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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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

  • 주세페 사르토는 1835년 6월 2일 베니스 근처 리에쎄라는 작은 마을에서 겸손한 부모 아래 태어났다. 마을 관리였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가톨릭 가풍 속에서 주세페를 양육하였다. 후에 주세페가 카스텔프랑코에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빠뒤아 신학교에 신속하게 들어가도록 하고 성장시킨 것은 이러한 가정 분위기 때문이었다.
  • 주세페 사르토는 그가 23살 되던 1858년 9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톰볼로 시에서 부제(副祭)를 맡았다. 9년 후 사제로서 쌀자노로 전출되어 8년간 지냈다. 그의 사목생활과 행정능력을 인정해 그의 주교는 주세페를 교구에 속한 주요 신학교의 영적 감독자 및(1875년 11월부터 1884년 만튜아의 주교로 승진할 때까지) 대교구의 재정담당관으로 임명하였다.
  • 주교로서 8년 후 베니스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관할 주교 및 추기경으로 근무하였다. 추기경 주세페 사르토는 청빈생활 및 성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베니스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교육, 가톨릭인들의 실천생활, 전례에서 그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그는 가톨릭 교육의 결핍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톨릭 신앙에 대한 흥미와 사랑을 잃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 레오 13세 사후 1903년 콘클라베는 교황직을 고사(固辭)하겠다는 사르토 추기경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업무를 받아드리도록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 새 교황은 비오 10세라고 이름을 지었다. 최고위 성직자로서 비오 10세 교황은 바오로 성인의 구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하도록”(코린토 전서 15:28)을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이는 국가가 천주님을 경배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세속주의라는 자유주의에 대항, 일선에 선 성교회의 투쟁 기간 동안 이러한 회복 운동의 목표는 특히 중요했다.
  • 11년 간의 교황직 기간 중, 비오 10세 교황은 성교회가 직면한 이러한 도전과 맞서 싸우고 많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복된 성사에 대한 교황의 심오한 헌신은 모든 가톨릭인들이 성체성사에 자주 그리고 열성적으로 받아드리게끔 전 방위적인 호소력을 끌어올렸다.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성사에 일치와 강화됨을 이용하여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교황 성하의 바램이었다.
  • 이는 또한 전례개혁을 시작한 교황으로서 그를 기억에 남기게 하는 전례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전례 및 교회의 기도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매우 가치 있는 보물인 가톨릭 전례 음악을 생동감 있게 유지할 수 있도록 성음악제정성(聖音樂制定省)을 설립하였다.
  • 비오 10세 교황은 현대주의, 실로니즘(현대 에큐메니즘) 그리고 자유주의 오류에 맞서 대항하는 데에 있어 경고도 하며 이와 싸우는데도 적극적이었고 매우 귀중한 전통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 및 스콜라주의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러한 헌신은 그로 하여금 로마에서 교황성서위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 비오 10세 교황은 세계 1차 대전의 끔찍한 시작을 목도하게 되었다. 국제적 갈등에 대한 그의 슬픔은 그 분의 병을 더 깊게 만들었으며 완전한 기력손실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그때가 1914년 8월20일 그의 나이 79세였다. 1954년 5월 31일 성 비오 10세 교황으로 시성되었다. 성교회는 9월 3일에 그의 거룩한 생애와 모범을 기념한다. 그는 현대에 들어 시성된 최초의 교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