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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9. 에콘 신학교와 로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2-08



르페브르 대주교 공개서한
19. 에콘 신학교와 로마

19. The Ecône Seminary and Rome

 


  아마 독자는 사건이 비통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진정한 미사에 참례하고 싶지만 그 미사가 금지되었다고 설득 당하기 때문에 이 참된 미사에 참례하기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당황해 하는 사람들에 해당될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더 이상은 아노락(방한용 수도복)을 입은 사제를 따르는 사람들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제들이 어떠한 비난을 받고 있기라도 하듯, 약간 불신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을 텐데, 그들에게 성직수행 금지령을 내린 사람은 주교가 아닌가? 당신은 교회에서 혹시 이탈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데, 그러한 두려움은 칭찬 받을 만하나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프리메이슨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크게 환영하는 제재 조치에 대하여 내가 어떤 입장인지 말해야겠다. 역사의 힘을 조금 빌어서 온전하게 이해해 보도록 하자.


  당국이 나에게 전교사업 일양으로 가봉(Gabon)으로 파견하니, 주교는 곧이어 나를 리브르빌(Libreville) 신학교 교수로 임명해서 6년간 신학생을 양성하게 했는데, 그중 몇 명은 주교가 되는 성총을 받기도 했다. 다카르(Dakar)에서 주교직에 서임될 때가 되자, 성소자(聖召者)를 찾아내고 천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청년들을 양성하여 사제직으로 인도하는 것이 나의 주요 임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카르에서는 진정으로 기쁜 일이 있었는데, 내 뒤를 이을 사람, 즉 몬시뇰 티안둠(Mgr. Thiandoum)과 현재 세네갈(Senegal)에서 티에스(Thies)의 대주교인 몬시뇰 디욘느(Mgr. Dionne) 등의 사람들에게 사제직을 수여한 것이었다.


  유럽으로 돌아와 성신회(Holy Ghost Fathers) 총장상직을 맡고 나서는 사제양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60년대 초가 되자 벌써 압력과 어려움이 그 얼마나 했던지 내가 원하고자 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성성(聖省)에서 인가받아 설립된 로마의 불란서 신학교를 운영함에 있어서 1920년과 1930년 사이에 운영되었던 올바른 노선을 그 당시에도 그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급기야 총칙(General Chapter)에 의하되, 가톨릭 전통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변혁에 배서하기가 싫어서 1968년에 결국 사임하고 말았다.


 그런 사태가 있기 전, 진작부터 사제단에 속하려는 청년들을 어디로 보내야 빗발치듯 문의하는 가족 및 사제로부터의 전화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받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매우 망설였다. 직책에서 은퇴해야겠다고 마음을 갖게 되면서 내 마음은 아직도 토마스식(Thomist) 교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스위스의 프리부르(Fribourg) 대학교로 눈길이 쏠렸다. 몬시뇰 샤리에르(Mgr. Charriere) 주교는 양팔을 벌려 나를 환영해 주었다. 집을 임차하고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신학생 9명을 받아들이며 남는 시간을 참된 신학교 생활로 이끌어 나갔다. 곧이어 그들은 앞으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열망을 보여 주었고, 많은 생각 끝에 ‘단체’ 설립을 추천하는 법령에 동의 서명을 해 줄는지를 문의하러 몬시뇰 샤리에르(Charriere)주교한테 갔다. 그는 법령을 승인했고, 그렇게 해서 1970년 11월 1일에 ‘성 비오 10세의 사제 형제회(Priestly Fraternity of St. Pius Ⅹ)’가 탄생하였다. 교회법상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프리부르 교구에서 설립된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 같은 상세한 설명은 긴요하다. 주교에게는 교회법상, 바로 그 사실에 의거하여(ipso facto) 로마가 인정하는 단체를 자기 교구에 설립할 권한이 있다. 그를 이은 후임 주교가 단체를 억압하려면 로마에 의지해야 한다. 로마 당국의 의향은, 주교가 맨 처음에 설립한 것을 보호함으로써 그 단체가 발전하는 데 해가 될 수 있는 불안 요소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법이 어떻게 운용되는지는 그와 같다(주: Canon 493)


  성 비오10세의 사제회는 비록 로마교황 차원의 법령이 아닌 (지역)교구주교 차원의 법령의 힘을 얻었지만 결국은 로마에서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인정해 준 셈인데, 합법적인 인정이 이루어지려면 로마교황 차원의 법령이 꼭 필요하지는 않은 까닭이다. 전 세계에는 교구주교 차원의 법령을 기초로 해서 자체 가옥을 가진 종교단체가 수백 개나 있지 않은가?


  교회에서 수련원이나 양성소가 있는 종교단체인 사업단 또는 교구주교 차원의 단체를 인정하면, 그것은 회원을 자체적으로 훈련시켜도 된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 신학교가 거기에 해당된다. 1971년 2월 18일 성직자성성 장관(Prefect of the Sacred Congregation for the Clergy: 교구 성직자와 신학생 양성을 위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인 라이트(Wright) 추기경은, 우리 단체가 “세상에 필요한 성직자를 조달하는 이 거룩한 집회로써 공의회가 추구하는 목표에 일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이 담긴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다. 허나 1972년 11월 루르드(Lourdes)에서 열린 프랑스주교총회(the Plenary Assembly of the French bishops)는 분명 에콘(Ecne) 신학교의 법률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 하나 껌벅하지 않고 ‘항명 신학교’라고 했는데, 현직 주교들도 그런 의견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항명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신학생들이 야간외출을 하고자 해도 못하게 하고,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TV 시청을 못하게 했기 때문이며, 폴로 타입의 목둘레가 있는 옷을 금지 했으며, 첫 강의가 있기 전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 당시 만났던 가론느(Garrone) 추기경(가톨릭 교육 성성 장관)이 말한 것을 보자. “나에게 직접 대꾸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서 그대에게 반드시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는데, 내가 신학교 설립을 위해 기초(ratio fundamentalis)를 정했소, 모든 신학교는 그 기초를 준수해야 합니다.”


 기초란 신학교에서는 라틴어를 가르쳐야 하고 성 토마스의 교리에 의한 공부가 이루어져야 함을 전제로 한다. 내가 화답하기를, “예하, 우리야말로 기초를 지키는 극소수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 그러하니, 아직도 기초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는 것인가?


  참된 신학교를 개교(開校)할 필요가 있어서 에콘의 대 성 베르나르드회(Great St. Bernard) 수사들의 휴양소였던 주택을 임차 후 시온(Sion)의 주교인 몬시뇰 아담(Mgr. Adam)을 만나니, 그는 흡족해했다. 이 건립은, 내가 오랜 계획을 세운 끝에 얻은 결과가 아니고 섭리(攝理)에 의해 억지로 떠맡겨진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이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면, 그것이 천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시겠지요”라고 말했다.

 

 해가 갈수록 신학생 수는 증가하여 1970년에 입학생이 11명, 1974년에는 40명이 되었다. (로마)혁신자들은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신학생을 양성한다면 그들에게 신품성사를 베풀 것이고 그렇게 서품을 받은 사제는 앞으로 교회의 미사, 전통미사, 영원한 미사에 충실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공격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었으니, 다른 이유를 찾지도 않았다. 에콘은 신 현대주의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등장했고 더 늦기 전에 경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1974년 11월 11일 첫눈이 내리는 가운데 바오로 6세에 의해 임명된 세 추기경, 즉 가론느(Garrone), 라이트(Wright) 그리고 수도자 성성장관 (Prefect of the Sacred Congregation for Religious, 주: 각종 수도회에 관한 모든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인 타베라(Tabera)로 구성된 위원회는 두 명의 교황 사절단을 신학교로 파견했다. 이들 교황 사절단은 나와 10명의 교수 그리고 출석 신학생 104명중 20명에게 질문했고, 이틀 후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은 신학생들에게 몇 가지 흠집이 될 만한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기혼 남자가 서품을 받는 것이 정상이며, 진리가 불변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주님 부활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의혹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정식으로 연설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의 연설에 분노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는 선언문을 발행했다.


“우리는 혼신을 다해 가톨릭 신앙과 그 신앙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성전(聖傳)의 수호자인 로마 가톨릭, 지혜와 진리의 여왕인 영원한 로마에 굳게 결합하는 바이다. “한편 우리는 2차 바티칸 내내 그리고는 2차 바티칸에서 비롯된 모든 변혁을 통하여 확연하게 입증된 신 현대주의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경향을 지닌 로마는 따르지 않는 바이다.”


  이상의 선언문은 물론 말투가 좀 날카로우나, 내 생각을 드러낸 것이고 아직도 또한 그러하다. 신학교가 운영되는 방식을 핑계 삼아서는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했기에 추기경 위원회는 바로 위 선언문 구절을 문제 삼아서 우리를 붕괴시키기로 작정하였다. 2개월 지나서 추기경들은 교황 사절단이 그 조사로 인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다음 해 2월 13일 로마의 ‘토론’에 참석하여 특정 항목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 달라고 (위원회에서) 초청했기에 나는 그것이 함정이라고 전혀 의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곳으로 갔다. 시작부터 토론은 재판 형식의 치밀한 반대신문으로 들어갔다. 3월 3일에 두 번째 토론이 있은 2개월 후 위원회는 위원회의 결정사항이라는 것을 통지해 왔는데, 그 결정사항이란 ‘성하의 완전한 승인을 얻어’ 프리부르의 새 주교, 몬시뇰 마미(Mgr. Mamie)는 자기 전임자가 설립하도록 허가해 준 단체에 대한 철회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체와 그리고 재단, 특히나 에콘 신학교는 ‘존속할 권리’를 잃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결정을 알리는 공문을 기다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몬시뇰 마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성 비오 10세의 사제회에 관하여 나의 전임자에 의해 발효된 법령과 허가, 특히 1970년 11월 1일의 각인이 찍힌 설립에 관한 포고령을 철회함을 통보합니다. 이 결정은 즉각 발효됩니다.”


  내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러한 압력은 프리부르의 주교가 아니라 교황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법 제493조에 의하면, 자격의 결함(缺陷)으로 인해 완전히 무효한 법규다. 또한 거기에는 충분한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그 결정은 위원회에서 “모든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정한 1974년 11월 21일의 선언문에만 의거할 수 있는데, 위원회 자체의 허가로 인하여 교황 사절단의 결과는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내 선언문은 가톨릭 신앙에 어긋나는가를 유일하게 판가름할 권한이 있는 신앙교리성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에서 비난하는 대상이 된 적이 결코 없었다. 공식적인 논제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3명의 추기경은 그저 “모든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위원회의 법률적 존재는 입증된 적이 없다. 어떤 교황령으로써 설립되었는가? 언제 설립되었는가? 어떤 형식을 취했는가? 이에 대해 알려진 사람이 누구인가? 로마 당국이 그 같은 법령을 제정하기를 거절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존재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교회법 조항에는, 유효성이 의심스러운 법률은 구속력이 없다고 한다. 권한에 대하여 의심스럽거나 권위가 있는지 어떤지 그조차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훨씬 더 그러하다. ‘교황성하의 완전한 승인을 얻어’라는 그 말로는 법적으로 결함이 되는 까닭에 추기경 위원회를 설치했어야 하는 포고령을 대체하지 못한다.


  단체에 대한 억압을 무효로 만드는 절차상의 불법 행위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나치나 마르크스주의자 같은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며 그리고 법률이 타당하게 진술되었을 때마저도(이번의 경우는 타당하지도 않지만)절대적이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 진리 그리고 생명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법은 우리를 영적인 생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도록 기획된 것이다. 그러한 교회법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이를테면 영적인 생명을 낙태시킨다면 국민이 국가의 낙태법에 불순종하는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법에는 불순명해야 할 것이 아닌가.


  법률적인 측면으로 돌아가서, 민사상의 공소원(控訴院)에 상당하는 교황청 최고재판소(Apostolic Signatura-대심원)에 두 번이나 연속해서 항소했으나 성청국무원(Secretary of State)의 추기경인 몬시뇰 비요(Mgr. Villot)는 사법부의 간부를 동원하고 방해공작을 폈기 때문에 교회의 최고 재판소가 항소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