지다.

1943년 1월에, 클로드는 아칸소에서 체포되고 미시시피 주의 빅스버그로 돌려보내져서 1월 13일에 강제로 고백을 합니다. 클로드의 변호사인 해리 K. 머레이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은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그는 배심원단에 의해 유죄 판결되어, 1943년 5월 14일에 전기의자에서 사형되도록 처음에 선고받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한 항소는 주 검찰 총장에 의해 거절되었고 그는 1944년 1월 20일에 사형되도록 시간이 다시 정해집니다.
 

클로드가 기적의 메달을 받다

이제 제시될 정보의 대부분은 오리어리 신부님과의 라디오 쇼 인터뷰를 테이프로 녹음한 것에서 왔습니다. ― 그 분은 클로드의 수감기간 동안에 그를 매우 잘 알게 된 사제였습니다.

클로드가 사형날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4명의 다른 죄수와 독방을 같이 썼습니다. 하룻밤은, 그 5명의 남자들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했고 결국 대화 거리가 떨어졌습니다. 이 시간 동안에, 클로드는 한 다른 죄수의 목에서 끈에 달려 걸려있는 메달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다른 죄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젊은 죄수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는 듣자하니 메달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또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했고)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며, 화가 난 듯 했다가 갑자기 그 메달을 자기 목에서 잡아채어 클로드 발끝에 욕을 하며 메달을 던져버리고는, 클로드에게 “그 물건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클로드는 메달을 집어 들었고 그것을 살펴본 후에, 자신의 목에 걸었습니다. 비록 그 메달에 있는 이미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것이 그에게 값싼 장신구일 뿐이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는 그 물건에 끌렸으며 그것을 목에 걸고 싶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클로드에게 비전으로 나타나시다

그의 간이침대 위에서 밤중에 잠들어 있는 동안 ,클로드는 그의 손목을 건드리는 느낌에 깨어났습니다. 흠칫 놀라 깨어났더니, 클로드가 오리어리 신부에게 이후에 말한 것처럼, ‘천주께서 만드신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거기 서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이 기이하도록 아름답고 빛나는 여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서 꽤 겁을 먹었습니다. 그 부인은 곧 클로드를 진정시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네가 나에게 어머니가 되어주길 원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 자녀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교회의 사제를 불러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분은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흥분해서 클로드는 즉시 “유령이다, 유령이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고, 그가 가톨릭 사제를 만나야겠다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로버트 오리어리 신부 (신언회) (1911-1984) 이 이야기를 말한 사제는,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호출되었습니다. 도착하여 그는 클로드를 보러 갔고 그는 신부에게 전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건에 깊은 인상을 받은 클로드는, 독방을 같이 쓰는 다른 4명의 남자와 함께 가톨릭 신앙에 대한 종교적인 가르침을 요청했습니다.


클로드와 다른 죄수들이 가톨릭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다

오리어리 신부는 다음날 교도소로 다시 와서 죄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사제는 클로드 뉴먼이 전혀 읽지도 쓰지도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책의 위아래를 구분하는 유일한 때는 그림이 있을 때 만이었습니다. 클로드는 그가 학교에 간 적이 없다고 말했고, 오리어리 신부는 곧 그의 종교에 대한 무지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종교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천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이 천주이시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클로드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죄수들이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오리어리 신부의 교구 학교 출신인 수녀님 2명이 교도소장으로부터 교도소로 방문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클로드를 만나 그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길 원했고, 그들은 또한 교도소의 여성들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곧 감옥의 다른 층에서 수녀님들은 여성 죄수들 몇 명에게도 교리문답서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천국의 가르침

몇 주가 지나고, 오리어리 신부님이 고해성사에 대해 가르칠 시간이 왔습니다. 수녀님들 또한 수업 때에 같이 앉아있었습니다. 사제는 죄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젊은이들, 오늘 저는 여러분께 고해성사에 대해 가르칠 겁니다.”

클로드는 말했다. “오, 저 그것에 대해 알아요! 성모님이 우리가 고해를 하러갈 때는 우리가 사제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그분 아드님의 십자가 곁에 무릎 꿇는 것이라고 말해주셨어요.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해 진실로 통회하고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아드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 위에 흘러 모든 죄를 씻어준다고 하셨어요.”

클로드가 이것을 말하는 것을 듣고, 오리어리 신부와 수녀들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있었습니다. 클로드는 그들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는 말했습니다. “오 화내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이걸 불쑥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사제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화가 난 게 아니에요 클로드. 우리는 그저 놀란 겁니다. 성모님을 다시 봤나요?”

클로드는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독방을 돌아서 오세요.”


복되신 성모님이 클로드에게 나타나고 계셨다는 증거

그들이 홀로 남았을 때, 클로드는 사제에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제게 신부님이 자신을 의심하거나 주저한다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께 1940년 네덜란드의 배수구에 누워서, 성모님께 맹세를 했고, 그분이 아직까지 신부님이 그 맹세를 지키길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고 오리어리 신부는 회상합니다. “클로드는 그리고 제게 정확히 그 맹세가 뭔지 말했습니다.”

클로드의 고백은 오리어리 신부에게 그가 성모님을 봤다는 그의 비전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배수구에서 1940년에 오리어리 신부가 우리의 성모님께 한 약속(클로드가 사제에게 성모님이 진실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증거로 말한)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그가 형편이 갖춰질 때, 성모님의 무염시태를 기리는 교회를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47년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는 아프리카계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미시시피 주의 클락스데일로 1945년에 옮겨갔습니다. 미시시피 주의 나체즈의 주교는 보스턴의 쿠싱 대주교로부터 “흑인 선교”를 위한 5천 달러를 전해 받았습니다. 그 주교와 오리어리 신부는 성모무염시태 기념 교회 건축을 의뢰했고, 그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오리어리 신부와 클라크는 그 후 고해성사에 대한 교리 수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드는 계속 다른 죄수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고해를 보러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정말로는 신부님이 아니라, 천주님께 우리 죄를 고백하는 거야.”


그리고 클로드는 말했습니다. “있잖나. 성모님께서 고해는 마치 전화기와 같다고 하셨네. 우리는 사제를 통해서 천주님께 말하고, 천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제를 통해서 대답해주시는 것이지.”


알폰스 라티스본의 개종


성모기사회를 설립한 1917년, 가톨릭 교회는 알폰스 라티스본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을 공식적으로 기념했습니다. 막시밀리안 성인은 이 사실을 기적의 메달이 고집스런 자유주의자이자 무신론자를 어떻게 회두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로서 여러 번 보고했습니다.


아래에 나온 알폰스 라티스본의 개종의 기록은 콜베 신부님이 저술한 “라티스본의 가톨릭 개종(1940)”이란 글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1841년 11월, 28살의 알폰스 라티스본은 그의 고향인 스트라스부르를 떠납니다. 그의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말타로 향합니다. 그 후에는 콘스탄티노플로 갑니다. 표 예약에서 실수가 일어난 탓에, 그는 1842년 1월 5일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 환경을 이용하여 그는 구스타브 드 뷔시에르 남작과의 만남을 잡게 됩니다. 알폰스는 유대인이지만, 구스타브는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영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잘 어울립니다. 그들은 공통의 개인적 의견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둘 다 가톨릭교회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둘 다 형이 있고, (그 두 형 다 이름이 테오도르이며) 개종한 가톨릭 교도였다는 것입니다.


알폰스는 로마를 떠나기로 계획하지만,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기 직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합니다. 이 도시에 대한 지식을 잘 아는 전문가는 구스타브의 형인 테오도르 드 뷔시에르 남작입니다. 그 남작은 또한 알폰스의 형인 테오도르 라티스본 신부의 진실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알폰스는 테오도르 남작을 방문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남작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해주며, 알폰스에게 그가 로마에 올 때 그와 동행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는 알폰스에게 기적의 메달을 선물로 전해줍니다.


처음에, 라티스본은 그 메달을 받길 원하지 않지만, 결국 그것을 일종의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선물을 받습니다. 남작은 그대로 놓아주지 않고 알폰스에게 매일 성 베르나르가 지은 기도문 “기억하라(Memorare)”로 아침과 밤에 기도할 것을 간청합니다.


라티스본은 강하게 거절하지만, 짧은 기간이지만 남작이 고집하자, 저항을 멈추고 뷔시에르의 열렬한 주장을 들어줍니다.


그 후에 라티스본은 기도문을 종이에 적으라는 요구를 수행합니다. 그 덕분에 “Memorare”는 그의 기억 속에 남아서, 마치 좋아하는 악곡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옵니다. “기억하라, 오 가장 자애로운 동정 마리아여, 누구든 당신의 보호를 찾아 피신하고, 당신의 도움을 간청하고, 당신의 중재를 구했던 자들이 도움 받지 않은 적은 절대 없었다는 것을. 이 신뢰에 힘입어 나 당신께로 날아갑니다, 오 동신 중의 동신이신 어머니, 당신께로 제가 갑니다. 당신 앞에 난 죄와 슬픔이 많은 채로 서 있습니다. 말씀이 현신하신 분의 어머니시여! 제 탄원을 경멸하지 마시고, 당신의 자비로 제 말을 듣고 답해주소서. 아멘.”


뷔시에르 남작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폰스 라티스본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친구들 중의 하나는 라페로네이스 백작이었습니다. 라페로네이스 백작은 진실로 성모님을 흠모했고 삶 속에서 자주 그분의 도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라티스본의 개종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다음날 라페로네이스 백작은 죽습니다. 남작은 백작의 가족에게 장례식 준비를 돕겠다고 제안합니다. 테오도르 드 뷔시에르 남작은 그의 일들로 바빠서, 알폰스가 로마를 구경하는 1월 20일에 그와 함께 가지 못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알폰스를 스페인 광장에서 만나게 되고, 그에게 백작을 매장하게 될 사도 안드레아 성당에 함께 가자고 요청합니다. 그는 라티스본이 마차에 머물도록 조언하지만, 알폰스는 성당을 자세히 보러 나가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장례식의 준비를 유심히 보다가, 고인의 성을 물어보았습니다. 드 뷔시에르는 대답합니다. “내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드 라페로네이스 백작이었소.” 라티스본은 라페로네이스 백작을 전혀 몰랐기에,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보통 받는 가벼운 씁쓸한 느낌만을 받습니다. 백작은 성구보관실로 옮겨졌고, 이 순간부터, 남작은 일어난 일을 읊었습니다. “성구보관실로 돌아와서 나는 대천사 성 미가엘 예배당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라티스본을 보았소. 난 그에게 다가가서 세 네 번 그가 날 알아챌 때까지 살짝 건드렸소. 마침내 그가 얼굴을 내게로 돌렸는데, 눈물로 뒤덮여 있었으며, 그의 두 손을 모으고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말하더군. 오! 이 사람이 날 위해 어떻게 기도했는지요.

난 충격을 받았소. 나도 기적을 경험한 후에 느낄 수 있는 그런 똑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오. 난 라티스본을 일으켜 세웠고, 교회 밖으로 나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어디로 가길 원하는지 물었소.“
라티스본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로든 데려가 주십시오. 내가 본 것을 보고 나니,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가 적어도 일어난 일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말해주도록 권고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기적의 메달을 붙잡고 친구하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여전히 나는 계속 간청하였음에도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고, 그에게선 울음소리와 깊은 감탄만 흘러나왔습니다. “오! 제가 얼마나 행운인지요! 천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요! 성총과 자애가 얼마나 가득하신지요! 이것을 알아채지 못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동정 받아야 합니다...”

나는 그를 예수회 성당의 빌포트 신부님께 곧바로 데려갔고, 그분은 그에게 이야기를 전부 해달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 라티스본이 메달을 붙잡고 친구한 다음 크게 소리쳤습니다. “난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을 보았어요!” 그는 감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곧 그는 이야기를 할 만큼 충분히 마음이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 제가 교회에 있던 어느 순간부터 난 일종의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눈을 들었는데 갑자기 전체 건물이 제게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예배당이 전세상인 것처럼 제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고귀하고 장엄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제대에 서 계신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분은 제 메달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막을 수 없는 힘이 저를 그 분의 방향으로 밀었습니다. 동정녀께서는 제게 손으로 무릎을 꿇으라는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말하는 듯 했습니다. “훌륭하구나!” 비록 그분은 말을 하진 않으셨지만 전 즉시 그분을 이해했습니다.


라티스본은 강한 감정적 충격에서 회복하기 위함 때문인지 자주 멈추면서 이 짧은 이야기를 읊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천주님의 방식의 심오함과 그 분 자애의 말할 수 없는 보물에 궁금함을 느끼며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한 가지 말이 그 깊이 때문에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비록 그분은 말을 하진 않으셨지만 전 즉시 그분을 이해했습니다.” 정말로 라티스본은 믿음으로 넘쳐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에 믿음으로 넘쳐나서, 영적으로 훨씬 더 많이 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성모님에 대해 진실한 신자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성모님에 대해 확신에 가득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현실에서도 성모님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드 빌포트 신부님을 떠난 후에, 우리는 천주님을 찬송하였고, 처음에는 거룩하신 성모님 대성당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갔습니다.


라티스본이 이 대성당들을 방문하는 동안 유지한 큰 기쁨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 그는 고발했습니다. “난 이제 왜 가톨릭 교인들이 그들의 교회에 대해 그렇게 많은 독실함을 가지는지, 왜 성당을 장식하려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여기는 너무 좋아요. 떠나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긴 더 이상 지구가 아니라 거의 천국 같습니다.”


가장 거룩한 성체 앞에 오자, 천주님의 존재가 그를 압도하여, 그가 떠나지는 않았지만, 거의 자신의 의식을 잃을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원죄를 갖고 태어난 탓에 진실한 천주님 앞에 서있는 것이 너무나 큰 짐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룩하신 성모님 대성당으로 몇 걸음 걸어갔습니다.

“여기에 ― 그가 말했습니다 ― 전 두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 거대한 자애로 보호받는 느낌입니다.” 전 열정을 가지고 성 종도들의 무덤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얘기해준 성 바오로의 역사는 그를 오랫동안 울게 했습니다.


저는 그가 본 다음 것들을 자세히 얘기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성당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게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그는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천국의 여왕님의 흠 없으신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러자 그 때 그의 눈이 성모님의 영광스런 찬란함을 견디지 못 했습니다.

그는 성모님을 향해 3번이나 눈을 고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성총의 빛이 쏟아져 나오는 그분의 손에 그의 눈을 들지 못하도록 무언가 방해했습니다.


“오! 내 주님 ― 그가 외쳤습니다 ― 바로 30분 전에 제가 신성모독을 행했다니, 가톨릭 신앙에 증오를 느꼈다니요! 그러나 그 때 유대인으로 있을 권리를 가진다는 제가 가진 인간적 생각을, 절 아는 모두가 이해했습니다. 제 가족은 유대인이고, 약혼자도 유대인이며, 제 숙부도 유대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