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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21. 이단도 아니며 종교분열도 아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2-28



르페브르 대주교 공개서한

21. 이단도 아닐 뿐더러 종교분열도 아니다

21. Neither a Heretic nor a Schismatic

 


   1974년 11월 21일에 행한 나의 연설은 이미 말한 적이 있는 소송의 계기가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로써 끝을 맺는다. “그렇게 해야........ 가톨릭과 로마교회에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잇는 후계자 모두에게 충성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충실하게 분배하는 자로 남아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오쎄르바토레 로마노(Osservatore Romano)에서는 문헌을 발행하면서 위 문단을 빼 버렸다. 우리를 일컬어서 말하기를,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고 하니 교회 단체에서 우리를 쫓아내야 하느냐 마느냐 하던 와중에, 쫓아내면 안 된다고 반대하던 자들은 10년도 더 넘는 세월을 고통 빋았다. 우리를 한 종파로 몰아서 종파 분리론자라고 선언했더라면 오히려 편했으리라. 우리에게 종파 분립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킨 적이 그 몇 번이었던가!


  어느 누가 교황에게서 이탈하려하면 나는 끊임없이 그것은 안 된다고 반복하였다. 의혹은 다른 게 아니고 다음의 것에서 비롯된다. 비록 교황의 권위가 교회에서 최고이기는 해도 절대적으로 무한하지는 않은데, 교황권은 성전(聖傳), 성경 그리고 교회의 교정권으로써 이미 선포된 정의(定義)에 나타나 있는 천주님의 권위에 종속돼 있는 까닭이다. 사실 교황권의 한계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주어진 목표, 즉 비오 9세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 교황령 Pastor Aeternus를 빌어 분명하게 설명한 목표로써 정해진다. 이상의 내용을 말함에 있어서 나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이론을 설파하고 있지 않다.


  맹목적인 순종은 가톨릭이 아니며 성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 천주의 뜻에 반하는 경우에는 더 높은 권위에서 비롯된 명령, 설령 그것이 교황의 명령이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다면, 누구든 천주께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사람에게 순종한 데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한다. 실제로 그런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교황의 무류성에 관련되는 경우가 극소수로 발생하기는 한다. 교황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다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그렇다고 주장한다 해서 내가 바오로 6세는 이단이니 그래서, 바로 그 사실에 의거하여, 그는 더 이상 교황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거나 견주어 말하는 사람들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시에 합법적으로 선출되지 않았다 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른바 ‘교황공석주의자(sede-vacantists)'인 자들의 입장이다.


  바오로 6세가 (신앙에)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신자들의 양심이 궁지에 몰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교황이 교회에 손해를 끼친 정도는 프랑스 대혁명보다도 훨씬 더 심했다. 분명히 새 미사의 총론(Institutio Generalis)중 제7조 그리고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에 관한 공의회 문헌에 서명한 것과 같이 스캔들이 된 그의 행위가 있다. 그러나 그 교황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아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훌륭한 여러 신학자들은 그를 공번된 교회의 교사가 아닌 민간 교사 정도로 여긴다. 내가 인용한 부류의 경우에는 교황이 자신의 무류성을 얼마나 포함시키려 했는지, 그 의향의 정도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이단에 속한 그 어느 사람보다도 더 자유주의자처럼 행동했음을 이미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자신이 위험한 일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바로 교황은 일찌감치 입안된 사항과 반대되는 신앙 고백문을 첨가함으로써 결국 모순된 문헌을 만들었다. 잘 알려진 사례가 단체 조직에 관한 공의회 규약(Council's Constitution) Lumen Genitum에 대한 머리 해설이다.


  그의 친구인 다니엘로(Danielou) 추기경도 인정한 바오로 6세의 자유주의는 바오로 6세의 교황직의 재앙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자유주의 가톨릭 신자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함으로 인하여 계속 모순된 상태에 있게 된다. 가톨릭 신자로 남고 싶어 하지만 세상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교황이 자유주의자일 수 있으며 또 자유주의자인 상태에서 교황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교회는 항상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인을 엄격하게 책망을 했어도 그 때마다 파문에 처하지는 않았다.


  교황공석주의자들이 제기한 또 다른 논쟁이 있으니, 80세 이상인 추기경들의 선거권 배제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지난 교황선거회의보다 앞서 준비한 비밀회의로써 선임된 두 교황은 무효라는 것이다. 두 교황이 무효라는 주장은 극단적이지만 무효인가 유효한가에는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추기경들과 로마의 성직자들에 의한 표결은 무기명의 후속 승인만으로도 비준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 이는 신학자들의 의견이다.


 교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교회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로까지 고착시켰다. 교회의 가시성(可視性)은 교회 존재에 꼭 필요한 것으로서 천주께서 수십 년 동안이나 교회가 (눈에 안보이고)사라지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황 될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추기경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교황이 선출될 수 있나? 그런 논거 뒷면에는 종교 분열적 정신이 (교황공석주의자에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우리 단체는 그들을 따르지 않기로 철저하게 배격 한다. 우리는 바오로 6세의 자유주의를 거부하지만 로마 및 전임자에 충실한 성 베드로의 후계자(교황)에 결합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모든 가톨릭 사제 및 신자의 의무란, 단언하건대, 종교의 자유, 새 교회법(Canon Law)으로써 인가된 성찬식에 호의적인 자세 그리고 교회 내에 두 최고권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종교연합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순명하지 않는 것이다. 악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영혼에 대하여 스캔들의 요인이 되는 경우, 그런 저항을 공식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 근거한 노선을 채택하여, 1983년 11월 21일에 데 카스트로 마이어(de Castro Mayer) 주교와 내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Ⅱ)에게 공개서한을 보내서 제발 교회를 분열시키는 절대 절명의 상황의 주요 원인들을 탄핵해 달라고 간청한 이유가 그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우리가 비공식적으로 취했던 이러한 모든 조치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침묵하는 것을 보면 우리를 세계적인 현상, 말하자면 신자들이 동요하는 것의 공범으로 생각할 모양이다.


  다음은 우리가 보낸 서한이다, “교황 성하, 무리가 흩어지고 버려진 양떼가 삯꾼 목자들을 따르고 있으니 불안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긴급한 사안입니다. 가톨릭 신자의 안녕과 영혼 구원을 위해 간청하오니 부디 진리를 재차 단언해 주셔서 그런 오류를 반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단이라고는 말 못하지만 새 교회법 조항에 섞여 있는 오류 및 마르틴 루터 출생 500주년 기념일에 즈음한 예식과 연설(주: 마르틴 루터를 위대한 종교가로 칭송한 일)이 있은 후에는 더욱 불안해져서 우린 한층 더 절박한 탄원을 제기했다.


  우리에게는 대응할 만한 게 전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 인간이니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체념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격렬한 변화는 모든 이단이 소멸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쇠퇴하고야 말 것이다. 언젠가는 성전으로 회귀할 것이다. 교황권에서 삼중관으로써 표명된 권한이 다시 등장하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진리를 보호하는 재판소가 영구히 회복되며, 주교는 그의 권한과 직접 발의권을 되찾아야 한다.


  메시지의 본질을 흐리게 함으로써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는 진정한 임무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모든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신학교는 진정한 자기 기능으로 되돌아가고, 수도원이 부활되며, 가톨릭 학교과 대학교에서는 세속적인 국가에 의한 교육과정이 없어져야 한다. 모두의 의무와 권리를 존중하고, 또한 겨우 국가의 내적인 냉전에 불과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사회적 두통거리를 없애고 형제적 자세로 협동하기로 결정한 기업주와 노동자 단체를 지원해야 한다. 교회법과 조화를 이루도록 시민법을 서둘러 제정하고, 사회를 잘 인도하여 그리스도왕의 사회적 규범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운영하는 공공기관에 가톨릭인을 천거하도록 격려하는 일도 필요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도할 때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네 나라이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미사 중 영복경(Gloria)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여, 대저 너 홀로 주이시요.” 그렇게 노래하지만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오, 아니다. 그런 생각은 구식이다. 현대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거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 그리스도인인가?


  국가들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싸우고 있다. 여러 곳에서 전쟁이 수 없이 계속 일어나고 핵 재앙이 일어날지 모르니 온 인류가 전율하고 있다. 경제회생, 통화안정, 실업구제, 산업발전을 이겠다고 하면서 해결책을 추구한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셔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 균형을 확보함과 그와 동시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는 천주님의 사랑과 계명이 군림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은 인간세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어떻게 해서든지 제외시키는 상태에서 한 두개 프로그램만을 가지고 확실히 그리고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어느 정치인 또는 정당 연합에 희망을 두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자세일까?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 종교를 온갖 정치적, 직업적 및 다른 관심사와 분리해 서로 상관없이 조성된 두 구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신앙이란 대관절 어떤 종류란 말인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천주께서는 우리가 비참하게 겪고 있는 물질적인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다는 말인가?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기도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 자녀가 빵을 달라고 요청하는데 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곳이면 어디서건 빈곤, 가장 약한 자에 대한 억압, 인간에 대한 멸시 그리고 죽음만을 가져다 준 마르크스주의의 반대편 기둥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는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타락케 하는 영향력에 맞서 싸우는 가정을 보호하며, 대가족을 격려함과 동시에 모친되는 이더러는 가정을 지키라고 격려한다.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는 민간기업이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을 허용하며 중소기업을 육성한다.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는 귀농(歸農)을 옹호하고 농업의 참된 가치에 감사하게 한다. 직장인 조합과 교육의 자유와 그리고 온갖 형태의 파괴와 혁명에 맞서 싸우는 시민보호를 지지한다.


  그리스도교적 질서는 정교(政敎)분리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체제와 확실하게 구별되는데, 정교분리만으로는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는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이지 어떤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런 이상(理想)도 없이 안녕과 편안함과는 도무지 상관도 없는데, 어떻게 해서 시민권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백성은 그리스도인답게 사고 습관을 유지하고 통치자는 얼마간 몇 가지 가치관을 의식했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많은 의혹이 생기자 암묵적이지만 천주의 뜻에 대한 언급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자유주의 체제란 상위 이상(理想)에 의한 자극이 없이 홀로 있다 보면, 결국 고갈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를 주장한다고 해서 유행에 뒤떨어진 구식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주저하지 않고 바로 채택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태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양쪽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교훈으로 삼고 있기에 뭔가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있다는 우월성이 있다. 이는 우리 업적이 아니기에 자만하지 말고  이에 알맞게 행동해야 한다. 진리를 소유하기에 교회는 오류와는 도무지 상관이 없다는 강점이 있다. 진리는 천주 성총의 조력을 받고 전파해야 하지만, 비겁하게 모말 밑에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진리는 거짓과 섞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티칸(Vatican)이 사회주의에 호의적이라는 내용을 게재한 파올로 베파니(Paolo Befani)의 기사를 르오쎄르바토르(L'Osservator)(1984.1.18.)에서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작가는 남아메리카와 폴란드의 상황을 비교하여 기술했다.


  “유럽의 상황은 제외하더라도 교회는 한 편으로는 라틴 아메리카국의 정세와 미국의 상황을 좌우하는 세력에 직면해 있고, 다른 편으로는 소비에트 제국의 위성국 중 폴란드의 정세에 직면해 있다. 교회는 이 두 영역에 직면하자 2차 바티칸으로 인하여 (자유주의에 의해 굴복된)프랑스 대혁명을 능가하는 급진적인 행보로써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향한 후기 혁명에 몸을 맡겼고, 지금은 해결책 일환으로 그 핵심 사상이 후기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그리스도교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자치적이고도 비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실패한 마르크스주의를 향하게 하고 있다.”


  “자유연대(Solidarity, 주: 1980년에 결성된 폴란드의 자주 관리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가 레닌 조선소 앞에 십자가를 깃발로 삼아 세운 것을 보면 교회가 동방을 어떻게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실수는 마르크스적 공산주의, 다른 말로 말하면, 반 그리스도적인 뿌리를 가진 사회주의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상기 내용에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아집에 사로잡힌 상태로서 단지 모순 덩어리의 말을 집합시킨 것에 불과한 자유주의의 허상에 관한 좋은 사례를 접할 수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계에 현재의 혼돈이 도래한 것은 바로 교회를 대혁명에 접목시키려는 망상에 사로잡힌 불의한 몽상가들 때문이다. 시요니스트(Sillonist)에 대해 성 비오 10세는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저들의 눈이 고정된 곳은 바로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인 카멜레온이다.” 저들의 뒤를 잇는 자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가 도래한다. 결국,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해결책은 분명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것에 대한 해답과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에 대한 해답으로 인도하는데, 마르크스주의 및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 동안 많은 타협이 있었고 많은 인위적인 단체도 있었다. 그런 진흙탕 속에서 건질 게 과연 무엇일까? 가톨릭인이라면 참된 핵심 사상을 지켜야 하는 즉 가톨릭인의 의무란 바로 직접 정치에 뛰어들거나 또는 투표로써, 지방이나 국가이건 간에 자기 나라에 평화, 정의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를 재건할 결심이 서있는 의회 의원을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는 것이다. 그 외 다른 해결책이란 없는 것이다.