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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5. 교회와 프랑스 대혁명의 결합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06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5.교회와 프랑스 대혁명의 결합

15. The Marriage of the Church and the Revolution

 


프랑스 대혁명이란 ‘인간이 세운 질서가 아닌 모든 질서를 증오하는 자이며, 인간이 왕도 신도 아닌 상태로 속해 있는 질서를 증오하는 자’임을 표방한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이것은 아담이 범죄한 원인이었던 그 교만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혁명이란 현대인의 교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마침내 저들은 ‘자기 존엄성을 이해’하는 상태가 되고나서야, 그리고 “인간이 노력한 덕분에 사회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수도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아의식이 강해져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믿는다.

 

 역사의 흐름이 너무나 빠르기에 헐떡거리며 쫓아가기에도 바쁘다. 간단히 말해서 인류는 사물의 질서에 관하여 대체로 정적(靜的)인 관념에서 벗어나서 역동적이고 진화적인 관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 새로운 분석과 종합을 널리 요구하는 새 문제가 뒤따른다.” 이렇듯이 현대세계 속의 교회에 관한 사목 칙령인 Gaudium et Spes의 머리말에서 뒷머리를 맞을 만큼 터무니없는 구절을 보니, 복음 정신으로 회귀하는 데에는 같은 특성을 지닌 여느 것들과 더불어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다. 참으로 많이 바뀌고 변질된 상황에서 과연 복음 정신이 살아날 수 있는지조차 의심이 간다.


  또 “산업사회의 양식이 점차 퍼져나가면서 사회생활에 관한 관념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란 저자(著者)가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자 했던 것, 말하자면 사회 관련 교리에 들어있는 교회의 그리스도교적 관념과 공통되는 것이 전혀 없는 사회에 관한 관념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그런 방식으로 이끄는 가정(假定)은 단지 새 복음과 새 종교로 이끌 뿐이다. 그런 것이 또 있다! “그러므로 신자란,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긴밀하게 결합하여서 그들이 현대 문화에서 표현하는 사고방식과 느끼는 법을 익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수계범절과 도덕 행위가 과학 관련 지식과 엄청 발전하는 기술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게 신자는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가르침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도덕률과 사고에 통합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신자는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감각으로 모든 가치 기준을 평가하고 해석하리라.”


 (교리와 복음은 일치되는 것인데) 교리가 잘못됐고, 그 잘못된 교리에서 피하려면 복음에 의한 지시를 따라야 한다니, 참 이상한 조언이 다 있다. 그러한 이론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 현대의 교리문답은 쉴레벡스(Schillebeeckx)가 기도(企圖)했던 방식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는 배울 점이 많이 있으니 그 말을 들으라고 저들은 아이들에게 조언한다. 또한 천주를 믿지 않아도 이성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무신론자들이 하는 말은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본위여야 한다는 주장에 신자와 비신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한다”는 제1장의 첫 구절은 그 뒤에 오는 구절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 거론될 법도 하다. 그렇지만 본질을 따져 보면 그것에는 구원이 경제 및 사회의 안녕이라는 의미로 바뀐 상태고 공의회 이후의 교회 어디든지 그 관념이 스며들고 있다.


  나는 어떤 편이냐 하면, 비신자와 대화한다는 구실로 그와 같은 건의를 대화의 공동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새 이론을 그리스도인의 교리와 짝을 이루는 사람은 신앙을 반드시 잃으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현대인의 교만이 교회의 황금률을 뒤집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말에만 솔깃해 한다. 그러한 ‘현대화’는 그 자체가 단죄의 대상이다. 지금의 무질서 뿌리는 현대 아니 그보다는 신경, 천주님과 교회의 계명, 성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도덕률이 유일한 부활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으려 아주 고집을 피우는 현대주의자의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 문제에 관해서는 정신 차려야 할 성직자들이 결국 “지구의 모양을 계속해서 변형시킬 기술의 진보 및 이미 우주 정복에 착수하고 있는 기술의 진보”(Gaudium et Spes 5-1)에 미혹되어, 우리 주님은 오늘날과 같은 기술 발달을 예상치 못하셨으니 이제는 주님의 메시지를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15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의 꿈은 교회를 혁명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150년 동안 역대 교황들은 자유주의 가톨릭주의를 견책해 왔다. 그들의 문서를 보면 가장 중요한 것 중 피스토이야 공의회(Council of Pistoia)를 반대하는 비오 6세(Pius Ⅵ)의 교서 Auctorem fidei, 비오 9세(Pius Ⅸ)의 칙서 Quanta cura와 Syllabus, 새로운 권리를 반대하는 레오 13세(Leo ⅩⅢ)의 칙서 Immortale Dei, 시용(Sillon, -프랑스 청년 운동으로서 성직자의 허락이나 도움 없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과 근대주의를 반대하는 성 비오 10세(St. Pius Ⅹ)의 법령, 특히 포고령 Lamentabili,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비오 11세(Pius Ⅺ)의 칙서 Divini Redemptoris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Pius Ⅻ)의 칙서 Humani Generis들이 있다.


 교회와 혁명의 결합이 옳지 못한 결합이고 그러한 결합은 가짜인 것만을 낳기에, 역대 교황들은 교회와 혁명의 결합을 극구 반대한 것이다. 새 미사 양식은 가짜 양식이요, 성사(聖事)는 가짜 성사다. 이제는 변화된 성사로써 성총이 주어지는지 어떠한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제는 가짜 사제로서 자기들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자신이 제단에 올라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생제물을 드리고 각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일을 하도록 하는 의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혁명의 이름하에 사제들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수녀들은 핍박당하고 살해되었다. 충성스런 사제들로 채워진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낭트(Nante)의 배를 잊지 맙시다. 그런데 교회를 파괴한 상태에서 보면, 혁명의 일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작태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서, 사제직과 천주님 앞에서 행했던 허원을 저버린 2만, 3만 명이나 되는 사제들은 차라리 교수대로 끌려가 순교를 당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 적어도 자기 영혼은 구했을 것인데, 지금 사제직을 저버린 그들은 영혼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다.


  이런 불쌍한 결혼한 사제들을 보니 이미 이혼한 이들이 많이 있거니와 로마에 결혼 무효화를 신청해 놓은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이런 것이 과연 공의회의 선한 열매일까? 또한 미국에서는 2만 명의 수녀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훨씬 많은 수녀들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일치시켰던 종신 허원을 파기하고 환속하면서 결혼하고 말았다. 만일 그들이 교수대에서 죽었다면 최소한 신앙의 증거자로 탄생했를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밀알이라 할 수 있지만 세속의 정신에 굴복하는 사제나 평범한 신자들은 결코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악마의 가장 큰 승리란 순교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교회가 파멸되는 것이다.


  교회와 대혁명간의 부정한 결합은 ‘대화’로 이루어진다.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는 보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만민을 회개시키라”고 하신 것이지, “저들과 대화는 유지하면서 회개는 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진리와 오류는 절대 병립하지 못하기에, 오류와 대화하는 것은 천주님과 마귀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이는 역대 교황들이 항상 연달아 강조했던 것이요, 상식적인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충분히 이해했었다. 다른 태도와 반응을 강요하려면 몇 가지 교의(敎義)를 주입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려면 새로운 교리를 퍼뜨리는 데 필요한 현대주의자 사제로 만들어 이용해야 했다. 이는 이른바 ‘재순환’이라고 하는데, 천주께서 판단의 방향을 정하라고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그 재능을 의도적으로 개조한 조절 작용이다.


  내가 얼마간 총장상으로 있던 단체에서 그런 종류의 조작을 본 적이 있다. 필요한 제1단계 작업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의회가 변화를 도입했으니 우리도 변해야 했다는 것이다. 진술된 관념에 변화를 입맛대로 일치시키는 데는 추리력이 동원되기에 변화는 광범위하다. 파리의 대주교관에서 발행한 소책자에서 “말로 이루어진 신앙”을 읽을 수 있다. “제2단계 조작은 더욱 미묘한데, 다양한 변화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확인은 실제의 반대가 변화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 자체를 기초하기보다는 변화에 직면하여 자발적으로 나오는 잠재의식 태도를 기초로 하기에 중요하다.


  “중간적 태도의 가능성을 참조하는 한편, 전형적인 태도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것은 새 것이 강요될 때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여서 결국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많은 다수의 가톨릭인들 에게 해당되는 것이니 그들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양보한다.


  “두 번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종도들의 신앙에 근접해 있도록 항상 조심하면서 새 문명시대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다운 신앙 표현을 전체적으로 수정한 것을 받아들인다.”


  이 마지막 구절은 현대주의자들이 심사숙고 마련한 전형적인 안전장치다. 저들은 항상 자기네 태도가 정통적이라고 항변하면서 ‘새 문명기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다운 신앙 표현을 전체적으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약간의 글로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이 전체적으로 파괴되면, 그러한 재보증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너무 멀어 가 있으니 종도들의 신앙을 공경하는 것이 많이 유익할 거라면서 살짝 위안을 준다.


  제3단계 조작은 위 두 번째 태도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이다.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은 자기 신앙이 위험에 처했다고 해야 한다. 그 지점까지 갖다 준 요인들까지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꼼꼼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불필요한 첫 추측을 극복할 수 있게 할 기본적인 보증 몇 가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온갖 차원의 저항이 예측되었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신참 사제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보증’이란 무엇인가? 바로 성신이란다! “정확히 말해서 역사의 전환점에서 신자들을 도와 줄 이는 바로 성신이다.” 목표는 달성되었다. 이제는 교정권, 교리, 교계제도도 없고 심지어 성신에 감도됨과 동시에 믿을 만한 역사서(歷史書)라는 뜻의 성경도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직접 성신에 감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니. 그렇게 되면 교회는 무너지고 만다. 재순환된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영향에 쉽게 무릎 꿇고 온갖 구호를 제법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재 보증이 필요하면 “심리해 보니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명히 많은 변화의 표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발표에 이끌려 아무 곳에로도 끌려가기 쉽다.


 성 비오 10세께서는 칙서 Pascendi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원인(현대주의)은 정신의 타락이로다라고  기술하셨다. 예전에는 정신적 타락을 경험하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재순환으로 인해 생긴 비슷한 형태의 정신적 타락이 만들어진다. 성 교황은 전임자인 그레고리오 16세(Gregory ⅩⅥ)의 견해를 인용도 했다. “종도들의 경고에는 관심두지 않고 알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또 오류 한 점 없는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교회 밖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때, 즉 인간의 이성이 현대 정신에 굴복하기가 무섭게 그 일탈이 얼마나 심각해지는 것인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