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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6. 신 현대주의 또는 신앙의 훼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6.신 현대주의 내지는 신앙의 훼손

16. Neo-modernism or the Undermining of the Faith

 


  교회의 어휘집 완결 개정판을 보면 몇 가지 용어를 살려 놓은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신앙이다. 문제는 바로 신앙의 정의(定義)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인데도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용어를 제멋대로 뜯어 고쳐서 진짜 참된 뜻은 어디로 사라지고 빠진 상태로 다루어지는 바람에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면..... 가톨릭인이여, 그러한 내막을 참조해야 할 것이로다.


  신앙이란 것은 ‘천주의 말씀으로서 계시된 진리에 (우리의)지성(知性)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 정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온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계시해 주신 천주의 권위로 인하여 진리를 믿는 것이며, 다른 곳에서는 진리를 구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누구도 신앙을 우리에게서 뺏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할 권한이 없다. 지금 마주치고 있는 신앙의 정의(定義)는 현대주의자들이 부활시킨 것으로, 80년 전에 벌써 비오 10세께서 정죄(定罪)하신 적이 있다. 현대주의자의 기준에 의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내적인 기분으로, 인간 안에서 종교의 해법을 구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내부이며, 종교는 우리생활의 한 형태이기에 다른 곳 아닌 인간의 생활 속에서 발견되며.....” 우리의 지력(知力)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천주님께 영혼이 결합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신앙은 누구나 각자의 양심 안에서, 자신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현대주의는 최근에 고안된 것도 아니며 또 유명한 칙서를 발표했던 1907년에 고안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대혁명의 정신으로, 우리를 인간 안에만 가두어서 천주를 우리 사회에서 매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현대주의의 잘못된 정의를 따르다 보면 천주의 권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쉽다.


  신앙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신앙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믿는 자는 구원받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우리 주께서 직접 단언하지 않으셨던가?


  1976년에 교황을 알현하러 갈 당시, 기가 막히게도 나더러 신학생들에게 교황의 말을 거슬러 서약하게 했다고 하면서 나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찌되어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나를 해칠 의도로 누군가 교황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최근까지도 사제인 경우에는 서품을 받기 전에, 그리고 교회의 고위 성직자의 경우에는 집무실을 배정 받는 순간에 모두가 예외 없이 맹서해야 했던 반(反) 현대주의 선서에 관하여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그런 식으로 단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오로 6세는 반 현대주의 맹서를 한번 이상 했다. 선서문을 살펴보면, “신앙이란 압박감 형태를 취한 잠재의식의 그늘과 도덕적으로 훈련된 의지의 성향에서 생기되 맹목적으로 종교적인 기분이 아니다 라고 단언하고 또 진정으로 고백하는 바이다. 오히려 외부로부터 오는 진리를 지성으로써 인정하는 것이 신앙인즉, 그에 따라서 우리는 창조주시요 주님이신 천주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증명해 주시며 또 계시해 주신 것을 참되다고 믿되, 이는 모두 천주의 권위를 근거로 하는 바다.”


  요즘에 와서는 사제나 주교가 되기 전에 이상과 같은 반 현대주의 선서를 맹서하라고 하지 않는다. 만일 반 현대주의 선서를 맹서하라고 했다면, 반 현대주의 선서를 맹세하면서까지 서품을 받으려 하지 않기에 서품식의 횟수가 현재 거행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적었으리라. 신앙의 개념은 이미 왜곡된 상태여서 그릇된 의향을 일부러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현대주의 영향권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믿던 간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을 자세가 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저들의 말대로 신앙이 각자의 양심에 준하는 것이라면.....즉, 신앙이 생기게 하는 것이 양심이라면.....논리적으로 따져서 개인의 양심이 천주께로 향해 있으면, 어떤 신앙으로든지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겠다. 프랑스 주교회의 교리문답 위원회에서 작성한 문서를 보면 그런 종류의 해설을 읽을 수 있다. “진리란 받아들여진 것, 즉 기존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는 것이다.”


  두 견해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이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고 또한 그렇다는 것을 지성으로써 확증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새 것을 만들어내는 자’가 교회내 중심부에 있기에 더욱 더 참된 종교를 파괴하고 있으니 그런 사악한 이론으로부터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에 그들을 손쉽게 구별해 낼 수 있는 수단을 허락해 주셔서 그들의 정체가 탄로 났으니 천주께 감사! 우리는 또 그것을 교회사학자들만이 관심을 쏟는 옛날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Pascendi는 비교적 현대에 쓰인 문헌으로서, 매우 종합적이며 놀라울 만치로 생생하게 ‘교회내부의 원수’를 묘사하고 있다.


  저들이 “중요 철학과 신학이 결핍되어 있고 겸손을 완전히 저버렸으며, 그러면서 교회의 원상 복귀자로 자임하며.....모든 권위를 능멸하며 어떤 제한에도 분노를 참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저들의 술책은  자기 이론을 질서정연하게, 총체적으로 절대로 해석하는 법이 없이 이리 저리 찢어서 여기저기에 대강 흩뜨려 놓았으니..... 그렇게 해서 저들의 이론은 애매하고 부정확해 보이며, 그와 반대일 경우에는 저들의 생각이 완전히 고착된 채로 시종일관이다. 저들의 저작물 가운데 어떤 부분은 가톨릭인이 쓴 것이기도 하지만, 책장을 읽어 넘기면 급진주의자가 쓴 것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도다. 저들은 견책 당하기도 하고 정죄 받기도 하며, 거짓으로 순명하는 모습을 취하기도 하면서 끝없는 파렴치함을 감추고서 자기 생각대로 해 버리니. 그 누군가가 헷갈리어 새 것 중 하나라도 비판하려고 하면 가당치않게 순서대로 꽉 채워 나열시켜서 내놓고, 그것을 부인(否認)하는 자는 무식한 이로 취급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지키는 자는 하늘만큼이나 자자하게 칭송하도다. 간행물에는 구구절절이 새 것이 숨 쉬고 있고, 박수갈채와 경탄 섞인 탄성이 그것을 환영하는지라. 대담하게도 옛것을 경멸이 여기고 성전(聖傳)과 교회의 치교권을 훼손시키는 작가일수록 더 똑똑한 쪽에 있도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정죄 받으면 다른 이들이 그를 감싸기 위해 곧바로 모여들고 그를 대놓고 칭송하며 진리를 위한 순교자인 듯 받들어 모시다시피 하도다.”


  위와 같은 특징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니, 이는 최근에 쓰여진 것임을 짐작하기 쉽다. 1980년 한스 큉(Hans Kng)에 대한 징계가 내려진 후에 어떤 그리스도교 단체는 교황청의 결정에 항명하는 뜻으로 그 스위스 신학자에게 가해진 징계를 철회시키도록 쾰른(Cologne) 대성당 앞에서 종교재판소의 판결 선고식(이교도 화형식: auto-da-fe)을 행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 속에다가 “용감하고 정직한 사고(思考)에 가하는 박해를 상징화하여” 큉의 초상과 저작물들을 던져 넣었다(르몽드-Le Monde).


 이보다 조금 앞서서 포이에 신부(Pere Pohier)에 대한 제재가 있으니, 다른 격렬한 항의가 공개적으로 일어났다. 즉 300명의 도미니꼬회 수사와 수녀들이 또 다른 문서에 서명했으며 부캉(Bouquen)의 수도원, 몽파르나쓰(Montparnasse) 소성당(小聖堂), 그리고 다른 전위파 단체들이 그 논쟁에 뛰어 들었다. 비오 10세(Pius Ⅹ)의 묘사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새로운 현상이 있다면, 저들이 이제는 더 이상 복종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감이 붙었고 교회 안에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기에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주의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진행 중이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Pascendi를 계속 살펴보자.교회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전통)가톨릭인들을 현대주의자들이 악의를 가지고 아무렇게나 설득하는 것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 자신의 위에 쌓은 저들의 모욕은 끝이 없도다. 상대방의 지식과 지성이 상당하여 위협을 주는 사람일 경우, 그 주변에 침묵의 음모를 통하여 무력화하도다.” 이것은 오늘날 박해를 당하는 전통주의 사제,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 종교 작가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인데도 진보주의자들의 손 안에 있는 언론에서는 그들에 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청년 운동도 충성을 다하는 사실 그리고 교화, 순례, 기타 등등에 대해서는 살짝 비껴가서, 대중이 그런 내용을 들으면 상당한 힘을 얻을 텐데,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를 기술(記述)하는 경우를 보면, 저들은 교회사에 대하여 오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꼼꼼히 적극 찾아내서 그것이 진리 전체인 것처럼 악의적인 쾌감으로 대중에게 폭로하노니 그런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어 성전(聖傳)을 경건하게 지키는 사람들을 마구 파괴하도다. 고풍다움으로 인하여 공경해 마지않는 성물(聖物)을 웃음거리로 만들기까지 하도다. 급기야 저들은 진작 논의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 헛된 욕망이라는 것은 저들 자신도 알고 있는 것으로서 모두가 이제껏 말해 온 것과 한가지로 말했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니라.”


  저들의 이론을 보면, 현대의 사고방식대로 한다면 인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릴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이는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입각하면서 당신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시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 잠재의식 속에 있는, 욕망이라 하는, 신성을 동경하는 욕구를 만족시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욕구가 ‘어떤 식으로 하든지 하느님과 인간을 결합케 하는’ 특별한 느낌을 영혼 안에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현대주의자들에게 신앙이란 이와 같다. 그러므로 천주란 인간의 영혼 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이 계시라고들 한다.


  기본 신덕도리를 자세히 기술(記述)하는 가운데 종교적 김정의 영역에서 지성의 영역까지 발전시켜 보자. 인간이 지능을 부여받았기에 자기 신앙을 지어낼 욕구가 있다하면서도 절대 진리가 아닌 진리의 이미지 또는 상징만이 들어있는 신앙 고백문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신덕도리가 들어있는 신앙 고백문은 변하기 쉬우며, 실제로도 변한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신덕도리가 바뀔 수 있는 창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신앙 고백문은 단지 신학상의 이론이 아니라, 진정으로 종교적이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이 갖는 종교에 대한 감정과 정서가 신앙 고백문을 ‘진정’ 자기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대로 사는 것’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 비오 10세의 현대주의 해설을 계속 읽어보면, “살아있는 신앙 고백문이어야 한다면, 그 신앙 고백문들은 언제나 신자와 신자의 신앙과 맥락이 같아야 하니.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저절로 본래의 뜻을 잃으며, 그렇게 되면 신앙 고백문들을 바꾸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도다. 신덕도리상의 신앙 고백문은, 현대주의자들이 표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성격이 너무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공공연히 경멸하지 않더라도 신앙 고백문에 대한 저들의 의견이 이토록 얕보는 분위기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다. 종교적 기분, 종교적 생활은 언제나 저들의 입에 담고 있는 표현이라.” 그리고 저들의 강론, 강의와 교리문답을 보면, ‘기존의 신앙 고백문’에 대해서는 혐오할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사적인 체험을 신자가 신앙으로 삼으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 말로 전달하고, 그렇게 해서 종교적 체험이 저절로 퍼져 나간단다. 신앙이 공동의 것이 되면, 흔히, 집단화되면 공동의 보화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조직이라는 형태로 결집할 필요를 느끼고, 그러한 이상이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공동 양심의 열매, 말하자면 개인의 양심이 모인 결실로, 근원이 되는 신자 한 사람에게서 유래하는데......그 한 사람이 가톨릭인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상과 같은 기술(記述) 방식은 현대주의자들이 교회사를 약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전히 천주께로부터 교회의 권위가 왔다고 믿었던 당시에, 즉 초기에는 교회의 권위가 독재 체제로 구상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교회가 공동 양심의 결정적인 결과물인 것처럼 권위 또한 순서로 따져보면 교회의 결정적인 소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권한은 임자가 바뀌어 맨 아래에서부터 오는 상향식이어야 한단다. 정치의식이 민중의 정부를 만들어 내듯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단다. “성직자의 권위로서 양심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기를 바라면 민주적인 형식에 굴복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에넨(Suenens) 추기경과 말 많은 신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어디서 획득했는지 알았을 것이다. 공의회 이후의 위기는 지난 세기 말과 금세기 초를 어지럽힌 위기를 어찌 쏙 빼 닮았는지! 또한 자녀들이 집에 가져오는 교리문답본을 보면, 어째서 모든 것이 예수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촉발된 동요(動搖)의 결과라고하며, 제자들이 신성한 욕구를 느껴서 다같이 ‘새로운 체험’을 겪은 성신강림 이후에 형성된 첫 공동체로써 시작했는지 알게 된다. 또 도서와 강론에는 성 삼위일체, 강생, 구속 그리고 승천과 같은 신덕도리가 들어있지 않은 이유도 알게 된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리문답을 위한 참고서(Texte de reference) 또는 교사용 안내서를 마련했다. 거기에는 현대주의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종도시대의 교회가 생겼던 당시에 구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작은 교회’, 앞으로 교회를 바꾸어 버릴 것이 분명한 ‘작은 교회’가 될 단체를 조직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교리문답반의 교사, 부모와 자녀들은 신앙 문제 가운데 자기 삶의 체험, 갈망, 종교상 및 약간의 지식을 제공한다. 그들의 동경심을 분발시킬 정도의 분명한 조건과 어떤 형태로든 복음에 맞추는 변화에 관여하게 하고야 마는 대조가 그 뒤를 잇는다. 독립, 개종의 체험, 즉 일종의 죽음이 있은 후에만 은총의 도움으로 신앙 고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모습이니 주교들이 백주에도 활개를 치며, 성 비오 10세께서 정죄하신 바 있는 현대주의자의 술책을 발효시키고 있다고 봐야 되는 것이 아닌가! 위에 써놓은 문단에서는 온통 그런 것뿐이다. 주의를 다해 다시 읽어 보라. 욕구, 갈망으로 뒤죽박죽된 종교적인 느낌, 체험이 공유되어 구체화된 진리, 교리의 변화 그리고 전통과의 불화. 현대주의자들은 성사(聖事) 역시 욕구에서 기원(起源)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미 보듯이 저들 체계에서는 필요성 또는 욕구가 만족스런 해법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가시적인 형체를 필요로 한다.“  저들의 성사는 분명 효험이 있겠으나 단순히 상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은 유행을 동반한 변화되는 언어에다 성사를 비유하는데 감동, 즉 감격하게 만드는 발상을 표현과 퍼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란다. 성사는 마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만 제정된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트리덴틴공의회가 단죄한 입장이다.”


  베레(Besret)라는 공의회의 전문가였던 그의 작품 중에서 한 예를 들자면 그런 생각을 다시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가져오는 것은 성사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은 이미 모든 사람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사란 제자들 공동체에서 당신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사건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사적 표시의 효험을 부인(否認)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자아를 자기표현으로써 이루려하는 존재이니,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성사에 있어서도 자기를 표현해야 자아를 성취하는 것이 사실이다.”(주: Decommencement en commencement, p. 165.)


  또한 성서(Holy Writ) 속의 책들은 어떤가? 현대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성서는 “주어진 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그 책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고는 하나,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촉발하여)쓴 것 이란다. 성서 속의 책은 시적인 감흥을 나타내는 정도에 비례해서 영감(靈感)을 반영하고 그 영감은 신자가 글을 쓴 행위를 통하여 신앙을 전달해야겠다고 느끼는 다급한 욕망에 비유된단다. 즉 성서가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피에르 비반드(Pierres Vivantes; 8장 참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를, 창세기는 옛날에 신자들이 ‘음미해서’ 써 내려간 ‘운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주교단이 모든 어린이 교리문답반에 배부한 그 편집물은 전체적으로 현대주의를 발산하고 있다. 간단하게 대조해 보자.


  성 비오 10세: “문서의 존속 기간은, 교회에서 계속 두각을 나타내는 욕구가 존재하는 기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이 (현대주의자의) 관례다”


  피에르 비반드: “공동체가 복음을 실천하는 것을 돕고자 어떤 종도들은 공동체에게 서한, 또 서간경이라고 하는 것을 써 보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종도들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을 언어로 얘기했다. 그 후에 4인의 복음사가.......말구(Mark), 마두(Matthew), 누가(Luke)와 요왕(John)......가 종도들이 말한 것을 저서에 끼워 넣은 것이다.” 복음의 연대를 보면, 말구 복음은 기원 후 70년 경? 누가 복음은 기원 후 80~90년 경? 마두 복음은 80~90년 경? 요왕 복음은 95~100년 경. 그들은 신자의 신앙을 교화시키려고 그리스도의 일생 동안의 행적, 특히 당신의 말씀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상술한 것이다.


  성 비오 10세: “저들은 주장하길, 성경에는 과학이나 역사가 들어있는 부분, 명백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나 과학이 아니고 다만 종교와 도덕률이다.”


  피에르 비반드: “그 책(창세기)은 시이며, 과학 안내서가 아니다. 과학에 따르면 수백만 년이 걸려야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통해서는 오늘날 라디오나 텔레비전 또는 신문을 통해서 사건이 보도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예수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성 비오 10세: “저들은 망설이지 않고 문제의 책, 특히 모세오경과 최초의 세 복음이 처음에는 매우 짧았던 이야기였다가 거기에 내용을 덧붙인 것으로서, 신학적 또는 우화적 해석 혹은 간단한 연결어구와 첨삭의 형태로 개작(改作)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피에르 비반드: “그 책에 쓰여진 것 대부분은 예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전(口傳)한 것이다. 그랬던 것을 누군가가 과거에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기록해 전달했고, 그가 쓴 것이 여러 차례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른 이가 다시 기록한 것이다........ 페르시아인의 통치 시대인 538년에, 음미한 내용과 전통이 책으로 되었다. 기원 전 400년 경 에즈라(Esdras)가 여러 책들을 한데 모아 이것을 법이나 모세오경으로 삼았다. 선지자들의 예언서는 만들어진 것이다. 현인들의 음미로 많은 명작이 만들어진 셈이다.”


  “공의회에 의한 교회”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언어에 놀라는 가톨릭인들은 그것이 그다지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언어를 19세기에 라므네(Lammenais), 푹스(Fuchs) 및 롸지(Loisy)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니, 저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유행하던 오류들을  한꺼번에 모두 취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변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는 일이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절대 속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