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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7. 성전(聖傳)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20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7. 성전(聖傳)이란 무엇인가?

17. What is Tradition?

 


  현대주의는 실로, 교회를 교회 내부에서 괴롭히는 것으로 과거와 현재도 그렇다. 칙서 Pascendi를 인용해서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에 들어맞는 전형적인 특징 몇 가지를 다시 살펴보자. “현대주의자들은, 교회에서 권위의 목적이란 순전히 영적인 것이기에 외적인 모든 화려함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온갖 과장된 장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하는 도다. 이로써 종교가 영혼에 속하면서도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권위에 부여된 명예가 그것을 세워주신 그리스도께로 반향(反響)된다는 것을 저들은 망각하고 있도다.”


  바오로 6세가 삼중관을 외면하고, 주교들은 반지는 물론 자주색 캐속과 심지어 검정색 캐속까지도 벗어버리며, 사제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평신도 복장, 즉,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신식(新式)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하는 압력 때문이다. 이미 행해졌거나 또는 끈질기게 요구되고 있는 전반적인 변혁은 온통 현대주의 개혁가들의 “광적인” 욕망으로 범벅되어 있는데, 이는 성 비오 10세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경배에 관한 것을 보게 되면 외적인 신심 행위의 횟수를 줄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늘리지 않기를 저들은 원하는 바라..... 교회 행정을 민주화시키고, 준 성직자 그리고 심지어 평신도에게도 행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주어 권한을 분산시키는 도다. 로마 성청(Roman Congregations)의 개혁, 특히, 검사성성(Holy Office)과 금서목록(Index)의 개혁....... 저들은 결국 개신교 목사들의 의도를 반영하여 사제의 독신제도를 억압하려는 자들 가운데 있으니.”


 현재 이와 똑같은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안되고 있으며 본래의 것은 전혀 없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사고와 미래의 사제양성에 대한 것을 보자면, 성 비오 10세 시대의 개혁가들은 시대에 뒤졌다는 체제 중에서도 특히 스콜라 철학을 저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저들은 “젊은이들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철학, 현대 철학 즉 현재 시대에 맞는 유일한 철학을 배워야 하며..... 그리하여 이른바 합리 신학은 현대 철학에, 실증 신학은 신덕도리의 변천사에 근거를 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이루었다.


 신학교에서 통산 이용되는 것을 보면, 저들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대신에 인류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마르크스를 가르친다. 토마스 철학의 원리는 세계 구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호한 체제로 만들기에 부조리한 철학으로 치부되고 있다. 현대의 혁명가라 하는 지식인들은 얼떨떨한 사제를 기준으로 삼는데, 그 어리숙한 사제는 모든 것의 중심에다가 성(性)적 의미를 부여하고 대담하게도 그런 것을 공식석상에서 발표한다. “선조들의 과학에 관한 가설은 거의 엉터리인지라, 성 토마스와 오리게네스는 상식도 안 되는 체계를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생명을 ‘생물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사실의 진화론적 연결고리’로써 설명하는 불합리에 떨어진다. 불가해하다니? 그럼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한 말하건대,  누구도 아닌 이른바 사제라는 사람이 오직 하나의 해법이 되시는 천주를 어찌 저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현대주의자들은 자기가 애써 만든 이론을 지키기 위해, 의사의 원칙을 반하여 잠재력과 행동에 관한 개념, 본질, 물질, 사건, 육체, 영혼, 기타 등등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은 그 개념들을 없애버리고 나서 교회 신학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하고 자의교서(自意敎書: Motu Proprio) Doctoris Angelici를 보면 “마침내 신성한 규율을 다루는 학생이 이제는 치교권에 근거하여 천주께서 이미 계시해 주신 신덕도리로 선포되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까지 되도다.”라고 한다. 신덕도리를 바꾸고 성전(전통)을 공격하려면 스콜라 철학을 공격하는 것이 필수적인 예비조처다.


  그러면 성전(聖傳)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이 단어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경제 활동, 가정과 시민 생활에서 통용되는 ‘전통’, 즉 완공했다는 뜻으로 마지막 타일이 붙여진 후, 집 지붕에 ‘꽃다발’을 얹어 놓는다던가, 기념관을 개관할 때 리본 테이프를 자르는 것, 등등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전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관습, 그것도 뚜렷한 근거도 없는 과거에 대한 충실성에서 비롯되어 보존된 관습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성전은 치교권에 근거하여 대대로 전래된 신앙의 보고(寶庫)로 묘사된다. 이 보고(寶庫)는 계시로써 주어진 것이니, 말하자면 종도들에게 위임된 것을 그 후계자들이 충실하게 전달하는 천주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현재, 신경이 주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또는 주께서 진리를 온전하게 주시지 않았다는 듯이 누구나 잡고서 의심의 눈길로 탐구하고 조사하려한다. 이렇게 모든 조사를 하고 나서 무엇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가? ‘확신을 버리고’ 난 후에는 ‘의혹을 품도록’ 속임수를 당하는 가톨릭인들이여, 다음을 잊지 말지니. 계시라는 보고(寶庫)는 마지막 종도께서 죽으실 적에 끝났다는 것임을. 그래서 이것은 이미 완성된 상태인 것이니, 세상 종말까지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재차 그 점을 명시했으니, “천주께서 계시해 주신 신앙에 관한 교리는, 인간이 철학적으로 고안하거나 창의적으로 제안하여 만든 것이 아니요, 충실하게 보전하고 또 그르침이 없이 선언하도록 그리스도의 정배(교회)에 신성한 보고(寶庫)로서 받은 것인 연고이니라.”


  어떤 이는 반론을 제기하기를, 천주의 모친 마리아에 관한 신덕도리는 4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성 변화에 관한 신덕도리는 12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교리는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등..... (교리가)점진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시대를 거치면서 정의(定義)된 신덕도리들은 이미 계시 안에 들어 있었고, 그렇게 되었던 것을 교회가 분명하게 언명했을 뿐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에 성모몽소승천이라는 신덕도리를 천명하면서 특별히 지적하기를, 동정녀 마리아의 영혼과 육신이 모두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진리는 계시라는 보고(寶庫)에 들어 있었고 마지막 종도가 죽기 전 알려진 문헌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였다. 이 부분에는 절대로 새 것을 도입해서는 안 되고 신덕도리 하나라도 덧붙여서는 안 되며 오직 있는 그대로를 훨씬 더 명백하게, 더욱 아름답게 그리고 더욱 현양(顯揚)하여 표현할 따름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니 매일같이 마주하는 오류를 판별하지만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그 오류들을 거부하면서 따라야 하는 규범을 이룬다. 보수에(Bossuet)가 강경한 어투로 기술(記述)했듯이,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도덕에 관한 원칙과 모든 시대, 특히 초창기의 성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교회의 기본 신덕도리를 설명하는 문제의 경우일 경우, 그 때로부터 계속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릇된 것이기에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하니, 이는 교회의 모든 거룩한 교부들과 누구보다도 먼저 교황들이 나서서 그릇된 교리를 단죄했던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서, 그 그릇된 교리에는 로마 교회가 그토록 지겨워하는 신식(新式)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저들은 겁먹은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논의를 몰아세운다. “그대들은 과거에 매달려 향수에 사로잡혀 있으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맞게 살라!” 어떤 이는 당황하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하지만 그 답은 어렵지 않으니, 여기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진리는 모든 시대에 속해 있어서 영원하다.


  성전을 무너뜨리려고 저들은 개신교를 본받아, 성경만이 오직 하나의 믿을 만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들이대는데 그러나 성전은 성경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늦게 쓰여졌다고 믿게끔 주장하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다지 늦게 쓰여지지도 않았으며, 네 복음사가(福音史家)가 저서를 완성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린 것일 뿐이다. 하지만 교회는 진작부터 존재했었고 성신강림이 일어났으며 종도들이 다락방에서 나온 바로 그 날에만도 3,000명이나 되는 수많은 개종자가 생겼다. 그들이 그 순간에만 믿었던가? 구전에 의하지 않고 계시가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성전보다 성경을 더 우선적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또한 부인(否認)할 수도 없다.


  한편, 저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해서, 감도된 문헌에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저들은 문헌이 전체적으로 감도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의심한다. “감도된 복음서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저 구원에 필요한 진리뿐이다.” 이에 따라서 기적, 거룩한 어린 시절의 사건, 우리 주님의 행적과 지침을 전설(설화)적인 전기문의 형태로 전락시켜 버린다. 우리는 공의회에서 그런 구절, “그저 구원에 필요한 진리뿐”이라는 구절을 둘러싸고 무던히도 싸웠었다.(주: 예수의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도 그 일부임)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을 약화시키는 데 호의적인 주교들이 있었으니, 이는 성직자가 그 얼마나 신 현대주의에 오염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가톨릭인이여,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 복음은 다 감도된 것인즉, 복음서를 쓴 이들에게는 지력(智力)을 인도해 주시는 성신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복음은 다 천주의 말씀, 즉 Verbum Dei이다. 취사선택하여 “이 부분은 인정하겠지만 저 부분은 인정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선택한다는 것은 이단자(異端者)가 되는 것으로, 그리스어 파생어의 어휘에 의하면 그렇다.


  복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것, 이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은 사실 그대로이며 복음은 그 내용을 설명해 주는 성전, 교정권에 속해 있다. 이는 해석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똑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자유 해석 및 우리를 완전한 환상 속으로 인도하는 현대의 카리스마적인 자유주의적 신감(神感)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신덕도리에 관한 공의회는 모든 성전, 즉 종도들이 가르치신 것을 정확하게 이해시켜 주었다. 성전이란 개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기에 관련된 교황들이 무류성의 보호에 맡기려 않으려하지 해서 그 선언문들이 무류하지 않지만, 이와 달리 트리덴틴 공의회의 교령들은 그르칠 수 없고 또한 교회의 공식 법령에 의해서 쓰여 지고 발행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고로 그 누구도, “그대들은 과거에 얽매여 트리덴틴 공의회를 고집한다”는 말을 못한다. 트리덴틴 공의회는 지나간 과거가 아닌 까닭이요, 성전이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시대를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