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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4. 2차 바티칸은 교회의 프랑스 대혁명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30



르페브르 대주교 공개서한

14. 2차 바티칸은 교회의 프랑스 대혁명이다.

14."Vatican II is the French Revolution in the Church."

 



교회의 위기와 프랑스 대혁명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8세기 철학 과 이와 함께 시작된 급격한 변화는 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그 독극물을 교회에 반입했던 자들이 직접 인정하는 것이다.

 

 “2차 바티칸은 교회의 프랑스 대혁명이다”라고 외친 이가 수에넨(Suenens) 추기경이었는데, 별도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러다가 혹시나 음모 탈로의 경계심도 품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작성한 다른 선언문들을 보자면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이 마침표를 찍은 앙상레짐 –구(舊) 정권 - 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그 혁명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교회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다. 즉, 반응이 있기 전에 벌어지고 있던 정세를 따로 떼어놓으면 반응을 판별하지 못한다”라고 덧붙였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마땅히 철폐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엄청난 교계제도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곧 교황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써 신기원이 이루어졌으며, 거기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연속된 신기원의 종말, 곧 한 시대의 종점이 나타난다.”


  노회한 개혁가 중 한 명인 콩가 신부(Pere Congar)도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교회는 10월 혁명을 평화롭게 치렀다.” 그의 말을 온전하게 이해하면,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문은 오류목록(Syllabus)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주장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혁가들 스스로 인정한 것들을 많이 인용할 수 있으니, 1976년에는 전국사목전례센터(National Pastoral and Liturgical Center)에서 분과(分科)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즐리노(Gelineau) 신부는, 새미사 양식(Novus Ordo)중 어떤 것은 지금 보편적으로 거행되고 있는 예식과 아주 조금 다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그 환상을 파괴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개혁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해빙의 신호탄이었다......(교회나 미사 등 여러)구조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점을 꼭 알아야 한다. 고치는 것은 똑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게 아니고 형식을 바꾸는 것이니, 형식이 바뀌면서 양식이 달라진다. 하나의 요소가 변화됨으로 인해 전체가 달라진다...... 말을 섞어 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익히 알고 있던 로마 양식이 이제는 없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붕괴된 것이다(주: Demain la liturgie, ed. du Cerf.).”


  자유주의 가톨릭인들이 혁명을 일으킬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음이 틀림없다. 다음은 그들 중 한 사람인 프랑스 두브(Doubs)의 의원인 몬시뇰 쁘레요(Prelot)의 책(Le Catholicisme Liberal, 1969)에서 읽은 것이다. “150여 년 동안이나 투쟁하여 우리 의견이 교회 안에서 지배하기를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었다. 2차 바티칸이 온 덕분에 드디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교회는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의 입장과 원칙을 확실하게 그리고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의 영향으로 인하여 반전론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라는 가면을 쓴 대혁명이 도입되었다. 자유주의 교황들 그리고 2차 바티칸을 틈타, 현대인의 오류와 잘못된 원칙이 교회에 침입하여 성직자들을 오염시켰다.


  사실을 확인해 보자. 먼저 자신 있게 말하지만 나는 1962년에 총 공의회(General Council)를 개최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희망에 차서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1963년 성신회(Holy Ghost Fathers)에 발송했던 것으로, 기존의 책 가운데 한 권(A Bishiop Speaks)에 수록돼 있는 내 서한을 현존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바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동안 전례상의 변혁이 필요했으니, 그런 뜻에서 공의회가 추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 바입니다.” 경당에만 국한된 기도와 학교, 직장 및 공공생활 등의 세속 활동 간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그로인한 경직성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라도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했었다. 교황이 나를 중앙 준비 위원회(Central Preparatory Commission)의 위원으로 임명하기에 2년 정도 계속된 작업에 아주 열심히 참여했다. 중앙위원회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작성한 예비 개요를 하나씩 체크하고 검토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랬으니 나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갔고 어떤 것을 점검해야 했으며 집회에 무엇을 제공해야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작업은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예비 개요 72가지가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교회의 교리는 완전히 정통적이다. 그랬는데 현대에 맞게 아주 약간의 조정만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으로 슬쩍 그리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 대폭 수정되었다.


  공표일(公表日)에 맞추어 준비가 손발이 맞게 진행됐고, 1962년 10월 11일 교부들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본당 회중석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때 예상 못한 사건이 교황청에서 터졌다. 공의회가 바로 첫 날부터 진보주의 세력에 밀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는데, 우리라 의미는 그 자리에 있던 공의회 교부 대부분을 말한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상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한 느낌은 곧 확인되었으니, 개회 기간 중 15일 후 72가지 개요 중 그 어느 것 하나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다 반송됐고 기각되었으며 휴지통에 버려지고 말았으니, 다음의 과정을 밟아 그렇게 되었다. 공의회 규약에는 예비 개요가 기각되려면 유권자 중 2/3의 득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표결에 부치니 개요에 반대하는 사람은 60%, 찬성자는 40%였다. 결과적으로 반대하는 쪽이 2/3를 얻지 못했으니 정상적이라면 공의회는 준비된 것을 기초로 해서 진행될 것이었다.


  바로 그때에 아주 강력한 조직이 얼굴을 들어냈고, 그 강력한 조직이란 독일 라인(Rhine)강 접경국의 추기경들로 구성되어 있는, 잘 훈련된 사무관들로 채워져 있었던 조직을 뜻한다. 그들은 교황 요한 23세를 찾아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황 성하. 다수표도 얻지 못한 개요를 고찰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라고 하니까 그 탄원이 접수되었다. 기존의 거대한 작업이 폐기되었고 집회는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의 빈 몸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아무리 작은 회사라고 해도 안건 하나 없이, 문서 한 장 없이 회의를 진행시킬 이사회 의장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제 공의회 위원을 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어려운 문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성 베드로 대 성전으로 모여드는 주교들을 생각해 보라. 거의 대부분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로, 참석한 2400명 중에서 겨우 서너 명 동료를 알고 있거나 또는 몇 명은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정도였다. 교부들 중에 누가 사제직, 예를 들어 전례나 교회법을 다룰 위원회 위원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겠는가?


  지극히 합법적인 일에 착수한 오타비아니(Ottaviani)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선별하여 논의할 예정이던 사항에 대해 일했던 사람들, 즉 공의회 준비 위원회 위원의 명단을 각자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선거하는 데 아무런 부담이 없도록 도울 수 있었고 또 그 전문가 중 몇 명 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큰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서 긴 연설을 한 교회의 군주가 누구인가를, 그 이름을 여기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그는 “명단을 돌림으로써 공의회에 용납할 수 없는 압력을 가하고 있네요. 공의회 교부들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 법정(Roman Curia)의 위원은 강요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예상치 못한 발언은 차라리 충격이라고 수 있었으니, 그래서 그 회기는 휴회되었다. 그 날 오후에 몬시뇰 펠리치 국무장관이 “교황 성하께서는 주교회의에서 목록을 작성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하십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때 주교회의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겨우 24시간뿐이었으니, 어쨌든 마땅히 모임을 가져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목록을 힘닿는 대로 마련했다. 그러나 음모를 꾸민 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특별히 선발된 자들을 사전에 모아 놓아서 모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교회의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다수표를 얻었다. 그 결과는 위원회 위원의 2/3가 진보파에 속한 구성원이었으며 나머지 1/3은 교황이 임명했다.


  예전의 것과는 그 성향이 뚜렷하게 다른 새로운 개요가 급하게 만들어졌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발행해서 공의회 이전의 교회 교리가 어땠는지 비교히겠다.


  일반 신자나 성직자 모임에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교부들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수정 조항을 넣은 새로운 개요에서는 이상한 글귀 또는 진술문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을 수 있지만 그 본질을 바꾸지는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결과는 치명적이다. 초기에 방향이 잘못 잡힌 문헌이란 전체적으로도 바로 교정되지 못하는 법이다. 그 문헌을 기초한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기초자의 모습과 그가 반영한 관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때부터 시작으로 공의회는 계속 삐뚤어지기만 했다. 1/3의 요원들이 자유주의 쪽으로 조종하는 데 공헌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지막 두 회기에 대비하여, 요한 23세가 지명했던 공의회 의장 10명을 제쳐놓고 사회자 4명을 임명했는데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사회를 맡게 된 그 4명의 추기경들이 절대로 중립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사회자들 입지는 대다수의 공의회 교부들에 대한 영향력을 결정할 정도로 막강했다.


  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열세였지만, 그 당시 입법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라성 같은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이었고, 그 가운데 적극적이고 조직화된 소수의 이름들을 열거해 보면, 르클락(Leclerc), 머피(Murphy), 콩가(Congar), 칼 라너(Rahner), 한스 큉(Kng), 쉴레벡스(Schillebeeckx), 베레(Besret), 카르도넬(Cardonnel), 샤누(Chenu), 등등과 같은 이들이었다.


 교부들이 국제 여론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고 항상 압력 넣던 독일과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보조를 받는 네덜란드 정보센터(Dutch Information Center), 즉 IDOC에서 발행한 터무니없는 인쇄물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속의 시각에 동조해 주길 바라는 세속인들의 기대를 교회가 받아드려야만 하는 기분,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 이상을 낳았다.


 그래서 그러한 움직임을 선동하는 자는 우선 현대주의자, 말하자면 온갖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나서는 교회를 몰아세워 서둘러 채택하라고 재촉하는 편이 쉽다는 방법이었다. 모두가 교회는 경직되어 있고, 시대에도 뒤쳐졌으며, 무기력하다고 여기게 만들었고 그게 다 조상들 탓이라며 가슴을 치고 슬퍼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악선전을 하였다. 과거의 분열이란 개신교나 정교회보다도 가톨릭에 죄가 더 많은 것으로 인상 갖게 함으로서, 활동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을 받아 로마에 출석한 여러 ‘갈라진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전통 교회가 그 부(富)와 승리주의에서 과오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공의회 교부들은 자기들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니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벌써 그들은 자신이 주교임을 나타내는 표시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성직자 옷 입은 모습을 부끄러워 할 것이었다.


  그와 같은 자유해방의 풍조는 얼마 안 되어 전 분야로 퍼져 나갔다. 주교단체주의 정신은 주교가 자기 개인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이를 숨기는 노아(Noah)의 외투가 되고 말았으니, 개인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20세기형 인간이 하는, 즉 해방된 인간의 정신에 위반된다고 한단다!


 각 주교에게는 자기가 맡은 교구에 대하여 개인적인 권위가 있다. 주교는 (그 지역의)왕과도 같다. 그런데 20세기 민주주의 시대가 되자, 주교가 그런 개인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자신의 권위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민주주의 방식으로 바꾸려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교들은 주교단체주의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주교단체주의는 주교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주교단체주의의 문제점은 주교의 개인적인 권위를 파괴한다는 것과 교황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다. 교황은 그 주교단에게 문의하지 않고는 혼자서 결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황은 또 주교단의 일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종교의 자유, 에큐메니즘, 신학적인 연구 그리고 교회법 개정은 자칭 말하자면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고 선언한 교회의 승리주의를 약화시켰다.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말하는 데, 우리는 자신이 주교라는 것에 대해 떳떳해 하지 못하는 마음을 주입시키면 주입시키는 대로 그에 휘둘리는 주교를 부끄럽게 여긴다. 주교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떳떳이 생각하지 못하는 현상은 온갖 혁명에서 이용된 전략으로, 그 결과를 공의회 연대표의 드러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현대 세계의 변화, 역사적인 흐름의 가속화, 수도생활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환경, 그리고 과학 및 기술의 지배에 관한 개요인 “현대 세계 속의 교회(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의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구구절절이 순전한 자유주의로 범벅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교황 비오 12세를 전문가라고 여겼기에 후세에 길이 빛날 공의회를 열고고 했었다. 뒤돌아보면 내 생각으로는 그 교황은 말할 수 없이 박식하고, 신학에서는 참으로 뛰어나고, 거룩함이 빛났으며 현대 세계 및 그 경향에 관한 과제에 있어서도 미처 다 풀지 못한 것이 없었다. 거의 확실하게 해결했었으니 참말로 그 교황은 사안을 신앙의 눈에서 본 것이다.


  그렇지만 저들이 공의회를 신덕도리의 것으로 삼지 않으려 하니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목적으로 볼려니) 사안이 그렇게 보일 리 만무했다. 2차 바티칸은 사목상의 공의회였으니, 요한 23세가 그렇게 말했고 바오로 6세도 재차 확인해 주지 않았던가? 개회 중에도 우리는 여러 차례나 개념을 정의(定義)하고자 했지만, 다음과 같은 말만 들었다. “우리는 신덕도리나 철학을 정의하러 모인 것이 아니고 사목상의 이유로 모인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연합이란 무엇인가? 저들이 원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흐릿하게라도 진술문을 분석해야 했는데, 그것도 용어가 애매하여 대략 가닥을 잡을 뿐이었다. 이는 또 아무렇게나 이루어지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쉴레벡스 신부가 그것을 인정했다. “나중에 어떻게 해석될지를 알기에 우리는 공의회 기간 내내 모호한 용어를 썼다.” 그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대의 다른 공의회들은 전부 신덕도리에 관한 공의회였다. 천주님은 우리 시대에는 어떤 오류들과 싸워야 하는지 알고 계신다! 신덕도리에 관한 공의회는 매우 요긴한 것을 충족시켜 주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비친스키(Wyszinsky) 추기경이 말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러분은 공산주의에 관한 개요에 대비해야 하오. 현대세계를 위협하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입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이 필요하다고 믿으셨다면, 개요를 표결에 부치려 총회를 소집한 우리에게도 매우 요긴할 것입니다.”


  가장 괴상하고 사탄의 정신에서 비롯된 공산주의가 바티칸에 공식적으로 접근했다. 세계적인 현상인 이 공산혁명은 특히 동방의 몇 나라에서 고생을 했던 추기경들이 필사적으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공식적인 무저항의 덕을 보았으며 교회의 원조도 많이 받은 상태다. 수천만  명의 순교자들, 그리고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정신병원에서 자아가 상실된 채 실험실의 인간으로 이용된 그리스도인들과 공산주의의 반대자들을 생각해보면, 사목상의 공의회에서 공산주의를 준엄하게 정죄하지 않았다는 사실행위 그 자체는 후일 치욕을 뒤집어쓰고도 남음이 있다. 허나 공의회는 침묵했다.


 우리는 450위 주교의 서명을 받아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망각된 채로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 Gaudium et Spes의 대변인이 우리 질문에 대답하기를 “공산주의를 정죄해 달라고 요청하는 탄원서는 겨우 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둘이라뇨!” 우리가 외쳤다, “400장도 더 되는데요!” “그건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조사에 들어가자, 우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곧 확인되었지만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나는 그 사건에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디아만티나(Diamantina)의 대주교, 몬시뇰 데 프로엔카 시가우드(Mgr. de Proenca Sigaud)를 대동하고, 그 서명서를 들고 공의회 사무관이었던 몬시뇰 펠리치(Mgr. Felici)에게 간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곳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공의회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대다수의 많은 가톨릭인들이 겪는 혼란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공의회가 성신으로써 감도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확실치는 않다. 신덕도리에 관한 것이 아닌 사목상의 공의회는 무류성을 위한 수단이 못된다. 회기가 끝날 즈음에 펠리치 추기경에게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어 말하건대 ‘공의회에 관한 신학상의 비망록’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라고 했다. 그는 말하길, “과거에 이미 신덕도리 정의에 관한 주제로 삼은 적이 있는 것들은 개요와 화제에 맞게 분류하고, 새로운 성격의 선언문에 관해서는 유보시키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니 2차 바티칸은 다른 공의회와는 전혀 다른 공의회이기에, 우리에게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판단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공의회 및 변혁 중에서 전통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면 다 인정한다. 이는 내가 설립한 단체가 그 확실한 증거다. 우리 신학교에서는 특별히, 공의회에서 표명한 소망 및 가톨릭 교육성성(Sacred Congregation for Catholic Education) 의 기초(ratio fundamentalis)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공의회를 잘못 적용한 것은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 성직자의 배교, 주교권의 도전, 전례와 월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신학 그리고 황폐해진 교회들은 요즈음 누군가가 주장하듯이 공의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솔직해 보자. 그것은 공의회의 열매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인해 독자들에게는 근심과 혼란만이 더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소동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도는 결국 허사가 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나오고 있다. 1968년 6월 30일 교황 성하가 신앙백서를 발행한 것이니, 그것은 신덕도리상의 견해에 근거한 행위인지라 어떤 공의회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베드로의 신앙을 확인시켜 주려는 뜻에서 작성한 그 신경(Credo)은 지극히 예외적으로 엄숙한 사건이었다. 그것을 발표하려고 교황이 일어서니 추기경들도 따라 일어났으며 운집한 군중도 모두 똑같이 하려했으나 교황은 그들을 다시 앉혀 놓았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홀로 신경을 선언하기를 원하여 가장 엄숙한 언어로 성 삼위의 이름으로, 거룩한 천신들 그리고 모든 교회 앞에서 그렇게 했다. 결국 교황은 교회의 신앙을 맹서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위안과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피어오른 신덕송, 그냥 그대로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다른 논점을 바오로 6세의 신앙백서로써 회복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