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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과 르페브르 대주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02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과 르페브르 대주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초상이신 비오 신부님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공통점과 다른 점)


August 13, 2018 / By fsspx.news


2018년 7-9월, (#340)는 50년 전, 1968년 9월 23일 돌아가신 오상의 성 비오 신부에 관한 프랑수와-마리 쇼타드 신부의 글을 개제했다.


성 비오 신부의 사명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다. 이 천주의 계시는 승천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천주 성부께로 올라가시어 거룩함의 성신을 보내셨다. 그로부터 각 세기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강생을 새롭게 하는 완덕의 삶을 사는 성인들이 나타났다. 때때로 몇몇 성인들의 외적 삶은 그들 육신의 고통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분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성인이 오상을 받는 모습을 묘사했다. 다른 성인들 또한 이 신비로운 현상을 체험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카리 부인(강생의 복녀 마리)등의 오상은 보여지지 않은 경우다.


하지만 1918년 9월 20일까지, 그들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의 성사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사제도 그들의 육체안에 십자가 희생의 신비가 새로워지도록 선택되지 않았다.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수도자 성가대 앞에 걸려있던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십자고상에서 빛이 나와 그의 손, 발과 옆구리를 마치 화살처럼 관통했다. 31세의 잚은 카푸친회 신부는 그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 50년간 1958년 9월 20일까지 그는 그리스도께서 매일 위안 받으셨던 그분 수난의 가시적 표시를 짊어졌다.


비오 신부의 사명 중 하나가 시작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고 희생 제사의 제대에서 새롭게 되는 실재에 관하여 영혼들을 깨우고 사제들이 희생양으로서의 사제 성소에 충실하도록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게 행함과 같이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


1887년 5월 25일 농가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포르지오네는 7자녀 중 4번째였다. 부모님은 피에트렐치나의 가난한 집에서 매우 단순하게 살았다. 그들은 성실한 일꾼이었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본당은 교황이며 치명자인 성 비오1세에게 봉헌된 곳이었고, 따라서 젊은 카푸친회원은 영예롭게 비오를 수도명으로 선택했다.


소년 프란체스코는 이미 환시들과 초자연현상을 받았다. 생의 일찍부터 마지막까지 비오 신부는 천사들의 방문이나 성모발현, 그리고 악마적 폭력에 시달리는 현상들을 경험했다. 처음에 소년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은 비오 신부님에 대한 신심이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성가들이 설명하듯, 초자연 현상은 성덕이 아니다. 그런 현상들은 때때로, 심지어는 종종 이어지기도 한다. 성덕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조심스럽게 구분되어야 한다. 비오 신부님이 성인이라면 그것은 동시이처존재와 다른 예외적 현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웅적 덕행들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프란체스코는 일찍부터 영웅적 덕행들을 실천했다. 어머니가 맨바닥에서 바위에 머리를 기댄 채 자고있는 그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그의 신심은 견고했고 그의 순종은 절대적이었으며 그의 학업에서나 의무에서의 근면함은 칭송받아 마땅했으며 그의 우정은 본보기였다.


15세 되었을 때, 이상한 환시가 그의 미래를 그에게 암시해줬다. 천신이 그를 불러 더 강하며 거대한 것을 거슬러 싸우게 했다. 소년은 주저하며 싸웠고 이겼다.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신성한 기념과 함께 천주섭리는 프란체스코에게 앞으로 닥쳐올 전쟁의 잔혹함을 알려주었다.


몇 주 후, 1903년 1월 22일, 15세에 그는 모르코네의 카푸친 수련소에 들어갔고 피에트렐치나의 비오를 수도명으로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 곳에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국에 있었다. 이 존경할 만한 아버지는 모두 7년 동안 (3년 그리고 4년) 가족 모두를 부양하기 위해 그의 존경할 만한 아내와 그의 사랑하는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다.


젊은 수련자의 학업은 1909년까지 계속됐다. 이 젊은 수도자는 진지하며 학구적이고 만족스러운 수사였으나 명석하진 않았다. 학업의 끝에 다다르자 그는 빠르게 성소의 단계를 올라갔다. 1908년 소품들을 받은 뒤 1909년 7월 부제로 서품됐다.


하지만 건강 문제들이 젊은 수사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업과 심지어는 수도원 생활까지 중단해야만 했고 피에트렐치나의 가족들에게 가서 요양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이 일시적 휴식은 7년간 지속됐다.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의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8월 14일 피에트렐치나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다른 카푸친 형제들과 분리된, 그리고 극심한 내적 시험으로 괴롭혀진 그는 이 기간 동안 그의 영적 지도자인 아고스티노 신부와 함께 그가 받은 내적 전투와 놀라운 은총을 적어달라는 말에 정기적으로 응답했다.


어떤 장상은 그를 세속에서 사목하는 사제로 살도록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1911년 수도회로 돌아오라고 명했다. 악마는 격분해 이 젊은 신비가를 매우 맹렬하게 때리고 공격했다. 그래서 수도회의 수호천사는 프란치스칸 영성에 움직여 비오 신부에게 앞으로도 침묵 중에 고통 받는 은총을 청하라고 주문했다. 이 은총은 바로 그 날 저녁 소음에 다소 지쳤던 카푸친 수사들과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비오 신부의 약한 건강은 곧 그를 피에트렐치나로 돌아가게 했다. 의사들은 진단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심지어 한 주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비오 신부는 피에트렐치나를 떠나 다시 공기가 그와 전혀 맞지 않았던 포지아로 갔다. 1916년 7월 28일 그는 산 죠반니 로톤도로 가 몇 주간 쉬라는 조언을 받았다. 그곳은 그가 선종할 때까지 있게 될 곳이었다…


그들이 면밀히 살펴볼 때까지 비오 신부는 반쯤 산 채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 시기의 징집병으로서 카푸친 수사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군복을 착용하고 총을 들고 있다. 그는 총기를 쏘아 본 적이 없었으며 사진에서 조금 어색해 보인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처음으로 두 군데에 동시에 존재하는 (초자연) 현상을 보인다. 1917년 10월 24일, 이탈리아군은 카포레토에서 막 대패했고 총사령인 카르도나 장군은 자결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총을 들었을 때, 카푸친 수사가 그의 집무실로 들어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장군은 그렇게 했고 그 좋은 사제에게 감사했으며 그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장군은 즉시 부관에게 들여보낸 사제가 누구인지 물었다. 부관은 들어오고 나가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장군은 수년이 지나 사진으로 그를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군대에서의 기간 후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1918년 5월 30일 사랑의 상처를 받는 은총을 받았다. 8월 5일, 그는 심장이 꿰뚫리는 신비를 받았고, 20일에는 큰 고통과 함께 오상을 받았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비오 신부가 그의 영적 지도자인 아고스티노 신부에게 보낸 것처럼. “제가 육체적으로 고통받은 것과 비교하면 영적인 전투는 훨씬 더 극심합니다.… 저는 영속적인 밤 속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저를 어렵게 하는데 제가 선을 행하고 있는지 악을 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다만 제가 느끼는 것이 천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지 저를 파괴하는 것인지 의심이 듭니다.”


비오 신부는 처음에는 상처를 고치고자 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감추고자 했다. 헛된 일이었다. 산 죠반니 로톤도를 향한 순례들이 시작됐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사도직 활동은 성장했고 그의 상처를 관찰했던 의사들은 설명 불가능한 성격의 상처임을 받아들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비오 신부는 지상에 민족들의 회심을 위해 이따금 천주께서 보내시는 사람들 중 하나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1921년에 일의 진행이 바뀌었다. 여자들과 내연관계에 있던 타락한 사제들과 성직매매를 일삼던 주교에 의해 주도된 교계적 음모가 로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산 죠반니 로톤도가 속해 있던 만프레도니아의 주교는 심지어 비오 신부가 그의 오상을 더 깊게 만들기 위해 그의 상처에 향수와 가루를 뿌리고 질산을 붓는 것을 봤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의전 사제단, 적어도 그들 중 몇몇은 카푸친 수사들의 “오상을 받은 사람”을 만든 거대한 이익에 관한 험담을 퍼뜨렸다. 최악은 이 모든 것들이 심각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이었다.


주교급의 주장과 교회법적 폭로들로 걱정하게 된 로마는 카푸친회를 경계했다. 비오 신부에게 맡겨졌던 사도직들이 하나씩 거두어짐에 따라 그에게 어려운 시기가 따라왔다. 그를 다른 수도회로 옮기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는 그들의 '성인'을 지키고 보호하기로 결심한 그 지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반란이 머지 않았다. 비오 신부는 갈가노에 위치한 그 작은 마을을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감동적인 편지를 썼는데, 마지막 말은 그가 묻힌 지하묘지에 적혀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의 부족하고 계속되는 기도중에 이 관대한 사람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의 평화와 번창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애정의 표시로 다른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장상께서 반대하시지 않는 한 내 뼈가 이 땅의 고요한 구석에 놓여지기 원합니다.”


카푸친회 장상은 심지어 비오 신부를 대형 통에 담아 몰래 빼내는 것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순명하지만 비굴하거나 어리석지 않았던 이 수호 사제는 그런 식의 변장을 거부했다.


처벌은 이 불쌍한 사제에게 계속되었다. 1931년 3월 23일, 성청은 모든 사도직에서 그를 제외시켰고, 공적으로 미사를 집전하거나 수도원 밖에서 어떤 카푸친회 사람과도 접촉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비오 신부가 극기를 계속한 후 수도원 식당에서 형제들이 심사숙고 끝에 보여주지 않았던 서신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의 방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흘렸다. 착한 그 형제는 비오 신부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그 장면을 증언했다. 하지만 비오 신부는 예루살렘의 거룩한 부인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답을 해 주었다.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회심의 은총을 잃게 될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은둔자로서 비오 신부는 독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로흐바케의 교회사를 읽거나 하루에 신곡을 독파했다. 역설적으로 낙원에 다다르면 두통을 겪는다.


1933년 제재가 풀렸다. 비오 신부는 사역에, 특별히 고해소에 복귀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 있곤 했다.


평화로운 해들이 지나갔다. 1940년에 만약 거기 있었다면 유일했을 병자인 비오 신부는 차후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이 될, 현대적 기구와 유능한 의료진을 갖춘 큰 병원에 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모든 섭리의 사업과 마찬가지로 장애물은 있었지만 1956년 5월에 병원이 개원했다. 병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때 비오신부는 주로 그의 영적 아들들과 딸들, 거기에는 프리메이슨회원들, 사기꾼들, 유명한 테너(Gigli) 및 약간의 덕행을 지닌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전세계적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기도 지향들을 비오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1957년 그의 선종은 비오 신부의 삶에 새로운 고통의 장을 열었다. 몇몇 고위 카푸친 형제들이 그의 손을 통한 막대한 수익에 그저 종교적인 관심을 보여줬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것들을 원했다. 수도회의 권위자들로부터 지지받는 “수도자적인” 음모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비오 신부의 방과 고해실에 마이크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 일은 한 사제가 그의 친구들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가운데 드러났고, 복음적 감독과는 동떨어져 잘못을 저지른 형제들은 맡은 역할에서 물러나 다른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여전히 영혼들을 위한 사역에 온전히 투신하고 있었다 해도 삶의 마지막은 더 평화로웠다.


마지막 몇 달간 있었던 두 사건은 주목할 만 하다. 1968년 규범 미사(normative Mass)에 뒤이어 새미사가 제정됐다. 비오 신부는 영원한 미사(전통 라틴 미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그 요청은 허락되었다.


같은 해인 1968년, 바오로 6세 교황의 산아 제한에 관한 회칙(역자 주: 「인간생명」)이 반포되었다. 비오 신부는 삶이 오직 두 달 남았을 때, 신비적 삶의 정상에서 교황님께 큰 논란의 원인이 된 이 회칙에 감사드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 제 2의 아르스의 성인은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꼈다. 1968년 9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나타난 지 50년이 되던 날 오상이 사라졌다. 그의 피부는 흉터없이 부드럽고 깨끗해졌다. 비오 신부의 피의 희년이 끝났다. 9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밤, 영원이 다가왔고 비오 신부는 그를 창조하신 주님의 옆에 있게 되었다.


에필로그: 르페브르 대주교와 비오 신부


1967년 여름의 끝무렵,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탈리아에 있었고 산 죠반니 로톤도를 여행했다. 만남은 짧았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신회 총회를 앞두고 비오 신부의 축복을 청했다. 겸손한 카푸친 신부는 거절하며 그 자신이 르페브르 대주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두 성자의 양선함이었다.


교회의 위대한 두 위인은 매우 달랐다. 한 사람은 사제였고 한 사람은 주교였다. 한 사람은 특별한 현상을 경험했고 다른 한 사람은 다카르에서의 신비로운 꿈에 대한 수수께끼같은 기억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유사점을 시사한다.


모두 교회로부터 교회를 위하여 고통 받았다.


핍박의 이유가 매우 다르고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응대했다 할지라도 모두 당국의 진정한 핍박의 희생양이었다.


비오 신부에 대한 핍박은 개인적이었다. 특정 카푸친 회원들의 욕심과 방종한 세속 사제들의 질투에서 비롯됐다. 이 핍박은 부당한 처벌로 이어졌고 비오 신부는 영웅적 순명으로 받아들였다.


르페브르 대주교의 경우는 달랐다. 핍박은 신앙과 영원한 미사를 지키고 공의회 체제의 오류와 새 전례를 거부하는 그의 결심에서 비롯됐다. 이 핍박을 몰고 온 믿음의 동기는 그에게 규칙의 문제나 대주교 자신보다 더 중요했다. 따라서 르페브르 대주교는 단순한 형식적 순명보다 더 상위의 동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경고에 불복종하기로 결정했다. 신앙은 영웅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순명은 간편한 굽실거림과 인간적 현명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유사점은 미사성제에 대한 그들의 깊은 이해다. 한 사람은 갈바리아에 오르는 길로써 미사를 거행하는 매우 신비적 방법으로, 다른 한 사람은 미사를 중심에 두는 그의 영성으로 새 미사에서 덤불 속에 가려져버린 미사의 희생제사적이고 속죄적 성격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은 직설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삶으로, 다른 하나는 사제직을 위한 사도직으로, 구속사업에서 사제가 지닌 중심적 역할을 상기시켰다.


Fr. 프랑수와-마리 쇼타드, SSPX

(출처 : Le Chardonnet n° 340 de juillet-août-septembre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