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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은퇴 이야기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26


르페브르 대주교의 은퇴 이야기 (1)


9/ 11, 2018 / By fsspx.news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2005년 12월 15일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에 받아들여졌을 때, 그는 그의 전임자인 도미니코회 앙브르와 - 마리 카레에게 찬사를 보냈다. 짧은 문장에서 그는 “공의회 이후 모든 혼란, 죄가 무엇인지, 조건없는 헌신, 가톨릭 교리에 대한 사랑, 헛된 논쟁을 경멸하는 등에 대한 감각은 이제 황폐화되고 있다.” (René Girard and Michel Serres, Le Tragique et la Piété) 그는 또한 “모든 야심가들이 ‘쟁론(contestation)’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많은 성직자들이 열성적으로 실행한 “실험적 활동”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는 1968년 이었다.


50년 전, 공의회가 일으킨 격량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그의 수도회를 갱신시키고, 시대에 적용하는 총회를 소집할 무거운 임무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때에 성신수도회의 장상이었다. 그리고 황폐화시키는 혼돈, 실험적 활동들, 쟁론과 격량의 한가운데서 그는 철수를 선택했다.


교회의 중요한 수도회 장상의 강제적 사임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교회 내 위기를 상당히 보여주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6년 전 절대 다수에 의해 선출되다


1968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6년 간 성신수도회의 장상이었다. 1962년 7월 26일 그는 2차 선거에서 절대 다수의 회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틀 후 이를 승인했다. 6개월 전 튈의 주교가 되었던 다카르의 전임 교구장 대주교는 코레즈의 그의 교구를 떠나 파리의 로몽 거리에 있는 성신수도회 본부로 옮겼다. 교황좌의 보좌역이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 위원인 그의 장상 선출은 이 공의회의 개회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공의 회의 5 회기동안 그는 논쟁들, 채택된 문헌들 그리고 내려진 결정들이 나올 때마다 수도회 가족들에게 알렸다.


이 연구는 르페브르 대주교가 공의회동안 말했던 모든 내용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들은 <나는 공의회를 고발한다(I Accuse the Council)>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어떻게 6년간 빠져나갈 수 없는 방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1962년 선출되었을 때 르페브르 대주교는 세계대전 이후 문제들과 우유부단함에 빠져버린 수도회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커다란 어려움들을 포함한 위태로운 상황을 떠안게 되었다.


역풍을 맞다


프랑스 전역과 특별히 성신회의 대 수련기관인 셰빌리- 라루에서는 분열과 해로운 분위기가 커지고 있었다. 현대적 경향을 가진 저자들과 스스로를 양성하고자 하는 실험들이 위험하게 퍼져갔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것을 끝내고자 했다. 그는 콩가르 신부와 셰뉴 신부의 단죄받은 책들을 도서관에서 치울 것을 명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호교론과 마리아론을 신학 수업에서 제거하고자 한 푸르몽 신부를 전근시켰다. 1963년 봄, 그는 대 수련기관의 수련장들에게 현대주의 사상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가르치는 소임에서 제외시키라는 정확한 지침을 전달했다. 또한 그들에게 피정과 강의들, 그리고 저널의 저자들의 선택에 식별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우리는 교회와 교황님에 대한 존경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과 성경의 역사적 진리, 교회전통의 가치, 도덕과 죄의 모든 개념, 그리고 개인적 책임감을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도 공동체 안의 세상의 정신이 침투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Bp. Bernard Tissier de Mallerais, Marcel Lefebvre: The Biography, Angelus Press, p. 345)


르페브르 대주교는 대 수련기관의 교사진, 특히 교장들을 재편했다. 철학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악, 관념론과 주관주의를 거부한다. 토미즘 철학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다.”고 했다. 신학에서는 “교도권과 전통의 중요성, 그리고 성사와 미사성제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식당에서의 독서에서 비오 9세 교황 때부터 지금까지 주요 회칙과 교황 문헌, 특별히 성 비오 10세 교황의 문헌을 읽을 것을 지시했다.


전례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로마의 지침을 따르도록 했다. “소위 전례학자라고 불리는 이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시작된 모든 것을 피하도록”하고, 교회의 언어를 지키고, 집전자가 없는 전례는 절대 하지 말고, 신자들을 보며 미사를 드리지 말며, 선 채로 영성체하지 않도록 했다.


개혁이 토네이도로 변하다


1963년 말, 그는 몇몇 관구에서의 충격적인 상황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티시에 드 말르레 주교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소름끼치는 언급을 적고 있다.


“권위의 파괴, 고삐풀린 자유,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판할 권리, 인간성의 상실, 동료, 권위,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존중의 상실. 복장, 인상, 책과 텔레비전에서 정숙함의 실종. (...) 전통에 대한 조롱, 라틴어와 그레고리안 성가 포기, 그리고 스콜라 철학과 신학 폐기.”


불행하게도 르페브르 대주교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필요한 개혁을 단행할 만큼의 결정력이 없었다. 세빌리에서 그는 교장의 사임과 3명의 교수를 교체하기로 했지만, 1964년 지명된 새 교장은 나중에 르페브르 대주교의 믿음을 저버렸다고 시인했다. “저는 그의 눈을 덮고 그가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학생들은 저의 형제들이지, 아랫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태도는 “새로운 신학과 혁명적 교수법의 유행에 맞서고 사제들을 양성해 낼 수 있는 강인함을 지닌 진정한 아버지의 권위”를 실행하는 데 무능함으로 드러났다. (Bp. Tissier, p. 348)


공의회 기간동안, 르페브르 대주교의 노선은 성신회 내에서는 점점 더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다른 주교들, 특별히 프랑스의 주교들로부터도 압박을 받게 되었다.


Sources: FSSPX / FSSPX.News – 9/1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