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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우리의 이상(理想)- 가장 강력한 무기, 희생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1-09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우리의 이상(理想)


제 4부 기사의 강력한 무기


제3장 가장 강력한 무기, 희생




불속에서 단련된 금과 같은 희생은 희생 안에서 정화된 사랑이어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였다. 우리 구세주의 생활 모두는 바로 그분의 ‘시간’을 위한 준비였다. 이와 같이 기사의 생활에서의 높은 관심은 활동이 아니라, 가장 장엄한 행위에 있지 않고 기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모든 일, 기도, 활동에 스며들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이다.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희생은 고통 가운데 면류관을 쓰게 된다.


사람의 생활은 세 가지 면으로 구성된다; 일을 위한 준비, 일, 그리고 고통이다. 니에포칼라나우(Niepokalanów) 이곳에서 몇 명은 단지 준비만 하고, 다른 이들은 벌써 일을 하고 있으며, 여러분 앞에 앉아있는 사람과 같은 회색머리 노인은 벌써 최종적인 국면(고통)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통하여 천주님은 우리를 당신 품으로 이끄신다. 천주님께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영혼일수록, 사랑에서 나오는 고통으로 성모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 사랑을 굳히기기 위해 이 세 번째 단계를 위해 더 빨리 준비가 된다. 바로 이런 사랑과 사랑 자체를 위해 고통으로 결합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만큼 우리를 성모님과 일치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이 고통의 길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성모님에게 진정으로, 즉각적으로 속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생활의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성모님을 위한 기사의 사랑,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기사로서 고통을 겪고, 일하며 죽지만, 그러나 이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다. 왜 뇌 속의 총탄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모님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봉인해야하나? 성모님을 위해서 온 세상을 서둘러 정복하고자 기사로서 왜 우리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않는가? 나와 또한 여러분 자신을 위해 하길 원한다!(Conference, August 28, 1939.)


천주님의 관점에서 첫 열정의 순간과 천주께 가는 영혼의 독수리 비행, 예수님의 감미로운 현존은 천주님의 시야에서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감정을 감화시키고 천주께 끌어드리는 단지 천주님의 감미로운 보너스, 특별한 은총일 뿐이다. 천주님은 당신의 감미로움 어떤 것을 맛보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뻐하여 완덕의 덕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게끔 한다. 그러나 영생을 위하여 이런 날은 아주 작은 공로이니, 이것들은 희생과 우리의 노력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완덕의 끈을 매는’ 오직 사랑만이 고통과 희생과 십자가를 통해 번성하고 충족된다. 자연적으로 우리는 이에 대해 천주께 매우 감사해야하니, 천주님의 헤아릴 수없이 값비싼 은총, 이 은총은 우리의 커다란 불행과 연약함 때문에 영성생활의 첫 단계 기간에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서 이러한 위안을 제거하면서 고통스런 십자기와 수난을 보낸다. 그 대신에 사랑은 줄지 않는다. 천주님에 대한 사랑은 마치 황금이 불 속에서 정화되듯이 고통 속에서 완전해진다. (Conference, January 17, 1937.)


기도와 희생을 바쳐라.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 천주 모친의 이 말씀은 파티마에서 1917년 8월 19일 말씀하신 것이니, 성인들의 통공(通功)의 신비를 확인하고 설명해주는, 다시 말해서 많은 영혼들의 구원은 우리의 작은 기도, 희생과 고통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콜베 신부가 이 점을 너무나 많이 강조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영혼의 선익을 위해, 우리의 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 천주님은 항상 타인의 의지와 별도이던 아니던 간에, 선한 의지이던, 부당한 의지이던 간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십자가를 지도록 허용하신다. 셀 수 없는 은총의 근원이 있는 수많은 분야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유용한 것은 타인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고통이다. 성부 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득죄한 자를 용서함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심과 같이”우리가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결국 주님은 친히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해진 잘못을 너무나 완전히 용서하는 것은 천주님을 거스른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기에 족한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상당한 크기를 부스러기로 용서받을 기회를 가질 때는 그 얼마나 행운일까!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고통과 굴욕 면에서 흔들리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탁월한 수단으로써 매우 중요하니, 신앙의 빛 안에서 그런 것들은 우리 영혼을 정화하는 데에 있어서, 천주님과 더 열정적으로 일치시키는데 기여를 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도하고 전교(傳敎) 열정을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시된 고통의 효력을 너무나 확신했기에 니에포칼라나우(Niepokalanów)의 아픈 형제 수사들이 신부님의 가장 중요한 동료였던 모든 손님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병원과 그곳에서 누워있던 환자들이 가장 큰 매출을 올리는 성모기사회의 출판부의 가장 중요한 인력이었고 가장 생산성이 높았는데 왜냐하면 이곳은 천주님의 대의명분에 있어서 공로와 보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러 가지의 애착과 자아 추구가 있으니, 이는 개인에게 일에 대한 결과에 있어서 인정이나 칭찬을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만족이나 성공에 대한 전방이 배제된다. 이곳에 남겨진 모든 것은 고통과 공로이다. 병원은 최대한 이익을 가져오는 성모님 도시의 단지 일부일 뿐이다. [J. Grzybowski, Die Bedeutung des Leidens bei P. Maximilian [막시밀리안 신부님에 따른 고통의 의미]


그러나 이 무기를 이상화하는 것에 깨우쳐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이란 영광스런 치명을 꿈꾸게 되는,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그 후 오랫동안 존경심으로 거론하는 그러한 행위, 모든 이에게 드러나는 영웅적인 모습이나 극적인 모습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몇 칠 전, 전교(傳敎)에 관하여 수사들과 대화 하는 던 중에 많은 수사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천주님의 뜻에 자신들의 생애를 헌신하고자하는 원의(願意)의 입증했다. 전교 과정에서 신앙을 위해 치명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치명이란 오직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만 지속된다. 수많은 세월을 고통을 겪으면서 병들고 서서히 자신을 소진시키면서 회독할 아무런 희망 없이 사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반면에 질병은 몸을 서서히 그러면서 확실히 파괴하며 그러므로 오랜 기간에 영웅주의를 얻어야 한다. 병든 사람이 천주님을 위한 불타는 사랑에서 앞서 나오는 희생이라는 자발적 영웅주의에 도달하려고 투쟁할 때,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천주님께 향한 거대한 발걸음을 걷는 것이고 매순간 더 강한 사랑의 끈으로 천주님과 일치된다. 


최고의 고행은 자신의 매일 겪는 의무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사랑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인내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이것을 평화적으로 견디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고행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며 그날 과정에서 많고 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Conference, November 8, 1936)


성화(聖化)는 작은 일, 시시하게 보이는 일에 있다.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는 다음과 같은 시례를 자주 말했으며 친히 보여주셨다: 모든 전교의 후원자! 성녀가 어디서 전교 사업에 있어서 상당한 ‘전문가’라는 호칭을 얻었는가? 많은 이교도 땅에서 그분이 아마도 전교자로 있었나? 치명자로서 피를 흘렸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리지외(Lisieux)의 수녀원에서 한 번도 문지방을 넘은 적이 없다. 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뚜렷한 기적을 행한 일이 없지만 오히려 평범 곳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에서 헌신을 다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슨 의도로 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하는가이다. 성녀의 의향은 무엇이었나? 구세주께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매일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 가기 위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의 작은 증거로 자신의 아버지와 엄마 마음을 감싸는 어린 아기가 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그런 전교자가 되어야 한다.(원고, 모든 전교의 후원자)


사랑이 증명되는 곳은 오직 희생 안에서이다. 천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좀 더 성모기사가 되고, 희생을 더 바치게 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와 더불어 그는 고통을 겪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사랑은 희생에 의해 살아가고 번성하는 사실을 묵상하도록 하자. 내적 평화를 위해, 사랑의 즐거움을 위해 성모께 감사를 드리자. 그렇지만 비록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모든 것이 다 사랑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모든 이러한 감정 없이 사랑은 존재할 수 있고 오로지 그러고서야 이것이 완전한 사랑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사랑의 높은 핵심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신 기조조건에 있다: “나의 성부여, 나의 천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희생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이다. 희생감각, 특히 시각, 맛의 감각, 청각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해와 그리고 거룩한 순명에서 오는 의지의 모든 희생이다. 성모님의 사랑과 같이 성모님 안에서 천주님의 선하심의 사랑과 같이, 성모님 안에서 예수성심의 사랑과 같이 그리하여 이 사랑이 우리를 가싸고 스며들게 하여야 하고 그리고서 영혼에 대한 의생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그 영혼은 새로워질 것이며, 이 사랑의 훨씬 심오한 증거가 되며, 이러한 증거들은 희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타인과 나 자신이 가능한 한 한 많은 희생을 바치기를 원한다. (Letter to Mugenzai no Sono, April 9, 1933.)


생이 그 얼마나 짧으며 빨리 지나가는가! 가능한 한 일생을 귀히 보내면서 희생을 바치고 살아가자.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죽은 후 고통을 덜 받아 좋다. 사랑을 증명할 시간은 짧다. 우리는 오직 한번만 살 뿐이다! (형제 수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March 17,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