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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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왜 성비오10세회를 선택했는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12




다음은 현대 가톨릭 교회 여러 곳에 다니다가 성비오10세회에 들어온 교우의 글로서 그의 허락을 받아 이 홈피에 게재합니다. 이 글은 성비오10세회라는 제목으로 그의 블로그에도 올려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왜 성비오10세회를 선택했는가?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어왔던 '성비오10세회'에 대한 이야기는 매번 비슷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의 "거기는 이단이야! 가면 안 돼!" 부터 안다는 사람들의 "거기서 하는 말은 맞는데, 교회법적 지위가 없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비오10세회를 선택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성비오10세회를 또 다른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생각했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교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면서부터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진리로써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이 말씀에 모든 것이 포함된다.


완덕을 이루는 것만이 천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며, 천주를 사랑하는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완덕을 이루는 것 자체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는 말) 아마 오늘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성경 근본주의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성총으로써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아버지의 성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일치함으로써 의화(義化)되는 것이다.


천주와 온전히 일치하는 방법이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에 매우 상세히 적혀 있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을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의 많은 이들에겐 허구한 날 기복(祈福)적인 기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천주와의 일치는 다른 세상 이야기이다. 마치 개신교처럼 말이다. 오늘날의 현대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대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가톨릭교회의 현대적인 가르침 안에서는 결코 회심하지 못했었지만,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서는 회심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저서 《영혼의 성》 《완덕의 길》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가르멜의 산길》《어둔 밤》을 읽으면서 회심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가톨릭교회만의 위대한 진리에 눈을 떴고, 비로소 그분들의 눈을 통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 눈을 들고 보니, 완전히 이상해진 교회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나를 회심케 한 완전한 가톨릭교회 진리는 온데간데없이, 뭔가 찝찝함으로 가득한 교회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발로 직접 걷고, 내 눈으로 직접 보며 그것을 실제 체험했다.

​회심 후 천주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굳건하게 마음먹고 수도회에 입회했다. 놀랍게도  내가  찾아가 입회한 그 수도회는 우리 가정보다도 세속적으로 살고 있었다. 사실,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몰랐다. '뭔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기도를 많이 하는 수도회니깐  괜찮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굳어져, 그곳을 퇴회 후 그 다음으로 입회한, 나를 회심케 하신 성인들께서 세우신 바로 그 수도회는, 창립자 성인들의 가르침이 무시되고 있었다. 분명히 성인들의 저서를 바탕으로 회원들을 가르친다고 스스로들 말하는데, 사실상 말과 행동이 달랐다. 모두가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괴리감이 있었지만 천주께 모든 것을 의탁하여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내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성체 신심'에 대한 문제로 인해 퇴회를 결심하는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성체께 대한 무례한 태도를 성직 수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니,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가톨릭교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순으로 가득한, 특히 교의(敎義)에 있어 모순으로 가득한 그들의 삶은 도저히 가톨릭교회 수도자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루에 최소 4시간 이상은 기도하는 수도회인데, 이렇게 기도하는 수도회의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성인들께서 보여주신 성체께 대한 신심의 기본적인 모습도 찾아볼 수 없는가? 이것은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창립자들의 책에 나온 대로 살고 싶으면 나가서 혼자 그 가르침을 지키면서 살면 된다고 했다. 수도회 장상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러한 말이 나오게끔 하는 '​현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악에 대한 방관을 사랑으로 착각함으로써, 악에 대한 침묵을 순종으로 착각함으로써, 오류를 갖고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을 구할 수 없게 만드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

​퇴회를 하고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전통 라틴 미사를 봉헌하는 단체에 가입을 했고, 교회 내에 인가가 된 전통 단체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여기도 오류는 존재했다. 삶이 복음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단체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밝히지 않겠다. 그곳에서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므로...


이 단체는 천주님을 위한 단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도 비밀을 좋아한다. 마치 비밀이 밝혀지면 천주께서 원하시는 일이 틀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언제나 99%의 정직이 아니라 100%의 정직임에도 말이다. 이에 대해 어설프게 인지할 때는, 후자의 태도가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자의 태도가 즉, 100% 선(善)만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이 합법적 전통 단체를 거부한 이유는 단순하다. 현대가 박해 시대라는 합리화로써 거짓말을 합리화 한다거나 교회의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진리 선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희생으로 생각하는 모습에서 이 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전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대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진심으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성 비오 10세회를 비난했었다.​

​교회와 일치해 있는 그 사제회에서 실제로 경험한 일화를 소개한다. 지난 부활절 즈음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현대 교회의 '공동집전 미사'를 오류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친다. 나는 그들의 수업에 참관하여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며칠 후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에 그 사제가 공동집전 미사에 참례하였다.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런데 그 사제는 그것이 '희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알면서, 그것이 오류라고 그들에게 말해주지도 않은 채, 자신이 겪는 불편함이 희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첫 수도회를 입회하기 전에 이미 타락이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입회를 했었다. (현재까지 알게 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정도의 타락으로)  가서 받을 고통을 희생으로써 봉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쯤 《가르멜의 산길》에서 천주께 희생을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현대 가톨릭교회의 현 상황은 희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 선포에 대한 침묵의 강요가 이미 저변에 깔려있는 영적 폭력의 시대인데, 그것을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용이한 이해를 위해 한 일화를 소개한다. 어떤 수도원의 수련장이 나무 빗자루를 바닥에 꽂아놓고, 한 수련자에게 매일 물을 주라고 했다.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수련자는 순종하였고, 마침내 그 나무 빗자루에서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다.


순종의 덕을 나타내는 우화이다. 그런데 이 우화에서 중요한 것은, 순종의 덕의 적용이 신덕(信德)을 침해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이다.

전통적인 가르침은 만약 장상이 성경, 성전, 교도권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거나 지시한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 저항해야만 한다. (성비오10세회의 경우 오늘날 교도권이 성전(聖傳)에 어긋난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맹종(盲從)이지, 결코 순종(順從)이 아닌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현대 가톨릭교회의 이상화(異常化) 현상이 맹종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성비오10세회의 경우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티아서 2장 11-14절)​

​여러 정황들을 바탕으로 앞부분에서 얘기했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1%의 악(惡)이라도 섞여 있으면 천주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신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것을 가르치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자 하며, 그렇게 살고 있는 곳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살아가는 곳이다.

맹종(盲從)은 악(惡)이다.

천주께서 인간이 걷길 바라시는 길은 눈곱만큼의 악도 없는 완전한 길, 즉 완덕의 길이며, 실제로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십자가 길, 바로 그 길이다. 완전한 길은 언제나 천주의 뜻을 충족시키는 길이기 때문에 십자가 길일 수밖에 없으며,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걷기 싫어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인간이 나약하고 부족하며 비참하다는 것과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은, 그로 인해 완덕의 추구가 어렵다는 전제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언제나 상기함으로써 겸손해지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성 교회의 많은 개혁가 성인들 또한 생전에는 인간이었으므로 똑같이 나약하고 부족하며 비참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적용이 얼마나 이상한 적용인지 알 수 있다. 악에 대한 합리화는 언제나 악이다.

​성비오10세회 사제들 중 누가 교회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싶지 않겠는가? 고집만 꺾고 조금만 타협한다면 언제나 문이 열려있는데 말이다. 한 번쯤은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은 천주께서 계시하신 진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하심으로써 바리사이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만 생각하면 확실히 어긋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천주교도 똑같은 상황이다.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율법에 진정으로 담겨있는 천주의 뜻을 생각할 것인가?


만약 성비오10세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와 부합(符合)한다면 교회법적으로 완전한 지위가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 친히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성경에서 '안식일'에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보라. 안식일은 오늘날의 교도권과 교회법이다.


(개신교​와의 비교는 정중히 사양한다. 성비오10세회의 행보는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지켜오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성비오10세회의 사제가 500년 전, 1,000년 전, 1,500년 전, 2,00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해서 미사를 거행한다면, 아무도 그 사제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만 충실한 사제가 500년 전, 1,000년 전, 1,500년 전, 2,00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해서 미사를 거행한다면, 모두가 그 사제를 이단자로 의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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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 (마태 복음 12장 ​9-14절)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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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3-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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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마르코 복음 3장 1-6절)

안식일(교도권, 교회법)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영혼 구원이다. 천주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로 그것 말이다.​ 다른 잣대에 혼란스러워 하지 말고 '영혼 구원'을 바라보라. 어떤 길이 올바른 길인지 보일 것이다.


아래는 성비오10세회의 창립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다큐멘터리 한국어 더빙 영상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상에 나와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성비오10세회를 판단한다면, 천주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Monseigneur Lefebvre - KOREAN fr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